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짜기
이제는 누가 누구를 포위하고 있는지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식량을 나르는 수송 물자부터, 어지럽게 널려 있는 막사, 도저히 도하를 준비한다고 볼 수가 없는 무질서한 모습들은 사실상 어디까지가 어느 부대인지도 알아보기 힘든 수준이었다.
샤를과 혼맥으로 얽혀 있으면서 혼자서 육만 보병을 대동했던 기욤 안주가 결정권이란 결정권은 다 가지고 있었는데 시온에게 끌려가 버렸다.
그들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때를 생각하면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기욤을 구출하기 위해서 시온에게 덤벼들 만한 사람은 없었다.
끼룩.
새들이 사이좋게 날아가고 있을 무렵. 시온은 카롤리나의 치료 마법을 구경 중이었다.
얼굴이 주먹이 제대로 꽂힌 기욤은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대체 넘어가서 무슨 짓을 한 걸까.’
에슬린은 시온을 보면서 새끼손가락을 물었다.
가고야 싶었지만 시온이 직접 고른 인원엔 에슬린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튀어야 하는데 저항하다가 각자 튈 수 있는 강한 유체 능력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법.
‘설마 넘어갈 때 만해도 기욤 공작을 직접 끌고 올 줄은 몰랐다...’
시간도 시간이었다.
시온이 위험에 빠지면 바로 원거리에서 마법을 포격할 준비를 하고 있던 에슬린이나 다른 마법사들도 김이 빠질 지경이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멀리서 보이는 시온의 모습에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광경은 이들을 경악하게 할 만했다. 시온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너무 진귀한 장면이었기에....
결투 자체만 해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사망률도 높고 이긴다 해도 부상할 가능성이 컸다.
‘아니 살아있는 게 다행이지. 보아하니 기욤 공작은 운이 좋았다.’
기욤 공작은 전형적인 관리형 귀족이었다. 마법도 기사도 어중간 한 형태. 대신 혈통과 관리 능력이 뛰어났다.
평소엔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했을 그지만 하마터면 육체 능력을 게을리한 덕에 주먹질에 사망할 뻔했다.
“죽진 않겠지?”
“살짝 흐릿하긴 하지만 일어날 거에요.”
카롤리나가 신중하게 말했다.
‘잘 되고 있군.’
시온은 이십만의 왕국 보병이 발이 묶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큼 연속 결투도 결투이지만 기욤이 거의 모든 걸 결정할 수 있었던 점도 컸다.
이제 시온의 손에 왔으니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밖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오히려 이렇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게 컸다.
‘이번 일의 목표는 이십만 군대에서 나오는 금화의 소비를 극대화 시키는 것.’
저번에 가졌던 에슬린과 코르도바와의 이야기에서 흘깃 나왔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에 관한 것이었다.
즉 보복능력에 대한 상실이다.
이렇게 샤를에게서 얻을 거 다 얻었지만, 샤를이 지금까지 보여줬던 전적 상 쉽사리 포기하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또는 회복하자마자 다시 귀찮게 굴 가능성이 컸다.
시온이 이왕 이렇게 된 거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카페 왕국의 축소화였다.
그리고 그편이 시온에게는 판이 깔리는 거였다. 여러 개의 세력으로 갈려서 싸우게 하는 것이 시온으로서는 여러모로 도움이 됐다.
이런 숨은 의도가 있기에 이렇게 바로 인질로 잡은 포로를 반환하지 않고 시간을 끌고 있는 것.
사실 시온이 이런 큰 그림을 보고 이렇게 대처하는 것은 아니다.
굳이 이렇게 문제를 키운 것은 아르강에서 궁지에 몰린 샤를이 배수진을 치기 전에 내렸던 명령 때문이었다.
그는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바보도 아니고 저런 군세가 있는데 바로 인질을 돌려준다면 무슨 꼴을 볼지는...
그리고 시간이 다시 빠르게 흘렀다.
그의 건강이 회복되어 갈 시기 시온은 그동안 고렘 열다섯 기를 원래 하던 작업에 되돌려 놨다.
‘흠, 별일 없나.’
그동안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고 시온은 저쪽 군대의 해산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미 이십만의 군대는 갈수록 엉망진창이 되어서 식량이 부족한 나머지 오만 보병은 돌아가고 있었고 나머지는 대규모로 낚시까지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마저도 이들이 모르는 사실, 시온은 심연의 고렘을 수면 밑에 잠복을 시켜서 낚시를 방해하라고 했다.
그러니 날이 갈수록 거대한 병력이 거꾸로 시온에게 공성전을 당하는 것 같은 웃긴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는 자기들 말까지 잡아먹을 지경.
그때 기다리던 소식이 들렸다.
“전황이 변했습니다!! 시온 공작님께서 얘기하신 대로입니다!!”
“?”
정확하게는, 시온이 한 얘기가 아니다.
에슬린이 한 얘기였지.
그런데 어쩌다 보니 시온이 고안한 것으로 변해 있었다.
“카페 왕국이 쥐고 있던 서부 점령지가 모두 반란을!”
“흠.”
“왕국이 피를 흘리고 있군요. 믿기지 않는 결과입니다.”
“지금 벌이고 있는 것만으로도 더는 나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로 타격이 커졌다.
이렇게 되니 이제 점령지를 놓치게 된 것뿐만 아니라 대치 중인 보병을 제때 그 지역 성벽에 배치하지 않으면 이제는 많은 영지를 뺏길 수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극도로 고통을 받고 있던 그들은 바로 십만을 기욤이나 왕의 명령 없이 되돌리기로 했다.
‘보통 밤에는 출발하지 않는 법인데.’
시온은 망루에서 넘실거리던 불빛이 꺼져 가는 것을 봤다. 얼마나 급한지 이미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예정에도 없던 대치를 한 덕에 필요 이상으로 자원을 써버린 상황.
저들은 당장 움직이기만 해도 기력이 딸려 사망자가 속출할 수도 있었다.
“대략 제가 정보를 모아봤는데 이동 중에만 아사자가 상당할 겁니다.”
코르도바가 따라서 올라오고는 시온에게 말했다.
“그래?”
“더 심할 수도 있습니다. 원래 저들이 준비하던 것은 유비드 가문을 약탈해, 이 지역에서 식량을 충당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군.”
“그래서...”
“생각이 더 있나?”
“하나 걱정되는 요소가 있긴 하지만 시도하지 못해볼 것은 아닌지라, 적당한 유혹만 있다면 다량의 병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얘기는...”
“저에게 기사와 병력을 붙여주신다면 낙오된 자들을 설득해 데려오겠습니다.”
나쁘지 않았다.
원래 사람이라는 게 목숨이 위험하다고 느껴지면 갑자기 편을 바꾸기도 하는 법이다.
하다못해 조건만 넉넉하게 달아준다면 시온 쪽으로 와서 그냥 살아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
이들도 서부 쪽으로 가봐야 목숨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대신 조건을 조금만 후하게 해주신다면...”
“하지. 내가 언제 사람을 받아들이는데 아끼는 거 봤나.”
코르도바가 감동한 얼굴이었다.
자기의 말을 믿고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면 과감하게 승인해준다는 점.
조건이야 천천히 정해도 된다.
간단한 집과 직업을 주고 이들의 가족을 무난하게 끌어올 수만 있다면 문제가 없다.
다른 영주라면 어떻게든 새로 들어온 영지민을 뽑아먹으려고 별놈의 법을 다 만들겠지만..
중세답게 악법이 많은 편이었다.
효율이 큰 악법이라면 시온도 조금 고려를 해보겠지만, 그냥 효율이 떨어지는 당장만 추구하는 법들..
이중, 삼중 과세부터, 심한 것은 인권이 없는 이곳답게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시온은 이들에게 일절 그런 것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부분을 줄여주는 것이 규모를 키울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곳엔 이곳 귀족의 룰이 있지만 시온은 그런 것을 따르기에는 예외적인 인물.
‘이왕이면 이런 느낌으로 갈까.’
ㆍㆍㆍ
그렇게 긴 행렬이 끝날 때쯤 반대쪽에 남은 병력은 삼만 정도에 불과했다.
도하는커녕 정면승부도 시온의 병력에 힘들다.
그 거대한 군세를 흐트러뜨린 것.
‘이제 받아낸 작위와 이득이 확립되는 순간이군.’
이제 사로잡았던 왕과 공작들 백작들, 귀족들을 몸값을 받은 대가로 풀어준다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코르도바가 잘해낼지는 모르겠지만.... 해내 주기만 한다면 샤를 왕은 여기서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겠군.’
먹고 먹히지만 엄격한 위계에 따라 나뉘는 세상.
언제나 그랬듯이 시온이 당연히 거대한 가문에게 먹혔어야 했지만, 거꾸로 잡아먹은 그림이었다.
시온은 바로 기욤 공작을 찾았다.
이들을 내보내 주기 전 잊으면 안 되는 사실이 있는 법이다.
육만의 병력을 이끌고 올 만큼 기욤 자신도 대단한 재력가. 안주 가문과 괜히 카페 가문과 혼맥으로 얽혀 있을까.
그리고 기욤과 만났다.
정신을 차린 기욤은 여전히 제 몰골이 아니었다. 딴에는 망자가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저승길을 경험한 거였다.
시온도 살짝 긴장해서 힘 조절을 실패한 것이었고.
그나저나 이 일 역시 신속함이 중요했다.
이제 이들을 데리고 있을 만한 이유가 없기에 다른 자들, 즉 다른 제후나 왕들의 심기를 거슬릴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온이 들어가자마자 그가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한다는 것을 확인하고선 이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대강의 얘기는 들었을 것이다. 나는 아직 네 왕과 나머지 귀족들을 모두 데리고 있다. 네 선택 여하에 따라서 여러 가지가 달라질 일이지.”
“오... 오는 소리가 들렸어. 네가 오는 줄 알고 있었다. 이 악마....”
“?”
시온이 살짝 손을 흔들어서 그의 앞에서 흔들었다.
‘정신이 나간 것은 아니겠지?’
그의 얼굴에서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 눈동자는 확대.
딱 봐도 좀 맛이간 것 같았다.
“한 대 더 맞아봐야 하나?”
시온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말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다.
정신이 번쩍 들은 모양이었다.
“아... 아니 그.. 저. 잠깐. 시온 백작님. 잠깐...”
시온이 아직 공작위를 받은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백작이다. 그런데 말까지 더듬으면서 기욤 공작은 시온에게 존칭을 붙였다.
“뭐지?”
“대..강 이해를 했습니다. 주먹을 내려놔 주십시오. 흐으어.”
머리를 붙잡는 게 아주 몸에 각인 된 모양.
‘힘 조절을 잘못한 덕분에 일이 쉽게 풀리겠는걸.’
안주 가문 자체가 성격이 악랄한 편이었다.
세수도 다른 지역보다 더럽게 강한 편이고 코르도바에게 듣자하니 평판도 썩 좋지를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세금을 붙이고 말을 안 들으면 공식적으로 고문한다나.
그런 것을 오래전부터 즐겨 하던 가문이니 아주, 대를 이어서 악행이 이어진 셈이었다.
시온은 자리에 앉아서 그를 쳐다봤다.
“그래? 내가 걸은 조건에 대해선 봤나?”
시온이 옆에 있던 기사에게 종이를 받아 그에게 밀어 넣었다.
안주 가문은 너무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서부 반란 지역과도 밀접해서 반드시 이 둘의 싸움에 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영지를 받아서 귀찮게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시온이 건 것은 막대한 배상금이었다.
무조건 금액을 거는 것이 아닌 상대가 낼 수 있을 아슬아슬한 지점의 금액.
과중하다 정도가 적당한 표현일 듯했다.
액수를 짜준 것은 에슬린이었다.
“그래서?”
“이...이건 아무래도 너무 많은...”
“낼 수 없지는 않을 텐데?”
“낼 수 없습니다.... 전쟁에 많은 비용이 들어서...”
물론 에슬린에게 들어서 이것이 거짓말일 수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에슬린은 대화를 통해 감을 잡아서 자세한 액수를 정하라 했지만...
다른 왕국의 봉신들도 안주 가문이 부유하다는 것을 몇 번이고 들었다.
이를테면 증인인 셈.
시온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탁자를 내리찍었다.
시온의 힘은 솔직히 자신도 가끔 놀랄 수준이 됐다.
푸른 액이 만들어낸 성장은 아직도 미약하게나마 진행 중이었고, 여기에 세대를 거듭해야만 얻을 수 있는 엄청난 마나는 시너지가 분명히 있었다.
간단히 내려찍는다는 것이 탁자가 순간 박살이 나면서 마나의 파장이 펑, 하고 일어났다.
그때 기욤의 얼굴에 꽂았던 주먹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일격이었다.
기욤은 식은땀을 줄줄이 흘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경기를 일으켰다.
이성적으로는 거부해야 하는 액수.
시온이 말한 대공작에 걸맞은 과중한 배상액은 안주 가문을 단번에 거지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적어도 자신의 가문 재산을 꺼내서 시온에게 내줘야 했다. 안 그래도 높은 세수에 더 세수를 올린다? 생각할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