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7화 (237/304)

비밀 모임

황제는 욕심이 많은 만큼 바쁘다. 디드리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바쁠수록 그만큼 그만큼 실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일부러 시간을 끄는군요. 그리고 경고도 함께입니다.”

“얌전히 기다리라는 뜻인가?”

“그렇죠.”

흔히 말해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시온을 압박하려는 방법이었다. 물론 에슬린의 설명에 그렇다는 거였다.

하지만 시온도 별다른 이견은 없었다.

벨저와 나름 비밀리 만나고 있었는데 두 번의 공식적인 만남이 벌써 황제를 불안하게 하는 모양이었다.

예를 들면 벨저의 모든 제자가 팔다리가 부러졌다던가 그런 공식적인 정보를 기반으로 각 밀정이 치열하게 원인과 결과와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솔직히 버거울 정도입니다. 막을 수 있는 건 최대한 막고는 있는데, 인원이 모자랍니다.”

“그러면 비약에 관한 것도?”

“새어나갔다고 봐야죠.”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바였다. 차라리 이렇게 되면 선제후와 거래를 하는 편이 나을 거였다.

바로 제국 회의 비슷한 느낌으로 황제를 만날 것이고 여기에 통과시켜야 할 안건들이 상당히 있었다. 제국법에 따라서 당연히 선제후들의 의견이 중요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고, 이왕이면 이들과 동맹을 맺으면 좋을 거였다.

경고한다는 것은 시온을 압박하겠다는 뜻이기도 했고 벨저를 확실하게 얻었지만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마리온이 하던 작업은?”

“마리온을 불러오겠습니다.”

곧 도착한 마리온은 날이 갈수록 초췌한 모습이었다.

“하. 죄송합니다. 요새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어서. 샬롱 때문에 부르셨다고요. 선제후들의 부인과 연락이 닿고 호의를 얻는 데는 성공하긴 했습니다. 다들 경계심은 많지만 아무래도 시온님이니까요.”

“그것 말인데, 그냥 그들과 나를 직접 연결해줄 수 있나?”

“샬롱에 나오신다고요?”

샬롱은 여자들의 전유물이었다. 많은 거래가 좌지우지되는 편이었지만 이런 일에 남자들이 끼어드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안 될 게 있나?”

“아니 좀.. 그렇습니다. 차라리 제가 대리로 나서겠습니다.”

“황제가 하지 말라고 황명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만약 하신다고 하면....”

에슬린이 바로 시온이 하려는 일의 문제점을 짚었다.

제국 수도 안에서 반란으로 찍히면 곧바로 탈출하기 어려울 정도의 기사와 병력에 둘러싸이게 된다. 알바에 들어갈 때와 다르게 시온은 관례대로 최소한의 인원으로 여기에 들어왔다.

황제는 분명히 자신을 탐색하고 있었고 압박을 주고 있었다. 그로서 제일 좋은 방법은 시온을 여기서 죽이는 것일 터였다.

시온이 확보한 광대한 토지는 형성되지 않은 니벨룽 가문의 구성원에 산산조각이 날 거였고 황제 입장에서는 그것을 받아먹기만 하면 됐다.

‘커질수록 부서지기 쉬운 법인가.’

시온은 이 한 어구를 지금에서야 더 와 닿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의심하기 좋은 인물도 데리고 있고요.”

시온은 새로운 동방 제국의 베이만과의 비밀 협정을 맺어줄 만한 여자와 같이 있었다. 점쟁이라고 소개해놓기는 했지만, 서로가 서로에 비밀을 캐려고 안달이 나 있는 이곳에서 불안 요소인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안건들을 통과시키기 위해선 선제후와의 만남이 무조건 필요하지.”

동맹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번 회의에서 표를 던져줄 정도의 거래를 해야 했다.

그러니 이 반란의 죄를 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한 걸음 움직여야 하는 것이었다.

시온은 잠시 더 고민했다. 이대로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선제후와 접촉을 시도할 것인가.

그리고 결정이 났다. 이번에 얻은 젊음의 비약을 거래 물건으로 놓는다면 과연 거절할 수 있을까?

그런 자도 있기야 하겠지만, 시온은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샬롱을 빌미로 선제후들에게 밑밥을 넣어. 젊음의 비약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면 긴가민가하고 있을 터. 내가 그것을 몇 개 이번 회의에서 내던져줄 거라고.”

ㆍㆍㆍ

“다들 이번에 누가 오는지는 잘 알고 있지?”

“시온 님에게 잘 보일 기회라고 생각하고.”

“저기 선제후 분들이 오시긴 할까요?”

주체하는 쪽도 전혀 감이 오지 않고 있었다. 워낙에 비밀리에 진행되는 일이고 시온이 먼저 떡밥을 던지고 누군가가 받았기에 벌어지는 일이지만 그게 누군지는 그 인물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모를 거였다.

그러니 확실한 건 하나였다. 시온이 온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여자들은 침을 삼켰다. 현재 제국에서 황제보다 인기를 얻고 있는 인물이 바로 시온 니벨룽이었으니까.

“근데 그 비약이라는 게...”

“그건 빌미지.”

“그 전에 함께할 사람을 구하시려는 거야.”

“황제께서 경고를 하셨다는데...”

“그러니까 다들 입 간수를 잘해야 한다는 거야. 그런 각오는 돼 있지? 남편들 한 자리 들어가게 해야 할 것 아니야.”

이들은 각 기사의 부인들이거나 여러 형태의 귀족의 부인들이었다. 즉 더 좋은 자리를,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시온 보다 그 욕구를 채워줄 인물은 이 제국엔 거의 없었다.

하다못해 선제후의 눈에 들어가기만 해도 확 피게 되는 것이다. 비밀에 대한 약속으로 갖가지 보상이 이어지는 건 이곳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누군가가 그것을 누설하고 모조리 가져갈 수도 있다는 두려움도 함께 말이다.

그리고 그건 시온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 언제든지 분위기가 바뀌고 사지에서 돌파해야 할 수 있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제국에서 귀족, 특히 선제후가 올 만한 건물도 크기도 아니었지만 시온이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 든 것은 기본적인 경계와 긴장감이었다.

언제든지 난전과 백병전을 수행할 수 있을 만한 상태. 그리고 시온이 도착하고서 별다른 징후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앞에 있는 여자 무리는 건물과는 달리 잘 차려입고 있었고 시온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했다.

“시온 님이신가요?”

시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들 흥분에 차 있었다. 시온은 이들을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응한 자들은?”

“아직은, 아무도 오진 않았습니다.”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 또는 이대로 병력과 기사에 갇힐 수도 있다는 가정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그렇게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만약에 제 부하가 죽는다면 저한테 바로 씁.. 신호가 올 겁니다.”

에슬린이 바짝 긴장해서 말했다. 부리고 있는 밀정들은 솜씨도 좋고 여러 은막에 능하지만 지금 제국에 데려온 수가 너무 적었고, 이곳은 제국에서도 수도였다.

지나다니는 거지 하나도 의심해야 하는 판이었다.

“지금 말을 좀 섞어둘게요.”

마리온이 다른 여자들에게 가서 의견을 나누겠다는 생각을 말하고 곧바로 자리에서 옮겨 다른 자들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리온은 카페 왕국에서도 핵심적인 일을 했기에 이런 곳에서 어떤 대화와 주제가 필요한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요란스러운 소리가 한 번 나더니 그곳에서 누군가가 온다는 것을 알았다.

“선제후인가?”

“아마도..... 마리온.”

마리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몇 가지 질문하다가 이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선제후가 하나 확실히 왔다는 것만으로도 일단은 최악의 가능성은 이제 면한 셈이었다.

이젠 이 기회를 잘 살려 이득을 보기만 하면 됐다.

그리고 두건을 쓴 나이가 꽤 있는 남자가 도착했고 시온은 바로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오자마자 악수를 했던 퀼른 선제후, 오토 퀼른 이었다.

그가 두건을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그를 따라서 건장한 기사들이 따라 들어와 시온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그것은 너무나도 정중한 것이어서 오토 퀼른 조차도 순간 놀랐을 정도였다. 기사의 전설을 눈앞에 본다는 것은 이미 피아를 가리지 않고 시온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뜻이 서려 있었다.

“이대로 곤란해지는 게 아닌가 걱정을 했는데 한 명 오시긴 했군요. 또 뵙습니다. 오토 퀼른님.”

“어떤가, 내 손녀에 대해서는 아직도 고려 중인가?”

“......흠. 오늘은 그것 때문에 부른 것은 아닙니다.”

“아니라고? 나를 바보로 아는가? 자네가 젊음의 비약이라는 헛정보로 낚시질한다는 것을 난 잘 아네. 하지만 샬롱을 이용해서 나와 다른 제후들에게 미끼를 던졌다? 이것은 오랫동안 제국의 정치판에 끼어있던 나로서도 신선하구먼.”

“........”

“과연 시온 니벨룽, 기사 중의 기사로 정평이 나 있는 자가 샬롱에서 선제후를 부를 거로 추측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있겠나? 보면 볼수록 단순한 자가 아니야.”

사실 이곳을 주최하던 여자들도 상당수가 놀랄 정도였다. 샬롱에 선제후가 들어왔다는 것만 해도 크게 소문을 탈 일이었다. 여자들의 전유물에 남자가 그것도 제국의 최상위 귀족이 찾아온다는 건 그것 자체로 약점으로 잡힐 수도 있을 정도였다.

“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오늘 한 명도 못 볼 줄 알았지 뭡니까.”

“아, 그럴 수도 있네. 나야 그럭저럭 넘어간다고 해도 워낙 깐깐한 자들이 많아서 말이야. 그런데 어떤 마술을 부렸기에 벨저가 입을 다물고 있나?”

“?”

“그와 나는 이십 년 지기야. 철없을 적에 사고도 함께 쳤고 같이 사지도 넘은 적이 있지. 그가 나에게 비밀을 둘 만한 일은 세상에 몇 가지 없어. 그중의 하나가 자네가 될 것 같구먼.”

이제 하나 확실해진 것은 벨저는 이십 년 지기 선제후보다 자신을 더 중요시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것이 계약과 서약이긴 했지만.

“아, 그거 잘됐군요. 벨저 공은 제 스승이기도 하십니다.”

“뭣? 그랬나???”

“그리고 젊음의 비약에 대한 건 그냥 던진 헛정보가 아닙니다. 전 이것을 거래의 물건으로 가져온 겁니다.”

“!!!”

시온이 그렇게 말을 했지만, 여전히 긴가민가한 얼굴이었다. 하기야 그런 소문으로만 숱하게 돌던 것과 자연의 이치를 순간적으로 역전시킬 수 있는 단약을 시온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믿을 정도로 제국에서 이성적인 힘이 떨어지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차라리 귀신을 믿겠네. 그걸 말이라고...”

“그럼 보시지요.”

시온이 준비하던 함에서 단약을 꺼냈다. 그리고 그 특이한 모양새와 안에 서린 영기가 퀼른 선제후를 홀리게 했다.

“과연 이게? 하지만 나를 돌대가리로 보는 건가? 나도 숱하게 단약을 봐왔어. 그 중엔 사기꾼이 파는 것도 많았지.”

시온은 바로 이 자리에서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지만, 일단은 참아야 했다.

‘지금은 제작에 한계가 있으니 시범적으로 하나를 보여준다고 하면 다른 제후들에겐 못 보여주니까.’

물론 다른 자들이 와야지 성립되는 일이었고 시온은 처음과 달리 다른 선제후 까지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오토 퀼른이 얘기한 것처럼 샬롱에서 선제후를 부르는 일은 은밀함에선 최고의 전략이었지만 거부감을 일으키게 한다는 점도 염두에 뒀어야 했다. 살짝 후회되는 부분이었다.

“시온 님. 옵니다.”

에슬린이 재빠르게 시온에게 한마디를 했다. 누군가 다른 선제후가 또 오고 있다는 것.

퀼른 선제후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선제후는 여럿이었고 따라서 최대한 다수의 의견을 거래해야 했다.

이것이 제국의 상당한 힘이 황제에게 가 있지만, 여전히 견제할 수 있게 하는 유구의 전통을 가진 제국의 뼈대였다.

“뭐? 또 오신다고?”

“다들 모욕이 두렵지 않은 건가?”

“그만큼 이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거야.”

주최하던 여자들도 깜짝 놀라서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에슬린이 또 말했다.

“또 옵니다. 또.. 또.”

“?”

“마차 하나가 더 온다고 합니다.”

“설마 다 오는 것이냐?”

“그럴...지도 모릅니다.”

모든 선제후가 이 허름한 샬롱에 모이고 있다는 거였다. 세 명만 와도 괜찮다고 보고 있었는데...

그 소리를 엿들은 오토 퀼른이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이 자식들.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여기서 제국 회의를 할 줄이야 나도 몰랐군.”

물론 이들이 모인다고 해서 일이 잘 풀린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기회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은 분명히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