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0화 (290/304)

포석

고드가 고개를 잠깐 숙이고 뒤로 물러섰다. 정갈하고 공손하게 물러났지만, 여전히 표정은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한 번만 더 워든에게 무례하게 굴면 그 죄를 묻겠다는 뜻이리라.

근데 굳이 고드가 아니라고 해도 이미 동물들의 집회가 되어 있었다. 방금 본 것이 무엇인지 주절주절 거렸다.

“조용, 조용. 워든 각하를 뵙습니다. 각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뭐지?”

“혹시 방금 눈이 부셨던 것이.”

“횃불은 치우지 않았나.”

아르눌프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상념이 번개 치듯 떠올랐다. 고도의 마나가 모이면 그 대상자는 그 자체가 환각(幻覺)을 일으킨다는 문구다.

그야말로 격차에서 나오게 되는 쏟아지는 80미터의 폭포에서 그 장관에 압도당할 때의 그것과 유사할 것이다.

“브뤼헤의 아르눌프입니다. 서품 마법사입니다. 만나 뵈어서 영광입니다.”

아르눌프의 어조는 주변 사람을 놀라게 했는데 조금 전만 해도 워든의 월권행사라 하며 개처럼 짖어댔던 것이다.

“그렇군.”

시온은 아르눌프를 내려다봤다. 금발의 남자는 얼어 있었다. 짖던 개는 사자를 보면 굴종하기 마련이었다. 

아까 대강 들었을 땐 아르눌프가 황제파의 수장 격이라고 들었었는데 생각이 삼백육십도 바뀐 모양이었다. 

뭐 상관없었다. 아주 격한 제한도 할 예정이었고,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고작 해봐야 철창일 거였다. 

명분은 대충 워든에 대한 무례가 될 거였다. 시온은 간단하고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을 목덜미에 들이댔다.

“전원 북서부 침공 전쟁을 위한 강제 소집에 응해줘야겠다. 나는 서부의 관리자이고 남부의 관리자이며 제국의 관리자인 워든이고, 나 스스로에게 엑사스초르를 임명한 서북부의 대원수(大元帥)다. 제국의 수호자이며 지금 제국이 위기에 빠져있다고 판단했다.”

시온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좌중을 쿵쿵하고 때려 박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예의 환각의 맛에 정신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마법사의 최대 난적(亂賊)은 마법사였다. 그 경지가 한 계단만 있다고 해도 그 높이에 현기증을 느끼는데 시온의 경지는 이들에게 경외감을 주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마법사를 잘 알고 있는 시온이었다. 자유 마법사의, 떠돌이의 굶주림과 초조함, 이들이 왜 마탑을 벗어났는지도 알고 있었다.

‘금, 그리고 영지. 명예는 뒷전이지.’

‘이들은 심지어 그들의 단계마저도 그다음이지.’

“골 제국은 라산 왕국을 멸망시켰고, 그 영토와 금은보화를 모두 쓸어담았다. 녀석들의 탐욕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밑줄 치고 강조해야 할 부분은 바로 전리품과 빈 영토에 대한 얘기였다. 그리고 제국의 누구보다도 이들의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자는 자신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워낙에 관례로 묶여 있는 곳이니까.’

제국의 활동을 위해 황제의 인가에 찍혀야 하는 고지식한 의례 행위는 어쨌든 이들에겐 중요했다. 적어도 한번 손을 잡으면 다시는 황제에게 인가를 받진 못하리라.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전부를 원한다.”

일단은 비수는 숨겨 놓는다. 거부하면 철창으로 보낼 계획이었다. 워든에게 있어서 없던 죄를 만드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었다. 

발목이라도 잡아놔 황제가 흡수할 마법사를 틀어막아야 했다.

“잠깐의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는 집단답게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열었다. 시온은 이들의 욕망 어린 분위기를 보고 확신하는 바가 있었다. 잘 데워진 열기가 후끈거리며 올라왔다.

“.....전원 합의로, 저희 천오백 명의 서품 마법사는 시온 각하의 명령에 응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해주십시오.”

“뭔가?”

“워든께서 인가를 내려주십시오.”

“......”

역시 마법사답게 하나씩 더 요구한다. 단순한 행위는 아니었다. 그것은 워든이라고 해도 분명히 문제 될 수 있을 일이었다.

한 마디로 물감을 끼얹고 어느 쪽으로 번지는지 보는 모양새일 것이다. 애매한 문제였고 그렇기에 정치적 요동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임시로. 대권(代權) 하지. 직권은 아니다.”

시온은 나름 머리를 굴려서 말했다. 황제의 사위로서 블랙파이어 가문을 대리하겠다는 뜻이었다. 에슬린에게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야말로 적절한 답변이었다.

‘과연 각하, 대단하군.’

어떤 군주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즉석에서 뚜껑을 열어야 했다. 이것까지는 따로 조언을 얻을 수가 없는 거였다. 가문의 권위와 카리스마와 엮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잘 풀어낸 거였다.

이번엔 따로 머리를 맞춰볼 필요는 없었다. 그들의 눈동자엔 그런 게 담겨 있지가 않았다. 목격한 경지에 이미 마음 깊숙한 곳까지 내줬다.

쉴새 없이 흘러가던 소식은 빠르게 제국의 심장으로 집결했다. 그 중심인 황제에게 말이다. 그는 짐승처럼 격노했다. 한 대 맞은 탁자가 쩍 하고 쪼개졌다.

“감히!!! 감히!!! 시온 니벨룽!!!”

벌게진 황제의 얼굴은 이 세상 모든 모욕이라도 모아놓은 것처럼 흔들렸다.

“정보가 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새로 취임한 란데런 공작 보두앙은 입안이 마르고 있었다. 어딘가가 잘못된 것인 분명했고 그 조각을 반드시 풀어야 했다.

“보두앙 이번 마법사들을 이끄는 건 네 아들이 아닌가?”

“제 사생아인 아르눌프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공교롭게도 그렇습니다.”

황제의 시온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끓고 있었다. 골 제국 따위, 라산 왕국을 멸망시킨 야만인 따위는 시온에 비할 바가 못 됐다. 동방 제국의 장엄제도 시온에 비할 바가 못 됐다.

녀석들에게 제국의 귀퉁이를 크게 베어 내준다 해도 제국의 힘은 이 위대한 수도에 있었다. 인구수 이천만의 육박하는 이 제국의 심장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마법이 있었다.

이리저리 쳐진 핏발선 눈으로 보두앙을 보던 황제가 소리쳤다.

“네가 배신한 거로군.”

“?????!”

“여봐라. 보두앙을 끌고 가 참수해라.”

“폐하???”

“개자식. 사생아 따위를 남기는 더러운 녀석. 다시는 너 같은 녀석을 쓰지 않으리. 시장에 천하게 목이 매달리지 않은 것으로 고마워해라. 보두앙.”

“폐하. 보두앙은, 강력한 충직함을 자랑하는 우방으로 지금 사태에서 보두앙 공작을 잃으면 큰 흔들림이···. 고정하십시오.”

“너도 죽을 테냐? 배신자를 감싸다니, 너는 그 검을 내려놓고 여기서 나가거라.”

돌벽처럼 서 있는 엠페러가드의 단장이 찬물이라도 끼얹은 마냥 멍하니 있다가 보두앙을 끌고 갔다.

황제는 자기 스스로 하나의 강력한 패를 찢어버린 거였다. 시온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으로 점점 명민한 이성을 꺼트리고 있었다.

ㆍㆍㆍ

2억 5천 평의 예프. 200킬로미터를 아우르는 장미의 장벽 위에 반듯하게 서 있는 벨리사르의 인내심에는 금이 가고 있었다. 황제의 동생이자 북부 정벌을 도맡아 했던 전쟁영웅이기도 한 벨리사르의 식견은 예리한 구석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 무슨 개 짓거리란 말이지. 이 군단은 모두 비느로 내려가야 하는데.”

인구 300만의 대도시 비느는 강물의 젖 줄기를 내부로 관통시키며 단단하게 형성한 갑옷 같은 성벽으로 유명했으나, 이 정도의 대규모 포위엔 아사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비느의 위치상 제국의 손꼽히는 요새로 이곳이 터진다면 비느가 자리 잡고 있는 2500만평의 트리아 일대가 쓸려가 버리게 된다.

벨리사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시온 니벨룽······.”

그는 그 이름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탁월한 기사를 끌어 올리는 것은 그의 오랫동안 해왔던 버릇이지만, 뭔가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상식을 깨트렸다. 

이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전설에서 볼법한 영광을 재현한 자였다. 단지 잠깐 손을 잡아 올려줬을 뿐인데 제국을 잠식해 버렸다.

이것은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 사실 덕분에 그의 형인 황제는 벨리사르를 믿지 않게 되었다. 제국은 마치 바람 앞의 등불 같았다. 그의 생각엔 시온이 없다면 이 폭풍에 침몰해버릴지도 몰랐다.

고로, 그는 시온이 북서부에서 벌인 망명자들의 구출 방식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형님은 의도치 않게 워든을 거래했지만, 녀석은 제국의 수호자 역할을 해주고 있다.’

두 곳에서 불길이 거침없이 번지고 있는데 정작 어느 곳에도 자신은 없다. 벨리사르는 시온이 뒤집힐까 예프를 지키고 있는 집 지키는 개의 처지였다.

“벨리사르 원수님. 수도에서 온 급보입니다.”

각을 딱딱 맞춰서 온 사내의 문장도 군단장이었다. 그러나 이 군단장은 누가 하라고도 하지 않는데도 자신의 상관을 극진히 받들어 모셨다.

“뭐지? 흐라비세, 군단장.”

“보두앙 공작이 참수당했습니다.”

“?!!!!!”

“왜!!”

“내란 동조죄랍니다. 그런데 소문엔 이번의 시온 니벨룽이 벌인 마법사 납치 사건 때문인 듯합니다. 그 마법사 무리에 보두앙 공작의 아들인 아르눌프가 있었거든요.”

“빌어먹을. 설마 의도한 건가?”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요. 솔직히 뒤에다 칼을 겨누고 식량을 틀어쥐고 있는데 기뻐할 장군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시온 경이 그럴 리가 없지 않나. 그런 계략을 하기엔 그분은 진정한 기사야.”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면 시온 경이 데리고 있는 그 마탑의 마법사 짓이군. 카페 왕조는 언제나 뒷얘기가 나왔지, 나는 그 마녀 쪽이 의심스러워.”

“아무래도 군단을 분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란데런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악수였다. 란데런도 예프 정도의 크기였고 문제는 보두앙은 세대를 거듭해온 황제파의 거두(巨頭)라는 점이었다.

“뭐가 됐든 시온 니벨룽의 의도 대로군. 군단의 일부가 란데런으로 배치돼야 하니까 말이지.”

ㆍㆍㆍ

영원의 방벽은 임시 독재관 벤츨의 지휘를 필두로 놀라운 속도로 구축되고 있었다. 그와 고렘을 조종하는 마법사들은 삼일 정도 굶은 것처럼 무섭게 움직였다.

원동력은 1,000마력이 넘는 고렘들, 이 황소 같은 움직임의 연결 고리는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아르눌프와 천오백 명의 마법사를 넋을 놓게 만들 정도였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도 있다.’

아르눌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모든 것이 그림 같이 그려져 있었다. 수천의 짐말과 노동용 영수, 바글바글한 인구와 시온의 보병들도, 심지어 기사조차도 천한 석짐을 지는 것을 마다치 않았다.

“니벨룽 기사단과 니벨룽 군단은 뭔가 다른 것 같소만.”

“동감이오. 우리는 지금 기적을 보고 있어.”

“마탑의 대의전에서 이 정도의 수준을 따라가려면 어느 정도가 걸릴 것으로 봅니까?”

“십 년.”

“지랄.”

그들의 눈동자는 미끄러지듯이 한 곳을 향했다. 시온 니벨룽을 향해.

시온은 여유 있게 자세를 잡고 메이스를 비스듬하게 들어보는 중이었다. 천 평 정도의 원뿔 형태의 수련장에는 관람이 허가된 기사로 꽉 차 있었다. 에릭이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시온쪽을 바라보았다.

“이 자식들아. 각하께서 앞으로 하시는 행동은 다 너희를 훈련 시키기 위한 것이다. 단 하나도 허투루 보지 마라.”

강체술은 현재 두 가지 파로 갈라져 전수되었는데 에릭 파와 고드 파였다. 에릭은 자신을 따르는 기사들에게 한소리를 한 거였다. 

실제로 이번 결투를 시온이 직접 하려고 하는 것은 기사들에게 강체술의 경지를 간접적으로 비춰주기 위한 것이 컸다.

더불어 시온은 자신의 전투 능력을 더 성장시키기 위한 것도 있었다.

정보의 전달을 단절시키고 시온은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앞에서 전신 갑주를 둘둘 매고 등장한 사내의 얼굴은 한 치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꽉 조여 있었다.

‘해보자고. 나.’

상대는 자신이었다. 환영 자아다. 능력의 35%를 당겨간 환영은 생각보다 흉흉한 분위기가 물씬 흘렀다.

그리고 단숨에 첫 번째 일격이 천둥이 치듯 내리쳤다. 쾅쾅! 대체 영문 모를 소리가 지진이 나듯 났다. 거대한 마나와 마나가 한 번씩 격동할 때마다 폭약이 터졌다.

“씨···. 씨발. 이건.”

에릭이 숨넘어갈 듯이 한땀 한땀 되짚으면서 봤다. 시온의 행동각인비술의 능력은 시온의 계산에 의하면 삼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오랫동안 둑 막히듯 갇혀 있었는데 저번의 시간왜곡술과 천지 뒤집기의 영향으로 다음 경지가 엿보였다.

“일단은 반복이 제일 좋지. 와 근데 이게 35%란 말이야? 제기랄···. 나 존나 쌔구나.”

시온은 손목이 저릿저릿하다는 걸 깨닫고선 혀를 찼다. 비술의 반복을, 극대화를 짜기 위해서 일련의 힘을 제어하고 있다곤 하나 솔직히 간담이 서늘할 정도의 공격에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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