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관문
“크흐흐. 이건 미친 짓이군.”
고드 부르스는 시온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렸을 때부터 단 한 번도 게을리 산 적이 없었다. 여섯 살 때부터 검을 쥐어왔고 그 목표는 서방 제국의 정벌이었다.
“정말로 해야겠느냐? 시온 니벨룽은 그사이에 검술이 더 늘어난 것 같다.”
물론, 보이지 않는 거래가 성립되었고 그 조건은 부르스 가문의 존속이었고 고드의 생존이었다. 시온이 그걸 모를 것 같지는 않았지만, 결투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나라를 바칠 순 있어도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습니다.”
“시온 니벨룽은 그 정도로 명예로운 자가 아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중신들과 논의해본 바론 그의 본질은 마법사에 가깝다.”
“그래서 나를 여기서 죽일 거라는 겁니까?”
“아니, 그러니까 아들아. 이건 결투고 여기서 벌어진 일은 신이 관여한 것이야. 그러나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아무리 고드가 뛰어나다고는 하나 아직 기사도라는 명예에 둘러싸여 있는 철부지로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결투인 데다가 고드의 간청으로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결투라니. 여기서 시온이 실수로 고드를 죽인다고 해도 시온을 비난할 수도, 가문의 생존을 담보로 한 협정을 깨트릴 수도 없었다.
“그런 자로 보입니까? 내가 봤을 땐 삼세기를 모아도 있을까 말까 한 존재로 보입니다만? 저자의 말이 아버지보다 어이가 없게 들리시겠지만, 신뢰가 있어 보입니다.”
“.........”
아무래도 이곳 법상, 특히 알바의 풍습상 시온이 여기서 고드를 죽인다고 해도 그냥 아들을 하나 더 보라고 말해버린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협정을 깨트린 것이 아니게 된다.
시온의 입장에서는 알바 지역의 대리로 맡기게 될 차기 계승자가 어리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스리기에는 오히려 이쪽이 나았다.
이런 갈등을 눈여겨보고 있던 시온은 사실 별생각은 없었다. 일단 고대의 총람이 고드와의 대전에서 작용을 받을지 받지 않을지가 중요했기에 말이다.
“날 앞에 두고 딴 생각하지 마라!!”
시온을 향해 그의 대검이 떨어졌다. 곧 요란한 소리가 퍼졌다. 시온은 손에 느껴지는 묵직함에 확실히 말에 뼈가 있다고 느껴졌는데 새삼 고드가 계승자치고 지나치게 강한 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택에 감금되어 있던 게 아닙니까?”
“고드의 기사로서의 이름은 거의 없다시피 한데 이건 운이 존나 나쁜 경우군요. 상대가 시온 경만 아니었다면, 기사로서의 명성을 한껏 날렸을 게 분명합니다.”
“네. 근데, 어림도 없네요. 역시 시온 님이네요. 언제 또 검술을 저런 경지까지 다루게 되신 걸까요?”
“어쩌면 저리 완벽하실까-”
아무래도 이번의 거대한 일정엔 단순한 원정이 아니라 그대로 알바의 권력이 시온에게 넘어간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서부 동부의 봉신 귀족과 그런 귀족의 딸들을 포함해서 상당히 많은 귀족 여자가 이 결투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처음엔 훤칠하고 시원하게 생긴 고드에게 관심을 뒀다가도 이내 그럼 그렇지 라며 시온을 잠시라도 보기 위해서 갖은 노력에 노력을 다했다.
조금이라도 눈에 더 익혀야 나중에 누군가에게 시온 왕의 결투를 직접 봤다고 입을 놀릴 수 있을 거였다.
시온이 인지를 했든 하지 않았든 시온은 이미 세계에서 유명인사였다. 특히 제국에서의 인기는 황제를 능가했다.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각종 사교모임은 거의 다 중요한 편이지만 은밀함과 인기의 척도를 잴 수 있는 모임은 귀부인들이 운영하는 사교모임이었다.
샬롱에 초대를 하고, 거기엔 각종 유명인사와 마법사들 그리고 아름다운 그림과 조각품 진귀한 물건들을 감평하며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위치를 확인한다.
이 중에서도 특급으로 모시는 인물이 세계에서 중요한 사건을 경험한 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의 이야깃거리가 제일 중요했다.
그런 이야깃거리 중에서도 가장 최고의 예우를 받는 것이 바로 시온에 대한 이야기였다.
시온을 그냥 보기만 했어도 많은 귀부인과 그녀들의 딸들에게 부러움을 받는다.
“하하하하... 이 정도 벽이 높다고?”
고드는 있는 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온은 강체술을 적용하지 않고 일부러 육체와 비술만으로 고드를 상대하고 있었다.
크게 요란한 소리가 한 번 더 일어나고 시온은 고대의 총람을 확인했다.
‘모자란다는 말이지.’
아마, 강체술까지 적용을 해야 할 듯싶은 모양. 그러면 좀 고민이 된다. 비술의 특성상, 고드의 성격상 진짜 피를 볼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적용해야겠다는 마음이 든 시온은 강체술을 적용했다. 순간 고드의 얼굴에 절망감이 실릴 정도였다.
“아니- 아니야. 나와 이 정도 차이가 난단....”
고드의 얼굴에 시온의 주먹이 박혔다.
“음?”
시온도 순간 놀랐을 정도다. 애초에 몇 가지는 직접 제어하는 편이긴 하지만 요즘 들어서 행동각인비술에 이렇게 두 가지를 섞어보는 것도 시도 중이긴 했다.
제압을 위해서 검술과 맨손기술을 섞어 놓는 것이다.
그 엄청난 힘에 다리가 풀리는 지 고드가 흔들거렸고 이어서 시온이 바로 검을 후려쳤다.
검도 날아가고 흉부에 검면으로 맞은 고드가 허수아비처럼 육중하게 먼지를 일으키며 쓰러졌다.
“앗!- 아- 저런 식의 여유라니??!”
“못 일어나나요??”
“아, 잠시 눈 비비는 사이에 무슨 일이.”
“딱 맞췄어. 시온 님이 압도적으로 이길 거라고 했잖아.”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기사들은 기사들대로 아주 눈이 뒤집혔다.
“검을 연습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대체 언제 저런 수준까지 되신 것인지? 아는 사람 있나?”
“예전에 어떤 무기든 극한이 되면 다른 무기도 쉽다는 얘기를 수도사들한테 들어본 것 같던데.”
“그건 그냥 말뿐이지. 손에 안 익으면 저런 솜씨가 어떻게 나와.”
물론 뛰어오는 자도 있었다.
“아들아!! 시온 대왕님 안 됩니다! 협정엔 반드시 고드의 목숨이 있어야 합니다!!”
“?”
그냥 한 대 쳐서 기절시켜놨는데 무슨 악당을 만들어 놨다. 시온이 황당해서 입을 열었다.
“숨 잘 쉬고 있다. 적당한 수준으로 해놨으니까.”
“비키세요! 이반 님!”
“약간 그거 말고! 세 번째 포션. 얼음이랑 들것도.”
준비 잘해놔서 카롤리나의 제자들이 뛰어와서 바로 고드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반이 잠시 넋을 놓고 보다가 얼굴이 빨개졌다.
추태도 이런 추태가 없었다. 속마음을 들킨 거나 다름이 없었다.
“시온 왕께서 그렇게 신경을 써줬는데 저렇게 말을 하나?”
“원래 이반 대왕이 성격이 꼬장한걸로 유명하잖아.”
“역시나 시온 님은 상관없다는 투시네. 명예로워.”
아주 자기들끼리 멋대로 해석을 더 해갔다. 시온이 잠시 얼굴이 굳은 것은 고대의 총람 때문이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이러면 일부러 위험한 곳에라도 뛰어들어봐야겠는데.’
다섯 개의 무기술을 모두 얻고야 말겠다고 시온은 생각했다.
ㆍㆍㆍ
철혈의 가도라고 불리는 대관문으로 가는 길. 이곳이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까닭은 길 자체가 험한 것에다가 날씨도 까다롭고 중간에 식량 보급소를 반드시 들려야 했기에 그랬다.
이런 와중에 대관문에서 보낸 보병이 양쪽에서 화살과 마법을 던지면 그야말로 피바람이 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극히 평화로운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사실 들어올 때는 혹시?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역시나 그런 일은 없었다.
“어렵다. 어려워. 시온 니벨룽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뭘 해야 하는지. 내가 만나 본 자 중에 가장 답이 없는 자야.”
이반의 고민은 끝도 없이 늘어나고 있었다.
“내가 봤을 땐 그는 거인입니다. 역사에 설 거인이죠. 그러니 후대에 우리를 비웃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흐흐흐. 어쩌면 이것이 더 좋은 기회가 될 지도.”
“무슨 뜻이냐?”
“제국의 정벌에 대한 부푼 꿈을 가진 것도 맞지만 동시에 다른 꿈도 하나 있었죠. 왕으로서 계승자로선 도저히 달성하는 꿈. 후. 제 기사로서의 검 말입니다. 거대한 자야. 정말로.”
“이 녀석아. 네 꿈은 가문을 잇는 것에 집중해야지. 무슨 기사로서의-”
이반의 얼굴이 붉어졌으나 고드는 퉁퉁 부은 얼굴을 굳힌 채 자신의 검을 닦는 일을 묵묵히 할 뿐이었다.
대관문의 파괴 흔적은 역력했다. 남쪽과 서쪽의 일 성벽이 제대로 무너져 있었고 그 유명한 독수리 석상을 달고 있는 관문의 문짝은 한쪽이 뜯겼고 독수리 석상도 바닥에 처박혀 머리가 없었다.
양쪽 해자에는 여전히 많은 물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무너진 석 벽돌 때문에 고여서 썩어버린 곳도 눈에 보일 정도.
안에는 정말로 간소한 보병 백 명 정도와 시온을 맞이하기 위해서 나온 알바 대국의 귀네드 공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삼만 명의 정예 보병과 삼천여 명의 기사들. 여기에 귀족들이 데려온 자신의 가문 구성원과 하인들로 거센 인파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미 제 역학을 하지 못하는 관문이지. 그런데 흠. 저자가 시온 니벨룽이구나.”
귀네드 공작은 시온을 바로 알아봤다. 시온은 가장 앞에서 말을 타고 가고 있었고 여러 명의 사람과 대화 중이었다.
“대담한-”
“복장이 상당히 복잡하군요. 절대로 왕이라고 보기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사도 아니지.”
“아마 저 마석들의 이면에는 대마법사의 지식과 룬의 비술들이 가득하겠지요.”
시온이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 알바 대국의 이인자라고 일컬어지는 귀네드 공작을 보게 되었다.
그는 일즈 왕의 차남이기도 해서 그가 여기에 왔다는 것은 일즈 왕이 알블린에서 시온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시온 니벨룽 님은 저의 견해를 넓혀주었습니다.”
정말로 귀족답게 생긴 남자가 그렇게 예우를 갖추며 시온에게 말을 꺼냈다.
“반갑군. 귀네드 공작. 자네가 여기 있는 것을 보니 자네 아버지인 일드 왕은 견해가 다르지 않을 것 같군. 맞나?”
“그렇습니다. 저희 가문은 오랫동안 부르스 가문을 모셨고, 그리고 새로운 분과 그 가문을 모시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음.”
시온이 귀네드 공작에게 이것저것 묻고 있는 와중 이곳을 발견한 귀족들은 모두 입이 떡 벌어져 있었다.
제국의 백만 보병도 막아낸 역사가 있는 관문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때의 맹공격으로도 대관문이 이렇게 무너졌던 일례가 없었다.
“내가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보는구나.”
“시온 경이 했다더군요. 코르도바 장군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약간. 이상한 느낌 아닙니까? 거인이 공격한 것 같은....일관적인 흔적입니다.”
거인의 몽둥이 맞아 으깨졌다고 보는 편이 맞아 보였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바로 자신들이 모시는 주군이라는 부푼 감정이 맴돌았다.
“뭐야. 뭐야. 시온 님이 낯선 귀족이랑 얘기하는데?”
“아마도, 귀네드 공작이야. 그 노르텐 성의 상속자.”
“그 아름답기로 유명한 성 말이야?”
여자 귀족들은 관문이 부서졌든지 말든지 시온과 귀네드 공작을 훔쳐 보느라 정신이 없고 무슨 말을 나누는지 상사병이라도 걸린 것 같았다.
대관문에서 그렇게 이틀을 쉬고 바로 알블린으로 향해 귀네드 공작의 안내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온은 바위 띠 산맥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바위 띠 산맥을 돌아야 했다는 것을 빼고는 정말로 잘 다듬어진 도로였다. 얼마나 빼어나냐면 만약 대관문에서 공성전이 벌어졌다면 적어도 그곳에서 식량과 무기가 부족할 일이 없을 정도였다.
중간에 보이는 간이 창고와 임시 대장간도 많았고, 그리고 이 중심 가도를 따라 다양한 남작령과 백작령으로 길이 터졌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알블린은 여전히 시온의 가슴을 뛰게 했다. 어쨌든 이들에게 권력을 돌려준다고 해도 알블린이라는 거대 도시는 시온의 직할령으로 남기 때문이었다.
시온은 코논과 벤츨에게 알블린과 서부 지역을 관통시켜 사보이를 잇는 거대한 육로를 만들라고 지시를 해놨다.
이런 대규모 일의 작업 규모라고 한다면 적어도 오십 년은 꼬박 걸릴 일이었다. 물론 사람이 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