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자
날씨는 선선했는데 여전히 영원의 방벽은 건설이 한창이었다.
시온은 천여 평의 평지에 서 있었다. 이곳은 저번 결투 때문에 터진지라, 사방팔방엔 죽은 풀들이 뉘어 있었다.
‘잘 되려나.’
고렘에 마나의 밀도를 욱여넣는 일은 분명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천 명 정도의 마법사가 모였다. 그들이 내는 소리는 시장 바닥의 그것과 유사했다.
원리야 같았다. 마법사야 언제나 그렇듯 자기만의 고집과 원론(原論)이 있기 마련이었다. 마탑의 마법사는 그것이 더 심했다. 천오백 명의 스승은 대략 삼백 명 정도를 더해야 할 것이다.
시각이 다르니 천오백 명도 각자 보는 시야도 다르다. 시온이라고 해서 무조건 관습적인 것을 멀리하는 것은 아니었다. 할 건 했다.
지금같이 열어 재끼고 보여주는 것은 시온이 놓친 것을 이들이 잡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법사들에게는 다른 소식도 있었다.
“아르눌프 얘기 들었나?”
“란데런 공작 보두앙이 참수당했더군. 보두앙을 따르던 백작들도 같이 목이 걸린 모양이다.”
“아르눌프의 아버지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란데런 공작의 상속분은?”
갑작스러운 죽음은 슬퍼해야 할 일이나 그자가 가진 것이 어질어질할 정도로 많다면 그건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일 거였다.
30억 평에 육박하는 직물 산지, 생산지와 산업장, 그것을 회전시킬 수 있는 거미줄 같은 인맥망, 상속자가 결정이 나면 천오백 명의 마법사 중 상당수가 아르눌프에게 들러붙을 것이다.
차기 란데르 공작이 마탑의 수련 동기이자 친구라 하면 출세는 이미 보장되어 있다고 봐도 좋았다. 다만 그의 출신 결함이 문제였다.
얼마 전까지만 했어도 이 정도 사건이라면 왼 종일 탐욕에 젖어서 떠들어댔을 것이나 시온을 알고 나선 8대2로 여기에, 관심을 들여놓고 있는 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여섯 기의 일반 고렘이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 무게에 풀들이 짓눌린다. 그 고렘을 이동시키는 마법사는 하나당 여섯 명이었다. 선임 마법사 하나와 다섯 명의 보조다. 하나의 짝이었고 묶음이었다.
“각하의 앞이다. 정확한 시연에 목숨을 걸어라!”
“알겠습니다!”
이들의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꽉 조여진 근육과 걸음엔 이들이 얼마나 긴장했는지를 알 수 있다.
움드를 기반으로 카페 왕조를 흡수한 니벨룽 왕국의 본 영토가 1천억 평이었고 광활한 서부 암반 지대가 3천억 평이었으며 험지와 깎아지른 산악으로 이루어진 알바 지역이 1천5백억 평 정도 되었다.
그 대륙을 집어삼킨 장본인이 바로 눈앞에 있으니 떨림을 참으려야 참을 수가 없던 것이다.
마탑의 천 명의 마법사도 이들의 신경을 건드리게 했으나 시온의 존재감에 비하자면 깃털에 불과했다.
“각하, 여섯 기가 준비되었습니다.”
차례차례 고렘이 반듯하게 섰다. 코르도바가 번쩍 뭔가가 생각이 났는지 괴었던 턱을 풀었다.
“각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전투 시 이 여섯 명의 마법사에 기사를 배치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헛물 삼킬 건 없지만 고렘을 전선에 놓게 되면 이들의 포석을 다시 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였다.
“허락하지. 고드와 에릭과 상의해서 가져와 보도록 해라.”
“영광을 주신 것에 감사드리옵니다.”
아이디어는 아이디어다. 시온이 아무리 현대인이라지만 혼자서 다 할 수는 없는 거였다. 그들에게 던져 줄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아이디어가 날아갈 수 있는 바람 정도일 것이다.
시온은 앞에 있는 허리 반 만한 미끈한 대리석 탁자 앞에 용환을 가슴 퍽에서 꺼냈다. 가운데에 있는 온갖 찬란한 색의 비단 함에 내려놓았다.
안에 용환이 들어가자, 마나가 한 차례 출렁였다.
“훌륭하군. 에슬린.”
“아슬아슬하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워든 각하.”
시온은 에슬린을 쳐다봤고 그의 얼굴엔 기쁨이 스친 듯했다. 정수나 마석, 환을 감쌀 수 있는 함은 단지 용도가 그것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안전하게 보호하고, 그것을 정제하며, 증폭시키기도 했다. 필요하다면 간단한 마법이 꾸역꾸역 들어있기도 했다.
물론, 시온이 원한 건 자잘한 것이 붙어 있는 게 아니었다. 오직 그 전이에 대한 효율에 집중된 물품이었다.
“좋군. 아주 좋아. 기대치도 않았는데.”
정말이었다. 이 정도 급의 함을 구하려면 마탑을 샅샅이 뒤져야 했다. 옆에서 그것을 보던 마리온의 안색이 납으로 변했다. 초조한지 입술을 긁었다.
‘에슬린 저것이 진짜. 하지만 이번 공로만 각하께 인정된다면···! 너에게 뒤지지 않아!’
그녀는 이번 일이 성공할 것이라며 마음을 달래고 있었고 그러는 와중에 저쪽 끝에서 다섯 기의 고렘이 거대한 묵석(墨石)을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다들 눈알이 휘둥그레졌다. 묵석에 대한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은 대칸의 아들 주챠의 케식을 전멸시킨 카스피아 늪지대 전투, 거기에 참여한 정예밖에는 없었다.
시온이 그곳에서 보여줬던 건 광기였다. 고드는 그때의 장면이 선명하게 나서인지 감전된 것처럼 잠시 떨었다.
6미터의 높이에 묵석은 거대했고 무거웠고 견고했다. 최후(最後)의 비석. 고대 제국의 마법 증폭 석이었다. 추정컨대 기존의 증폭 물품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먼지가 풀썩 일어난다,
최후의 비석이 적당한 거리에 놓였다. 지켜보던 천 명의 마법사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들은 마탑에 있는 증폭석 보다 더욱 거대하단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용환과 최후의 비석. 이것 두 개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고렘의 탈취를 막고 그 공급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선 마나의 밀도를 올려야 했다. 어지간한 술식은 마리온이 구현해놔서 밀도 문제만 다음 단계로 올리면 됐다.
“해볼까. 준비해라.”
“예. 각하.”
“알겠사옵니다.”
대수식(大數式)은 총 네 군데였다. 그 한가운데에 마나를 기울이고 집중시킨다.
“맙···. 소사···.”
“천지가 요동친다!”
처음 보는 마탑의 마법사들은 얼굴이 벌게져서 벌어지는 현상을 하나도 빠트릴 수 없다는 집중력으로 노려봤다.
최후의 비석의 주위로 성난 짐승처럼 마나가 날뛰기 시작했다. 그곳에 상당량의 마나를 흘려보내고 있는 근원지는 시온이었다.
시온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득한 냄새가 났다. 옷자락이 미친년처럼 나부꼈다. 소용돌이치며 마나가 최후의 비석으로 뒤엉키고 용환으로 몰아쳤다.
날아가 버렸어야 했으나 꿈틀거리면서 그것을 받아먹는다. 위험한가? 용환이 깨지면? 시온의 직감이 경고했다. 좋지 않았다. 꽤 잘 맞는 편이라고 생각하기에, 버티지 못하면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헤어지기엔 아쉬운 물건이었다. 고룡을 다시 찾을 방법은 전무. 선택의 시간이었다.
“칫······.”
망설임의 인내심이 뚝 하고 끊기려고 하는데 시온의 눈가가 휘어졌다.
‘뭐지?’
무언가를 말하는 것처럼 용환이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아주 잠깐 왔다가 없어진 밋밋한 무엇. 하지만 분명히 시온은 봤다. 이어서 홱 하고 고개가 돌아갔다.
천 명이 넘는 마법사가 각양각색으로 절정에 오르고 있었다. 하기야 마법사라면 게거품을 물어도 이상하지 않은 영예의 관음인 것이다.
그곳에서 일렁이는 찰나의 순간, 시온은 곧바로 그곳을 향해 뛰었다.
“각하!!!??”
“??????”
“이런 제길, 집중해! 에슬린! 보는 눈이 많아! 낯깎이게 굴지 마!”
마리온이 카랑카랑하게 소리쳤다. 에슬린은 그 울음에 정신을 차렸다. 시온의 역할까지 해야 하는 거였다.
대수식은 잠시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마저 마칠 수도 없이 숨 가쁘게 아르눌프의 앞에 시온이 섰다.
“아르눌프!”
“????”
“네 그 보석을 다오!”
시온이 외친 것은 아르눌프의 오른쪽 어깨에 매달려 있는 활활 타오르는 보석. 아르눌프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지만, 곧 깨달았다. 보석이라고는 양어깨에 매달고 있는 판 란데런 그의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유품밖엔 없었으니까.
“겉옷을 이리 내라.”
“각하, 하지만 이건!”
“빨리!”
그의 머릿속엔 오만 가지의 갈등이 얽혔다. 다만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가문의 유품보다도 이 남자가 그의 가슴을 지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깄습니다!”
“고맙다.”
영문은 모르지만, 아르눌프는 잽싸게 판 란데런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망토 일체의 겉옷을 시온에게 넘겼다. 시온은 그것을 받자마자 보석을 쭉 뜯어냈다. 순수한 악력.
오른쪽 것만 있으면 됐다. 이어서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자, 에슬린이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각하, 빨리!”
“수고했다!”
두 쌍의 눈은 설명을 바라는 듯했었으나 시온도 그것을 해주기에는 원인이 부족했다. 그것보다는 이것의 용도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골몰이 생각해봐도 답은 떠오르지를 않았다. 낭패였다.
“썩을.”
‘시간이 너무 없잖아.’
시온은 갑자기 짜증이 확 났다. 용환이 깨지든지 욕심을 부리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고렘을 전선에서 쓰고 싶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견적이 나오질 않았다. 시온은 용도를 알아내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한 나머지 홧김에 그것을 찍어버렸다.
보석이 터져버렸고 팽팽하게 겨루던 마나도 균열이 일어났다. 저지르고 나니 후회가 몰려왔다. 시발.
“????”
근데 갑자기 공간의 문이 열렸다. 시온은 기억을 뒤졌다. 이건 들어가야 했다. 문고리를 돌리자마자, 아공간으로 들어간 시온은 낯선 곳에 도착했다.
시간의 경계점.
바깥은 멈춰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억에 있던 차원보다는 몇 단계나 높은 아공간임이 틀림없었다.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불안감과 함께 동시에 고개를 드는 것은 호기심이었다.
“분명히······. 세계의 지식에 들어왔다.”
시온은 편의상 이 같은 공간을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원인불명. 하지만 이 안에는 항상 뭔가 있었다.
주위가 몇 평인지에 대해서는 감이 오질 않았지만, 일단은 널찍한 것은 확실했다. 굵은 기둥이 수천 개는 넘어 보였다.
빛이 거의 없어서 아주 희미한 발광을, 유혹에 걸음을 맡길 수밖엔 없었다.
그렇게 홀리듯 걸음을 옮긴 시온은 10미터의 높이의 틈 하나 없는 철문에 도착했다. 고개를 올려야 했는데, 시온은 알았다. 이거를 밀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주위를 휘적휘적 돌아봤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나가기 위해서라도 이 문을 밀어야 했다. 만약에 빈약한 마법사가 들어왔다면 여기에 영원히 갇힐지도 몰랐다.
“씁···.”
시온은 정신을 집중하고 이 10미터 짜리의 철문을 밀기 위해 차가운 면에 양손을 들이대었다. 강체술로 달궈진 거대한 마나를 동반한 거력이 앞을 밀어붙였다.
문틈이 점차 벌어졌다. 한 번 열리기 시작하니 나머지는 금방이었다. 시온은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 비 오듯 흐르는 땀을 한 번 훔치고는 양쪽의 공간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불빛이 눈을 떴다.
“이건······?”
시온의 눈길이 향한 곳엔 8미터높이의 고렘이 우뚝 서 있었다. 영혼이 나간 듯 점잖아 보이는 듯했으나 시온은 거인의 이름을 확인했다.
“멸망(滅亡)의 검날, 파멸자.”
거창한 이름이었다. 게다가 시온이 알고 있던 것관 모든 면에서 다른 목적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대 전쟁용 고렘이군.”
천정의 높이를 알 수가 없는 원형의 방 안에 옛적부터 고독하게 있었을 녀석이었다. 시온은 다시 주변을 살폈다.
적이 있든지 수호자가 있든지, 아니면 가져가는데 까다로운 조건이 있을 거였다. 그러나 기감을 흩뿌려도 희한하게 개미 한 마리 걸리는 게 없었다. 정말로 여기에 이것과 시온 둘밖엔 없었다.
“흠···. 아, 이런 방식이군.”
시온은 삼면에 퍼져있는 대수식을 확인했다. 동시에 마나를 불어넣어 공간을 이전시키는 것이리라. 단번에 그 의미를 이해한 시온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에겐 절대로 가져갈 수 없는 물건이겠군. 이곳에 동시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말이지.”
대수식을 가동할 만한 칠 단계 마법사가 세 명이 필요했는데 하지만 시온에겐 해결 방법이 있었다. 환영 자아.
환영 반지가 마나를 흠뻑 빨아들이더니 환영 자아를 두 명 만들었다. 대량의 마나가 다시 한 번 대수식으로 빨려 들어갔다. 가동할 수만 있을 뿐 배울 수가 없는 공간이전 마법이 시연됐다.
“.......?”
시온은 멸망의 검날, 파멸자와 함께 다시 원래의 장소로 떨어졌다.
“각···. 각하???”
“어, 음. 뭔가 떨어질 테니 조심해라.”
무슨 말인지 의문을 표하고 있는 이들의 위로 검은 그림자가 뒤집히더니 곧 뭔가가 추락했다.
주위가 다이너마이트라도 터진 듯이 흔들렸다. 파멸자의 첫 등장이었다. 검도 한 자루 들고 있고 일반 고렘과 외견부터가 달랐다. 이건 고대 기사의 형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