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0화 (230/304)

제국으로 가는 길(4)

“그 카드의 그림은 나를 뜻하는 건가?”

“원래라면 더 거창하겠지요.”

“내가 하기 싫다면?”

“글쎄요. 제 경험엔 그것과 싸우셔야 할 지도요.”

“.........”

“한 일주일 정도 저희도 논의를 계속했습니다. 물론 짐작하신 대로 브아송 공작은 동방 제국에 호의적인 자입니다. 시온 님도 저희가 점점 좋아지실 겁니다.”

“그렇다면 내 생각이 맞는군. 너희는 나와 친해지고자 하고, 그것은 우리끼리의 얘기가 되는 건가?”

“그렇지요. 제위를 노리는 자들의 싸움에 모두가 힘을 낼 필요는 없어요. 저희는 저희끼리 힘을 아낄 필요가 있죠.”

“그럼 동방 제국의 황제는 나를 원하는 것은 아닌 건가.”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이 당연하시죠. 그렇기도 합니다만, 모든 일정은 그것에 맞춰져 있습니다만.”

즉, 베다는 동방 황제의 명을 받고서 이곳에 왔지만 동시에 자기 가문과 관련된 협정을 시온과 맺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치가 좋군? 나는 어차피 동방 제국에 붙어서 양방 전쟁을 해야 한다면 거절할 셈이었으니. 아마도 너희는 나에게 곧 쫓겨나게 될 예정이었지.”

“그렇게 보였으니까. 이런 제안을 다시 드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솔직한 것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베다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기야 동방 제국이 침공을 시작한다 해도 형식적인 싸움으로 간을 먼저 보기 마련이었다.

가장 유명한 도시를 공격하고 그 거점을 지킬 수 있는지 없는지, 적어도 그곳엔 시온의 영토가 없었다.

그러나 흔히 그렇듯 다른 봉신들은 서로 영지를 밥 먹듯이 들어가 약탈을 하고 초토화하기 마련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 흐름을 지금 잡아내기 위해서였고.

‘에슬린의 말이 맞았군. 나와 근접해 있는 여러 베일릭들이 공포에 떨고 있다는 말이.’

지금 제국에서 가장 유격전에 뛰어난 자로 평가받는 것이 시온이었다. 제한 없는 약탈전에서 시온이 얼마만큼 활약을 보여줄지는 아무도 몰랐다.

‘베다, 그리고 야부타. 이들이 원하는 것은 나와의 비밀 불가침에 대한 것이고.’

이렇게 더듬더듬 얘기를 진행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만큼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었다. 저쪽이나 이쪽이나 둘 다 권역 봉신인 점인지라, 눈과 귀가 많아 흔히 말하는 정치적 숙청이 이뤄질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불가침 조약을 나와 맺는다. 그건 서로 위험이 있을 때의 얘기이지. 내가 동방의 베일릭을 두려워할 이유가 있다고 보나?”

물론, 시온도 사실 신경이 쓰이긴 했다. 주 전투에 시온이 불려 나갈 것은 당연한 일이고 남은 지역을 방어하라고 지시를 해둬도 많은 피가 흐르게 될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아닌 척을 해줘야 하는 것이 이곳에서 살아남는 생존법이었다.

베다가 아주 긴장된 얼굴로 시온을 올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곡해가 약간 있었군요. 저희가 계속 상당한 금품과 그에 준하는 것을 시온 님에게 바칠 겁니다.”

“음?”

“설마 이렇게까지 얘기가 풀릴 줄은 몰랐습니다. 여기 보셔야 할 내용이 적힌 서신입니다. 그... 논의된 내용이고 베일릭들의 서명이 보이실 겁니다. 정식적인 문서는 얘기되면 준비를 하겠습니다.”

몇 개의 전서가 그녀의 품에서 나왔다. 당연히 누군가 이것을 가져가려고 했다간 한바탕 피가 흐를지도 모르는 내용이 있었다.

동방 제국을 모시는 봉신들이 황제 몰래 시온과 따로 협정한다는 내용도 있지만, 체면이 걸릴 만한 조건이 들어가 있었다.

조공 목록도 제법 있었지만, 더욱 놀란 건 조세의 이 할을 내주겠다는 거였다.

물론, 전쟁이 터졌을 때와 여러 논의 기간에 한정돼 있긴 하지만. 지나치게 많았다.

그만큼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뜻일 거였다. 위명을 쌓다 보면 이렇게 손쉽게 따라오는 것이 있었는데 이번에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였다.

‘단순한 얘기는 아니지. 조세의 이 할을 내주겠다는 것은 베일릭에서 그 조세 대신에 다른 것을 부탁해도 그것을 들어주겠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말이야.’

그 정도로 이곳에서 조세를 조공으로 내주겠다는 것은 협정 중에 가장 자존심과 직결된 내용이었다.

일부로 원수에게 이러한 조약을 강제로 맺게 하고 그것을 공표하는 일도 종종 있을 정도였다.

“흥미로운 조건이군. 일단 나는 괜찮아 보이는데. 다만, 내 사람들과 논의를 해보긴 해야겠다. 만약 결렬된다면.”

“당연히 저는 그냥 동방에서 온 점쟁이일 뿐이고 이들은 비단과 진주를 팔기 위해 브아송에 온 자들일 뿐입니다. 저로선 답답한 결정이겠지만, 그것뿐이지요.”

“걸 말한 것이 있나? 내가 그런 말을 다 믿을 줄 알면.”

“야부타는 쾨프 가문의 장남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제국의 재상인 사드라잠입니다.”

“?”

재상직은 바로 황제 밑에서 나라의 반 이상을 행정 하는 자리였다. 더럽게 높은 위치였고 시온보다도 높다고 할 수 있었다.

제국으로 비유하자면 제국엔 핸드직이 있는데 이 핸드직은 거의 황제의 방계 가문이 독점하곤 했다.

시온 같은 경우는 현재 패권을 가지게 됐으나 그런 재상직에 오를 순 없었다. 저런 위치는 그냥 나라의 법으로 고귀한 가문밖에는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나보고 그걸 믿으라고?”

그러니 쾨프 가문은 당연히 시온의 영토만큼이나 자리를 잡고 있는 대영주란 것이었고 그의 아들인 장남은 자연스럽게 제국처럼 중요하게 다뤄질 거였다.

그런 장남을 이런 변장을 시키고 한 번도 만난 적도 없고 이곳에서 변심해 죽여버릴 수도 있는 그런 자리에 보냈다는 것은 일견 이해하기 어려웠다.

“처음엔 반대가 많았죠. 그러나 시온 경. 시온 경은 모르시는군요. 지금 시온 경이 동방 제국에서 얼마나 이름이 드높으신지. 그리고 그 얼굴을 한 번 보는 게 얼마나 귀한 경험인지 말이죠.”

“나를 봐서 뭐하게. 그냥 평범한 사람인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진 않겠죠?”

“아니 정말인데.”

“.......”

어차피 이 귀한 신분에 대한 정보를 직접 입으로 들었으니 거짓인지 아닌지는 에슬린과 마리온 코르도바에게 지시해 두면 됐다. 셋 다 각기 뛰어난 첩보원들을 가지고 있으니 교차 검증을 해보면 될 터였다.

‘은근히 이쪽에 금화가 많이 들어간단 말이지. 좀 더 인원에 대한 규모를 늘려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올라갈수록 전투에 나설 용맹한 기사와 군기가 잡힌 보병대 말고도 많은 밑 작업을 하는 자들이 필요함을 느꼈다.

스스로가 가진 비밀도 불리한 건 막아야 했으니 그런 차원에서도 필요했다.

‘내가 강하다 한들 내가 이긴다 해도 다른 쪽에서 지면 피해가 막심해지니. 갈수록 정보들이 중요해지는군.’

이런저런 생각을 시온이 하는 도중 베다가 어떤 결정을 하려는 지 고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 내용을 보니 동맹에 대한 증거로 여식을 첩으로 주겠다던데. 이 부분은....”

시온은 어지간하면 거절할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곳은 이런 방식이 아니면 동맹으로 인정하지 않는 관습이 심했다.

“진짜여요. 그리고 그 대상은... 바로 저여요.”

순간 시온은 이 이국의 여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잠시 못 알아들었다.

“네가 그, 첩으로 나에게 바쳐질 여자란 말이냐?”

“예. 야부타는 제 오라버니입니다.”

“......그러면 너도 쾨프 가문이겠군.”

“그러니까 이 제안을 받아들이셨으니 저도 가지시게 되는 거여요.”

“쾨프 가문의 어린 여식을 첩으로 받아들이라니. 상식적으로 내 가문이 너무 낮지 않나.”

쾨프 가문이면 정실 자리를 요구할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돌아갔다.

“니벨룽 가문은 아직은 미약하지요. 하지만 시온 님이라면 얘기가 달라요.”

“.......”

“전 시온 님이 마음에 들어요. 정실 자리가 아니라고 해도요. 그리고 듣자하니 하렘을 가지실 거라고 하던걸요?”

“그 얘기는 어디서 들었나.”

“에슬린이 동방 제국의 하렘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세하게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리고 방금 시온 님의 반응을 보고 알았죠. 아, 이걸 제도적으로 도입하시려고 하는구나.”

점쟁이라 그런지 눈치가 보통 이상이었다. 사실 시온도 베다가 싫지는 않았다. 나이도 무척 어렸고 얼굴도 예쁘고 다만 이국인이라는 건 인지를 해둬야 했다.

관습도 풍습도 어느 정도는 다를 것이고 그것이 장차 지금 다스리게 되는 영지에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해서 고려를 해봐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 하렘의 첫 번째에 제가 되는 영광이 되고 싶어요.”

“흠...”

세상이 달라서 그런지 이곳의 여자들은 이런 것에 익숙했다. 제국인만 해도 귀족들은 기본 첩이 네 명에 따로 비밀리에 더 두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특수 지역인 알바나 동방 같은 곳에는 시온 같이 거대한 작위를 얻은 자가 하렘을 가진다는 것에 오히려 호의적이고 더 남자답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무래도 첩이든 하렘이든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가문의 생존과 위상이 걸려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그런 관습이 뿌리 깊게 여자들 머릿속에 들어가 있었다.

‘아 맞아. 이랬었지...’

시온도 예전에 첩들이 오히려 그것을 당연하게 알고 오히려 늘리게 하려고 자신의 남편을 재촉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수가 딸리면 귀족모임에서도 지위가 약하고 약점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아. 제국인 인지라 하렘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으시긴 한가 보군요. 대충 알 것도 같아요. 시온 경은 위대한 기사이니까요. 그러면 이 안건은 지금 고려 중이겠군요. 알바가 예외적으로 하렘을 운용하는 곳이니 시온 님께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셔야 할 처지시고, 현재 가문을 열고 계시니 니벨룽 가문의 혈족을 늘리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머리가 상당히 좋아 보였다. 어쩌면 이런 쪽으로는 마리온보다 나을지도...

“쾨프 가문은 남부 베일릭을 모두 쥐고 있는 대가문이고 아버지는 현재 재상직을 수행 중이시며, 저희 가문은 총 여섯 번의 재상직을 수임한 전적이 있는 가문입니다. 제가 첩으로 들어가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여요.”

“당연히 없기야 하지.”

당연히 없었다. 그 정도로 대가문인데 무슨 첩이란 말인가.

그렇게 밤중의 승마에서 돌아온 시온은 바로 에슬린, 코르도바를 불렀다.

“그것참. 상상을 깨는 신분들이군요. 쾨프 가문이라니. 쾨프 가문은 저희가 가진 지역보다 넓은 지역에 힘을 가진 가문입니다. 진짜 이 제안은 좋습니다. 좋긴 한데.”

코르도바가 듣자마자 운을 뗐다. 베일릭 자체가 시온이 확보한 지역처럼 강력한 왕권을 위시한 작위로 돌아가지는 않고 연합된 공화제 형식을 띄웠다. 쾨프 가문은 그 당선이 될 가능성이 항상 큰 유력 가문이라는 뜻.

다만 말꼬리를 흘린 건 역시 시온이 처한 상황 때문이었다. 제국의 봉신이라는 점. 그리고 황제의 기사라는 점이다.

당연히 이 일은 비밀로 해야 했고, 결혼식도 가급적은 숨겨야 했다. 해도 나중에 다시 하는 식으로 해야 하는 편이 좋았다.

에슬린이 황당한지 웃었다.

“직감이 오는 게 있긴 했는데 설마 진짜였군. 당연히 해야 하죠. 안 그래도 이쪽으로 일을 추진할까 했는데. 조세의 이 할을 떼준다는 제안은 앞으로 운명을 함께하고 싶다는 겁니다. 동방의 황제가 다시 없을 절정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하죠. 그러니 봉신들이 위험을 느끼는 거겠죠. 언제든지 작위를 뺏어갈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와?”

“다른 방법도 있지만 그만큼 동방 제국에서도 시온 경의 명성이 자자하다는 뜻인 겁니다. 강력한 자구책으로 시온 님과의 결합을 노렸으니 말이죠.”

찻잔을 한 번 마신 에슬린이 다시 빠르게 말을 이었다.

“쾨프 가문이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입니까? 제가 봤을 땐 전혀 아닙니다.”

“첩으로 들이는 것 말고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이런 제국 밖의 이방인들과의 동맹은 절대로 피와 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저도 여기엔 동의합니다. 사실 이번에 하렘 건이 제국에서 잘 떨어지게 되면 서부의 대가문들에게서도 여식을 하나씩 받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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