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7화 (287/304)

황제의 도시

“영 말이 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 각하는 워든 이시니까요.”

워든은 제국이 위험하다 판단이 될 때 황제의 전권을 대리해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제국의 수호자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것이다.

제국이 위험이란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야 봉신들의 투표로 결정되는데, 현재 라산 귀족과 카스피아 초원 지대를 거점으로 삼고 있는 수많은 백작은 시온에게 빚이 있었다.

‘어차피 내 사리사욕으로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10 킬로미터 짜리 장벽을 치겠다는데.’

당연히 발 벗고 나설 것은 뻔했다. 자기들 힘으론 죽었다 깨나도 할 수 없는 건축이었다.

“제국 귀족들의 지지가 걱정되는데요···.”

에슬린은 시온의 생각이 아득하다고 느꼈다. 황제의 도시를 털겠다니, 아무리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군주이지만 이건 수틀리면 황제의 군단과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황제가 가지고 있는 군단은 18개로 동부 제국의 구원에 상당량이 투입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여전했다. 수도의 풍부한 인구로 언제든 증편할 수 있었다.

다만 황제라 해도 이런 군단을 무조건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각 장군과 많은 기사의 단장, 군단 장교들은 각 귀족이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인츠 선제후가 동맹이기 때문에 귀족들의 지지에 대한 건 앞으로 모르는 일이에요.”

마리온이 바로 에슬린에게 반대했다. 수도에서 여러 일을 통해 친해졌던 마인츠 선제후는 제국의 비옥한 중부 지방의 한구석을 담당하고 있었고, 마인츠 가문에 기대고 있는 세력의 공작은 여섯이었다.

슈타이어 공작, 아우크스 공작, 스트리아 공작, 케른 공작, 크라인 공작.

여기에 딸려 있는 백작들의 수는 당연히 수백이었고, 이들이 낼 수 있는 분위기는 당연히 살벌했다.

많은 것을 수도와 겨루고 있었기에 반대극점을 찾고 있었고 이 모두를 휘어잡을 수 있을 만한 인물로 시온이 발탁이 된 거나 다름이 없었다.

“마인츠에게 전서 하나 보내야겠다. 마인츠가 알아서 해주겠지.”

“결혼 제안을 할 건데요?”

“벌써 써버리긴 아깝지. 안 해도 돼. 나에게 딸의 목숨 빚을 진대다가 어차피 내가 아니면 황제와 대립을 설 수 있을 만한 인물이 없으니까. 막무가내로 해달라고 해.”

“..........”

“위대하신 각하. 이렇게 되신 거, 마탑에서 수도로 이동 중인 마법사들을 잡아 오는 게 어떨까요?”

“?”

에슬린이 어이없다는 듯이 마리온을 쳐다봤다.

“너, 그건 어디서 정보를 얻은 거지??”

“네가 알 바는 아니지. 나도 내 나름대로 전하께 최선을 다하고 있어.”

마탑에서 이번에 배출이 된 마법사가 대략 천오백 명이었다. 이들은 이제 제국의 수도로 가게 돼서 황제의 인정을 받은 뒤에 황제나 각 귀족에게 다시 배분된다.

당연히 운명이야 각 전선에 곧바로 배치될 게 뻔한데, 이런 전선 유지에는 마법사 하나하나를 확보하는 게 중요했다.

근데 황제가 반을 가져간다고 해도 각 제후가 동방 제국을 방어하기 위해 각축을 벌일 것인데.

‘나에게는 하나도 안 주겠지.’

어떻게든 내 공적을 작게 만들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작자였다. 따라서 아마 내 쪽으로 배치되는 전선은 하나도 없을 게 뻔했다. 가치 있는 자도 별로 없을 것이고.

천명 중에서도 6단계에 들어간 마법사가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 6단계의 마법사들이 벌일 수 있는 규모 있는 마법은 전투의 큰 축을 담당했다.

“좋아. 그거 흥미롭군.”

“각하! 그래선 안 됩니다.”

“왜지?”

“앞으로 마탑에서 계속 불이익을 줄 겁니다!”

앞으로 받을 만한 마법사에 대한 협박 문제.

‘그때는 그때 가서 생각하자. 지금은 내 전선이 더 중요하기도 하고.’

“고드를 불러.”

이런 정치적인 일에는 고드가 확실히 나았다. 고드는 알바의 왕족이자 계승자였기에 제국에서 돌아가는 분위기에 대한 정치적인 감각이 있었다. 다만, 쓸데없이 명예가 많다는 것인데.

마리온이 고드를 부르러 가는 와중에 에슬린이 자꾸 설득했다. 마탑 출신이라 그런 것이다. 그곳에서의 자신의 평가가 낮아지고 가족이 있으니 이리 필사적인 것일 거였다.

하여튼 이런 에슬린과의 논답을 하는 시온을 지켜보는 알렉시오스는 침을 삼키고 있었다.

‘개인의 무력뿐만 아니라 냉철한 술수까지, 과연 저자였다면, 그 전투에 어떻게 했을까?’

아무루 강을 틀어잡고 생산되는 비옥한 저지대와 여덟 곳의 지역을 복속해 세기를 넘기 다스렸던 라산 왕국은 제국의 오랫동안 정략적인 파트너였다.

오트라르 공방전에서 격파당해 순식간에 몰살당해 수십만의 사상자가 나면서 그동안 알렉시오스가 할 수 있던 건 별것 없었다. 

누구든 극복할 수 없었을 것이라 자책하고 있었지만, 저자라면? 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고 있던 것이다.

고드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시온의 단독명령에 요청됐다는 사실에 감동하면서 말했다.

“각하, 저를 쓸 일이 있다 하여.”

“잘 왔다. 네가 마리온에게 기밀을 받아 제국으로 향하는 마탑의 마법사들을 내 쪽으로 데려왔으면 한다. 강제적인 수단으로 말이지.”

“???”

시온은 고드가 쉽사리 말을 듣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뭐가 됐든 강제로 데려오라는 것은 영 그의 방식과는 맞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시온이 고드에게 제시한 것은 생각보다 심플한 거였다.

“자네의 정치적 감각을 고려해서 이 같은 일을 맡기는 것이야. 나는 제국이 위험하다 판단했다. 워든의 단독 집행권으로 마법사들을 독점해서 써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자네가 어렵다고 한다면, 에릭에게 맡기지.”

“아?”

고드가 바로 갈등에 빠졌다. 시온은 그에게 두 가지를 돌려서 말했는데 가장 크게 작용할 건 아마도 에릭에게 맡길 거라는 점일 거였다. 니벨룽 기사단은 현재 두 부류로 갈라졌다. 이들 모두가 공적을 세우기 위해서 치열하게 경쟁했다.

단순히 고드가 거절했다고 하면 지금 고드가 사로잡고 있는 기사들이 흔들릴 수도 있다.

“빨리 말해 주겠나? 그곳에 가야 하는 것은 시간이 촉박하다.”

“그, 알겠습니다. 제가 그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도록 해주십시오.”

“좋다. 고드 너에게 천 명의 기사를 붙여 줄 테니 반드시 데려와라.”

“천 명씩이나?? 괜찮으십니까?”

아직 전선이 풀린 것은 아닌지라 각종 정찰과 척후에 투입해야 할 기사와 백병전에서 일반 전사들을 도륙할 수 있는 기사들은 그냥 그 자리에 주둔시키는 것만으로도 중요했다.

“괜찮다. 나는 별일 없을 것 같거든.”

생각보다 대칸에게 보낸 멩구티가 일을 잘 처리할 것 같았다. 적대적인 인물이라고 생각되던 다얀을 처리해버린 게 크게 작용했는지, 멩구티가 다음 이 전선의 장군으로 승격한 거였다.

ㆍㆍㆍ

‘뭐 지금 골족이 들어오면 난리 나긴 하지만, 황제의 도시를 습격하려면 군단이 필요하니.’

시온은 다섯 개의 군단을 끌고 잠시 자포리자 일대를 지배하는 황제의 대표 도시인 오데사로 향했다. 오데사는 인구 140만쯤 되는 도시였는데 230헥타르의 면적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광대한 지역이었기에 다섯 개 군단으로 완전히 포위한다는 건 무리였고, 입구 정도만 틀어막을 수 있었다.

이곳에 있는 성과 성벽을 해체한다 해도 장벽을 짓는 데에는 충분한 재료를 구할 수 있었다.

“워···. 워든 각하??”

그리고 포위된 도시에서 나타난 남자는 이곳의 총독이었는데 자신의 영지가 아닌 황제의 영토를 대신 다스리는 제국 관직이었다.

“이름이 뭐지?”

“테오하리라 합니다. 영광입니다. 각하.”

테오하리는 마흔 살의 나이였다. 변방이라 해도 황제 직할의 총독령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단순한 능력만으로는 부족했다.

수도 내에 존재하는 관료 시험에서 통과해야 했고 거기에 돈이든 정치적이든 연줄까지 동원해야 했다. 그런 식으로 십 년 동안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어야 총독까지 갈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염원하던 궁극의 형태가 바로 눈앞에 있는 남자였다. 절로 숨이 막힐 수 밖에 없었다.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탁상 머리는 결국 탁상 머리, 진짜 전투와 사지를 밥 먹듯이 다니는 사람에게서만 나는 맹수의 분위기가 있었다.

‘이 자가 사실상 황제다···. 기사 따위가 아니야.’

숨 막히는 제국 정치에서도 난다긴다하는 기사 단장들을 봤다지만 테오하리가 봤을 때 시온 니벨룽만큼 탁월한 분위기가 흐르는 자는 존재하질 않았다.

‘벨리사르 장군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는 목이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시온도 사실 테오하리가 만만찮은 자인 걸 알았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암살 꽤나 해봤을 것 같은, 속이 열 개라도 모를 듯한 눈빛.

“반갑군. 테오하리 총독.”

“그렇습니다. 위대한 자를 뵙습니다. 황제의 사위이자 제국의 방패이자 수호자께서 하는 많은 일은 제국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체 무슨 연유로 오데사를 포위하신 겁니까??”

“장벽을 만들까 한다.”

“장···. 장벽 말입니까? 다수의 고렘이 워든 각하에게 가고 있다는 얘기는 듣긴 했습니다만.”

시온은 한 번 이자를 떠보기로 했다.

“그걸 알고 있나? 그러면 네가 고렘의 이동로를 방해한 거로군? 덕분에 군사 작전에 차질을 입었다.”

“아닙니다. 제가 알고 있던 사실은 다른 곳에서 들은 것으로.”

“누구에게 들었지? 나는 극비로 옮기고 있었다. 서북부 야만인들이 세운 제국과 라산 연합 왕국의 망명자들을 받아내기 위해서. 이 일은 목숨이 걸릴 정도로 중한 일이다.”

테오하리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간 그의 정치적 커리어에 거대한 불운이 닥칠 수도 있었다.

‘젠장, 시온 니벨룽, 다스릴 줄 안다.’

시온은 빠르게 일을 진척시키러 했다. 선제후들을 두루 만나봤더니 속을 숨기고 딴짓을 하는 자들이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에 대해서 배운 것이다.

“오데사 총독 테오하리, 널 즉결 체포하겠다.”

“?????? 그···. 그런!!”

오데사 총독의 뒤에 있던 기사가 두 명이 발끈했다. 말도 안 되는 처사라고 한소리를 하며 총독의 앞으로 나온 순간 시온이 기사의 팔을 꺾었다.

“?!!!!”

“끄아아악.”

“마···. 마법??”

시온은 이번에 익혔던 시간왜곡술에 동작을 섞어 단번에 기사의 팔을 점했던 거였다. 할 거면 완벽한 실력행사를 보여주는 편이 좋았다. 이 기사들도 골족 전사들에게 놓는다면 오십 명 정도는 능히 상대할 수 있을 만한 기사였다.

총독을 보필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황제가 아끼는 자들이었고, 바로 블랙드래곤 기사단 출신일 가능성이 컸다.

그런 실력을 갖춘 기사가 단 한 번에 팔을 봉쇄당한 것이다.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고 발작적으로 다른 녀석이 검을 뽑으려고 했으나 시온의 답변이 더 빨랐다.

“신중하게 생각해라, 기사여. 너희는 지금 제국의 수호자인 나에게 반란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뽑은 순간 되돌이킬 수가 없다.”

“이···. 이런.”

에릭도 속으론 혀를 찼다. 좋은 구경 했다 싶었다. 맨손 결투했던 그가 직접 얻어맞았던 그 기술이었다.

“가만히 있어요. 총독 나리. 전하께선 지금 몹시 화가 났습니다. 황제 폐하와 까다로운 사정이거든요.”

테오하리가 시온에게 포박되고 그가 데려온 자들도 모두 포박이 되어 갔다. 테오하리가 반항하지 말라고 언질을 뒀기 때문이었다.

“그···. 그래서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네, 도시.”

“무슨 말씀이신지.”

“네 도시를 뜯어다가 장벽을 만들어야겠다.”

“도시를 뜯···. 어, 다···. 가···?”

“여기에 서약해라. 오데사 뿐만이 아니라 올비아, 오카치프, 티라스풀 자포리자 일대에 있는 모든 도시가 포함된다.”

“................제발.”

“그럼 여기서 죽겠단 건가? 반역죄로 너를 다스리고 내 사람을 임시로 놓으면 되겠군. 황제의 사위인 내가 그 정도도 못할 거로 생각하나?”

테오하리 총독의 계산은 잽쌌다. 곧바로 서약서에 총독 인장을 찍은 것이다.

“테오하리 총독.”

“말···. 말씀하십시오.”

“좀 더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한다. 장벽이 완공되기 전에 골족이 오데사로 들어올지도 몰라. 도시를 약탈당하면 과연 네 처지가 되겠는가.”

“......설마.”

“아니, 아니야. 그럴 수도 있다는 거야. 그리고 까놓고 말해보지. 황제가 너에게 분명히 명령해놨을 것인데. 나를 맥이라고 말이야.”

“.....!!!”

“맞는군. 거기에 대해서도 한 번 뜨거운 얘기를 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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