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0화 (300/304)

결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코르도바의 우렁찬 소리가 터졌다. 장벽 위의 모든 지시는 코르도바가 할 거였다. 자신보다 훨씬 나았다. 

시온은 곧 장대비를 돌파하는 마석기의 매개물을 보았다.

기본은 철이었으나 무게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기 위한 혼합물이었다. 그래도 빗물쯤은 잘 젖혔다. 떨어진 위치는 그것만으로도 요동을 친다.

이어질 죽음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일 터였다. 어떻게 반응할 새도 없이 뻣뻣하게 결정화가 일어난다. 

여기서 보일 정도였다. 삽시간에 원형의 둘레로 결정화가 일어났다. 물줄기를 타고 닿는 것은 뭐든지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흠···. 역시 비 때문인가, 효과가 크군.’

시온은 빙 계열 마법은 구사할 수 없었다. 한다면 할 수 있었지만, 굳이 거기에 시간을 투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기본적으론 주변의 상황에 어울려 더 치명적인 효과를 내게 하는 게 원소 마법이었다. 

따라서 마석기의 매개물은 장대비와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중에 세 개가 빙 계열이었고 나머지는 전격 계열이었다.

여덟 번의 묵직한 공격은 각 인간의 막, 한가운데에 떨어졌고 그때마다 화려하게 결정체를 피웠다.

마석탄의 특징상 바깥쪽에 있는 자들은 숨이 붙어 있다고 봐야 했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정지 명령은 없었기에 그대로 전진하는 군세에 깔렸다.

숨이 좀 붙어 있을 게 분명한 오천 명 정도가 압사했다. 이래도 티도 안 났다. 시온은 팽팽하게 돌아가는 기운을 느끼며 오른쪽 끝자락을 바라보았다.

숨어 있기 좋은 구릉지의 틈새가 벌려져 있었다. 신경 쓰기 어려울 정도의 작은 틈새지만 안쪽은 오천 명이 숨어 있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거기에 아르눌프와 전장 고렘 300기 마법사 1800명, 기사 700명이 숨어 있었다. 백만 군세가 본격적으로 성벽에 달라붙을 때 그 목덜미를 물어줄 패였다.

‘시키기야 했지만, 용기가 필요하긴 하다.’

아주 조금만 어긋나도 전원 사망이 예정되어 있었다. 시온은 이들의 목숨을 쥐고 있는 심지에 언제 불을 붙일까 재고 있던 거였다.

어쨌든 백만 군세가 50킬로미터의 좌우 길이를 꽉 채워서 밀려오고 있었다. 오히려 양쪽의 병목 현상 때문에 오목하게 가운데로 쏟아지는 현상이었다.

공성전은 언제나 냉혈인의 피가 흐른다. 특히 공격하는 측에서 더 그랬다. 가장 먼저 보내는 건 가장 약한 자들이었다.

첫 번째 군세가 갈라져 나오는데 그들의 뒤통수엔 화살이 쟁여져 있었다. 구성원은 약하거나 중죄와 노예를 섞은 잡병들이었다.

대강 보내는 거라고 해도 숫자도 많고 더럽게 빽빽했다.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달려야 하지만 가끔은 반항하는 경우도 있었다. 왼쪽 두 번째 마디에서 벌어지는 일이 그러했다.

예외 없이 원칙대로 하늘엔 빗줄기와 섞인 화살의 장대비가 사이를 채운다. 피인지 물인지를 쏟아내며 진득한 바닥에 고개를 처박는다. 시온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가동해라!!!”

코르도바가 사방을 뛰어다니면서 준비한 단어를 열었다. 이어지는 건 함정의 연속이었다. 기본적으로 모든 함정은 폭발형태였다. 마석탄 보다 작은 것도 큰 것도 섞여 있는데 당연히 위력은 그 이상이었다.

굉음이 일어나더니 폭죽이 펼쳐졌다. 한 번씩 마나가 출렁일 때마다 피 안개가 퍼졌다. 마찬가지로 그 요소는 다양했다. 

감전돼 익어버린 자도 있고, 얼어붙어 동사한 자도 있고, 폭발력에 몸 중의 일부를 날려 버린 자도 있었다. 이쪽은 차라리 운이 좋았다. 떨어지는 빗물 덕에 목숨은 건졌을 거였다. 

두 번째 여덟 기의 마석기가 장전한 것을 토해냈을 때, 드디어 적측에서도 화염에 감싸인 뭔가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열여섯 개의 거석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절묘하게 시온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벽과 투석의 격돌 했는지 장벽 전체가 흥분으로 떨었다. 시온의 눈가가 좁혀졌다. 쥐고 있던 메이스가 거대화되었다. 깨면 되잖아. 

아우성치는 부하들은 미처 움직이지 못했으나 그들은 거꾸로 놀라고 있었다.

적당하게 무럭무럭 자란 혼돈의 메이스가 시온에 악력의 의도대로 휘청였다. 적중한다 싶었을 땐 이미 서로 박혀 있었다. 

움푹 들어간다 싶더니 어느 한계에서 질질 되돌려지곤 역으로 튕겨 나갔다.

“워. 이런 것도 되네. 깨부수는 것보단 이게 낫겠지.”

극치. 기사들은 자신들이 뭘 받는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되돌려진 것은 빈 땅에 틀어박혔다. 다시 되돌아가 발사될 일은 없기에 죽은 거라고 봐야 했다.

대형 영수 하나가 전방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순서가 어긋난 모양인지 제어가 안 된 모양인지 맹렬하게 돌격했다. 그 위용이 대단했는데 거기에 특대 석궁이 발사됐다. 순식간에 고슴도치가 됐다. 

발사된 화살의 특징상 중력이 가중되어 바닥에 눌어붙게 된다. 백 곳이 넘는 상처에서 피를 물처럼 흘리다가 주저앉았다.

잠깐의 소강상태가 왔다. 머리카락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적막함이 50킬로미터를 감돌았다. 하지만 여지없이 빈 공간을 다시 채워갔다. 너무 많아.

시온은 혀를 찼다. 영원의 장벽 앞에는 강만 한 해자를 파놨다. 쏟아지는 물 폭탄에 어느새 범람해서 넘실거렸다. 이곳을 돌파해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장벽 위로 올라와야 했다.

ㆍㆍㆍ

천지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에 전신에 피가 팽팽하게 돌았다. 대규모 공성전은 이미 절정이었다. 범람하던 해자엔 넝쿨이 미친 듯이 자라 있었다. 이건 예상치 못했던 거였다.

비가 와서 그런지 넝쿨이 성장하는 속도도 예상 밖이었다. 장벽에 똬리를 트듯이 엉겨 붙은 것이다. 

양쪽에서 피아를 가리지 않고 날리는 화살이든 마법이든 돌덩이든 포악하게 가득 찼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비가 이렇게 철철 쏟아지는데 해자에 흐르는 건 공포스러울 정도로 많은 피였다. 피의 해자가 되어 있었다. 파묻힌 자들만 8만명, 이어서 그거 자체가 둑이 되고 있었다. 미친 전략이지. 이건.

광기가 공기를 타고 매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곳은 하나의 생사의 시험장이었다. 시온은 어느새 무성해져 넝쿨을 타고 오는 수천의 인간을 보고는 300미터 둘레에 불덩이를 끼얹었다.

시온이 쓰는 검은 불길은 지독했다. 이건 빗줄기로 안 꺼졌다. 저번의 깨달음으로 매개물을 뒤바꿔놨다. 

사람을 굽다 못해 뼈까지 태워 버리고 피의 해자에다가도 불의 길을 만들어놨다. 누가 보면 밑에 물이 기름인 줄 알 거였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다니며 전선을 조율했다. 그래 봐야 가운데를 돌아다닐 뿐이고, 양익은 알아서 해야 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하자 이거지.”

어느 정도 상황이 쌓였다 싶으니 아껴둔 것을 투입하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기초 토대는 일반 병사가 닦아놨으니 정예병이 몰려들고 있었는데 그래도 핵심은 시온이 서 있는 정 가운데였다.

거대한 다리가 놓여 있는데 이곳이 영원의 방벽을 관통하는 심장이었다. 당연히 가장 치열하고 가장 무거웠다. 다리만 해도 좌우길이만 3킬로미터를 아울렀고, 이어져 있는 관문은 그 이상이었다.

일부러 이렇게 지었다. 가운데에 쏠려야지, 내가 막지. 전 방향을 때려 막는 것보다 약점을 드러내 일부러 공격이 쏠리게끔 해놓은 거였다. 계산된 일이었다.

“밀어붙여라!! 시온 니벨룽을 잡으란 말이야!! 관문을 뚫어라!! 저기만 뚫으면 케식이 들어간다!! 꺽···.”

이렇게 소란스러운데도 발광하는 목소리가 여까지 들릴 정도였다만 막 석궁의 살촉에 물려 바닥에 찍히듯 꺼졌다.

시온은 눈을 흘겼다. 장벽 위의 상태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상자가 미친 듯이 속출했고 사망자가 실려 가고 물자가 올라왔다. 그런 곳이 팔백여 군데다. 소용돌이치듯이 회전하고 있었다. 으으,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어쨌든 3킬로미터의 다리 폭에 메인디쉬가 들어왔다. 황소 같은 사오 미터의 거인 여섯이 관문을 작살낼 만한 공성추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코르도바가 발작했고, 석궁과 마법이 거인에게 쏟아졌다. 하나는 자빠졌는데 다른 놈들은 턱도 없었다. 시온이 2.5미터 짜리 창대를 던졌는데 눈알에 박히고도 공성추를 꾸역꾸역 끌었다. 

모르핀이라도 도는지 어지간한 공격엔 반응도 없다. 뒤에 있는 주술사들이 원인인 게 틀림없었다. 뭔가를 걸고 있었는데 통각을 날려 버리는 것 같았다.

이런 녀석들이 뒤에 다섯 팀이나 있었다. 하나가 벌집이 돼서 나자빠지면 그 자리를 다른 거인이 채웠다. 아파서 엎어진 게 아니라 진짜로 죽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무식한 전진을 했다.

“에밀턴.”

“각하!”

“코르도바에게 최후의 비석을 가동하라고 해라.”

에밀턴이 듣자마자 먹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놀라운 속도로 뛰어갔다. 최후의 비석에 가동 시간을 생각해보면 지금이 좋은 것 같았다.

양익이 밀려가는 게 보였다. 비석이 가동되면 기본적으로 성벽 위에서 마법을 펼치는 마법사들의 모든 마법이 단계가 올라갔다. 

대마법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의 지형과 형세를 이용한 준 대마법을 미리 준비시킨 바가 있었다.

마나가 흔들흔들 출렁였다. 기가 막힐 정도의 세기였다. 양익에 준비해 놓은 대마법이 달랐는데 그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게 빙결의 운무였다.

왼쪽의 하늘에 시퍼런 안개가 5킬로미터까지 널찍하게 퍼진다. 그곳을 통과한 빗물은 얼어붙어 중력과 크기를 키우고 낙하했다. 

아래에선 곧 지옥도가 펼쳐졌다. 단순히 관통시키는 것뿐 아니라 스쳐도 영하에 휩싸인다. 동상은 기본이고 추락한 것은 그대로 바닥을 얼려버린다.

“미친······.”

시온도 혀를 찰 정도의 장관이었다. 이어서 오른쪽엔 뇌전의 수레바퀴가 만들어졌다. 8미터 크기의 원형의 수레바퀴가 수만 명이 밀집된 공간을 애석하게도 갈아 버린다.

흥건한 바닥의 물을 통해 멀리 떨어져 있는 데도 전기에 휘감겼다. 7단계 급의 전류인지라 대량 심장 마비로 이어졌다.

이번엔 내 차례인데. 시온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4미터 거인들과 그들이 끄는 초대형 공성추를 감상을 했다.

크기는 더럽게 단순했다. 크기를 키우고 기타 잡다한 것을 죄다 빼버린 공성추는 거대한 송곳이었다. 관문을 찍으면 얼마 안 있어 성과를 볼 거였다.

“해볼까.”

시온은 관문 위에서 안쪽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바닥을 짚었어야 했으나 중간에 걸려서 멈췄는데 파멸자의 어깨 위였다. 

한 번 눈을 깜빡이자 뒤에 지탱할 마법사와 기사가 식은땀인지 물인지를 줄줄 흘리며 성호를 긋고 있었다. 에슬린, 마리온과 마법사 삼십여 명 그들을 가드할 기사 백여 명이 보였다.

이들이 마법사의 방벽이 되고 마법사는 나와 분담을 해서 마나를 집어넣을 것이다. 일단은 좀 뒤에 말이다.

“문을 열어라.”

“대원수께서 관문을 열으시라 하신다!!!”

방금 준 대마법을 구사한 것도 버거웠는지 양쪽 끝에선 각혈하는 원소 마법사 삼십여 명이 상처를 핥으며 실려 갔다.

나의 대마법을 아낀 이유가 있지. 시온은 마저 몸을 돌렸고 본격적으로 마나가 끓었다. 파멸자가 흠뻑 빨아들인다. 배를 채웠는지 그것이 몸을 일으키고 앞으로 천천히 걸었다. 막대한 톤의 무게가 대범하게 지상을 흔들었다.

22미터를 꽉 채우는 관문이 비명을 지르며 올라갔다. 전방에서 비바람 몰아쳤다. 시온의 입매가 굳어졌다. 심장이 펄펄 뛰고 아드레날린이 돌았다.

“가보자고.”

그 흐릿한 경계의 사이에 거인의 몸통이 보였고 괴물 같은 급의 공성추가 욕에 찬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시온이 휘파람을 짧게 불었고, 그 소리를 들은 것마냥 파멸자가 내달렸다.

뉴턴의 법칙에 의해 빗물이 쇠처럼 떨어진다. 달려오는 7미터의 파멸자를 확인한 거인의 눈동자가 급격히 펴졌다. 초점이 모이고 그 중 용감한 놈 한 마리가 뛰어들었다.

해보자 이거였다. 축배라도 들고 싶은지 벼락이 한 번 반겼고 그 찰나의 빛 번짐이 없어지기도 전, 파멸자의 검인 멸망의 검날이 하늘 위로 치솟았다가 반듯하게 내리그어졌다.

정면으로 맞은 거인의 면상이 산산조각이 나고 범람하는 힘은 몸통째로 짓눌렀다. 뼈들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빗소리와 섞인다. 

단숨에 절명한 그것이 바닥에 굴러다닐 때 파멸자의 몸에서 대수식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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