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협상
시온은 기다리고 있던 전서를 받아들였다. 전서는 꽤 투박했다. 그 끝이 짐승의 뼈로 감겨 있었다. 전서를 감은 가죽 하나와 껴 있는 뼈 하나하나가 껴 있었다.
나온 건 예상했던 결과였다. 내용이 궁금했는지 에슬린이 물어봤지만 바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에슬린에게 전서를 넘겼고 바로 펼쳐보더니 입을 열었다.
“뜻밖인데요. 생각보다 중하게 만나고자 하다니.”
지금 시온이 그들에게 끼친 피해가 보통은 아니었다. 당장에 뼈를 씹어 먹겠다고 선전포고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마당에 이렇게 이들이 공손하게 시온에게 답신을 보낸 것은 에슬린도 예상 못 했던 일이었다.
포도주를 받으며 시온은 간단한 답신을 적었다. 그 내용은 한다면 날짜를 정하고 주챠의 몸을 내주겠다는 거였다.
그들이 이 먹이를 물어야겠지만, 나머지는 주챠의 몸으로 강제 평화협정을 유도할 계획이었다.
핏대를 세우며 누가 잘못했는지를 가르고 있는 라산의 귀족들은 그들의 영토를 되찾고 싶은 마음이 강했지만, 영토를 되찾을 만한 힘과 계략은 없었다.
시온은 라산의 망명자들을 무사히 데려온 것만으로도 황제와의 약속을 지켰다.
이제 매력이 넘치는 그의 딸을 완벽히 가질 수 있었다. 북서부 지역에서 그들과 전쟁을 하는 것보단 이들을 묶어 놓고 안전하게 다음의 카드 탑을 쌓아 올리고 싶었다.
“약해진 제국이라고 해도 형식상 여기를 보호하는 편이 각하께 더 이로워요.”
마리온은 한입 가득 포도주를 머금고 이어서 말했다.
“전쟁이 길어지면 제국의 인구가 줄게 될 것이고 골족들이 하는 전쟁의 방식상 약탈과 절멸 전으로 전쟁을 치른다면 제국의 인구는 더욱 줄 거에요.”
“그걸 알고 황제는 골족 놈들과 손을 잡은 건가?”
“그만큼,,, 워든 각하가 위협적이란 뜻이겠지요. 애초에 저는 워든의 작위를 받으시는 걸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선제후 정도가 좋았지요.”
“그걸 내가 받고 싶어서 받았나.”
“거절 하셨어야 합니다. 더 높은 직위를 주려는 건 그만큼 부리려고 하는 거니까요.”
만고의 진리였다.
“그래서?”
“계속 막아 내셔야 합니다. 대신에 골족의 침입을 막아 낼 수 있다면 제국 이인자의 칭호는 움드에 막대한 인구 유입을 이뤄낼 수 있을 거여요.”
인구 하나하나가 이제는 자신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세금이란 것은 직접적으로 재정으로 들어왔다. 여기저기 무역의 활성화를 위해 도로망을 열어 놨는데 인구가 딸려 버리면 말짱 도루묵이지 않은가.
적은 답신이 담긴 서신을 에슬린에게 넘겼다. 에슬린은 서신을 받자마자 잽싸게 밖으로 나갔다.
연회는 여전히 열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다소 분위기가 굳은 듯했지만, 대략의 자신의 정치적 포석을 정한 시온은 연회를 재개했다.
ㆍㆍㆍ
며칠이 빠르게 지났다. 시온은 부관과 함께 골족과 협상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평원의 중간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군요.”
“동의합니다. 워낙에 기괴한 짓들을 많이 한 자들이니.”
부관들은 여기에 대해서 걱정스러운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게 여기서 마음을 바꾼 골족이 습격을 벌인다면 골족들이 기동력 상 둘둘 둘러싸여서 곤란한 상황이 나올 수도 있었기에 그랬다.
그냥 그 자리에 있기로 한 시온은 진짜로 한동안 별일이 없었다. 생긴다고 해도 설마 달려들겠는가, 싶었다.
“대부분의 케식을 각하께서 줄여놨는데. 너무들 걱정이 많군. 오히려 그때 없었던 자들이 더 겁먹은 꼴이라니.”
“아니, 고드 경. 전투, 전투만 하지 마시고, 이것은 협상이란 것을 잊지 말아 주세요. 대화로 풀어야 하는 법도 있으니까요. 어긋나면 처음부터 판을 다시 짜야 한다고요.”
어쨌든 골족 입장에선 대범한 짓을 한 번 더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정말로 저 끝에서 골족으로 보이는 비슷한 녀석들이 오고 있었기에 시온은 그 보고를 받고선 지평선 끝을 쳐다봤다.
“오는군. 코르도바, 마리온, 준비해라.”
그 사신들이 돌아오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보고가 왔다. 사신들이 쓰러지고 있다는 거였다.
“???”
“뭐라고?”
“각하, 확인해 보십시오!”
시온은 안에 있다가 바로 밖으로 나가서 무슨 일인가 해서 그곳을 봤다. 아니 골족들이 자기들끼리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다른 골족 무리가 그 사신들을 살해하고 있는 거였다. 치열하게 저항하는 도중이었다. 너무 사신들의 수가 적었고 기습하는 자들이 많았기에 그들은 상당수가 죽어가고 있었다.
어쨌든 공격하던 골족은, 진정한 적이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시온을 향해 방향을 틀려고 했다.
이제 전투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들에게 과연 평화협정을 할 만한 지혜가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런 야만인 녀석들이.”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저들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확실히 더 가까이 뒀어야.”
“동의한 얘기 아닌가? 각하가 주챠를 정체불명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 이상, 믿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한 건 마리온 네가 아닌가.”
유목 제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자기들끼리의 권력에 대한 경쟁이 너무 심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봐왔던 바로는 약속 같은 것도 얼마든지 뒤집기도 했고.
적이라고 해도 자기 부족에게 도움이 된다면 쉽사리 협력하는 모습도 보였다.
“저들을 도와야 합니다!!!”
코르도바가 몇 번이나 시온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그는 야만인 놈들이라고 해도 사신이라면 그만한 대우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였다.
시간은 아직 약간 남아 있기는 했다.
여기서 냉정하게 생각을 해야 했다.
“각하, 이대로 관망 하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에슬린이 그렇게 말하자 시온은 쓴웃음이 났다.
‘맞는 말이긴 하지, 저 녀석들의 특징상 저 짓거리 자체가 상대의 결정권을 뺏으려고 하는 것이니···.’
“승리를 하는 쪽에다가 협상을 다시 걸자 이건가?”
“맞습니다. 각하. 만약에 칼을 대 버리면 협상의 여지도 없겠지요.”
자기들끼리 죽인다고 해도 그 승리자와 협상을 하는 것이 또 아예 불가능하냐, 그건 또 아니기 때문에 시온은 정말이지 어지간하면 평화협정 쪽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다들 왈가불가하며 한 소리를 내는 와중에 저들이 전투가 말미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젠 늦었지.’
“방어 준비를 해라. 그들의 태도를 먼저 확인 하는 것이 낫겠다.”
그런데 웃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동쪽에서 한 무리의 골족이 벌떼처럼 몰려오더니 겨우 끝내가고 있던 전투에 다시 참여하게 된 거였다.
“??????”
한마디로 공격을 했던 자들이 또 역으로 공격을 당해 죽어버린 상황이었다.
‘당연한 건가. 아, 생각이 짧았다. 애초에 처음 협약을 걸었을 때 서로 주둔군의 거리를 멀리 잡자고 했지. 그러니 그들의 지원군이 오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을 거야.’
아까부터 쓸데없이 이것저것 논의하던 게 오히려 머리를 굳게 한 셈이었다.
차라리 도왔으면 확실하게 구실까지 생기게 되는데.
지금 막 죽어가는 사신들을 도와준 자들은 분명히 협상하기 위해서 결정을 내렸던 부족들로 보였다.
“.......”
ㆍㆍㆍ
궁지에 몰렸다가 다시 승리한 사신들이 가까이 왔다.
“시온 니벨룽?”
대뜸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자는 반절이 검은 문신으로 뒤덮인 자였다. 아마 저번의 녀석과 비슷한 경우일 거였다. 전투를 해본 경험에 의하면 저것 자체가 제약으로 그의 능력을 보조하고 있을 거였다.
“그렇다.”
“젠장, 네놈. 왜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지?”
“..........”
그는 자신들을 왜 도와주지 않았냐고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의 촌철살인의 질문과 함께 고요해진 분위기는 막 이들이 들어올 때와는 꽤 달라져 있었다. 칼바람이 불었던 거였다.
아무래도 솔직하게 얘기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었다. 시온이 망명자들을 데리고 오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서로 눈을 가리고 싸운 거나 다름이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었고 그냥 압박만 서로 하는 상황이었다.
‘그 정도로 뇌가 없을까.’
넌지시 얘기한다고 해도 서로 가면을 쓰는 상황이니 이와 같은 곤란한 입장에 대해서 솔직하게 얘기를 하는 편이 나아 보였다.
“누가 이길지를 모르겠더군. 그리고 누가 제대로 된 권력자인지도 모르겠고, 너희는 왠지 맨날 사람이 바뀌거든.”
“뭐라고? 이 개 같은 녀석이!! 그럼 우리가 당연히 졌어야 한다는 말이냐?? 이런 더러운 황제의 개를 보겠나.”
그가 격노하기 시작하자 마리온이나 에슬린이나 머리를 부여잡았다. 된통 꼬인 거였다. 오랜만에 둘의 의견이 같았다 싶었는데 코르도바의 명예심이 길을 열 때도 있는 법이었다.
게다가 앞에 있는 녀석이 어느 정도 증오심을 지녔다는 확신이 들었다.
“네가 정말로 주챠 님을 저승으로 보냈다니.”
“그건 사고였다. 그리고 나는 쫓기고 있었다.”
“빌어먹을 텐신이시여!!”
공식적으로는 가면 질을 하는 것이지만 시온이 케식과 주챠를 죽인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여기서 곧바로 전투가 일어날 수도 있는 급격한 상황으로 변질이 되었다.
“젠장, 검 뽑아.”
에릭이 소리쳤고 골족의 전사들과 대치가 이어지려고 했다. 그 정도로 시온과 앞에 있는 남자는 매우 가까워져 있었는데, 시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보이지는 않지만, 저 끝에서 뭔가가 몰려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저것들은 또 어느 쪽이야?’
이 녀석들이 배신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기에 도무지 상대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적어도 동방 제국에서는 종교적인 문제가 까다롭지, 이렇게 밥 먹듯이 배신하는 녀석들과 다퉈야 하지는 않았다.
“당장 주챠님의 옥체를 내놔라.”
“알아볼 수는 있고?”
“!!!!!”
눈짓으로 거래하기 위한 주챠의 일부분을 가리켰다. 전부는 아니고 조금만 가져왔던 거였다.
“이런 황제의 개!! 위대한 기사라더니 이런 치졸한 짓을···!!!”
하지만 그의 발언은 이어지지 못했다. 시온은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녀석은 쩍 소리가 나며 뒤로 날아갔다. 박살이 난 것은 분명했는데 바닥을 구르면서 깨져버린 이가 허공을 흩뿌렸다.
“!!!!!!!!”
시온의 공격이 들어가자 그다음 근접해 있던 에릭과 고드의 교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직 죽지는 않아서 부들거리고 있는 녀석에게 시온은 빠르게 올라탄 뒤에 머리를 계속 내려찍었다.
하나, 둘, 셋, 넷. 두개골 터지는 살벌한 소리가 연이어서 울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름난 케식이었는데 주먹으로 맞아 죽고 있던 거였다.
“..........”
이것이 오히려 도움이 됐는지 갑자기 골족들이 두려운지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에릭과 고드만 교전이 일어났지, 다른 자들은 동시에 물러나 버린 거였다. 시온은 아마도 사망했을 녀석에게서 떨어지고 피가 뚝뚝 흐르는 손을 한 번 털었다.
“고드, 에릭 그만. 그만 싸워라. 그대로 떨어져라.”
시온이 떨어지라고 명령을 하자 엉켜있던 두세 명이 그대로 얼어붙어서 떨어졌다.
시온의 기사야 당연히 자신의 포지션을 잡았는데 다만 기다려 봐야 하는 거는 골족의 전사였다.
그들의 눈은 아래에 무참히 머리가 깨져 버린 자식의 케식 리더를 보고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 아, 이런, 이런!! 죄송, 죄송합니다. 저는 멩구티 라고 합니다. 저도 케식입니다.”
바로 부대장이 시온에게 와서 고개를 박고 사과를 했다. 조금 전에 그 선제공격으로 수준의 차이를 목격했기에 이들은 속으로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멩구티는 땀방울을 흘렸다. 실력에 차이가 대단했기에 그랬다. 저렇게 죽을 대장이 아니었는데 주먹으로 맞아 죽다니, 시온 니벨룽에 실력은 진짜였다. 주챠의 죽음은 사고가 아니었다.
“저희의 대장인 다얀 장군이 좀 성격이 급해서.”
사실 방금 사망한 다얀은 케식 중에도 가장 손꼽히는 골족이었다.
아무리 방심했다고는 하나 이렇게 순식간에 목숨을 잃기엔 너무 황당했던 거였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상대임을 다시금 확인한 멩구티는 협상을 이어가기 위해 말해야 할 단어를 신중하게 골랐다.
상대가 극도로 고분고분해지자 시온은 때로는 매가 약이라는 진리가 고금을 통해 먹힌다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평화협정을 원한다. 그리고 망명자들을 포기하고, 데리고 있는 라산의 귀족과 기사와 상인 평민들을 평화협정의 증거로 보내라.”
“그건 너무 과한, 이미 노예로 변해서 추적하기 어려운 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면 주챠의 몸을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인가?”
“그···. 그건 아닙니다. 대칸의 아들은 텐신에게 돌아갈 자격이 충분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답변해 주십시오. 저것이 주챠님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내가 직접 봤다.”
“.............”
“내 명예를 걸지.”
“아···. 알겠습니다. 아마도 사실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