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4화 (234/304)

벨저의 저택

극한의 긴장감도 잠시 벨저가 본격적으로 달려들면서 끝이 났다. 수준이 올라간 시온은 조금 전과는 달리 벨저의 공격을 간단하게 받아내기 시작했다.

그 파장만으로도 난리가 날 지경. 보고 있던 벨저의 제자들이 진귀한 음식이라도 앞둔 것처럼 봤다.

그리고 수준 차이가 난다는 것이 바로 극명하게 드러났다. 시온이 하려는 것은 거의 수비적이었지만 아까와 같은 느낌은 없었다.

열렬히 검과 검이 부딪히고 있었고 제자들은 감탄하고 있었지만 벨저는 이미 패배를 직감했다.

‘생애에 이런 위치에 처해본 적이 있던가.’

벨저가 순간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시온의 실력은 독보적이었다. 그가 알고 있던 그 누구를 대입해도 여러 명을 놓아도 시온을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순간 침을 삼킬 정도였다.

그리고 시온이 공세를 취한지 이십 번을 넘기지 못하고 시온의 일격에 그가 뒤로 날아가 나뒹굴었다.

역시 벨저는 벨저였다. 그 충격을 나름 최소화했다. 어쨌든 그가 일어날 때 시온은 벨저가 그만한 기사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순간 아차 싶을 정도로 강하게 내던진 공격이었는데 그냥 날아가기만 했을 뿐 별다른 부상이 전혀 없었던 거였다.

하지만 그랬다고 해서 이 승부를 되돌릴 수 있거나 영향을 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대체 이 기술과 여기에 서려 있는 힘이 뭔가?”

“그 전에 한가지는 확실히 답변을 해주셔야지요.”

기침을 하던 벨저가 곧 답변을 내놓았다.

“그것이 탐이나 시도를 해보았건만 원래 존재하지 않던 것이니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벨저의 말은 그것이 정확히 강체술인지 아니면 비검술인지 의문은 있었지만, 어쨌든 패배를 승인한 것으로 보였다.

원래라면 상대를 나중에 기습, 납치, 암살해서라도 원하는 것을 얻어가려고 하는 것이 이곳이지만 벨저는 그런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제자 녀석들이라면 모를까.

그런데 제자들도 그럴 생각 자체를 떠올리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저 시온에 대해 방금 벌어진 일에 대해 감탄하고 압도당했을 뿐이었다.

“원하시는 것이 강체술입니까? 비검술입니까.”

시온이 운을 떼자 그가 말을 가렸다.

“둘 다로군요. 그러니까 저에게 이런 정식 결투를 걸으셨던 거겠지요. 한가지 말씀드리자면 일단은 둘 다 안 됩니다.”

“그렇지. 그럴 것 같으니 나도 대담하게 그런 조건을 건 것이야..”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약효가 빠지지 않아 젊었다. 시온은 그게 참 신기할 노릇이었다.

“강체술이라면 따로 조건을 걸고 벨저 공만 기본만 알려드릴 순 있습니다.”

“???”

벨저가 낙담해 있다가 시온의 말을 듣고 대체 무슨 말인가 하고 눈을 크게 떴다.

“말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일단은 둘 다 안된다고 언질은 해두겠습니다.”

강체술의 기본 형태는 가르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강체술도 경지가 많았고 그 단계에 대해서는 사실 알려진 것이 없었다.

에릭이나 코르도바한테도 기본 형태를 알려줘서 하나씩 검증하고 있는 판이었다.

시온이 익힌 강체술은 좀 더 비범한 방식이었기에 일반적인 형태는 아니었다.

‘벨저를 내 편으로 만든다면 황제를 등지고 나에게 붙을 수만 있다면 강체술을 가르쳐도 상관이 없지.’

어떻게 보면 시온으로서로 처음에 이 결투를 지면 안 되는 이유에 포함되는 거였다. 결투에 졌다면 그에게 그냥 이것을 가르쳐줬어야 했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본인이 익히고 본래의 의무대로 제국의 기사들을 무장시켰을 거였다.

하지만 이건 똑같은 짓이라고 해도 정 반대의 효과가 있고 올 수 있었다.

이를테면 빚이나 은혜 같은 개념으로 넘겨주는 게 된다.

“나로선 그 말의 의미가 정확히는 이해가 잘되지 않는구나. 그 조건이라는 건?”

벨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간절한 모양이었다. 그는 죽기 전에 좀 더 강렬한 무언가와 만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황이었다.

“엠페러 가드 단장직을 유지하시고 저와 군사 동맹을 맺는 것입니다.”

“시온. 너 그게 무슨 뜻인 줄은 알고 하는 소린 게냐? 설마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가?”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하지만 기사로서 결투에 대한 대가로 어떤 것이든 해주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허어. 하지만 이런 것일 줄은....”

엠페러가드의 단장직의 역할은 딱 하나였다. 황제의 친위 기사들을 지휘해 황제를 보호하는 거였다. 그런 엄중한 임무엔 황제의 부인과 딸도 포함된다.

그래서 꼭 정해진 건 아니었지만, 결혼하지 않으면 좀 더 명예로운 기사로 봤고 차기 단장은 거의 그런 자였다.

물론 시온도 두근거리면서 봤다. 여기서 없던 것으로 하고 격노하면서 시온에게 다시 검을 겨눠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시온의 생각엔 이 제안이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다름 아닌 검에 미쳐있는 벨저였기에 강체술을 미끼로 건다면 충분히 이 결투의 결과까지 포함해서 될 수도 있었다.

“말을 마저 드려야겠군요. 지금 제 상황에 대해서 그렇게 아무렇게나 다닐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벨저 공도 알고 계실 겁니다. 제 마법사들이 밝혀낸 정보와 알바의 대왕인 이반에게서 황제가 나를 치려고 한다는 기밀을 얻었습니다.”

시온은 이 말을 하면서도 벨저의 얼굴을 유심히 지켜봤다. 벨저가 이에 대해 알고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여부. 시온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엠페러가드의 단장은 제후 회의뿐만 아니라 황제와 밀접한 얘기를 직간접적으로 얻었다.

“그... 뭐랄까. 참. 어쩔 수 없군. 어느 정도는 사실이야. 제국은 예나 지금이나 혼란스럽지.”

“그러면 제 말의 뜻을 이해하시겠군요. 저는 일단은 저를 보호하기 위한 측면에서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 힘이 필요하다? 어느 정도는 나를 유도한 건가?”

벨저가 진지하게 물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이미지와 다른 면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는 이제 곧 드러날 거였다.

“제후가 될 만하군. 기사의 정신으로는 유지하기 어려운 자리야. 그간의 전투가 자네를 담금질한 모양인가. 때로는 그런 쪽으로 발전하는 자들도 있지.”

엠페러가드의 기사단장이자 기사수도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벨저가 붙는다면 제국 내의 기사의 상당수를 챙겨가는 게 된다.

‘일단 이 정도만 해둬도 넘어오기만 한다면 좀 더 다음 단계는 천천히 진행하면 되니까.’

강한 동맹의 분위기만 나도 황제와 제후들의 행동반경의 폭이 줄어들기 마련이고 주도권을 잡기도 수월했다.

여전히 제국은 강력한 세력이었고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시온의 생각이었다.

“확답을 주십시오.”

“친족인가. 아니면 명예인가.”

벨저가 말을 끌었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강체술을 눈으로 확인한 이상 이미 마음이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게다가 서약끼리 충돌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엠페러가드의 단장으로서 황제 외 다른 동맹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거였고 그에 관련한 서약과 맹세를 한다. 그런데 결투의 대가라는 것도 제국의 기사로서 지키지 아니하기는 어려운 거였다.

“끄응. 어렵군.”

“단순히 저와 동맹을 맺는 것이 아닙니다. 벨저 공이 하시려는 것은 제국의 균형을 위한 것입니다.”

균형과 안정 분명히 이것에 관련된 것도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이게 결정적인 모양이었다.

“알았네. 그러면...”

“강체술은 벨저 공 본인만 연마하십시오. 누군가에게 알려주지 않고. 맹세하셔야 합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절차와 함께 그의 제자들이 공증을 서고 맹세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드셨던 강화단약 남았습니까?”

“그것도 원하나?”

“예. 제가 굳이 가지려는 것은 아니고 상당히 흥미롭더군요. 좀 분석을 하고 싶습니다.”

“이런 것도 할 줄 알았나???”

“처음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원래 마법사입니다. 이번 사건들로 마법 쪽에도 조예가 깊어졌습니다.”

벨저의 제자들도 시끄러웠다.

“그러고 보니 시온 경이 대마법사라는 소문이...”

“아, 그런 것도 있긴 했지.”

“그러면 그 불가사의한 검술도 이해가 되지 않나.”

강체술에 대한 것은 벨저와 따로 이야기한 것이라 제자들은 여전히 그것에 대해선 몰랐다. 단지 시온이 자신들의 스승을 동맹으로 만드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흠. 자 여기 받게.”

“몇 개나 있으십니까?”

“세 개 남았지.”

시온은 기묘한 빛이 도는 강화단약을 받고선 바로 실전된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혼자선 안 될 것 같고. 카롤리나에게 맡겨둘까.’

카롤리나는 포션 제작에도 뛰어나지만, 정수 쪽에서도 일가견이 있었다. 다만 그녀에게 정수 작업을 맡기지 않은 것은 시온도 그쪽 작업에 대해서 숨겨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잠깐 근데 순간 나이를 되찾는 이 용도만 생각해도 양산만 가능하면....’

여자 귀부인들에게 팔면 떼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을 소화해내려면 따로 마나를 다룰 줄 알아야 하고 그만한 마나도 있어야 하지만...

시온은 바로 해답을 찾았다. 마나를 가두는 법을 가지고 있으니 따로 그것까지 제작해서 팔면 됐다. 유효시간이야 벨저 공이 말한 바대로 여섯 시간이니 이 정도는 안 되겠지만, 여자의 단련되지 않은 육체와 적응력을 살펴서라도 한 시간 정도는 어떻게든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된다면 말이지...’

일 년? 이 년? 시온은 좀 길게 보고 있었다. 일을 맡겨두고 시온도 연구도 해야 하고 관련 유적도 알아봐서 털어야 하고...

“대단한 물건이군요. 만들 수만 있다면. 그런데 어디 유적에서 얻으신 겁니까?”

“북방 정벌에서 얻었던 것인데. 유적지 자체는 파괴되어 버렸네. 엄청난 눈사태가 왔었는데 그 힘 때문인지 나중에 찾아보니까 감쪽같이 사라졌어.”

벨저가 말하는 북부는 유목제국이 아닌 좀 더 골치 아픈 지형을 가지고 있는 서북부 지대로 사슴 신을 모시는 문화적으로 낙후된 나라와 부족이 복잡하게 퍼져있는 곳이었다.

“나중에 한 번 가봐야겠군요.”

“그런데 이것도 자네한테 가능한지는 모르겠군. 나를 따라오겠나? 그것과 관련된 것을 저택에 보관하고 있어.”

벨저의 저택의 규모는 대단했다. 제자들의 입이 가벼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시온의 실력을 맛본 이들은 자신들이 입었던 부상에 대해서 밝힐지 말지도 시온에게 물어봤던 거였다.

시온은 이 정도는 허락했다. 중요한 것은 말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말이다.

애초에 팔다리가 부러질 일이 없는 자들인데 반이 그렇게 돼버렸으니 자기들끼리 그런 일을 벌였다고 하기에도 어색한 구석이 있었다.

저택 안에서 기다리다가 벨저가 안내한 곳으로 갔다.

“전공으로 받은 저택이긴 한데 영 내 취향은 아니야. 나는 불편해서 팔려고 했는데 디드리히가 격정을 하는 바람에.”

그 정도로 넓은 저택은 무서울 정도로 깔끔했다. 그 흔한 기사 석상도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벨저가 안내한 방 안에는 여러 가지가 무질서하게 놓여 있었다.

“........이 비싼 것들을 이렇게 아무렇게나 놓으셨습니까?”

“뭐 어떤가? 허허. 자네에게 보여주려고 한 것이 바로 이거야. 이 방에 있던 것은 거의 그때 그 유적에서 나온 것인데.”

그가 오래된 서적과 양피지 하나를 찾아서 시온에게 줬다. 시온은 재빠르게 읽었으나 보조적인 내용에 가까웠다.

하지만 큰 소득이었고, 적어도 이 단서만으로도 이 강화단약의 제작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거였다.

그렇게 벨저에게 감사를 드리려고 하는데 시온의 눈에 바닥에 굴러다니는 녹색 반지가 보였다.

저건 분명히 시온이 가지고 있던 녹반지와 비슷한 형태였다. 재빨리 그것을 들어 올린 시온이 말했다.

“이건???”

“뭐지 그건? 그때 물건을 싹 쓸어오긴 했는데 몇 개 말고는 잘 몰라....”

“이것도 주실 수 있습니까?”

“마음에 드나? 어차피 쓸데없는 마법이나 걸려 있을 것 같은데 가지게. 나는 필요가 없어.”

시온은 먼지를 닦아내고 확인을 했다. 같은 형태에 문장만 다른 것으로 분명히 다양한 단약의 레시피를 가지고 있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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