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4화 (294/304)

파멸자(3)

제국의 황제라면 자연스럽게 계략을 꾸몄을 것인데 골족의 대칸은 대번 보복을 맹세했다. 

아마도 이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이 차이일 것이다. 라산 왕국을 정복했는데도 대칸부터가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거였다.

그 사이에 내부의 분쟁으로 한 번 교체가 된 대칸이었다. 같은 가문에서 바꿔봐야 무슨 의미겠느냐마는, 나름의 불안이 넘쳐 흐른다고 봐야 했다.

“아마도, 유지하는 게 어렵다고 본 것일지도 모릅니다. 모래성 위의 탑인 거죠.”

“정복할 줄 알지만 지배할 줄 모른다?”

“수용할 부분은 있어요. 몇 세기 동안 약탈만 해온 것들이에요. 대충 들어봐도 간단한 벽돌 하나 지을 줄 모르는 무지렁뱅이들이에요.”

마리온이 톡톡 쏘았다.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었다. 하긴 제국 사람 중에 라산 연합 왕국도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핏대를 세우는 사람이 천지인데 하물며 근본적으로 왕국이란 기틀조차도 없는 야만인들을 반가워할 만한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무지렁뱅이가 도축 칼을 들고 뛰어온다는 점 아니겠나.’

“예상하신 겁니까? 영원의 방벽은 무리한 작전이긴 했습니다. 과연 각하께서는 몇 수를 내다보고 계신 것인지······.”

“음.”

귀족과 기사가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 그 감정이 이리저리 퍼졌다. 당연하다는 듯 시온의 위대함으로 결정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알렉시오스의 의견이었다. 단언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가 해줬던 골족에 대한 체험과 경험. 그리고 허술한 기반 없는 정부체계라는 것을 말이다.

하여튼 그렇다고 치켜세워주기도 묘한 관계이기도 했다. 시온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을 선택했다. 한 번 띄워주면 다시 실비아를 들이댈 건데.

‘내가 뭔 수로 라산 왕국을 되찾아주겠느냔 말이야.’

할 거 하고 가만히 있는 게 더 낫다고 보고 있었다. 카스피아 초원지대를 넘어서면 본격적인 전장이 펼쳐지게 되는데 당장에 시온이 맞닥뜨려야 할 규모는 제국 급의 대륙이었다. 단일 면적으로는 제국보다 훨씬 넓었다.

비옥한 토지로 뭉친 제국과 다르게 라산 왕국과 골족의 땅은 서부 지대 못지않게 험했다. 쓸만해 보여도 개간 안 된 경우가 많았는데 자연스레 거까지 댈 만한 석벽과 포졸리나 시멘트가 모자란 경우가 태반이었다.

중간에 골족이 약탈 질까지 숨 쉬듯이 하는데 어떤 바보가 거기에 물자를 대고 투자를 할까.

라산 왕국의 수도가 아무루 강의 저지대 해면에 바짝 붙어 있는 걸 고려하면 관도를 연결하는 것만 해도 핏방울이 강처럼 흐를 일이다. 전쟁 아니고서야 답이 없단 뜻이다.

“각하. 테오하리 총독이 뵙겠다옵니다.”

격론이 튀어 오르는 와중에 홍일점인 마리온이 환기를 시킨다. 시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일단은 배신은 아니군.’

테오하리는 황제의 여덟 명의 비밀 재산관리자 중 하나였고 시온은 그에게 꽤 중요한 직책을 맡기고 일을 시켰다. 판매처야 뻔했다. 마탑 아니면 수도 근방이었다.

수도에 파려면 밀수와 비밀 판매장을 거쳐야 했고, 마탑에 보내도 황제파 제후들의 감시망을 녹여야 했다. 당연히 개인의 능력이 총망라할 수밖에 없는 작업인 거였다.

단순하게 나열해봐도, 인맥이 있어야 했고, 뇌물을 줘야 했고, 정치적 거래를 해야 했고, 협박해야 했다. 워든의 계수관 자체가 권력 자체는 대권(代權) 이었기에 협박의 내용이야 뻔했다.

‘뭐 내가 개 잡듯 패기 전에 비키라는 뜻이겠지.’

물론, 그건 진심이었다. 방해하면 죽여버릴 계획이었다. 지금 사방에서 적이 밀려오는데 사정 봐줄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테오하리가 배신한다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어차피 따땃한 황제의 품으로 돌아가 워든이 이런저런 나쁜 짓을 했다며 고해하면 그만이니까.

다만, 그러지 않을 거라고 가능성을 재봤기에 그에게 이 일을, 거금이, 막대한 물자, 특히 밀이 십만 톤 정도는 필요했다. 금도 좋지만, 전시엔 밀값이 금화보다 비싸진다.

따라서······.

시온은 언덕 아래로 이어져 있는 긴 짐말의 행렬을 목격했다. 굽이굽이 쭉 펼쳐져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었다. 짐말엔 식량과 금화가 두꺼운 직물에 둘러싸여 고봉처럼 모셔져 있었다. 답이었군. 시온의 입꼬리가 자연히 올라간다.

테오하리가 가져온 물량과 금화만 해도 현재 총력전이 걸린 상황에선 누구 보다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었다. 막아내야 하는 입장에선 먹을 게 준비돼 있고 없고는 압박이 천지 차이였다.

자포리자 일대가 비록 70억평 정도의 평지를 자랑한다고 하지만, 여기서 의미 있는 밀의 규모가 나오는 곳은 자포리자 일대의 수장 격인 오데사밖엔 없었다. 나머지는 인구의 수준도 십 분지 일이었다.

오데사가 무너지면 자포리자 일대는 고장이 나버린다. 바로 70억 평이 골족의 수족으로 넘어가게 되니 이곳의 공략 난이도는 쉬웠다.

그래서 이곳에 들어오기 위한 길목에 장벽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 라산 왕국의 망명 왕자 알렉시오스의 조언이었다.

“각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보고는 정리해서 내일 드리겠습니다.”

언덕 아래에서 곱슬머리를 한 남자가 주홍빛으로 뒤덮여서 올라왔다. 테오하리였다. 노을이 사방팔방을 짓물렀다. 자신감 넘치는 기운이 가득한 눈. 시온은 그에게 말했다.

“훌륭하군. 테오하리. 내가 절실히 바라던 바를 알아서 가져왔구나. 분명히 유혹이 있었을 거라고 나는 봤다만.”

“앞으로 그런 의심이 옅어지도록 뼈가 닳도록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제 의지는 각하께서 본뜨시는 제국을 위한 것입니다.”

‘이 녀석. 뭔가 위험해지는 데??’

그냥 한 번 던져본 개념이고 그다지 현대적인 개념도 아닌 제국주의에 대한 사상이었다. 하지만 근본이 철저한 황조와 왕조, 귀족이 수 세기를 해먹고 있는 이곳에선 자극이 꽤나 심한 모양이다.

“골 제국의 대칸이 나에게 복수를 하겠다는군. 듣자하니 나를 가지고 불장난을 하고 싶은 모양이야.”

“!!!!!!”

“고로 네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최대한 밀을 구해와야 해. 황제가 확보할 것까지 모조리 다. 황제의 그 정예 군단이 움직일 것 같나?”

“절대로 움직일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배불러도 밀을 쌓아두는 편이죠. 이건······.”

“그렇지. 수단 방법 가리면 안 된다.”

노을이 점점 더 입맛이 돋을 정도로 진해졌다. 시온은 한 마디를 더했다. 아무래도 이 녀석을 위한 사상을 한 번 더 지펴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제국의 유일한 방패는 우리다. 우리가 무너지면 제국 민의 수천만이 죽는다. 제국이 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싶은가? 테오하리 총독.”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절대로.”

너무나 결연한 표정이라 시온은 살짝 난감해졌지만, 저런 타입에게는 이런 식으로 밀어붙이는 편이 나을 거였다.

ㆍㆍㆍ

아르눌프는 결정해야 했다. 사실 지금 그의 위치는 제법 상승세였다. 시온에게 따로 의견을 전할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발전한 거였다.

그걸 다른 마법사가 모를 리가 없었고, 다들 질시 아닌 질시까지 퍼붓는 와중이었다. 그러나 마냥 속 편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가 입고 있는 겉옷의 오른쪽 어깨엔 뻥 뚫린 공간이 그의 심정이었다. 

가문. 

브뤼헤의 백작이자 판 란데런의 유력 상속자이자 란데런 일대의 30억 평의 직물 산지의 일대의 권력자인 란데런 공작이라는 작위.

“제기랄! 제기랄! 아버지!”

복잡했다. 황제의 충성파인 판 란데런의 입장과 그 판 란데런을 떠받고 있는 다섯 개의 가문, 긴느, 릴, 이페런, 헨트. 이 다섯 가문은 절대 동의하지 않을 거였다.

‘내가 예정대로 고렘 탈취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나한테 공작 위가 상속되게끔 동의하지 않겠지. 빌어먹을.’

사생아로서의 그의 불안한 결함이 이 이유였다. 오랫동안 갈망했던 일이 아닌가? 그는 충분히 가문으로 돌아가 일대의 주인으로서 당당히 란데런을 다스리고 싶었다.

마탑에서 조차도 피가 마르는 수련을 참게 해줄 수 있었던 건 사생아이기 때문에 더 많은 능력과 자격이 필요하다는 강박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게 문제였다.

‘시온 니벨룽. 위대한 자.’

보고 말아버린 것이다. 휘말려 들어 그의 카리스마에 발버둥 치고 있었다. 오랜 기간의 수련은 그의 인격에 한 가지 더 뜻을 가지게 했다. 마도! 그 마도를 위해 자신이 뭘 할 수 있을까. 그 위대한 의지에······.

문제는 시온을 따라간다는 것은 판 란데런의 고유 권력인 란데런 공작의 작위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건 그에게 있어서 일생을 좌지우지할만한 선택의 순간이었다. 피가 나도록 고민을 한 결과 그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서신을 움켜쥐었다. 다섯 가문이 요구하는 비밀 서신, 여기에 그가 던진 건 엿이었다.

촛불과 서신은 교미하듯이 일렁였다. 곧 활활 타올라 재가 되어 그의 탁상 위에서 자욱한 기운을 피웠다.

“후······. 상속 포기인가. 엘리 누님. 잘 가져요. 나랑 지독히 싸웠잖아. 축하해. 허망한 결과지만.”

정해버리고 나자 후련해졌다. 상속은 그의 배다른 누나인 엘리 판 란데런에게 갈 거였다.

다른 마법사가 여섯 명이 차례차례 들어왔다. 이 여섯 명은 친우 그 이상의 동료였다.

“돌아갈 건가?”

“어떻게 할 거죠?”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시온 각하와 함께할 거다. 우리 우정을 생각해서 나는 입은 반드시 다물 것이니······.”

“나 역시 뜻은 같아. 고로, 칼을 좀 대야겠어.”

“!!!!!!!!”

원래 계획하고 가담했던 자들을 바치고 기반을 닦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ㆍㆍㆍ

멸망의 검날, 파멸자가 걷는 것만으로도 진귀한 광경이었다. 7.5 미터의 높이에 육중함은 땅이 흔들리고 가지고 있는 투박한 검은 강철보다 견고해서 맞는다고 하면 으깨질 수밖에 없었다.

건설 작업에 쓸 수가 없는 그 자체의 목적인 결전용의 기사형 골렘으로 딱 하나의 의도인 대량 학살을 위해 태어난 녀석이었다.

“흠······.”

시온은 녀석의 고대 제국 기사의 의전으로 차있는 파멸자의 왼쪽 어깨 위에서 감상 중이었다. 

대단했다. 마나가 소모되는 속도가 그 이상이었고 여기에 여섯 개의 마법이 난사를 한다면 얼마나 많은 마나가 소모될지는 여전히 어렴풋했다. 녀석은 행복하게 시온의 마나를 빨아먹었다.

“이쯤일 건데.”

시온은 지도를 쫙 피면서 생각했다. 본래 사냥꾼으로서 유년기를 전부 채웠고, 영수 사냥꾼들을 소집해 전문적인 사냥터를 육성해왔다.

재해 영수를 직접 사냥하기도 했고 영수 사냥꾼에게서 종종 보고를 받기에 굳이 그 지역이 낯설다고 해도 어디쯤 가장 강한 영수가 자리 잡고 있는지 알았다.

킁.

시온은 흘러오는 악취에 고개를 들었다. 전방에서 오는 것으로 썩어가는 짐승과 짐승과(科) 영수들로 산적했다. 영역표시다.

“......나와라. 이것아. 들어가야 되냐?”

어쩔 수 없이 시온은 파멸자의 어깨 위를 타고 안쪽으로 대범하게 들어갔다. 영역에 발자국이 추락하자 대번에 알아차린 녀석이 울부짖었다.

“어우···.”

귀가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고성이었다. 그리고 육중한 게 저 끝자락에서 내달리고 있었다. 바로 뒤에 있던 세 명의 마법사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뒤로 거리를 벌려라. 에슬린, 마리온, 아르눌프.”

“알겠습니다. 각하.”

말 고삐의 돌리고 이들이 적정거리까지 주춤했다. 둘? 아니 셋이었다. 세 마리의 영수가 뛰어오고 있었다. 

크기는 4.5미터 정도로 보였고 세 마리란 게 변수라면 변수. 무게가 육중했고 탐욕스럽게 주둥이를 벌렸다. 수백 개의 이빨이 억세게 무성했고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두 팔이 이어진다. 털은 은빛.

“재해 영수는 아니고, 되기 전의 놈들이구나. 것도 세 마리나.”

파멸자가 갑자기 맞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겁이란 건 찾아볼 수 없는 고대의 기사는 검으로 앞에 녀석을 내려쳤다. 어깻죽지로 박혀 들어갔는데 파멸자의 힘은 그 이상이어서 그것을 밀어버렸다.

땅이 흔들리는 굉음이 이어진다.

“?????”

“?!!”

뒤에서 보던 세 명의 마법사가 경악에 찰 때쯤, 바닥을 구르는 영수는 일단은 반쪽이 되는 것을 면했다. 날이 무뎠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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