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7화 (297/304)

대보급

시온이 기사들과 돌아왔을 땐, 비 맞은 것처럼 쫄딱 젖어서 들어왔다. 문제는 그게 다 피라는 거겠지만 말이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마리온이 글썽거렸다.

“각하!”

“각하께서 돌아오셨다!”

“괜찮으십니까?”

“장비를 풀어드려라!”

시온은 말을 젖혀서 쿵 하고 내렸다. 지반이 울릴 정도의 갑주의 무게는 무겁다. 투구를 올리자 시야가 선명해졌다.

‘아무래도 이젠 갑주가 방해되는 것 같은데.’

시온은 점점 무장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투구를 벗을 때가 됐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정도로 실력이 차올라야 가능한 일이지만, 시야 폭을 넓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기감으로 볼 수 있는 양도 산더미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눈으로 본 것만은 못했다.

“피해는?”

“오른쪽 측면이 불타고 있습니다! 완벽한 기습입니다. 후케식 한 명도 처리하셨다고!”

“후케식?”

“케식 위의 케식이라고 합니다.”

“어쩐지.”

시온은 방금 일격을 나눴던 녀석을 떠올렸다. 어째 이 녀석들은 계급이 올라가면 곱게 죽는 법이 없었다.

아마도 그들 특유의 주술이 강한 탓일 거였다. 시온은 곧바로 장벽 위로 훌쩍 올라가 방금 저질렀던 곳을 내려다보았다.

불바다였다.

하기야 보통 불이 아니었다. 시온이 생각해도 용환으로 정제해낸 이 불꽃은 그 이상의 지독함이 담겨 있었다. 아마 더 연습한다면 물로 못 끄게 하는 불 마법이 생겨날지도 몰랐다.

‘쓸만한데?’

방금 떠올렸지만, 꽤 쓸만한 아이디어였다. 대마법사 수준의 조작 능력이 필요하겠지만, 꺼야 하는 매개를 다른 것으로 바꿔치기하는 거였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물을 부을 때마다 불길이 더 치솟게 만들 수도 있었다.

‘흠···. 근데 너무 부족하다.’

대칸의 군세가 아물어 가는 게 보였다. 게다가 밤중인데도 뒤에서 밀려오는 녀석들만 해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전원 공격해야겠군, 기사단 전체로 돌진을 통해 피해의 규모를 늘리는 게 맞았다.

“에릭, 고드, 코르도바 어찌 생각하나?”

줄줄이 올라온 건장한 사내 중 두 명은 막 뜨끈한 피를 한 바가지 뒤집어썼는데도 여전히 누그러짐이 없다. 둘 다 강체술이 오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집중적인 훈련과 시온의 대결 맞상대로 이번 영원의 방벽 건설 과정에서 눈에 띄게 성장한 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움드에서 생산되는 고품질 정수가 집중적으로 실려 오고 있었다.

예전에 움드 근처에서 재해 영수를 처리한 덕에 생겨난 영수 사냥터에서 나온 정수는 하급품 정수는 가공되어 마탑에게 넘어갔다.

마탑 입장에서는 하급품 정수를 최대한 받아서 하급 마법사를 길러내는 것이 중요했는데 시온이 대금으로 중상품 정수를 일정량 요구했었던 것이다.

목적이야 딱 하나였다. 전쟁을 돌파하기 위한 기사단의 성장이었다. 강체술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잘 맞아떨어졌다.

움드에서 온 것은 비단 식량뿐만이 아니었고 각종 특수 장비 오백여 벌과 기본적인 군단 장비품으로 석궁이 2만여 개가 실려 왔다.

‘초이와 피에르가 잘 해주고 있다.’ 

사실 피에르가 공포 놀이 한다는 정보가 들어왔지만, 뭐 지금에야 그 역할이 오히려 제대로였다. 벌이야 나중에 줘도 되는 거다.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시온이 기사 시절에도 피에르는 밥 먹듯이 부하를 참수한 경력이 있었다.

“초이 집정관이 아주 잘해주고 있습니다.”

코르도바가 코를 문지르며 말했다.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 황제파에, 아니 황제에 붙어서 자신을 곤궁에 몰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마리온의 밀정이 철저하게 이중 감시를 하고 있었는데, 이것도 특이한 게 초이가 일부러 끌어들여 해달라고 한 거였다.

‘나도 못할 것 같은데 그런 생활은.’

노예로서 그게 당연하다나. 어쨌든, 초이의 보고에 의하면 황제가 실제로 지금 여덟 번이나 협상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때그때의 주제도 다양했다.

작위, 영토, 남자의 씨가 빈 가문에 여자 등. 초이는 마치 관심 있는 척을 하면서 그 사실을 빼곡하게 적어다 자신에게 보내줬다. 이마저도 가짜일 수도 있다. 

그만큼, 

현재 움드의 집정관의 자리는 니벨룽 왕국의 섭정 역할이었고 사실상 초이는 왕이 할 수 있는 모든 수행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권력의 맛을 봤는데 미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긴 했다.

‘하지만 그럴 거면 물자가 안 오지. 이건 정말로 나를 추종한다는 뜻이지. 굳건하게.’

전력을 다해서 내부를 안정시키고 모든 물자를 영원의 방벽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추가적인 군단 증편도 해냈다.

“언제 도착하지?”

“열흘 정도 걸린다고 하더군요.”

에슬린과 마리온도 헉헉거리며 올라왔다. 올라오면서 들은 건 다 주워들었는지 바로 한 마디 더했다.

“황제가 초이가 보낸 군단을 가로채라고 명령을 한 모양입니다.”

“그랬다고??”

“아, 예. 그런데 결과적으론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왜지?”

마리온이 지지 않겠다는 듯 가로챘다.

“벨리사르 장군이 거부했다 합니다. 비느가 함락된 터라, 직접 모든 군단을 데리고 아래로 내려갔다 합니다. 그리고 억류하고 있었던 식량도 보내줬습니다.”

“그···. 래? 그 양반이?”

시온은 벨리사르의 고집을 잘 알고 있었다. 한두 번 만날 때마다 어째 그 고집이 참 질기다는 생각을 했었다. 같은 블랙파이어 가문인지라 좋은 자이긴 하지만 어딘가 베베꼬여있었던 것이다.

ㆍㆍㆍ

뭔가 날씨가 조금씩 탁해지는 것이 보였다. 이건 좋은 현상이긴 했다. 카스피아 초원 지대에 도시가 없는 이유는 땅도 별로 좋지가 않지만, 이 예측불허의 날씨 덕이었다.

시온은 난사하는 맞바람을 맞으며 장벽 아래, 240만 평의 진지에 많은 군단병과 기사가 빨려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많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보고보다 확실히 많습니다. 물자도 많아 보입니다.”

“아마, 초이가 황제를 속이기 위해서 각하께도 거짓 보고를 한 게 아닐까요? 충분히 그럴 만한 간계가 있는 남자입니다.”

그동안 이중감시 전담은 마리온이 했으니 마리온의 말이 아마도 맞을 것이다. 군단 규모가 20만 정도인 데다가 딸려오는 물자는 당연히 황제가 침을 질질 흘릴 만한 정도였다.

시온은 휘파람을 불며 아래로 내려갔다. 코르도바가 바짝 붙었다.

“병력이 많아 거주할 곳은 임시로 막사를 쳐야 할 것 같습니다.”

“물자는?”

막사를 치는 데도 물자가 필요했다. 막사를 쳐야 하는 통나무와 그것을 덮을 수 있을 만한 가죽도 일반이냐 영수급이냐 천차만별이었고, 당연히 후자가 좋았다. 

조금이라도 시설이 좋아야 피로와 질병, 사기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하다못해 규모적으론 불리하기에 코르도바는 몇 번이고 강조했을 만큼 절실하다고 볼 수 있었다.

“.......보냈더군요.”

“좋아. 그럼 확인해 볼까.”

시온은 물자의 규모에 감탄했다. 넓은 부지에 차곡차곡 쌓이는데 별놈의 것이 다 있었다. 

끼익, 끼익. 땅을 질질 끌리며 오는 것은 7미터의 공성 병기였다.

그런 것이 여덟 기가 왔다. 이건 당장 써야 했다.

“각하 이건.”

“바로 배치하지.”

마탑에서 나온 물건으로 당연히 돈 있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미리 준비해야 했다. 황제한테 불려갔을 때부터 초이가 마탑에다 주문했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시온의 눈이 옆으로 옮겨졌다. 검고 투박한 흑색의 상자에 뭔가가 가득 채워 있었다. 곧바로 그것을 따서 열었다. 마법 갑주였다.

“.......... 이게 설마······. 다?”

“허, 이런 물자를 대체 어디서.”

“털었군. 분명히. 알아서 하겠지만, 황제를 턴 것 같은데. 나중에 물어봐야겠군.”

“허허허.”

코르도바가 어이없다는 웃음을 털어낼 때쯤 시온은 다른 상자도 이것저것 하나씩 열어 재꼈다. 전부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은 육 단계 수준이 보조 마법이 걸려 있었고 항마도 그쯤 되었다.

니벨룽 기사단을 모조리 입힐 수 있었다. 게다가 태반이 검은빛이 도는 것을 보니 백 퍼센트였다. 이건 블랙드래곤 기사단의 증편에 쓰일 물건이었던 것 같았다.

“코르도바 니벨룽 기사단에 최우선적으로 입혀. 그리고 최대 규모의 기습을 한 번 해야겠군.”

그동안 여기저기 방비가 약한 곳을 갑자기 출격해서 야간 기습을 했다. 효과는 대단했는데 불면증을 앓는지 전방에 형성되는 진지의 구축 속도가 형편이 없었다.

면적은 넓은데 어느 방향에서 정확히 올 줄을 모르니까 자꾸 갈려 나가는 거였다. 적들 입장에서는 신출귀몰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후케식이 투입이 돼 있다고 해도 케식이 수는 한정되어 있었고, 약한 곳으로 달려오는 것도 문제지만, 벌써 여덟 번의 출격으로 적들이 피로도가 심각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ㆍㆍㆍ

최대 기습. 

지금까지는 정예만 따로 빼서 굴리는 식이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무장도 무장이고 손실에 대한 두려움도 줄었던 거였다.

것보단 적의 포위를 한번에 와그러뜨릴 수단이 필요했다. 전술 지도를 곰곰이 보던 시온에게 에슬린이 입을 열었다.

“각하.”

“뭐지?”

“이번 기습에 아예 전장 골렘을 따로 빼두시는 게 어떻습니까?”

마리온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무리 잘 숨어도 보름은 있어야 되는데?”

초이가 골렘 조차도 물자 이동용으로 200기를 더 보냈기에 기존에 훈련 시킨 고렘 300기를 따로 빼도 좋았다.

‘간절하긴 하지. 기병과(科)가 필요해.’

보통 기사단이 전쟁을 내려칠 수 있는 역할을 하지만, 문제는 적이 그쪽에 이골이 난 녀석들이란 점이었다.

어디 근방의 도시에라도 숨어 있으면 좋으련만 카스피아 초원지대는 사방이 훤하게 뚫려 있는지라 기병대를 운영하면 뻔히 보인다.

본 군단이 장벽에 묶여 있는데 기병대만 따로 보내면 박살 날 게 뻔했다. 하지만 공성전이 막상 들어가면 그 순간이 문제였다. 

그 순간에 뒤쪽에서 공격할 수 있는 기병이 있다면 상대의 턱에다 기절할 만한 한 방을 후려쳐준 꼴이었다.

“딱 한군데 있지 않습니까. 기병대는 무리여도 그곳에 7단계 수준의 은신 마법을 걸어놓으면 보름은 버틸 수 있습니다. 그동안 정신없게 교란한다면.”

“교란?”

“예. 뭐든지, 그러면 발각될 가능성도 적고.”

“아하. 좋은 교란이 생각이 났다.”

“뭡니까?”

“내가 대칸에게 결투 신청을 하지.”

“!!!!!!!!!!!!”

좌중이 깨끗하게 얼어붙었다. 누가 감히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간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시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잘 됐어. 후케식의 수도 줄이고 대칸 놈이 뛰어오면 더 좋지.”

시온은 자신이 있었다. 각인 비술이 오 단계에 접어들고 새로운 수준에 들어서고 있었다.

“각하! 한 번만 다시 생각을!”

코르도바가 바로 결연하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에슬린을 노려봤다. 눈을 부릅뜬 것이 진짜로 열이 끝까지 뻗었다.

“코르도바 그러면 이것보다 다른 방법이 있나?”

“없긴 하옵니다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기각이다. 일어나라.”

코르도바는 버티기로 작정한 모양이었고 시온은 빠르게 마리온에게 물었다. 마리온은 여전히 반대.

“그런데 이번 시기를 놓치면 배치 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오로지 전면전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솔직히 삼십만의 병력이 대단히 많은 편이었지만 백오십만이 넘게 몰려오는데 방벽이 있다고 해도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당장에 바트 녀석이 우회해서 들어올 길을 뚫으려고 산맥을 타고 올 수도 있었다. 

희생이야 수만 명이 나겠지만 그만큼 이곳을 뚫어내겠다는 의지가 없다면 저 백오십만의 병력을 모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비. 비가 문제야.”

시온이 입을 뜨자 다들 동의했다.

“언제 오냐가 문제죠.”

“대칸이 총공세를 가할 겁니다. 제 정보에 의하면 방벽을 파괴할 수단이 꽤 있습니다.”

시온은 혀를 다시다가 결정을 내렸다. 골렘을 빼기로. 아무리 생각해도 기병과(科)가 필요했다. 게다가 관건은 비였다. 비가 언제 꽂히느냐가 대칸의 행동을 정할 것인데,

‘나 같으면 총공격이지.’

“흐음······. 각하. 그러시면 결투라도······.”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지 그건. 재수 좋으면 바트가 나오지 않겠나?”

“..........”

“고렘을 반대쪽에 빼두고 일곱 기의 마석기를 모두 사용해 기습한다.”

마석기는 투석기에다가 탄환을 마법으로 바꾼 것인데, 원리는 의외로 간단했다. 그 매개를 도달하고 터뜨리는 형태였다. 당연히 원소 마법사가 필요한데 저번에 싹 쓸어온 터라 여유가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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