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7화 (177/304)

줄다리기

일단은 아르강 전투는 끝이 났고 받을 것은 다 받았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샤를에게서 받을 수 있는 게 무엇인가였는데.

계획했던 것보다 한참이나 챙긴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다.

“약간이라도 백작님을 의심했다니 이런. 그리고 듣자하니 이미 왕국의 대군이 아르강으로 몰려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까진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잡은 수뇌부가 한두 명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서.”

에슬린이 턱을 괴면서 그렇게 말을 했다.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이제 협상이 끝났으니 이들을 돌려 보내줘야 하는 게 맞긴 합니다.”

코르도바가 바로 의견을 내놓았다.

“흠....”

받을 건 다 받았으니 원리 원칙대로라면 이들을 아르 강 반대로 보내줘야 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몇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이들이 다른 마음을 품을지 안 품을지. 

천 년 동안 괜히 대가문으로서 강대한 지위를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시온에게 이 정도를 당했다고 할지라도 여력은 여전히 있었다.

처음에 염두에 두고 있던 문제도 바로 이 부분이어서 협상도 빠르게 진척을 한 감이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또 모르는 일인지라 자신들이 포로로 남아있는데 막상 아르 강 반대에 결집 되어 있는 추가 편성된 대규모 보병을 본다면 없던 의지도 샘솟기 마련.

“여기까지 와서 마지막에 칼을 맞는 것도 이상할 겁니다. 제가 제시한 견해가 이상하진 않을 것인데요. 코르도바 경.”

“이미 약조와 협상을 샤를 왕에게서 받지 않았습니까. 카페 가문 정도 되는 곳이 시온 백작님과의 약속을 어긴다? 지금까지 쌓아온 명예를 생각하면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꽂히고 나서 생각하는 게 더 웃기지 않습니까. 코르도바 경. 그때 와서 만약에라도 시온 백작님이 위험에라도 빠진다면.....”

에슬린이 이어서 말했다.

“솔직히 말해보십시오. 아르 강에서 저희가 지금 집결될 만한 병력을 지금과 같은 피해로 압도적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두 명의 얼굴이 시온에게 몰렸다. 시온은 솔직히 두 명의 의견이 일리는 있다고 봤다. 

어차피 이러니저러니 해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건 그때가 되어야지 만이 알 수가 있는 법이다.

여기에 대한 시온의 생각은 지극히 간단했다. 

어차피 니벨룽 가문이야 자신이 일으키고 있으니 명예가 좀 깎인다고 해서 문제 될 게 있겠나.

“에슬린의 말이 옳아 보이는군. 확신할 수 있는 건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코르도바 다음 견해를.”

이렇게 고리타분한 면이 있지만 코르도바의 좋은 점은 결정이 내려지면 바로바로 뛰어난 장군답게 나머지는 잊어버린다는 점이다.

이제는 정말로 전술적인 의견을 물어보는 것.

“전술적으로 보자면 아르강의 도하를 방해하면 됩니다. 가장 간단하고 강력한 방법은 그곳에 간이 축성을 하는 것입니다.”

“그걸로 한다.”

“명령을 이행하겠습니다. 시온 공작님.”

어차피 지금 데리고 있는 고렘의 힘이 남아도는 상황이었다.

급한 불은 거의 다 껐고 축성을 바로 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닌 선택의 문제인 이유는 세계에서 시온만 가능할 것이다.

보병의 피로를 유지하면서 대부분은 고렘으로 만들면 그만이기 때문.

보통 축성이라고 하면 깎아지른 듯한 높은 성을 의미하나 지금 코르도바가 제안한 것은 그런 의미의 것이 아니었다.

나무, 흙, 돌, 주변에서 잡다한 것은 다 가지고 와서 아르강의 반대편에서 넘어오려고 하는 적의 보병을 받아버릴 수준만 되면 된다.

그러니 간이 하게 나오는 것이고 또 그 정도가 충분한 것이 너무나 여기에 자원을 써도 손해였다.

그러니 이런 간이 축성을 지을 때의 요점은 완벽하고 거대한 규모의 축성이 아닌 기간 내에 반드시 만들 수 있는 속도와 전투 후, 그냥 버려도 될 정도의 허술함이다.

이 묘한 관계를 잘 잡아야 했다. 코르도바는 오랫동안 각종 세력에서 움드를 방어해낸 전력이 있는 만큼 축성 능력도 뛰어났다.

고렘을 빌리고 그것이 축성을 위한 자원의 결집에 들어간다.

시온은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앤드류의 비술에 덕을 보지 않은 적이 없지만 가만 보니 두 번째 비술이 더 쓸모가 있는 것 같긴 하다.’

다만 처음 것이 없었다면 두 번째 것이 없었으리라는 것이지만.

ㆍㆍㆍ

축성 작업이 들어가고 시온은 모든 인질에게 협상의 대가로 자유를 주진 않았다. 다들 갑작스러운 시온의 결정에 당황했지만,

시온이 그 안에서 고문하는 것도 아니고 좋은 건물에 그냥 밥 잘 넣어주고 기다리라고 할 뿐인지라 별다른 일은 없었다.

“아르강으로 이십만 보병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빨리 준비하기를 잘했습니다. 하지만 이 완성도는 코르도바 경의 솜씨가 아니었다면...”

“흠...”

축성 작업의 진척도는 빠를 뿐만 아니라 광대하게 일어나고 있었고 결과물도 좋았다.

돌이 많았고 재주가 있는 자도 많았기에 튼튼한 망루도 몇 개 지었고 폭우로 불어난 강 덕에 아르강 자체가 그렇게 도하에 위험이 커졌다.

시온은 그렇게 가장 높은 망루에 올라서서 강 아래를 내려다봤다. 굽이쳐서 흘러오는 것이 물살이 제법 있었다.

도하에 관련된 마법을 쓰면서 오면 도하가 되기는 하는데 그런 것을 생각하고 만든 것이 지금 이 간이 축성이었다.

즉 이곳을 넘어오려면 엄청난 피해를 각오해야 했다.

‘확실히 샤를이란 놈이 동전처럼 왔다 갔다 한다더니 나에게 달려든 녀석은 미친놈이고, 다른 놈도 미친놈이군.’

이십만의 대군을 집결하라 명령한 것은 시온과 협상을 했던 그 샤를일 터였다.

‘순전히 내주는 척을 하다가 여기서 자기의 병력과 합류를 해서 나를 치려고 했을 수도 있다는 거지.’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하나는 확실했다.

만약 그 폭우에서 전투를 내지 못하고 질질 끌렸으면 이 병력과 마주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내줄 게 너무나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아예 벌어질 일이 없는 방향이지만 말이다.

ㆍㆍㆍ

“저게 대체 뭡니까?”

“씨발...”

샤를의 최측근이자 혼맥으로 얽혀있는 대가문인 안주의 공작 기욤 안주는 어이가 없어서 아르 강 뒤에 펼쳐져 있는 방어 전선을 봤다.

“있을 리가 없는 보고가 있기에 직접 와봤더니.....”

대강 돌아가는 꼴을 보니 모든 소문과 정보는 사실로 판명이 되고 있었다. 기욤이 이를 갈면서 말했다.

“대체 몇 수 앞을 보고 있는 거냐 시온 니벨룽.....기사가 이 정도의 안목을 같이 가지고 있다니 역사적 인물을 떠올려 봐도 비할 자가 없겠군.”

“있잖습니까. 그 여우.”

“적어도 그자는 본인은 약했어. 마법사도 아니었지. 연속 결투라니 어떤 시대인데 누가 그런 짓을 받아들이고 해내겠나.”

“듣자하니 샤를 왕께서 시온 백작에게 결투를 청했다던데요. 물론 소문이긴 합니다만.”

“그... 광증이 또 발목을 잡는구나. 그래서 내가 누누이 그러지 않았는가. 왜 왕께서 앞 전선까지 나간 것이지?”

“음... 좀 걸러서 들으셨으면 합니다. 아직 확실치는 않은 것이긴 한데 시온 백작이 직접 거기까지 찾아왔다더군요.....”

“.....?”

“......”

“어떻게 말인가. 샤를 왕이 준비한 군세는 원래 대침공을 위해 준비해둔 병력. 대체 어디를 어떻게 해야 그 백작이 왕을... 만난단 말인가. 날아서?”

“하하.. 못 들은 것으로 하십시오. 기욤 공작님.”

어쨌든 기욤은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을 보고서 몇몇 마법사를 불러 기일을 다시 계산해봤을 정도였다.

도저히 아르강 전투가 있었다고 추측이 되는 시간으로부터 저것을 지어낼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기에.

시온은 꾸역꾸역 몰려드는 대보병을 가장 높은 망루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바람이 거칠게 불었다.

‘많긴 많군. 하지만 코르도바가 정확히 지어냈고, 이렇게 되면...’

다른 마음을 품는다고 해도 이곳에서 기욤의 보병은 십만은 잃을 각오를 해야 했다.

단순히 강을 넘기 위해서 말이다. 시온은 그 이상의 피해를 줄 자신도 있었다.

심연의 고렘의 소환수는 이런 수중에서 더 강한 면모가 있었다.

ㆍㆍㆍ

모여든 기욤 안주의 대보병은 압도적인 숫자를 가지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강 하나를 두고 덫에 걸린 것처럼 그냥 멀뚱멀뚱 있어야 하는 정도. 숫자가 많으니 모여드는 데에만 며칠이 더 걸릴 정도였다.

일단은 한 가지는 대성공이었다. 이들의 발목이 꼼짝없이 묶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시온이 버티고 있는 이상 다른 방법을 쓸 수밖에는 없었다.

좀 더 우호적인..

덩치가 크다고 꼭 좋은 것은 아니다. 많은 대보병이 가지고 있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밥만 먹어도 막대한 물자소모가 이루어지고 그냥 가만히 모여 있어도 문제였다.

특히 점령지를 차지해 군대로 누르고 있는 경우라면 더욱이.

그러니 기욤의 입장에서는 미칠 것 같은 노릇이었다. 이것을 들어가자니 희생이 너무 크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쾅!

기욤이 결국 화를 터뜨리고 말았다.

“위에를 봐준다고 하지 않았나!”

“보긴 봤다만. 미안하네. 도저히 방법이 없어. 도저히 저곳을 큰 피해 없이 도하 할 방법이 없네.”

“이런 망신이 있나. 지금 왕국의 모든 전력을 가지고 왔는데 고작 저 한 줌의 병력을 밀어내지를 못하다니.”

침울해진 이들은 이제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샤를 왕까지 가지고 있는 시온이 너무나 유리해진다.

ㆍㆍㆍ

적이 무력감을 느끼며 단호한 방향을 결정할 것을 압박받고 있을 무렵 시온도 어떻게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꼴을 보아하니 저들은 상당히 호전적이었다. 이미 협약으로 잔뜩 뜯어낸 시온의 입장에서는 이대로 돌려보내고 끝내는 것이 가장 좋았다.

꼭 무조건 칼을 들고 싸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애매한 전투는 둘 다 손해를 크게 보는 것을 의미했다.

즉 할 거면 반드시 이겨야 하고 빠르고 정확하게 이겨야 했다.

그래야 남는 것이 있을 것이니 말이다. 

보병대 자체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경우가 많아서 본격적으로 서로 대치하기 시작하면 세수가 높다 한들 버티지를 못한다.

그래서 중간에 협상하고 거래를 해버리는 것이다. 중세는 그게 더 심했다.

봉신이 다른 봉신으로 갈아타는 일도 많고 하극상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편인지라 마냥 둘이 싸우고 약해진다는 것이 좋은 방향은 아니었다.

‘요점은 지금 협상을 해주냐 아니면 길게 끌 것인지의 여부인데...’

당연히 길게 끌면 시온이 무조건 좋은 게 많았다. 

당장 돌려보낼 것이 아니라 다른 짓 못 꾸미게 받은 거 확실히 받아내기 위해선 상대의 손실을 키워나가야 했다.

덩치가 작으나 이미 알짜배기를 다 챙긴 시온의 입장에선 이 정도 군대로 몇 달 기다리는 것은 카페 왕국에 비해선 일도 손해가 아니었다.

하지만..

크게 막아낼 수 있다곤 해도 진짜 뒤를 안 보고 저 대보병이 도하 하기 시작하면 시온도 결국 큰 피해를 보고 한참은 뒤로 물러서야 했다.

즉 만약 저들이 진짜 뒤도 안 보고 시간의 압박을 받아 도하를 시작해 버린다면 시온의 손해였다.

그리고 묘수가 하나 생각이 났다.

기욤은 자신에게 온 전서를 또박또박 한 글자씩 읽었다.

“모든 협정이 끝난 지금 그대의 행위는 명예롭지 못하다? 그래서 결투를 청한다???”

“미친놈이군요.”

“그 결투 당사자가 본인이 맞습니까?”

“아무리 자신이 있어도 그렇지, 상식적으로...”

“이길 기사가 있어 보입니까?”

“하지만 나쁘지 않아. 시온 백작만 이길 수 있다면 포로를 전부 반환받을 수 있다. 무슨 협정을 샤를 왕과 맺었는지는 몰라도 없던 것으로 할 수도 있고...”

“조건만 하나 더 추가한다면 못 받을 것도 없습니다. 설욕도 할 겸해서 말이지요.”

기욤이 방금 발언을 한 자를 쳐다보고는 손을 탁 쳤다.

“연속 결투.”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시온 백작의 이 오만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가 없지요! 그리고 이 제안이 온 이상 이미 많은 명예의 손해를 본 저희로서는 거절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이십만의 보병을 준비하고 있는데 백작의 정면 결투를 무서워서 거절한 다라, 지금 형성되어 있는 무역이 붕괴할 정도의 명예 타격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