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8화 (218/304)

힘의 차이

대왕이 주기적으로 쉬는 곳이라 해서 안쪽 건물도 크고 깊은 편이었다. 물론 시온은 사치스럽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아이고 이런 창피한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원래 이 정도로 내부 치안이 약하진 않았는데. 하지만 심려 마십시오. 대관문을 잃은 이후 이곳엔 최고의 정예들만 모아놨습니다.”

에릭이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군율은 낮지 않지.”

“뭐해! 이 새끼들아! 빨리 안 움직여!! 하여튼 최대한 빨리 대처하겠습니다.”

이반 대왕의 첩들도 줄줄 나타났다.

“진작에 준비했어야지요. 항상 이렇게 대처할 건가요?”

“어쨌든 알아서 하실 겁니다. 굉장히 높은 실력의 기사분이 오셨군요.”

“혹시 들은 거 있니?”

“제국에서 높으신 분이신 것 같아요. 그냥 분위기만 봐도 나오는 것 있잖아요.”

“내가 봐도 그런 것 같아. 특히 저분은.....증명이 되신 것 같구나.”

미모의 여자는 호기심 넘치는 얼굴로 시온을 바라봤다.

첩들은 보통 독수공방을 하길 마련. 나이는 거의 이십 대에 많아 봐야 서른 초반이었다. 장성한 아들이자 계승자인 고드를 생각하면 이 여자들을 충족시키긴 어려웠다.

“저 옆에 있는 자는 수행기사일까요?”

그녀가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당연하지. 대왕의 첩에게 첫 만남부터 하대할 만한 남자는 몇 없단다.”

“그러면, 저분이 황제의 혈족이라는 뜻이야?”

“황제의 혈족!!! 언행을 조심할게요.”

시온은 첩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안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종소리는 끊겼고, 밖에서 고함이 나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침입자들의 흔적이 없다니!”

“밖을 뒤져봐, 안으로 왔으면 벌써 피를 튀겼을 놈들인데!”

밖은 밖대로 여전히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고 그 와중에 복도가 점점 고급스러워지고 좁혀진다.

“저분들은 누구시죠?”

“안에 대왕님이 있나요.”

“제가 먼저 물었죠. 지금 저 두 분이 누구냐고 물어봤어요.”

둘의 사이가 상당히 좋지 않은 듯했다. 문을 지키는 여자와 지금 안내를 맡던 여자의 서열이 같아 보였다.

“으~음~ 감당할 수 있겠어? 지금 네가 하는 짓이 전부 우리를 망신시키는 일인데.”

“설마...”

“저기, 제가 말씀드릴게요. 이 분은 황제의 혈족분이세요.”

가장 어린 여자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너무 당황스럽네요. 황제의 혈족이 찾아오시다니. 제 기분 이해 하시겠죠... 양해를 부탁해요. 기사님... 아니 공작님.”

급히 옷매무새를 본능적으로 다듬는다.

“빌어먹을. 밖이 소란스럽군요. 잠시 보고 오겠습니다.”

“그래? 그래라.”

이반은 여전히 체스에 몰두 중이었다. 그나마 시온의 악몽에서 벗어나는 순간은 이때밖에는 없었기에 그는 이 순간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예. 그럼.”

대왕의 최측근을 담당하고 있을 만큼 아돌프 역시 라버 경 부럽지 않을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근위대장이었고, 친위기사이기도 했다.

‘하여튼 내가 그렇게 조용히 하라고 말을 해놨는데도.’

“보시렵니까?”

“무슨 일인진 알고? 열어라.”

내외부와 격리되어있는 공간답게 정보의 전달도 이런 식으로 해야 했다.

“안 그래도 열 준비 하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문이기에 기사들이 집중해서 문을 열었다.

“아까 전부터 조용히 하라고-”

아돌프는 시온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만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아닌가? 아니야. 이 자는.’

“불만을 표할 게 아니에요. 아돌프 경. 그만한 분이 왔으니까요. 이 분은.”

“아, 잠깐만.”

아돌프는 갑자기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시온이 상상할 수도 없는 강자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속으로는 지금 다시 문을 닫아서 격리하고 싶을 정도였다. 대왕을 보호해야겠다는 것이 아닌 그냥 자신이 안전한 곳으로 숨고 싶다는 본능.

“아돌프 경. 어디 아프세요? 정신 차리세요. 이 분은 제국 황제의 혈족이십니다. 급한 용무 때문에 이반 대왕님을 직접 보셔야겠다고.”

시온과 에릭은 문 안으로 들어왔다. 누가 뭐라고 승인하지도 않았건만, 그런데도 누구도 시온을 저지할 생각을 하질 못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온 시온이 잠시 멈췄다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눈이 커져 있는 아돌프를 향해 말했다.

“내 신분을 밝히지.”

모두 시온을 집중했다.

“나는 시온 니벨룽이다. 용무는 이반 대왕의 목이다.”

“농담도, 참. 시온은 서부에 있는 걸.....요...”

그녀의 말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숨 막힐듯한 압박. 누가 봐도 허언으로 보이지 않았다. 

서로를 쳐다보다가도 살기가 넘실거리는 시온의 의도가 명백했다.

“뭐...뭐하나!”

“멍하니 있지 마라!”

누군가 그렇게 말을 하자 단련된 기사들이 척수 반사적으로 시온을 향해 뛰어들었다.

어찌 됐든 이 중요한 상황에서 이런 발언을 한 것만으로도 죽여야 할 이유는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왼쪽부터 할까?’

시온은 달려오는 두 명 중 누구부터 공격할지를 고민했다.

기세만 봐서는 둘이 시온을 찍어 누를 것 같이 보였다. 그렇지만 달려드는 남자의 손목에서 검을 빼앗은 후 그대로 내려쳤다.

콰직!

검과 장구가 부딪히고 베인다기보다는 뭉개지는 소리가 두 번 나면서 앞에 있던 자들이 허물어지듯이 쓰러졌다.

이런 밀집하고 기사들이 운집해 있는 곳에서 갑작스러운 이러한 행동은 앞을 개통시켜줬다.

“아...?”

“이 정도의 실력이라면 시온이 맞는 건가?”

“그자가 여기에 왜 있어? 그리고 대관문에서 여기까지 바로 오기엔 시간이 안 맞잖아.”

“대관문의 범인이 밝혀졌구나-”

“시온? 시온이 맞는다면 고드 님을 되돌려 받을 기회다! 무조건 달려들어 새끼들아!”

보병과 기사들에게 호통 소리가 떨어지고 그중 몇이 시온에게 달려들었다.

봐줄 생각은 없었다.

어설프게 하면 일이 꼬인다. 확실하게 하나씩 숨통을 다 끊어야 했다. 누군가에게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상황과 달리 이곳에선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했다.

그래서 시온도 여유를 두지 않고 바로 전력으로 나섰다. 깨진 검을 던져 버리고 바로 트루 블레이드를 뽑았다.

“트루 블레이드다! 라버 경을 시온 니벨룽이 죽인 게 맞는 거야!”

“그래 보인다.”

“야이 자식들아 천천히 해! 상대는 라버 경을 처리한 그 기사인 시온 니벨룽이다!!!”

누군가 다급하게 더 외쳤지만 이미 호승심으로 가득 찬 이들은 시온에게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다.

이번에 얻은 그나 일족의 비검술과 강체술을 전력으로, 이미 시험 단계는 끝났기에 시온이 이리저리 검을 내리쳤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공격하는 자나 막으려는 자나 팔이 떨어지든지 목이 떨어지든지 재수 없으면 몸통이 잘려나갔다.

아까도 비슷하게 했지만, 이 정도의 절삭력은 보여주질 않았다. 검이 깨지거나 강체술의 힘으로 그냥 으그러뜨리는 수준.

그런데 트루 블레이드는 논외의 얘기였다. 애초에 대관문에서 그 학살을 선택해 악명을 얻을지언정 가져오려고 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

순식간에 피바다가 되었다.

“어어억!! 살려..살려..”

“이건 안돼. 인간이, 아니야.”

“이런 씨발. 소문은 이 정돈 아니었잖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바닥을 구르는 자나 아직 뛰어들기 전의 기사나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의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전의 결과가 가능한 기사는 아예 없다고 봐도 좋았다. 시온이 보여준 것은 이들의 상식 밖이었다.

바닥에 눕고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상위 기사이거나 바로 간부로 쓸 수 있는 정예들.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군...”

아돌프가 순간 혀를 물뻔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시온과 상위 기사들이 얽혀있을 때 그사이를 노리려고 했다.

‘이게 분명히 교전이라는 것이 일어나긴 했는데.’

달걀이 바위에 던져지듯 다 터져버린 거였다. 다시 봐도 이해가 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

그런데 시온은 이미 비술에 명령을 해두었는지라 벌써 다른 기사들 사이로 뛰어들어갔다.

요란한 검 소리가 나고 검이 잘려나가는 경우가 있을 정도, 그 찰나에 다섯 명이 죽거나 전투할 수 없을 정도의 신체손상을 입어버렸다.

“상대할 수가 없어....끄으으.”

“시온 니벨룽이 아니면 그게 더 문제야 지금은. 씨발. 저런 인간이 하나 더 있다는 거잖아.”

에릭도 두 명을 상대하고 있었고 막 하나를 젖혔다. 피 분수가 나면서 한 명이 어깨를 맞고는 바닥에 쓰러졌다.

“저자가 그 자자하던 시온...”

“감탄하고 있을 때에요?? 어떻게든.”

“움직이면 안 돼. 벌써 열두 명이 죽었어.”

이반의 첩들이 떠들고 있는 와중 한 명을 그대로 쪼개버렸다.

그냥 절단을 내버린 거였다. 사람이라는 것은 일자로 절단이 잘 나질 않았다.

어마어마한 힘과 그에 받쳐주는 기술이 필요했고 하물며 그 상대가 상위 기사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갖춘 장비도 장비인데 기사라는 무한한 경쟁을 뚫고 올라온 실력자 중의 실력자기에 그랬다.

이제는 어느 정도 휑해 버린 공간.

그리고 아돌프의 차례였다.

지금까지 천재와 찬사와 누군가의 위에 서본 적 밖에 없던 그의 머릿속은 완전히 불에 타고 있었다.

‘이길 수 있나... 아니 몇 번을 버틸 수 있지? 무슨 검술을 쓰는지도 감이 오질 않는다. 저 미친놈의 소문은 오히려 적게 알려졌다.’

온갖 가능성을 다 재고해봐도 이길 가능성이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시온이 그를 향해 검을 겨누자 자신의 차례가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공격과 방어 중 택일을 해야 했는데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명예와도 관련이 있었다. 아돌프 역시 절정의 명예를 누리고 있는 제공의 사냥꾼으로 이름이 드높았다.

차라리 베이더라도 명예스럽게 달려들어야만 했던 것, 하지만 다리가 전혀 움직이지를 않았다.

사실 그가 방어를 선택한 것은 그냥 간단한 이유에서였다. 결국, 선택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너무 위축되어 평소의 실력도 발휘하지 못한 그는 댕강, 검을 든 손이 날아갔다.

“내 손이 어디 갔어!”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의 검이 소리를 냈으니 답은 거기에 있을 거였다. 시온이 다가가자 아돌프가 이리저리 없는 손을 습관적으로 휘둘렀다.

피가 흩뿌려졌지만 시온은 마음을 먹었다. 봐주면 안 된다. 특히 이 녀석 같은 자는 정신 차리고 나면.

근데 시온이 다가가자 온 얼굴이 하얗게 되더니 그대로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얼마 전에 에릭 덕분에 사람 기절한 것은 누구보다 잘 아는 시온은 그가 정말로 기절한 것을 확인하고는 첩들에게 말했다.

“움직이면 베어버린다.”

“그...그럴리가요.”

“전 포기했어요오.”

에릭이 막 한 명을 더 고꾸라뜨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에릭 네가 나머지를 제압하고 여자들도 감시해라, 난 안쪽으로 간다.”

“알았어. 내가 여길 맡으면 되겠어.”

이윽고 시온이 안으로 들어가자 막 창문 가로 도망을 가려는 이반이 보였다.

“이 잠깐의 시간도 벌어주지 못했단 말인가? 이 멍청하고 쓸모없는 것들!”

“거기까지야. 이반. 나는 네 목을 가지로 왔다. 다만, 그렇게 될 때는 너의 목을 정말 베어버리고 그대로 네 아들인 고드를 참수시킬 생각이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길게 얘기한 이유는 알겠지?”

“내 아들을 살려줄 수도 있단 말인가???”

“그렇지. 그러니 조용히 내려와라. 나한테 다리가 잘려서 끌려오기 싫으면.”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시온의 말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화를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도망갈 여지가 없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을 일이다.

“방금, 벌인 일을 보아하니....”

이반이 슬금슬금 내려왔다. 시온이 바로 가서 그를 밀치고 창가를 내려다봤다.

한 명이 매달려서 내려가고 있었다. 시온이 바로 줄을 끊었다.

“......!!”

“에릭! 안으로 여자들을 데리고 와!”

그리고 첩들이 그리고 불구로 제압당한 자들이 질질 끌려왔다.

“첩들을 다 죽이려고?”

“죽일 필요는 없지. 대신 벗겨야지.”

“?”

시온은 마리 자링의 경우를 알고 있었다. 여자들이 잡다한 도구와 마나를 다루는 일이 많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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