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과의 전초전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그래?”
시온은 좀 더 작업하려다가 말았다. 삼십여 명의 마법사를 눌러주고 풀어주고를 반복할 수는 있었지만 영 구미가 당기진 않았다.
항상 극한까지 몰고 가는 게 좋은 것은 아니었다. 멩구티의 사건만 봐도. 시온은 멩구티를 카스피아 평원 어딘가에 잘 묻어주었다.
어쨌든 궁지에 몰린 쥐는 자기도 모르게 고양이를 무는 법이었다.
“그럼 용서하겠다. 지금은 중요한 상황이니 말이다. 제국에 목숨을 바치겠나?”
이제는 술술 나왔다. 한 번 이 개념을 대면 어지간하면 꼼짝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만큼 명예와 관습을 중요시하는 이곳 사람들에겐 달콤한 모양이었다.
“하겠습니다!”
“기회만 주신다면 제국에 마나를 바치겠습니다!”
기사는 심장이고 마법사는 마나였다. 사실 그게 그거인데 그만큼 지금 상황을 가볍게 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시온은 이들에게 한 가지 전달되지 않은 사항에 대해서 말했다.
“모두 자신의 마나를 걸고 서약하겠는가?”
“하겠습니다.”
“좋다. 지금 백오십만이 넘는 골 제국의 군세가 에가에 집중되고 있다. 곧 이곳을 넘겠다는 심보지.”
에가는 카스피아 초원지대 앞에 있는 거점 도시였다. 카스피아 초원지대엔 살기가 힘들어서 이곳을 경계로 제국과 라산 왕국이 갈라져 있었다.
에가에 백만이 넘는 군대가 모인다는 것만으로도 한 번에 밀어붙일 힘을 비축하고 있는 거라고 봐야 했다.
“!!!!”
“그러시다는 건···!”
“너희가 너희의 죄를 제국에 씻기 위해선 최전방으로 투입될 것이다. 공을 세우고 살아남아라. 그러면 너희가 원하는 금과 영지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시온은 일단 던져놓아 보고 이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때 불덩이 같은 기운이 올라왔다. 아무래도 영지에 대한 욕구가 심했던 모양이었다.
마탑을 나온 마법사들이 원하는 바야 남작급 영지를 가지는 것이었다. 그것을 확실히 가질 방법은 전공이 제일 좋았다.
오히려 최전방에 자진하는, 죽음에 뛰어드는 마법사도 많은 것이다. 아무튼 시온은 긍정적인 이들의 반응에 곧장 아르눌프를 불렀다.
“아르눌프. 이들은 너와 같이 쓰임새가 있으니 따로 말을 잘 해둬라.”
“.....!!!!”
아르눌프는 뭐라도 채인 것 같은 표정이 됐다. 전시의 법상 분명히 줄줄이 참수될 줄 알았던 거였다. 차라리 그편이 그로서는 속이 편할지도 몰랐다. 자고로 사람은 한 번 얽히면 반드시 복수하기 마련이었다.
“좀 더 큰 걸 보고 인내를 해라. 반드시 이 영원의 장벽 전투에서 이겨야 한다. 지게 되면 뒤가 없어.”
“알겠습니다. 각하!”
목소리 톤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원만하게 할 수 있을지 말지는 아르눌프에게 달렸다.
ㆍㆍㆍ
눈 깜짝할 사이에 카스피아 평원에 바글바글하게 인간이 모였다. 오자마자 대뜸 하는 것이 진지 구축이었다. 백 오십만을 수용해야 하니 그 넓이가 장난이 아니었다.
대략 봐도 8천 평의 넓이의 군단 막사가 수십 개가 늘어지기 시작했으니 최대 규모는 굳이 예측할 필요가 없었다.
“꽤 시간이 걸릴 겁니다.”
에슬린이 자신했다. 애초에 이곳의 지리를 그냥 잡은 게 아니었다. 카스피아 평원의 삼십 프로는 질퍽한 평지였는데 아니나다를까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대칸의 군대는 개간작업부터 해야 했다. 하지 못하면 기둥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한다. 단순 막사가 아니라 공성전을 위한 진지는 훨씬 난이도가 높고 손이 많이 갔다.
방어선을 세우기 위한 석벽부터, 곳곳에 세울 통나무도 수만 톤이 들어간다. 식량을 보호할 만한 진지의 부위는 그 규모와 크기가 더 엄중해져서 백만 정도의 군세의 식량 파이프는 거의 요새 급이라고 봐야 했다.
여기에 그곳으로 식량을 댈 관도 곳곳에 타워를 지어야 하고 의료시설도 준비해야 한다. 공성전의 핵심은 질병이었다.
단순히 먹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썩어가는 것이 사방 천지인지라 질병이 범람하게 되는데 이것을 잡아내려면 치료 마법사가 필수였다.
간단히 포위하기 위한 진지를 건설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자칫 잘못하면 자멸해버릴 만한 요소가 많기에 이 정도 백만 급의 규모는 이곳에서 그다지 벌어지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굳이 힘 싸움을 하자면 다른 방식도 많고. 그래서 총력전으로 기울 지는 않았다. 어지간히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전투인 거였다.
‘적어도 역사엔 뚜렷하게 남겠어.’
시온은 장벽 위로 올라갔다. 종종거리며 수십의 인원이 줄줄이 따라 올라왔다. 완성된 영원의 방벽은 정말로 그 견고함이 남달랐다. 벤츨의 말에 의하면 제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들어갈 만한 완성도라고 했다.
“그 정돈가?”
“장담합니다. 물론, 고대에서부터 뿌리내려온 것들은 빼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렇군.”
애초에 기본이 되는 재료가 황제가 아끼던 휴양지에서 나왔기 때문에 질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온의 시선이 지평선 쪽으로 향했다. 꾸역꾸역 말뚝을 박아 넣는 몇만의 인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었다.
개간 작업도 동시인지라 물을 빼거나 흙을 퍼붓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특징 삼을 만한 점은 거의 노예였다.
게다가 구축 수준도 제법이었다. 인구가 많아도 골족이 이렇게 큰 군세를 이루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저런 점에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제대로였다. 라산 왕국을 완전히 흡수한 거였다.
“흠···. 거리도 적당하군.”
“마법이 닿지 않는 거리입니다. 누가 측정해서 저들에게 알려줬다고밖에는.”
원소 마법사의 공격은 그거 자체로 범위가 넓고 강력하지만 대게 거리가 짧았다. 가장 긴 것을 감안해도 닿지 않을 위치에 포위의 시작점을 세워놓은 것이다.
“각하. 오늘부터 바로 기습을 들어가면 될 것 같습니다.”
“음. 그럴까.”
가만히 내버려 두는 건 체질상 영아니었다. 유격전에는 시온도 이골이 낫고 여우 같다는 정평이 있었다. 유비드 가문과의 일전은 아직 까지도 제국 참모관학에서도 회자됐던 것이다.
ㆍㆍㆍ
영원의 장벽은 특이했는데 비밀 관문이 양쪽에 더 있었다. 보통 장벽이라고 하면, 특이 카스피아 초원 같은 곳에는 별도의 관문을 만들진 않지만, 만든이가 마탑에서도 소문난 마공장인인 벤츨인 탓이다.
벤츨 자체부터가 마법에 조예가 깊었고 그것을 건축물에 접목시키는 것에 환장한 사람이었다. 자연히 은신 마법이 걸려 있는데 그 교묘함이 어지간하면 알 수가 없는 최상급이었다.
게다가 모든 관문의 구조가 그렇듯이 안쪽에서만 열 수 있는데 이곳의 관문은 더욱 특이해서 마법사가 아니면 열 수가 없었다.
“열어라.”
“각하께서 열라 하신다!”
시온과 에릭, 고드 그리고 육백은 그 와중에도 실력으로 추려놓은 자들이었다. 치고 빠지는 데 있어서 어설픈 자가 있다면 전체가 위험해지고 이런 작전의 특징상 낙오된 자는 곧바로 사망한다고 봐도 됐다.
“쓸만하군. 벤츨, 소리도 나지 않는다니.”
“이번에 목숨을 건다더니 과연 워든 각하의 임시 독재관.”
“각하께 목숨을 바쳐라!”
“죽을 거면 기사답게 죽어라!”
조용히 이들의 서약이 낭랑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시온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이런 것은 여전히 적응이 되질 않는 탓이다.
시온도 기사에서부터 여기까지 올라왔지만 저런 어처구니없는 서약 맹세는 전투 직전에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최우선으로 여겨라!”
시온이 기사들을 훑어보며 얌전히 한마디를 하자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히려 성나게 감동해버렸다. 역효과였군. 시온은 짤막하게 중얼거리곤 영수마(馬)의 옆을 쳤다.
영수마가 빠르기 질주했다. 찬 공기가 세차게 밀려 들어왔다. 점점 더 속도를 올리고 올린다.
전원 6단계의 음소 마법이 걸려 있는데 아무리 수준 높은 차단 마법이 있다 해도 이 정도 속력이면 감출 수가 없었다.
요란한 북소리가 공포스럽게 터졌고, 시온은 앤드류의 비술을 꺼냈다. 저번의 집중 훈련으로 비술의 수준은 오 단계에 도달했다. 이쯤 되면 의사(意思)라도 있는 것 마냥 죽여야 할 것과 죽이지 않을 것을 세심하게 구별할 정도였다.
원리야 시온도 몰랐다. 예전에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들었다면 무덤에서라도 기어 나왔을 것이다.
육백의 기마 공격은 하나의 딱딱한 덩어리처럼 진형의 측면을 묵직하게 박았다. 인간이 걸레 조각처럼 흩어졌다. 박힌 부분이 터져 버린 것이다. 마나가 찢어질 듯이 흔들렸다.
골족이 구사하던 가속돌격의 개량 버전이었다. 시온이 따로 고드와 에릭에게 주문한 것이었는데 그렇게 다투면서도 할 건 다 했는지라 그 위력과 규모가 이들의 것보다 한 수 위였다.
‘휘유.’
순식간에 얼마를 발겨내서 죽였는지 공중엔 핏물이 거미줄처럼 뻗쳐 있었다. 곧 아래로 추락할 것들이지만, 시간왜곡술을 다루기 시작한 시온의 기감엔 이것이 느릿느릿하게 보였다.
시온은 천지뒤집기를 터뜨렸다. 이제 막 백병전이 시작되려고 하는 찰나 시온의 메이스를 중심으로 중력이 쏠려 버렸다. 기우뚱하더니 근처에 있던 천 명이 넘는 인원이 밧줄에 매인 듯 끌려 들어왔다.
시온의 기사들은 안전하게 검으로 멱을 따기 시작했다. 물론 한순간이다.
천여 명 뒤에는 수만 명이 있고 수만 명 뒤에는 수십만 명이 있다. 이러니 조금이라도 늦으면 빼곡하게 감싸이게 된다.
삽시간에 피가 강처럼 흘렀다. 시온은 지릿한 그 냄새에 코가 나갈 것 같았다. 시온의 눈동자가 옆을 훑었다. 기사들은 되려 흥분한 듯했다.
‘내가 뭘 만들어놓은 거지?’
시온의 니벨룽 기사단은 시온이 직접 컨트롤 하는 경우가 많아서 육성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많은 것을 의도했다.
하여튼 보통의 기사들이라면 벌써 질려버리거나 손이 무딜 법도 한데 고드와 에릭의 강체술로 전반적으로 삼 단계에 도달한 이들이 내는 강체술의 동력은 평균적으로 십이 넘었다.
일반 제국 기사가 온갖 마법 장비를 떡칠하고 죽을 힘을 다해야 사, 오인 점을 보면 그들의 두 배가 가볍게 나오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온갖 보석과 대대로 내려오는 가문의 마법 무구로 강체술을 보조할 수 있는 오급의 마나 저장고가 최소 다섯 개는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한 마디로 실력과 장비가 결합된 괴물들이었는데 여기에 시온이 압도적으로 만들어내는 전장의 유리함까지 주사위가 굴러도 한참은 굴러갔다.
“살려!! 끄륵!”
시온은 냉정하게 시간을 재고 있었다. 앞으로 이러한 짓을 계속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칸의 군세에 불타기 위해 들어간 게 아니라 균열을 내서 무너뜨리기 위해 들어간 거였다.
“네가 시온 니벨룽 이렸다!!”
쿵쿵거리면서 피바다에서 등장한 자는 온몸이 근육으로 부어져 있는 녀석이었다. 시온은 녀석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케식임을 알았다.
시온이 상대했던 케식보다 훨씬 직급이 높고 실력도 높아 보였다. 그냥 녀석이 뿜고 있는 마나만 봐도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내가, 시온 니벨룽이다.”
“!!!!!!!!!!”
그냥 내질러 본 모양인데 설마 여기에 진짜로 시온 니벨룽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황당하다 못해 보물을 발견한 것 같은 탐욕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당연했다. 저 장벽을 뚫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제 발로 저곳을 통솔하는 최고위 사령관이 나왔다니 벌떡 흥분하지 않고선 버틸 재간이 없는 것이다.
골족이 흔히 그러하듯 이미터 이십 센티의 신장이었는데 걸어 다니는 성벽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들고 있는 건 무식하게도 쇳덩이였다. 곤봉 같이 둘러놓은 것인데 둘레가 이상할 정도로 두꺼웠다.
“죽어라!!!!! 네 녀석을 죽이기만 한다면!! 나는 한평생 우러름을 받겠지!!”
뒤도 안 보고 달려드는 녀석에게 시온은 마주 달렸다. 적어도 이곳을 통솔하는 자인 건 확실하기에 쉽게 빠져나가려면 반드시 죽여야 했다.
두세 발자국 나가고 나서 바로 충돌할 지경이었는데 시온의 본능보다도 빠르게 앤드류의 비술이 근육과 마나에 신호를 보냈다.
두 가지의 기술이 얽혀들었는데 이미 능숙해진 시간왜곡술에 용격점 이었다. 교차는 찰나였다.
두개골이 으깨지는 소리가 났다.
시온은 영문도 모르고 주저앉아버린 녀석의 두개골에서 혼돈의 메이스를 비집어 올렸다. 질퍽한 게 들러붙었다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맙소사!!! 미노 대장이 죽었다!!!!”
경련이 있는 녀석의 몸이 지진 나듯 떨렸는데 시온은 이 전조증상을 알고 있었다.
‘이 녀석도 죽어서도 달려드는 타입이로군.’
왼손으로 다리뼈를 붙잡으려는 것을 메이스로 푹 내려찍었다.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크기를 키워 몇 번 몽둥이찜질을 퍽퍽 해주다가 거기에 진화(火)를 붙였다.
이들의 눈엔 충분히 불길해 보일 검은 불길이 미노에게 붙어 삽시간에 번져 탔다. 이게 시발점이었다. 시온의 의도로 불길이 무식하게 퍼졌다.
“이대로 빠진다! 길을 터라 고드, 에릭!”
“길을 터라 잡것들아!!”
“빠져나간다! 목적은 달성했다!!”
들어왔을 때처럼 시온과 기사들은 쓸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