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5화 (175/304)

왕의 몸값

상황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에슬린이 짜놓은 계획들은 물론 목적이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통하진 않았다.

하지만 시온이 안으로 들어오면서 그리고 한 단어를 꺼내자마자 모든 게 달라졌다.

‘저자를 막을 방법이... 생각이 나질 않아.’

수많은 지식과 그녀에 할아버지의 조언 그 어느 것도 지금 상황을 타개할 수가 없었다.

‘저자는 분명히 한다면 하는 인간이야.... 그런 느낌이 들어. 저 마나들은 나에게 경고를.’

마리온이 본 시온은 그러했다.

독보적인 인간 옆에 황제를 놓는다고 해도 구별이 될 정도의 사람.

너무나도 광대한 마나는 시온이 꺼릴 것 없는 자라는 것을.

심지어 지금 관계를 맺고 있는 황제조차도 얼마든지 적으로 돌릴 수 있는 자라는 추측이 맞아 보였다.

카페 가문을 무너뜨릴 정도의 수준이라면 동방의 제국이나 다른 왕조와 동맹을 맺고 대립을 세우는 것이 가능할 정도.

이쯤 되니 근처에 있는 에슬린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모든 결정권, 힘의 집약, 포로의 자비와 처벌 모든 것에 영주 하나 에게 모여 있었다.

영주라고는 하나 중세에서 이 정도로 모든 일에 영주가 간섭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샤를이 유명했던 것은 그가 집권하기 위해 벌였던 전쟁과 확장 전쟁 두 개로 그가 차지한 권력의 뛰어남이었다.

‘시온은 그걸 넘어섰어.... 이 자는 지금 여기에 있는 모두를 죽인다고 해도. 벗어날 방법이 없어. 말릴 사람도 없고.’

다스리는 영지의 규모를 봐도 이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내는 역사적으로도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시온은 그것을 나쁘게 사용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보자면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자일지도 몰랐다.

그것은 지금 세계를 양분하고 있는 황제들에게는 걸림돌일 터였지만.

그녀의 여러 생각이 복잡하게 돌고 있는 와중 시온은 그녀에게 이어서 말했다.

“나를 위해 일한다면 샤를의 목숨을 살려주겠다.”

시온은 최대한 위협적으로 연기하는데 진이 빠지고 있었다.

원래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긴 했지만 누가 봐도 의연하던 그녀가 이 문제에 대해 집착하고 있는 것은 뻔했기에.

원래라면 이 문제를 굳이 언급할 생각은 없었다. 샤를에게서 뜯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데 손쉽게 죽이겠는가.

단순히 침공했으니 그에 대한 보복을 보여줘야 한다고 해서 그걸 다 날려 버릴 만큼 시온은 감정적이진 않았다.

한참의 정적이 이어졌다.

에슬린은 시온의 제안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다. 폭시 가문이 지금까지 얼마나 붙어 있었는데 이렇게 쉽게 하겠는가.

한 가지 더 밀어붙여야 할 것이 생각이 났다. 아까 에슬린과 코르도바와 나누었던 카페 왕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가능성에 대해 말이다.

사실 이 정도까지 카페 왕국이 기울기야 하겠느냐마는 약간의 가능성이 있었다.

왕국이 확장에서 얻어낸 점령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이 틈에 그때의 반란으로 원한을 가지고 있는 변경의 백국들이 전부 독립적으로 나가는 일을 말이다.

“네가 합류하지 않고 내가 샤를을 죽이면 서부와 다른 지역에서 모두 독립을 하겠지. 그리고 카페 왕조는 멸망해버릴지도.”

에슬린의 눈이 올라갔다.

아까 나눴던 얘기 중에 가장 가능성이 없다고 여겼던 것이었다. 굳이 이런 말을 더 한다고 해서 괜히 위세만 까이는...

“이것이 운명인가 봐요.”

“!!!!!!”

에슬린이 붕어 입처럼 벙긋거렸다. 그리고 마리온이 시온 측으로 넘어오는 것도 그다지 반길 일은 아니었다. 자기보다 높은 마법사인데 환영할 리가.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언젠가 예언을 해주신 적이 있어요. 제가 한 번은 누군가의 생명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말이죠. 나는 그게 지금이라고 봐요. 시온 니벨룽. 내가 조금이라도 잘못 말한다면 나를 여기서 죽이고 이어서 샤를 왕도 죽이겠죠.”

“?”

“아마 당신의 목적은 이대로 왕국의 분열을 지원하면서 점령할 영지를 노리고 있을 사자일터...”

청산유수였다. 아마도 단단히 착각한 모양.

시온은 그냥 내버려뒀다. 괜히 수정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런 계획은 없지. 지금 재정도 아슬아슬한데 무슨 지원이야.’

“그래서?”

“하겠습니다.”

“맹세를 준비하겠습니다.”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대일 맹세 말고도 여러 사람이 있는 가운데에서 시온으로 들어오겠다는 맹세를 해야 했다.

더불어 시온에게 마나의 서약을 해야 했다.

마탑측에 사람을 데려와야 했지만, 마법사끼리 할 수 있는 서약이 있었다.

연결 고리를 만들어 그자가 다른 마음을 먹었을 때 상당한 마나를 잃게 하는 것이다.

그녀의 수준이 대단한 만큼 잃게 된다면 뼈가 아픈 수준이 아닐 것이다. 폭시 가문이 쌓아온 마나가 날아가 버리는 일일 터이니.

ㆍㆍㆍ

지금까지 얻은 이득은 계획했던 것을 한참을 넘어서고 있었다.

에슬린은 설마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진행될 줄도 몰라 넋을 놓고 있었다.

‘한 명 한 명 대하는 것이 달라, 심지어 각각 노리는 바도 다르고 마리온의 일은...’

감탄을 아낄 수가 없었다.

사실상 거의 맞춤식으로 협상을 진행한 것 같은 기분을 느낀 것이다.

대체 어떻게 한 것이지??

지금까지 누구에게 성적으로 머리 쪽으로 눈치 쪽으로 낮다고 평가를 받아본 적이 없던 그는 진심으로 조금이라도 시온의 비법을 알아차리고 싶었다.

가치가 있는 영주 모두에게서 하나씩 먹어가고 있는데 이 사실을 모르는 샤를은 다른 자까지 구하겠다고 몸값 협상에 응해야 할 거였다.

즉 이 안건의 고안자인 자신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현상이 벌어지고 있던 것.

어쨌든 이제 이러한 각계 협상이라는 초유의 협상법의 대미가 장식되어갈 예정이었다.

샤를의 차례가 된 것이다.

이런 숨이 막히는 분위기.

그런 상황인데 사람들의 시선과 달리 시온도 나름 긴장을 하고는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듣자하니 반절 미쳐있다고 하니. 자존심도 높아서 그냥 미쳤다 하고 그냥 망자로 가버릴지도 몰랐다.

물론 시온이 염려하는 이런 일이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름이 좀 된다 싶은 가문에선 궁지에 몰렸다 하면 그러한 선택을 하는 자들이 꽤 있었다.

‘나 같으면 그냥 다 넘기고 그냥 구석에 가서 살 것인데.’

아직 할만하기에 시온이 그럴 일은 없지만, 그 반대라면 그냥 조건이란 조건을 다 들어주고 느긋한 곳에서 애나 낳고 부유하게 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살아있는 게 낫지 않겠나.’

어쨌든 시작이 됐다.

이곳에서는 솔직히 포로가 된 귀족만큼 정확하게 떨어지고 가치가 높은 건 몇 개 없었다.

그중에 가장 가치가 높은 건 당연히 왕이다.

샤를은 거의 맛이 간 상황이었다. 게다가 지금 동전이 뒤집혀 있었다.

“조심하십시오. 시온 백작님. 내내 광기가...”

“음.”

그리고 샤를이 시온을 보자마자 달려들었다.

“시온 니벨룽!!! 네 녀석도 악몽을 꿔봐라!!!”

이곳에 잡혀 있는 동안 내내 악몽을 꿨다는 뜻.

보통은 무서워하지 이렇게 달려들지는 않는데 시온도 처음 보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쇠약해졌군.’

쇠약하고 느렸다.

검을 들 때는 제법이었는데 격투기 쪽은 영 아니었다. 그러니....

간단히 목을 잡았다.

“꺼억!!!”

핏줄이 올라오고 그의 눈이 붉어졌다. 숨이 막힌 지 컥컥거리고 시온의 팔을 떼려고 했다.

“시온 백작님!!! 지금 기사 대 기사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여선 안 됩니다!!!”

에슬린이 깜짝 놀라 소리를 쳤다. 그만큼 시온의 동작이 신속하고 낭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행동각인마법은 가끔 이러한 이유로 오해를 사기도 한다.

바닥에 내 던지고 나자 샤를이 몇 번 뒹굴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럴 리가 없지. 내가 대체 왜 이 돈줄을 죽이겠어. 자꾸 날 오해하네.’

솔직히 살짝 기분이 나쁜 상황. 뭐만 했다 하면 자신이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줄 아는가.

단순히 적만 그런 줄 알았더니....

“한 번 더 달려들면 죽이겠다.”

하지만 위협은 한 번 더 해야 할 것 같아서 속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이제 본격적인 몸값 얘기를 해야 하는데 자꾸 이러면 곤란하니.

“기...기다려. 시온 백작. 커헉..헉.”

“?”

목소리 톤도 가라앉았고 이것저것 분위기가 바뀌었다. 시온은 이게 그의 광증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보고받은 대로라면 반은 현인이고 반은 광인이라더니, 지금은 눈빛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던 거다.

‘몇 대 더 두들겨 줄 걸 그랬나.’

살짝 후회되는 부분.

어쨌든 아까 전부터 생각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형태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나. 나에게 덤벼드는 건 이걸로 두 번째다.”

“후욱...훅.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군. 망할 자식이. 네놈의 힘은 대체 어떤 망할 핏줄인 거냐?”

“물론 알려주면 네가 전혀 알 리가 없는 가문이지. 이제 경고는 알아들은 모양이군. 네가 왕이 아니었다면 넌 벌써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시온의 연기는 점입가경. 그런 와중에 호흡이 돌아올수록 샤를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내가 본 어떤 인간보다... 대체 뭘 할 수가 없다. 게다가 이 마나. 도대체 어떻게 손에 넣은 것이지. 마치 내가 어떻게 나올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속도였다.’

유서 깊은 가문 중에서도 손으로 꼽히는 대가문으로 태어난 샤를로서도 이렇게 많은 역할이 동시에 가능한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기사로서도 어중간한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육체의 단련부터 전술적 판단, 용기와 용맹에 무기가 없을 시에 벌어질 일을 대비한 격투 기술까지.

대마법사의 마나가 왜 이런 기사에게 모여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런 자에게 전략가의 재능이 있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지금까지 그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시온은 단순히 공포로 아랫사람을 찍어 누르는 자가 아니었다.

바닥을 닦는 하인조차도 하급 한 일을 하는 어떠한 자도, 시온에 대한 이야기와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명예가 없는 자도 아니었다. 명예로운 대우였고 밖에서 치러지고 있는 정중한 장례까지 이것들 모두가 시온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신께서 나를 사랑하여 왕관을 내려주신 줄 알았더니.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따로 있었구나.’

정신이 가라앉으면 놀라울 정도로 침착해지는 샤를은 침착하게 감탄하며 시온을 분석해갔다.

“앉아라.”

“솔직히 불편해서 안 물어볼 수가 없는 게 하나 있다. 왜 내 병력의 장례를 치러준 것이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성격이 안 좋은 영주라면 갖은 방법으로 죽이고 짐승과 몬스터의 먹이가 되게 한다.

그나마 살아있는 자들도 갖은 방법으로 고통을 받고 하여튼 머리를 참수하다가 창대에 꿰서 자랑하는 것이 일상인 이곳에서는 시온의 행동은 그림과 같은 충격을 줄 수밖에는 없었다.

하물며 기사가 아닌 보병한테 이 정도의 예우는...

‘거짓말이군. 전략가다운 준비. 치밀한 자다. 아까 나를 죽이려고 했던 것은 진짜일까 거짓일까. 그리고 이자는 대체 뭘 보고 있는 것일까. 미쳐있군. 지금 상황은 미쳐있어.’

샤를의 눈매가 부르르 떨렸다.

침착하고 냉정한 상태로 들어온 그는 이미 자기가 크게 실패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의 자신도 역시 자신의 일부. 그러면서도 그것을 묵인했다. 간단히 밀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랬다. 그런데 너무 물렀다.

시온은 그냥 갑자기 운 좋게 나타난 자가 아니었다. 그것을 일으킬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 세기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인물.

그런 자를 이렇게 어설프게.

그의 머리에서 많은 정보가 주마등처럼 흘렀다. 

가끔 정신이 들 때마다 들었던 것은 시온이 보여준 아르강 전투에서의 여러 개의 전략적 배치와 돌진이었다.

신의 경지가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예술적인 수들.

그러기에 지금부터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비정상적인 상황이 정상적인 판단을 방해하는군. 잃어버린 건 잃어버린 거지만 저 무표정한 얼굴 속엔.... 한 번만 판단을 잘못해도 내 가문은 멸망한다.’

샤를이 마른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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