새로운 영지
얼딘의 얼굴이 붉어지고 분한지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시온을 말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시온은 이들 모두의 목숨을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신과의 전투에서 이겼기 때문에, 그리고 시온이 만들어낸 전투의 성과가 얼마나 대단한지 분한 마음속에서도 대단함을 인지할 정도다.
그 정도로 유비드 가문은 적으로 시온을 만나지만 않았더라도 기존 동맹을 버리고 시온과 동맹을 맺을 정도로 시온의 전술은 귀신 같은 면이 있었다.
큰 흐름을 보는 것은 전략가이지만 결국엔 그 판도를 뒤집어내는 것은 실제 부대를 지휘하는 야수 같은 감각을 지닌 자다.
시온은 그 기준치를 한참은 넘어섰다.
물론 유비드 가문이 생각하는 것만큼 시온이 이것저것 계산을 하거나 노림수가 있어서 공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환각이 끝이 나고 자신이 무엇을 봤는지에 대한 심한 영향을 떨쳐내지 못한 카밀이 겨우겨우 시온에게 말을 건넸다.
“시온 백작. 반갑소.”
“반갑습니다. 유비드 백작.”
같은 백작이라고 해도 시온과 유비드 가문은 차이가 컸다. 시온은 이제 백작 직을 맡은 자에 불과했고 심지어 백작도 한 개밖에는 없었다.
중세에서의 진정한 세력을 구가하는 것은 여러 개의 작위를 독점하는 일에서 왔다.
유비드 가문은 무려 세 개를 가지고 있는 가문이고, 그에 딸려 있는 남작들의 봉신이니 단순한 세수 구조만 봐도 세 배가 넘는 데다가 움드령 같이 파괴된 진행도가 심한 영지완 아예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의 힘의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것도 결국엔 단순한 수치 싸움에 불과한 것, 이러한 것이 상대와 전투를 벌였을 때 이길 것이라는 가능성이 크기에 압도적인 결과를 계속해서 받아낼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정작 누구도 이기지 못할 것으로 추측되던 그 싸움에서 시온이 이겼으니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영지를 뜯어낼 수 있을까.’
시온은 고민을 해봤지만, 딱히 시원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영지를 받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벌였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보상을 받아 낸다는 것이다.
“내 조건은 이렇습니다.”
시온이 협정서를 그의 앞에 밀어 넣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다. 그러니 한번 쭉 보던 카밀이 턱이 빠진 듯한 얼굴이 되었다.
시온이 요구하는 금액을 내줬다가는 아예 미래가 없는 수준에 당장에 다스리는 곳의 영지가 바로 반란이 일어나든지 식량 부족으로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었다.
“대체 무엇을 요구하기에...”
“너희는 볼 수 없다.”
시온이 그렇게 말하자 관심을 가지던 형제는 모두 고개를 처박았다. 시온의 무서움은 이미 전장에서 익히 봐왔다.
그런 시온의 눈빛과 목소리만 들어도 겨우 감추고 있던 공포심이 커질 정도였다.
“너무 과하오. 이것을 치를 능력이...”
강하게 나가야 할까 아니면 뭔가 얘기를 해야 할까, 시온은 잠시 고민하다가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어차피 반대를 들어봐야 보복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면 가시오. 오늘부터 하나씩 유비드 가문의 자식을 처형하겠소. 장자를 먼저 보내고, 그다음엔 안을 저세상으로 보내겠소.”
“왜 내가 먼저인가!!”
얼딘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당장에 죽어야 한다니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 거다.
하지만 시온은 이곳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고 시온 역시 그 작은 오지 가문에서도 장자 우선시되던 문화에 피해를 보았기에 이것이 강한 효과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았다.
“잠..잠시 생각할 시간을...이것을 도저히 치를 수가 없습니다.”
“하나 해결책을 주겠습니다. 구스타령을 넘기시지요.”
“!!!”
가지고 있는 세 개의 작위 중 가장 비싼 영지였다. 그것을 얻어내는 데에만 해도 삼 세대가 걸렸다.
그걸 내놓기에는 너무나도 아찔했던 거다. 차라리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 카밀의 입장이었다.
“조금만 더 논의할 여지를 주시오.”
카밀 유비드의 목소리가 떨렸다. 시온은 일이 먹혔다는 것을 알았다. 좀 더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전투에서 이겼는데 어차피 더 세 개 요구해도 시온이 지는 리스크는 너무 적었다.
“얼딘을 이리 데려와라.”
시온이 그렇게 말하자 코르도바가 그의 뒷목을 잡아다가 시온의 옆으로 와서 무릎을 꿇렸다.
“여기서 처형을 하겠소.”
“?!!!!!”
“!!!!!!”
“시..시온 백작님.”
코르도바까지 놀랄 정도였다. 시온은 이곳의 관습을 한참은 무시했던 거다.
관습을 공부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기에 시온이 여기까지 생각하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처형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나에 얼마짜리들인데 목을 날려버리겠는가, 누가 이들의 목숨을 끊으려 한다면 시온이 몸을 날려 막아줄 수도 있었다.
‘당장 갚아야 할 빚이 얼마인데.’
어쨌든 시온은 현대인답게 부담이 적은 연기를 하는 중이었다. 어쨌든 얼딘의 머리를 잡고 시온이 코르도바에게 손을 내밀었다.
“백..백작님.”
“허리에 차고 있는 단도를 꺼내서 넘겨라.”
“알겠습니다.”
코르도바 역시 명예로운 기사, 그가 보는 시온은 역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전설 급의 기사다.
그런데 그런 기사가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이 그에게 큰 파문을 주는 거였다.
어쨌든 시온의 손에 잘 갈린 단도가 올라갔다. 무려 얼마 전만 해도 전장에서 몇 명의 목숨을 앗아갔을 그런 단도였다.
시온은 카밀의 얼굴을 봤다. 카밀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마치 상관없다는 투였다.
‘그 정도로란 말이지. 흠, 그러면 다른 도시를 달라고 할까.’
시온을 조금 목표를 낮출 필요를 느꼈다. 이 일이 완전히 어긋나기를 바라지 않았다. 받을 거 받고 이제는 나름 영지를 복구하는 데 집중해야 했다.
카밀이 뒤늦게 자신의 이마를 잡았다가 말한 것은 시온이 이런 생각을 하고 난 바로였다.
“잠깐만 얘기를, 얘기해봅시다. 지금은 너무 빠르오.”
시온은 좀만 더 밀어붙이면 그가 알아들을 것 같았다.
사실 이쯤 되면 다른 도시를 달라고 해도 될 것 같긴 했는데 유비드 가문이 가지고 있는 영지 중 가장 좋은 것은 구스타령 이었다.
근데 어차피 죽일 것은 아닌지라 휘둘렀다가 목 앞에서 멈춰야 했다. 그건 누가 달려들어도 시온이 막아줄 거였다. 비싼 몸들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거기서 멈추게 되면 이 명석한 유비드 가문의 주인인 카밀이 자신의 약점을 알아차릴 것이란 거다.
금화가 급해서 못 죽이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면 질질 끌면서 계속 받을 수 있는 것이 낮아질 수밖에는 없었다.
시온도 나름 모험을 하는 셈이었다.
그러니 그런 서로의 속셈이 숨어 있는 상황에서 시온도 긴장할 수밖엔 없었다. 태연한 표정이야 원래 얼굴 관리가 긴장되면 잘 안 됐다.
“난 지금 결정했다. 나를 멈추려면 구스타령을 내가 낸 값으로 치를 수밖엔 없을 거다.”
시온이 그렇게 침착하게 한자씩 말하고는 그를 밀어붙여 단도를 들어 내리칠 준비를 했다.
얼딘은 밀어 쳐질 때부터 질질 눈물을 흘리며 빌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얼마 전을 생각해보면 너무나 처절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시온은 이미 앤드류의 마법을 그의 목 앞에다가 끝내놓은 상태, 즉 알아서 멈춰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너무나도 망설임 없이 모든 동작이 물 흐르듯이 흘러가자 아무리 사람을 많이 봤던 카밀도 이것은 정말로 죽이려는 것으로밖에는 볼 수가 없었다.
아니, 다른 자들 모두가 그랬다. 단 한 명도 시온이 여기서 얼딘을 죽이지 않을 거로 생각한 자가 없을 정도로 군더더기가 없는 그런 동작들이었다.
“주겠다!! 주겠어!! 구스타를 너에게 넘기지!!”
너무나 긴박한 상황에 그의 목울대가 한 가지 단어를 내뱉었다. 그러나 시온의 동작은 여지없이 이어졌다.
모두 눈을 감아버렸을 때 시온의 단도가 놀랍게도 목 바로 앞에서 멈췄다. 핏방울 하나가 단도 끝으로 흘렀다.
“그런가. 조건을 받아들이지. 구스타령과 그 작위와, 거기에 딸린 모든 남작에 대한 권리는 나에게 넘어오는 것으로.”
‘휴, 먹혔다.’
시온도 속으로는 땀을 흘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영지 하나를 더 받아먹는 게 무조건 남는 일이었다.
영지 하나 때문에 왕과 황제가 움직일 때도 있는데 이것은 그거에 비하면 약과였다.
“허어..허억.. 헉.. 허엉...”
얼딘이 자기 바로 앞에 있는 단도를 보면서 눈깔이 천천히 뒤집혔다. 너무나 놀라서 정신을 놔버린 것이었다.
그 정도로 시온의 동작엔 거짓이 보이질 않았었다. 그럴 수밖에 마법적인 동작이었으니 애초에 망설임이란 있을 수가 없다.
에슬린이 저 끝에서 입을 벌리고 시온이 벌였던 바를 곱씹고 있었다.
그야말로 난제를 풀어버린 탁월한 행동이었으나 그 누가 저런 식으로 행동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마탑은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거기에서 배웠던 시간과 노력 그리고 거기에서 자리를 잡으며 권위를 내세우는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야. 이 짧은 시간에 시온에게서 배운 것이 내 스승들보다도 많구나.’
시온은 놀라있는 코르도바에게 얼딘을 넘겼다.
“아.... 백작님. 죄송합니다. 잠시 너무 놀라서.”
“아니다. 카롤리나를 불러서 얼딘의 상태를 한 번 보도록 말 좀 해두게.”
“구..구스타...를.. 내가 대체 무슨 말을 내뱉은 거지.”
카밀 유비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자기도 놀랐는지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했다.
그럴만도 했다. 구스타령의 세수는 유비드 가문의 삼 분의 이를 담당할 정도로 번성한 도시였다.
유비드 가문을 강자로 만들어 낸 것은 구스타령의 풍부한 자원과 인구가 한몫했다는 점이다.
시온은 다른 협정서 하나를 꺼내서 그에게 밀었다. 이것은 당연히 방금 것을 결정하는 종이다.
“두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오.”
“너..너는 대체.”
‘내가 본 환영은 진짜다. 아니 이 정도를 다행이라고 봐야 하는 걸까? 만약 이 남자가 본격적으로 우리 가문을 침공한다면 이젠 버틸 수 있을까?’
그는 새로운 협정서를 보면서 별생각이 다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젠 자신이 없었다. 조금 전의 실력만 해도 이미 자신을 압도했다는 거다.
게다가 그 파격적인 행동들, 만약에 여기를 내주지 않는다면 여기서 모든 자를 다 참수해버릴지도 몰랐다. 예측이 안 되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유비드 가문 하나가 지탱해오던 곳인데 여기서 가문이 절멸하고 시온의 맹공을 받아낼 수 있을 만한 인물이 없었다.
즉 시온이 구스타령을 차지하는 동안 다른 승냥이들도 일어나 유비드 가문을 칠 것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그가 서명을 빠르게 했다. 이것이 오히려 손해를 적게 본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시온은 그것을 받아내고서 아직 끝낼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얻은 건 얻은 것이고 한 번은 더 찔러봐도 문제 될 건 없었으니까.
찔러보고 아닌 거 같으면 그냥 빼버리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전투에서 이겼으니 리스크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유비드 가문을 종속가문으로 넣겠다.”
“???”
코르도바가 이어서 자기의 이마를 딱 쳤다. 에슬린도 논의하지도 않았던 내용이 시온에게서 나오자 놀란 모양이었다.
시온이 말하는 종속, 조공관계를 맺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세부적으로도 시온에게 세금과 징병권, 무역권 일부를 내줘야 했다.
시온은 딱 한 마디를 더했지만, 지금까지 모든 일이 악몽처럼 카밀의 눈에 어른거렸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두 번째 협정 조건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