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9화 (299/304)

강행

올려본 하늘에서 구름 사이로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분명히 좋은 현상은 아니었다. 이렇게 되면 다시 돌려야 하는데.

전장 고렘 300기와 딸려 있는 마법사 1800명에 기사들까지 합하면 2500명이었다. 그대로 버림패로 간주하기엔 뒤가 없는 선택이었다.

흥겨운 연주가 한창이었다. 앞에는 인간의 바다가 쌓여 있었다. 물론 2000미터 정도 거리를 두곤 있었지만, 그 가운데까지 왔으니 1000미터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봐야 했다.

정 가운데에서 높은 의자에 탄 자가 거만한 자세로 실려 나왔다. 저 녀석이 대칸이군. 시온은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금과 짐승 가죽이 라산 왕국의 해골이 섞여 권좌를 지탱했다.

“시온??? 네가 시온인가??”

저 녀석만 죽이면 되는 거 아닌가. 시온은 허리춤에 있던 유령단을 그의 목젖을 향해 던졌다. 힘을 흠뻑 빨아드린 단도는 기본적으로 은신 마법이 걸려 있었다.

눈치 없으면 이대로 사망하는 거였다. 190센티미터의 사내가 잽싸게 손을 내밀었다. 피가 터져서 바트의 얼굴 위로 흩뿌려졌다. 그의 눈알이 부릅떠졌다.

피를 삼키자마자 이제야 유령단의 단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형제의 물건! 곧바로 두툼한 핏줄이 솟더니 분개했다.

“흠···. 역시 안 되나.”

“이런 제국의 개! 네놈 뭔 짓을 한 것이냐! 감히 대칸에게! 너의 가족을 찾아 사지를 잘라···.”

“잘라······. 뭐?”

시온은 단숨에 뛰어들어 상대의 목을 움켜쥐었다. 푸른 액으로 단련된 신체는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극치였다. 당연히 단순 근력만으로 벗어날 길이 없는 데다가, 마나까지 겹쳐진다면.

용격점의 주먹이다. 뭔가 모인다 싶더니 그대로 질주했다. 함몰되는 소리가 요란했다.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안 그래도 기분 안 좋은데.

전술적 오판으로 크게 손해를 볼 참이다. 그들을 되돌리는 데에만 해도 얼마만큼 피가 흐를지 감이 오질 않았고, 손을 놓자 너풀거리면서 바닥에 구겨졌다.

“!!!!!!!!!!”

음악이 격렬하게 바뀌었다. 독특한 음조였다. 사실 전투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곡조임이 분명한데 시작하자마자 머리를 상실해버렸으니.

후케식은 이제 열여섯 명밖에 남지 않았다.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후케식은 이들의 정점 중의 정점이었다. 

케식은 백 단위가 넘지만 후케식은 깡그리 긁어봐야 열여덟 명뿐이었는데 벌써 시온 혼자서 두 명을 이승에서 보내버렸다.

‘곡조가 안 끊기네.’

흥겹디흥겨워 누가 보면 축제의 전주곡으로 들릴 지경이었다. 하기야 골족에게서는 전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하.

시온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작게 입에다 손가락을 대고서는 피를 철철 뿜는 후케식의 몸땡이에 겨눴다. 

9미터 둘레의 불기둥이 막 2차전을 하려는 그것에 뒤덮였다. 발작을 하면서 일어나는 것을 보니 직감은 확신이 되었다.

보통 화염보다도 더 지독한 것이라 곧 자빠져서 모닥불이 되어 활활 마른 땅에 불을 지폈다.

“잠깐만, 뭔 몸에 칼이 이렇게 많아.”

시온은 그제야 상대의 몸에 들어 있는 칼이 여덟 개가 넘는다는 것을 알았다. 완전히 미친놈이었다.

“맙소사! 지옥 칼잡이, 구육 장군이!!”

아니나 다를까 알렉시오스는 신께 감사드린다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 구육은 알렉시오스의 형제를 잔혹하게 살해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괜히 지옥이란 글자가 붙어 있는 게 아니었다.

그가 포위한 도시에서는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죽는 것으로 유명했다. 물론 그만한 실력이 있었으니 그만한 난동을 부렸을 것이나.

아무리 기습이라고 해도 순식간에 모든 수단을 봉쇄하고 최후까지 태워버리는 시온의 솜씨에 감탄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트, 네 부하를 언제까지 보낼 것이지? 나는 사령관끼리의 결투장을 보냈을 것인데!”

두 가지 의도가 있었다. 하나는 유령단을 던진 것이 명예에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는 점이었는데 이러면 바로 사라져버린다. 실제로 시온이 요구한 건 최고사령관의 결투였다.

바트의 얼굴이 벌게졌다. 얼마나 벌겋게 변했는지 여까지 보일 정도였다. 그는 나오려고 하는 것 같았는데 나오면 죽는다. 이제 그것을 아는 것이다.

유령단에 꽂혔던 190센티미터의 후케식과 열정적으로 실랑이하더니 결국엔 막힌다. 

그 앞에 두 자루의 1.5미터 짜리 대도를 교차해 매고 있는 2미터 20센티의 사내가 한쪽 무릎을 꿇고는 강제로 허락을 받는다.

‘후케식들의 권력이 상당하구나.’

아마 방금 죽인 지옥 식칼은 후케식 중에서도 급이 낮은 것 같았다. 저기 두 자루의 대도를 매고 있는 녀석이 진짜였다. 흠······.

허락이 떨어졌는지 몸을 돌리더니 자신 쪽으로 걸어왔다. 거리는 멀었지만 뭐 상관은 없었다. 연주는 중반부로 넘어가 있었지만, 여전히 여름이었다.

“각하. 계속하실 셈입니까? 지옥 칼잡이 구육을 제거하셨다면 이미 굉장한 성과가······.”

“최대한 내가 제거를 해야지. 내가질 것 같나?”

“지실 것 같지는 않으시나, 혹시 부상이라도 입으신다면, 20만의 사기가 크게 꺾입니다. 모두가 각하를 신봉하고 있습니다.”

코르도바가 뼈가 담긴 조언을 남겼다. 다 좋은데 정신적으로 지탱하는 존재가 오롯하게 자신뿐이라서 지금 상황에선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됐다.

900미터까지 그가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자의 얼굴이 흥분으로 뒤틀렸다. 아마 평생 맞설 수 있는 존재 중 단연코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갖춘 게 자신일 거였다.

그런 와중에 툭툭,

갑작스레 빗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시온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하늘을 바라봤다. 먹구름이 포악하게 질주하고 있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왔다.

직감이 오자마자 코르도바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엔 신기함이 담겨 있었다. 어떻게 아셨냐고, 물어보는 묵언에 시온이 답했다.

“아무래도 운은 내 편인 것 같은데.”

점점 젖는 양이 많아지더니 곧 짓눌릴 정도의 폭우가 시작됐다. 우기의 시작이었다. 당황한 건 비단 시온 측만 그런 것이 아니었고, 바트쪽이 더했다.

시온은 바로 등을 돌렸다.

“모두 돌아간다! 코르도바 전해라. 바로 빠진다.”

기사만 데려온 탓에 그 숙련도는 최상급, 전원 말에 올라타는 속도는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거기 서라!! 시온!!”

뒤에서 바람맞은 것마냥 녀석이 달려오고 있었지만, 이제 시온의 관심사엔 놈은 없었다. 선물 하나는 줘야겠군.

가장 빠르게 시전할 수 있는 천둥 마법으로 5단계 수준의 직격뢰. 시온이 마나를 돌리자 놀라운 속도로 하늘에서 천둥이 쏴 꽂혔다.

“각하?”

“돌아가자. 다음 작전으로 들어간다.”

“알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옷이 그을린 것 빼고는 멀쩡했다. 케식도 쉽게 막을 것인데 후케식인 쟤가 당할 리가 없을 것인데 그냥 기습의 묘미가 한 번 그의 발목을 세 개 잡은 것일 터였다.

오우. 거센데. 시온은 다시 장벽 안으로 돌아와 그 위로 올라갔다. 세상이 빗물로 가득했다. 분노를 토하는 먹구름이 더더 모여들고 있었다.

“우기가 예상보다 강해 보인다만?”

“저희 쪽도 대처해야 합니다.”

“알렉시오스, 코르도바.”

“예. 각하.”

“각하, 감사드립니다.”

“?”

“구육은 제 원수였습니다. 꿈에서도 보이는 자였습니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 어쨌든 둘이 우기 방비를 한다. 바로 움직여.”

코르도바와 알렉시오스가 뭐라도 걸칠 새 없이 잽싸게 아래로 내려갔고 에슬린이 나타났다.

“들어올 것 같나?”

“분명히, 이렇게 되면 총공세에 나올 겁니다. 제가 모은 정보에 의하면 대형 영수를 공성전에 쓰기 위해 준비하고 있답니다.”

“마리온 그게 가능한가?”

영수를 기르는 것은 마리온에게 물어보는 것이 빨랐다. 마리온이 골치 아프다는 제스쳐를 취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 정도 급의 방벽을 공략할 수 있을 만한 대형 영수라면 손꼽히는데요.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불가능합니다.”

“그런가. 뭔가 비법이 있나 보군.”

“아마도요···.”

딱히 영수를 길러 보지는 않았지만, 예전에 확보한 영수 육성과 관련된 책자에 의하면 몸집이 크면 클수록 길들이는 건 불가능했다. 그게 가능했다면 제국의 규모는 두 체급이 컸을 것이다.

“연습은 잘했나? 둘 다? 적임자를 골라야겠다.”

파멸자의 운행 문제. 시온은 자신 외에 긴급히 여기에 투입되어 운행할 수 있을 만한 자를 세 명 꼽았다.

처음엔 아르눌프가 적임자였는데 작전변경으로 그를 전장 고렘의 지휘에 보냈으니 그 역할이 두 명에게 갔다. 

둘의 눈동자가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처럼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제가!”

“제가 적임자입니다!”

서로가 한 마디를 동시에 토해내고는 홱 하고 쳐다봤다. 자신이 없었다면 진작에 물어뜯었을 분위기였다. 으르렁대는 둘을 두고는 시온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마리온은 여자입니다! 그녀를 여기서 잃게 되실 겁니다! 각하! 그 연약한 육체로는 화살 하나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닥쳐욧. 나도 강체술을 배웠어! 무시하지 마!”

“?”

마리온이 강체술을 배웠다니? 가르친 적이 없었다. 사실 에슬린을 데리고 간 것은 강체술의 세 번째 버전 마법사에게 익히게 할 강체술을 만들게 하기 위해서였다. 

결과적으론 실패에 가까웠다. 에슬린의 솜씨가 그쪽으로는 영 아니었다. 개창을 하기엔 한참은 부족했던 것이다.

“흠···. 언제 배운 거지? 마리온?”

“코르도바 경이 가르쳐줬습니다. 확인해 보세요!”

그녀가 자신의 옷차림을 잡아 재꼈다. 원래 마법사들이 즐겨 입는 로브라는 것이 적잖게 몸을 가리는지라 상태를 보기가 어려웠다.

간소한 차림의 마리온은 어느새 근육이 제법 붙어 있었다. 나름의 맹훈련을 뒤에서 한 모양이었다. 그보다. 음?

시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곧바로 마리온에게서 독특한 흐름을 감지한 거였다. 시온이 바라는 바를 마리온이 해낸 듯했다.

“마리온 네가 강체술을 파생했나?”

“제가 익히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죄송해요, 각하.”

“아니. 잘했다. 그거 나중에 정리해서 나에게 올려라. 마법사들이 익히면 좋을 것 같다.”

“!!!!!”

에슬린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에게 내려갔다. 

“정말이에요? 감읍드리옵니다. 각하.”

“네가 어떻게 그걸?”

“설마 각하께서 네게 주문했던 것이니? 한심하구나. 에슬린. 혼자서 공을 독차지하기 위해 나한테 입을 싹 씻고 있었어???”

에슬린이 최후의 변론을 했다.

“각하, 그래도 안 됩니다. 그녀는 경험이 너무 모자라요. 실제로 화살 한 번 박히면 곧바로 정신을 집중 못 할 겁니다. 각하를 따라다니면서 극한의 상황을 겪었고 극복했던 저만 못합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이것도 사실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칼이 박혔는지 안 박혔는지 그건 중요했다. 특히 파멸자를 움직여야 하는 건 자기들이 크게 부상을 입는다 해도 파멸자가 우선이 되어야 했다.

“어렵군. 그럼 둘 다 가자.”

“......!!!”

“성벽의 특대 석궁과 마석기의 운영, 장벽 위의 원소 마법사를 지휘할 자를 빠르게 발탁시키도록 해라.”

ㆍㆍㆍ

우기가 쏟아진다는 건 명백하게 시온쪽으로 주사위가 굴렀다는 뜻이었다. 간단했다. 지대부터가 문제가 있고 개간한 늪부터가 다시금 역류한다. 병도 창궐할 거고 계속된 빗물은 온기를 빼앗는다.

불이 잘 안 붙으니 시체 처리할 방법이 없다. 시온의 연속 기습으로 사상자가 10만 명이 넘게 나서 완전히 처리하지도 못했다. 

이들의 습성상 그것을 장벽 안으로 날릴 수도 있겠다만, 투석기의 사거리가 시온측이 압도적이었다.

대칸이 내릴 명령은 의외로 간단했다. 총공격!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다. 이들이 그냥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 장벽을 단숨에 뚫어버릴 수 있을 만한 수단이 있어서 온 것이었다.

‘오는군.’

시온은 적들의 군세가 기형적으로 형태가 바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뒤에 배치된 무언가를 앞으로 보내는 작업이었다. 시야가 깊고 빗물로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뒤에 몰려오는 거대한 생명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인···?”

영수와 인간을 합쳐놓은 듯했는데 상당히 불만족스러운지 오는 길에도 소를 산채로 찢으며 오고 있었다. 

키가 4~5미터 됐는데 이들이 끌고 오는 건 그만한 공성추에다가 뒤에는 네발의 대형 영수까지 재갈에 물려 있었다. 뿔 크기만 2미터였는데 돌진하면 성벽이 으깨질 건 뻔했다.

그런 게 줄줄이 오고 있으니,

‘이러니 제국을 침공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지.’

저 정도면 예프에 위치한, 고대에서부터 제국의 심장을 지켜온 뼈대인 장미의 장벽을 돌파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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