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몸값(2)
샤를의 목표는 재빠르게 다시 정해졌다. 가문이 멸망하는 것보다는 대가를 교환하고 살아남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지금 시온은 주도권을 꽉 잡고 있었다.
우스운 얘기지만 시온도 샤를에게서 어떻게 얻어낼지 감은 잡지 못한 상황.
‘일단은 대화는 통하는 것 같고. 다시 덤벼들진 않겠지.’
이건 시온으로서도 신경이 쓰이는 문제였다. 한 번 더 덤비면 창에 꽂아 버리겠다고 했는데 시온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자기를 죽일 마음이 절대로 없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고 배짱을 부릴지도 몰랐다.
샤를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공작위와 그에 따라오는 지역에 대한 모든 권리가 시온이 노리고 있는 바였다.
공작에는 여러 백작령이 따라오게 되고 백작급 봉신을 지금만큼이나 얻을 수 있게 되니,
이제 비로소 제대로 된 세력으로 발돋움하는 것이 된다.
시온이 노리고 있는 지역은 콘랑드르 지역과 티니아 지역. 그리고 사보이 지역이었다.
각자 독특한 문화와 상권, 무역권, 자원이 설정되어있는 곳으로 한 곳 한 곳의 수익이 대단했다.
콘랑드르 지역은 양모 사업으로 대규모 방목지와 그것을 가공할 수 있는 다양한 품목의 공장을 가지고 있었다.
티니아는 와인산지로 유명했는데 이곳의 와인은 품질이 최상급이어서 다른 와인보다 항상 비쌌고 당연히 잘 팔렸다.
마지막으로 사보이의 가치 역시 나쁘지 않았다. 산지를 끼고 있는 이 지역의 핵심은 약간 금이 나왔다.
요구해야 한다면 이 지역 중 하나를 노려야 했다. 다른 지역은 이 정도까지는 가치가 있지는 않았다.
좀 더 점령하기 위해서 전략적인 포지션을 잡기 위해서 얻어내는 것이면 모를까.
그러려면 아무래도 적을 우후죽순으로 늘리게 될 거였다.
질질 끌었다가는 황제가 개입해서 시온이 가질 수 있는 이득을 줄이려고 할 것이다.
제국의 황제가 시온에게 움드령을 수여했을 때 기대한 역할은 변경백으로서 끝까지 그 지역을 사수할 희생적인 인물이었지, 이곳을 흔들어버릴 인물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코르도바의 조언처럼 슬슬 이런 것도 염두에 두어야지.’
어쨌든 사실 어느 것 하나라도 가지게 된다면 시온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세수로 따지자면 티니아, 거리의 가까움을 생각하면 사보이, 최대 상업 지역을 확보하겠다면 콘랑드르인데.
샤를이 두 손을 벌려 탁자 위에 놓았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서로에게 검을 겨누지 않았나. 좀 더 대화할 여지가 있다고 보는데.”
‘?’
“대화의 여지가 당연히 있지. 그래서 몸값을 어떻게 치를 것이지? 그리고 귀족들의 몸값과 내가 포로로 잡은 보병의 몸값은?”
잠시 조용해지다가 샤를이 빠르게 되물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내 목이 아니라는 것인가? 나의 가문이?”
“그건 네가 하기에 따라서 달렸지.”
“노련하게 나를 모는군..... 선택하라는 건가? 피하면 나를 죽이고 찾아갈 것이고, 선택하면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큰 것을 가져가겠구나.”
에슬린은 왕을 가지고 협상한 것 같지 않은 시작과 그리고 몇 마디에 그 몸값의 크기가 결정되는 형세가 되어가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잠시, 목 좀 축이고들 하시지요. 들어와라.”
에슬린이 빠르게 여자 하녀를 데려와 찻잔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관심을 낮추지 않았다. 찾잔 두 개가 돌아가고 시온과 샤를이 한 잔을 마셨다.
“독은 타지 않았겠지?”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승리왕이시여. 지금 선택하셔야 할 어려운 문제는 어느 지역을 시온 백작님에게 넘기실 것이 무엇인가입니다.”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 된 샤를.
“나를 죽이는 것보다 이렇게 얻어내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았나 보구나.”
샤를이 이렇게 대범하게 말을 했지만, 그의 눈동자는 시온을 흘깃 봤다. 시온이 어떤 표정인지 궁금했던 거다.
“언제나 낫지.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할 거로 생각하면 곤란하고.”
“최대한 먹이를 주는 것을 피하려고 했는데 결국 나를 읽었나. 그래. 시온 니벨룽. 나에게 원하는 것을 말해다오.”
대답은 에슬린이 했다.
“시작부터 말이 이렇게 잘 통하다니 명성대로입니다. 저희는 콘랑드르, 티니아, 사보이 이것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언급되지 않았으면 했던 것이 전부 나왔군. 그래.”
전부다 카페 왕조를 지탱하는 지역이었다. 셋 다 세수가 높았고 다들 독특한 가치가 있었다.
이 중 하나라도 없으면 점령 지역을 상비군으로만 유지할 순 없었다.
중세에서는 상비군의 유지비용이 상상을 초월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비율을 잘 따져봐야 했는데 이 세 지역 중 하나를 시온에게 내준다면, 양도, 질도 다 낮춰야 했다.
즉 군사로 억제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하는 압박이 숨어져 있었다.
그 다채롭게 변하는 샤를의 얼굴을 보며 시온은 생각했다.
‘지역 하나에 뭔가 하나 더 얹힐 수 있겠는데?’
“격렬하군. 내가 가장 소중히 하는 곳은 다 알아낸 모양인가. 그래서....아... 그래. 어디를 원하지?”
에슬린이 시온의 귀에 속삭였다.
“셋 다 대단한 곳이긴 한데. 굳이 뽑자면 저는 티니아 지역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세수가 가장 안정적이고 평지를 끼고 있어서 식량도 풍부합니다. 온화한 지역의 사람들이라 필시 말도 잘 들을 겁니다.”
콘랑드르가 가치로 따지자면 가장 좋았다. 하지만 가장 멀었다. 움드와 구스타에 연결을 하기엔 너무 먼 거리였다.
그 과정에 당연히 관세라든지 여러 공사를 치를 때 돈이 들 것이고, 좋은 항구도시이기도 한데,
이것저것 따져봐도 이미 툴즈 공작의 아들에게서 아르본이라는 항구 도시를 얻었기에 그렇게 목이 마르진 않았다.
사실 셋 다 좋았고 관세가 걱정되면 항만끼리 교역을 이어도 되기에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괜찮은 판단.
제일 마음이 편한 건 티니아지만 시온은 사보이가 마음에 들었다. 산지라서 옛날 생각도 나고...
금 생산지를 가지고 있다는 건 중세에선 정말로 특권이었다.
어떻게 보자면 다른 것은 기후라든지 여러 가지의 영향에 의해 무너질 수도 있는 요소들이다.
와인은 장마가 오거나 병충해가 있으면 생산량이 급감하기 마련 게다가 평지가 넓다는 것이 꼭 장점으로 오지는 않는다.
약탈에 약해서 방어하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한번 척을 지게 되면 겉으로는 휴전 협상을 잡아 놓고 있다고 해도 뒤로는, 술수를 부려서 약탈단을 운영해 중요한 시기에 쓸어가는 강도짓도 중세에선 빈번했다.
사보이는 이러한 측면에서 시온에게 매력적이었다. 여기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가장 간단한 이유가 하나 있었다.
‘거리가 가깝다.’
바로 움드, 구스타, 유비드 가문이 가진 지역을 이어서 큰 형세를 만들 수 있다는 것.
단점도 많지만...
“사보이 지역을 원한다.”
시온이 그런 결정을 하자 에슬린은 또 말하지 않은 뭔가가 있구나 하고 알아서 생각했다.
그만큼 시온이 지금껏 보여준 것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셋 중에 가장 가치와 손을 봐야 하는 곳.
그리고 샤를이 얼굴을 숨기느라 당황했다.
‘제기랄. 가장 내주고 싶지 않은 장소를.’
에슬린과 달리 샤를이 가장 피하고 싶었던 지역이 바로 사보이 지역이었다.
“어떻게 할 것이지? 수락하겠는가?”
시온이 그렇게 말하자 샤를이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단순히 물어본 것에 불과하지만, 샤를에게는 자꾸 다른 의미로 환청처럼 들렸다.
그냥 죽을래, 아니면 내놓을래.
‘대체 언제부터 이 안을 준비했을까? 저 표정. 압박. 완벽하게 돌아가는 협상. 내가 흥분해서 달려들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나?’
도저히 참기 어려울 정도의 압박감. 샤를은 전쟁과 비슷한 느낌을 계속 받고 있었다.
자기의 목숨과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그것을 담보로 천 년 동안 내려오던 지역을 내줄 수밖에 없다는 단 하나의 사실...
이가 갈리고 눈에 피가 솟지만 그런 표정도 조심해야 했다.
그리고 담담한 척하려고 눈물 나게 노력하며 시온에게 말했다.
“겨우 그 정도가 네가 원하는 것이냐? 이건 조금 실망이군. 시온 백작. 내가 가지고 있는 최대 지역은...”
“입을 물어라. 난 결정을 내렸다. 사보이 지역으로.”
바로 조용해졌다.
조금 전에 잡혔던 목이 욱신거릴 정도.
그 정도로 방금 위협은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잔재주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시 한 번 확인됐다.
도저히 더는 방법이 보이지 않을 수준이었고 자괴감까지 들 무렵 샤를이 입을 열었다.
“내...주지. 종이를 가져와라.”
“에슬린.”
사보이 공작위에 대한 강제 수여가 적힌 종이였다. 그리고 준비해둔 제국의 귀족 관리와 마탑의 관리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기침 한 번 없을 정도로 다들 극도로 긴장했다. 시온에게서 풍기는 기세는 범인에겐 더 심했다.
관리들이 머리에 많은 것을 채운 것은 맞으나 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그랬다.
그러다가 돌발상황.
제국 귀족 하나가 숨이 막힌다며 쓰러졌다.
“죄...죄송합니다.”
제국의 귀족이 곧바로 시온에게 사과했다.
관례상 제국의 귀족은 황제의 권리를 약간 대행하고 있는 것이어서 이런 사과를 백작에게 할 필요는 없지만... 이들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기 위해 시온에게 바로 정중하게 사과를 구했다.
“상관없다. 그자는 밖으로 내보내고 그럼 진행하지.”
시온도 슬슬 근엄한 척, 하는 것에 한계가 오려고 하고 있었다.
샤를의 앞에 종이가 가고 그가 침을 삼키곤 침착하게 서명을 해 나갔다.
그 서명이 다 끝이 나고, 옆에 있는 작은 단도로 자신의 손에 상처를 입혀 피를 냈다.
피가 뚝뚝 떨어지며 서명이 완성됐다.
영지를 넘기는 건 이렇게 마지막을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물며 그 영지들을 결집하는 공작이라는 직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새로운 공작의 탄생.
너무나 빠르고 너무나 대단한 활약으로 누구의 도움도 없이 밑바닥에서 올라온 자.
제국 관리들의 시선이 시온 하나에게로 쏠렸다.
전설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것.
그 순간을 지금 공유하는 것도 행운이라고 이들 중 상당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과 가장 쓰레기 같은 순간이라. 가문을 내가 망쳤군. 하하하.. 그래 만족하나? 시온 백작.”
시온은 넋이 나간 듯한 샤를의 얼굴과 목소리를 들으면서 한 가지를 더 요구할지 안 할지를 고민했다.
분위기상 해도 될 것 같긴 한데...
한 김에 하자.
“아니. 이제 네 몸값이 끝난 것이지.”
“??????”
“?!!!!!!!!”
“다들 나가 있어라. 이제 다른 자들의 몸값을 계산할 것이니까.”
“...............”
그런데 샤를의 편은 없었다. 시온의 눈치를 보며 관리들이 눈치껏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ㆍㆍㆍ
물론 이미 공작령을 뜯어냈기에 같은 급을 가져올 수는 없었다.
시온은 그래서 다른 자들의 몸값으로 사보이 지역에 붙어 있는 영지 하나를 더 받았고, 와인 무역권을 얻었다.
티니아 지역에서 나오는 와인에 대한 무역은 당연히 카페 왕조와 깊게 결탁하고 있는 상단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을 시온 쪽으로 바꾸겠다는 협약까지.
대충 이쯤 마무리가 되고 시온은 밖으로 나왔다. 혼이 빠진 듯한 샤를을 뒤로하고선.
‘끝났나. 나름 이 짓도 힘들구나.’
시온의 이마에서 땀방울 하나가 흘렀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시온도 충분히 긴장은 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변수가 많았다. 너무 밀어붙이면, 자기 목숨을 포기해 버리는 경우도 많다.
지금 몰려오고 있는 왕국의 거대 병력의 존재도 신경이 쓰였다.
즉 끝까지 뒤로 시간이 물리면 여기서 한 번 더 회전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