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2)
뜨거운 열기로 상황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관중들이 토해내는 것이든 환영 자아의 메이스를 내리치는 것이든.
한 대, 두 대, 세 대, 숫자가 늘어갈수록 메이스가 격하게 요동쳤다. 한치의 공간도 양보하지 않은 빡빡함이 기사들의 넋을 나가게 하고 있다.
맞춰보는 것이 아니라 실전의 수준이라는 것을 눈썰미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알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저게 저희가 알고 있는 강체술이란 말입니까?”
“그렇다고 하더군. 페이스를 너무 올리시는데.”
“저 정도가 적당하다고 보신 게 아닐까.”
“부끄럽다. 너무나도 부끄럽다.”
조금이라도 안간힘을 써야지만 흘러가는 줄기가 보일 거였다. 이대로는 무엇을 보고 익혔는가에 대한 보고도 제대로 올리기 어려웠다.
수준에 맞게 잡아줬는데도 그 수준보다 더 낮다고 얘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에릭은 좀 더 집중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다만, 대부분 사람의 머릿속에 번진 것관 달리 실제로 시온은 페이스를 내고 있었다.
“나를 전장(戰場)에서 안 만난 게 다행이지.”
여러 번의 내리침은 여러 번 강화되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서로의 공세를 빠듯하게 이어가는 것은, 분명히 큰 경험이 쏟아지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의 내가 얻는 것은 아니지. 수확의 때가 핵심이겠군.’
여러 번 마나의 파장이 베어버린 억센 잡초 내음이 가득했다. 이곳의 천 평 정도의 결투장은 용도가 임시였고 당연히 여기에 투자할 자원 따윈 없었다.
그냥 적당히 고루 퍼진 땅이었다. 그곳엔 발목 위를 덮는 잔디와 잡초가 천 평에 걸쳐서 펼쳐져 있었고 마나의 격동 때문에 토막 쳐 사방을 비산했다.
그 근원지인 시온과 환영 자아는 멈출 생각이 없었기에 연거푸 천여평의 풀들이 폭발하며 휘몰아치고 흔들렸다.
“완벽하군······.”
멀리서 그것을 관음하는 천오백 명의 입에선 각의 각색의 신음이 쏟아져 나왔다. 진심 어린 격탄(激嘆). 어쩔 수 없이 느끼는 질시.
고작 해봐야 몇 년 전만 해도 수련 마법사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이들의 마음을 애석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거대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저자를 따라 나룻배를 띄운다면 도착할 곳은 바다이리라.
아르눌프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브뤼헤의 백작이자 칠 단계의 서품 마법사였고, 30억 평의 직물 산지로 제국에 직물을 밀어 넣는 란데르 일대의 주인 란데르 공작 보두앙의 사생아였다.
그의 아버지인 보두앙부터 그 아버지의 아버지까지 모두 강철같은 황제의 추종자였다. 그런데 그는 지금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미치겠군.’
아르눌프가 시온이 던졌던 미끼를 덥썩 물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장기적인 기회 때문이었다.
세계에 또 다른 거인으로 치솟아 오른 것은 다름 아닌 고렘이었다. 고렘과 관련된 모든 것은 하다못해 그 작은 요소까지도 폭등(暴騰)하고 있었다.
‘가문을 위해선 고렘을 탈취해야 하는데.’
고렘과 관련된 것이 어디 한두 가지이겠는가. 제작자, 재료, 설계도, 그리고 그 운영할 수 있는 마법술, 조종술, 집념체의 제약, 단순 열거해봐도 아득할 정도로 많았고 하나하나 시온이 독점하고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시온은 고렘 계파를 열어버린 계파자였다. 그는 마탑에서도 수만 명의 지지자를 집결시키고 있었으며 이들은 곧 큰 소리를 내게 되었다.
‘저런 자한테서? 내가 하는 일이 과연 제국에, 마도에 도움이 되는가?’
스멀스멀 그의 자존심이 박살이 나고 있었다. 보두앙과 그의 가문과 다스려야 할 영지와 황제에 대한 충성, 마탑의 이해관계, 그 이상이 저기에 있었다.
ㆍㆍㆍ
늦은 밤이 내리깔렸다. 240만 평을 아우르는 군사 주둔지.
160억 평의 카스피아 초원지대와 70억 평의 자포리자 일대를 연결하는 고리의 끝자락은 밝게 켜져 있었다.
좌우 50킬로미터에 육박하는 영원의 방벽은 뭉쳐져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안쪽의 군사 기지엔 작은 도시가 반듯하게 세워져 있었고 더욱 깊은 안쪽엔 보물(寶物) 창고가 숨겨져 있었다.
7천 평에 걸쳐서 세워진 밋밋한 창고는 누가 보면 자재 창고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이면 안에는 블랙파이어 가문의 욕망에 단면이 비쳐 있었다.
“더럽게 많군. 이 많은 것을 숨길 수도 있었을 것인데도, 나에게 바치는가?”
“각하께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제국에게 바치는 겁니다.”
“나를 믿는다는 말인가?”
“물론입니다.”
테오하리의 눈빛은 타오르고 있었다. 자포리자 일대의 총독의 임무 중 하나는 블랙파이어 가문이 오백 년 동안 축적해온 재산 일부였다.
별처럼 깔린 수천 점의 명화와 예술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조각품들, 이것은 그것 자체가 3단계 이상의 마법이 숨겨져 있었다.
하나하나가 평민이 반평생 사치할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점점이 끊어지다가 그 뒤에 이어지는 건 으리으리하게 쌓여있는 금덩어리들이었다.
“............ 설명이 안 되는데. 테오하리 총독.”
테오하리는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떨림이 숨겨져 있었다.
“사실, 각하께 보고하지 않았던 저의 비밀 임무가 있었습니다.”
“?”
“저는 황제의 자산 관리자 중 하나였습니다. 블랙파이어 가문의 비밀 재산은 분산되어 관리됐는데, 그 여덟 명의 관리인 중 하나가 바로 저이옵니다.”
“비밀이란 뜻은....”
“예, 말 그대로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황권의 재산입니다. 그 용도는 황제에게 있으며 본연의 목적은 반란의 제압을 위해 축적되어 온 것입니다.”
“..........”
어쩐지 황제의 유명 휴양지 하나를 털었다고는 하나 지나치게 탐욕스러운 것이었다. 테오하리가 이만한 금을 갈취했다면 세간의 민심은 이 기회를 타고 그의 목을 원했을 것인데.
시온은 휘파람을 불었다.
“재미있군. 테오하리 총독. 나는 지금 영원의 방벽에 댈 자금이 부족했단 말이지. 내 영토는 여기와 거리가 멀어서 말이지.”
그 해당 영토에서 금을 유통하는 것과 다른 지역에 유통하는 것은 배로 힘든 일이었다. 하물며 서북부 끝자락까지 니벨룽 가문의 금이 흘러오려면 그 배의 배는 위험했고 각 지역의 권세자들에게 세를 내야 했다.
한두 가지 신경 써야 하는 건 아니었다. 불법적으로 강탈한, 황제로부터 얻은 석벽과 포졸리나 시멘트 외에도 통나무, 철, 밧줄, 짐말, 영수, 식량, 인간 등 수없이 많은 보조 물자가 필요했다.
물론, 워든의 고유 권력인, 제국의 위기 법을 선포했으니 자포리자 일대의 모든 물자와 인간을 수탈할 권리가 있었으나 현대인인 시온의 구미엔 영 맞지 않는 방식이었다.
일한 자에겐 정당한 대가를, 그것이 움드에서 퍼지고 있는 의미심장한 사상이었다. 고로 이 몰아치는 비용을 차용증으로 막아놨는데, 이러면 얘기가 달라진다.
‘내가 먹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이유도 없고.’
직관적인 손익계산으로도 단기적인 순간을 제외하고 나면 모든 부분에서 영원의 방벽에 투입된 비용에 금을 지급하는 것이 유리했다.
“테오하리 너를 워든의 계수관으로 임명하지.”
“......!”
테오하리의 얼굴이 흥분으로 차올랐다.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그에게 시온이 손을 잡아준 거나 다름이 없었다.
“감사하옵니다. 각하.”
“너에게 첫 임무를 내리지. 이 품목을 분별해 팔아치우는 것이야. 나는 예술품이 필요하지 않아. 이곳에 댈 만한 금이 필요하지. 에슬린과 아르눌프와 상의해 봐라.”
“마탑은 언제나 좋은 거래처이지요.”
“주머니가 두둑한 녀석들이지.”
고고한 분위기완 달리 마탑은 은근히 금으로 굴러가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것의 근원은 마법사들이 마탑에 입성하여서 하게 되는 서원(誓願)에 있었다.
그러니 마탑에서 나고 배운 자들은 나와서 수입이 생긴다 해도 그 이십 분지 일의 수입을 마탑에 기부하게 된다.
시온은 황제의 약탈품목창고를 나와 테오하리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있었다. 사실 전반적인 건 골치 아픈 내용이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아는 척을 해주면 됐다.
“비켜! 거기 비키라고!”
“마리온 수석 마법사님. 자제해 주십시오.”
어디서 낯익은 목소리가 난다 했더니 수석 마법사 마리온이었다. 마리온이 그녀의 제자에게 붙잡혀 있었으나 왈가닥 하는 그녀의 고집 상 뿌리쳐질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그녀의 앞에는 이제 막 높이가 높아진 모닥불이 포악하게 타고 있었는데 그녀의 뒤에는 짐말이 불안한지 푸륵푸륵 거리고 있었다.
‘흠. 뭐지 저건?’
짐말이 배부르게 싣고 있는 것은 종이였다. 두터운 종이 뭉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푸른 액체 덕에 밤눈이 밝은 시온은 그게 마법에 대한 실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한 장이 너풀거리면서 막 바닥에 추락했고 시온은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놔! 모두 태워버리게!”
“그래도 남겨 놓으시는 게! 귀중한 자료가 아닙니까.”
“귀중해? 실패한 마법은 필요가 없어!”
마리온과 마리온의 사람들이 끝을 가고 있었다.
“마리온, 무슨 일이지?”
“시온 워든 각하.”
“각하께서 오셨다!”
잠깐의 소란스러움이 가라앉고 마리온이 시온을 흘깃 올려보고는 허리를 폈다.
“각하, 죄송해요. 각하께서 보시기 전에 치워버리려고 했는데.”
부끄러움에 마리온의 얼굴은 잘 익어 버렸다. 약간의 결벽증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그게 심해진 것 같았다.
‘하기야, 마리온이야 마탑에 서원한 마법사가 아니니, 마도를 연구한 것을 마탑에 보낼 의무는 없지.’
어떻게 처리를 하던 그녀에게 달린 일이었다. 시온은 잠시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태우진 마라. 제자들 뜻대로 해. 영 뭐하면 니벨룽 대학에 집어넣어도 되잖느냐.”
시온은 니벨룽 교육소를 넘어 마탑과 같은 마도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는 대학도 키우고 있었다. 아직은 작았지만, 이번 일이 끝나면 저 천오백 명의 원소마법사 중 일부를 계약시킬 수 있을 거였다.
“부끄러워요. 이건 너무 심각한 결함이.”
“뭔데 그렇지?”
“저번에 요청하신 고렘에 대한 탈취 결함에 대한 것으로...”
“....!!”
“역시...”
“실패했나?”
“........예....”
“이런.”
시온은 나름 태연하게 군다고 했으나 약간의 허탈감을 느꼈다. 이것저것 설치가 끝이 났으니 불만 붙이면 되는데 그게 안 붙는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고렘을 전장의 전면에 놓을 수 있었다. 현대인인 시온은 이것이 가지는 전술적인 중요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설프게나마 기마병(奇馬兵)의 상위 병과가 만들어지는 거였다. 기동력만 보태진다면 전격전(電擊戰)이 가능할 거였다.
“실망하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시온은 마리온과 짐말이 싣고 있는 서류 더미를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괜히 화가 나는 거였다. 시온이 던져버리고 싶어질 정도였다.
마리온에게 이것을 맡긴 것이 수도에서였으니 이제는 제시간 내에 도달할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게 한숨이 참을 수 없이 새어 나왔고 시온은 아쉬움에 내용을 보기 위해 종이를 들췄다.
딱 집어낸 것이 하필 마지막 조각이었는지, 왜 이 결과가 실패인지에 대해 적혀있었는데, 시온은 마리온에게 잽싸게 물었다.
“마리온, 그러니까 네가 말한 건 일반 마나의 밀도를 높일 방법이 없다 한 게 맞나?”
“고대어 실력이 여전하시네요. 각하. 정확합니다.”
기본적인 모든 마법상의 언어는 이곳 사람이 봤을 땐 지렁이 굴러가는 느낌일 거였다. 하지만 시온에게는 바보가 아닌 이상 쉽사리 읽어낼 수 있었고, 이어서 몇 장을 빠르게 들춰내며 쭉쭉 읽어갔다.
“네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이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군.”
“????, 무슨 말씀이세요?”
그녀뿐만이 아니라 근방의 마법사들은 동물원의 동물이라도 보는 것처럼 시온을 빤히 바라봤다.
“이 마나의 밀도 문제를 내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 내일 바로 임시 결투장에서 이것을 실험해 보도록 하지.”
현재의 마도의 수준상 밀도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다만 시온은 이것을 여과할 수 있는 보물이 하나 있었는데 이번 여정에서 얻은 용환이었다.
흐릿하던 것이 맑게 닦였고 시온은 용환이 그 역할을 해주지 않겠느냐는 희망을 품었다. 과연 자신이 아닌 고렘에게도 그러한 역할을 해줄지는 해봐야 아는 일이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