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전(2)
이게 무슨 힘인가. 시온은 파멸자가 만들어 낸 광경에 놀랐다. 날이 없는데도 비슷한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대수식은 여섯 개였고 기본적으론 발사 형태였다. 마나를 한 움큼 집어삼키더니 수식이 허공에 칠해졌다.
“좋아, 좋아. 자신 있다, 이거지. 이것아.”
파멸자는 대답 대신에 앞으로 뛰었다. 엎어진 사 미터 거인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덜컹거리는 움직임이 있더니 다음 사냥감을 향해 질주했다.
왈칵 쏟아진 빗물을 바람에 쓸렸다. 빠르다. 이 녀석도 실전에 강한 모양이었다. 단숨에 공성추 근방까지 침착하게 도달한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소같이 밀던 거인 다섯이 그림같이 뛰어들었다. 무기는 전부 무식한 쇠몽둥이였다.
앞에서 오는 것부터 차례차례 쇠몽둥이를 떨어트리기 위해서 자세를 젖혔다.
하지만 마나를 근본으로 움직이는 이 거인과 피와 살을 태우는 거인의 동력은 차이가 날수밖엔 없었다. 게다가 이 파멸자는 분명히 세계의 지식이란 아공간에 봉인이 돼 있던 물건이었다.
먼저 도달한 건 당연하게도 시온 쪽이었다. 검날이 거인의 머리에 떨어졌고 그대로 상쾌하게 양단했다.
“?!”
반듯하게 양단된 거인의 눈알은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는데 어차피 곧 알게 될 거였다. 방향을 잃은 눈알이 위로 흘러갔고 핏덩이가 훤하게 드러났다.
잠깐만, 뭉툭했던 것 같았었는데, 예상을 확 깼다. 아까부터 돌던 아드레날린의 꼭지가 기어코 열린 것 같았다.
소와 인간 노예를 찢어 먹을 땐 그게 자신이 될 줄 몰랐겠지만, 지금은 아닐 거였다.
이런데도 약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달려드는 것은 거인의 본능이 제거된 것 같은 추측을 남긴다.
시온의 눈가가 이것들과 이어져 있는 가느다란 실을 향했다. 그 끝이 향하는 곳엔 수준 꽤나 있어 보이는 주술사들이 있었다.
그야말로 표정은 터지기 직전이다. 당황해서 허둥지둥하는 녀석도 있었고, 수준은 최소 아르눌프쯤은 되어 보였다.
‘대수식?’
어쩔 수 없이 한 대 정도는 맞아야 할 것이었는데 대수식이 사각에서 선수를 쳤다. 뭔가 기운이 모인다 싶더니 막대한 기운이 발사됐다.
수천 발의 마법이 갈라져서 거인에게 쏟아졌다. 벌집을 내기 시작했다. 시온의 진화(火)의 특징상 비를 맞으면 가열차게 올라타서 한 마리는 오 미터짜리 불덩이가 되었다.
본능적으로 눈을 가린 포즈였는데 사실상 전투불능이었지만 어쨌든, 그 틈을 놓칠 파멸자가 아니었다. 갈비뼈 쪽에 검날이 적중해 날렸다.
으그러지긴 했으나 잘리진 않았다. 공중으로 날아간 초대형 모닥불은 범람한 해자로 풍덩하고 잠겼다. 올라오는 기색은 없었다.
뭔가 조건이 있는 모양이었으나, 그걸 떠나서 방금 보인 대수식의 마법은 기가 막힌다고 생각했다.
마법엔 여러 조건이 있고 캐스팅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효능이 안 좋았다. 그리고 작게 나누면 컨트롤이 더 힘들었다. 이건, 자유자재였다.
폭격이 시작됐다. 사방팔방으로 여섯 개의 수식이 떠다니며 구체를 발사했다. 여덟 명의 주술사가 죽어 버리자 오십여 명의 주술사가 바로 등을 돌렸다. 일단은 살고 싶은 게 사람의 본능이었다.
그 와중에 파멸자가 공성추를 내리찍었다. 지탱하던 바퀴가 박살 나고 폭삭 주저앉았다. 위에도 상해서 이젠 관문에 박아 봤자였다.
뒤로는 비슷한 게 다섯 개가 더 있었다. 거인도 삼십 마리 정도 됐고 들이박을 수 있는 이미터 뿔을 지닌 덩치의 코뿔소도 여럿이었다.
놈이 자신 있어 할 만은 했다. 저런 영수가 성벽을 박아대면 장미의 장벽도 넘어갈 거였다. 넘어가고 나면 숫자 많은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적이 많은 제국과 한 곳에 집중하는 적과는 입장이 다를 수밖엔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시온도 이 정도까지 일 줄 몰랐다. 확인해 보기엔 시간이 촉박했기에······.
대수식 중 하나가 공중으로 날아가더니 육백 미터의 둘레의 원뿔의 화염을 뿜어댔다. 세 개는 작고 빠른 수천 개의 발사를 가진 것이고 두 개는 화염이나 전격이나 염력을 질러대는 것이었다.
마나가 갈려 나갔다. 그러나 대마법에 익숙한 시온은 꿈쩍도 안 했다. 효과만 내주면 그만이다. 보통 대마법사의 여섯 배에 달하는 마나를 가진 시온은 혼자서 이것을 다 돌릴 수 있었다.
삽시간에 아래에서부터 뭔가가 무럭무럭 자라나려고 했다.
사방팔방이 잡초 더미와 넝쿨로 무성했는데 이것이 형성하려고 하는 것은 시온의 생각에 거인 하나는 통째로 삼킬 수 있을 만한 식물이었다.
“대마법방어진인가······.”
걸리고 있는 주술은 분명히 대마법급의 소환물이었다. 비가 신나게 뿌려진 지금이야말로 그것이 극대화해 한참은 시온과 설왕설래할 녀석이었는데, 성장할 여지가 보이질 않았다.
신기했다. 것도 존나게 신기했다. 일단 하나 확실한 건 자신이든 마탑이든 구현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파멸자가 걸치고 있는 망토의 기능이 이제야 밝혀지고 있었다. 고대 문자로 꽉 차있는 이것이 육각 형태로 모든 일말의 가능성을 억제하고 있었다.
자라나려고 하면 독약을 한바탕 뿌린 것처럼 시들어 버리고 자라나려고 하면 다시 시들어 버리고 그런 마디가 여덟 군데였다.
정신 차려보니 한복판이었다. 검날이 좌우의 거인의 얼굴을 격렬하게 뭉개고 다시금 시작된 대수식의 폭약이 주술사를 휩쓸었다.
작고 빠른데 적중률도 높았다. 수천 개가 헛발이 오 할 미만 수준이라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이러면 단숨에 끝낼 수도 있겠다, 좀 더 한복판으로 들어가고 싶어졌다.
시온의 예상은 맞았다. 주술사가 전멸에 가까워지자 컨트롤 하고 있던 실이 죄다 끊어진다.
대범하게 얼굴을 내준 거인 둘은 고통이 쏟아지는지 울부짖었고 쌓아뒀던 불만과 공포에 좌우로 도망갔다.
“도망쳐라!! 거인의 줄이 풀렸다!!”
“!!!!!!!!”
누군가가 그렇게 외쳤다. 어딜 가도 인간이 있는 탓에 공간은 비좁았고 시온에게서 벗어나고 싶은지 그동안의 욕구를 어문 대다 풀었다.
삼십 마리가 넘는 거인과 거인이 죄고 있던 영수가 날뛰니 찰나에 주변이 확 넓어진다. 이천 명이 사망한 것이다.
공간이 넓어지니 갑갑한 게 사라졌다. 시온은 일단 마나를 정리했는데 그 사이에 에슬린과 마리온과 고드가 이끄는 기사가 붙었다.
“나눠서 한다.”
“알겠습니다! 원수님!”
기본적으론 기사는 마법사를 가드하고 마법사는 마나를 공급한다. 여섯 개의 수식을 유지하는 데 최우선을 하는 것이다.
ㆍㆍㆍ
여전히 양익의 장벽은 무게가 쏠리고 있었다. 뺄 수 없는 상황인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론 이곳의 전쟁은 국면 단계에 들어가면 따로 돌아갔다.
가운데가 진다고 해서 다 무너지는 것이 아니었고 세 방향이 따로 주사위가 굴러간다고 보면 좋았다.
하여튼 저 오른쪽 측면에서 시온이 숨겨놨던 전장 고렘 300기 마법사 1800명, 기사 700명이 돌입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곳의 지휘관은 아르눌프와 에릭이었다. 후퇴가 없는 돌격. 그야말로 이기지 않고선 뒤가 없는 공격이었다.
시온의 계산에 전장 고렘의 역할은 기병의 여덟 배 이상이었다. 물론 기사단도 수준이 있기 때문에 평범하다고 가정을 해야 했지만, 그걸 감안 해도 압도적인 돌파력을 보여 줄 수 있었다.
목적은 딱 하나였다. 지휘부! 대칸이 있는 곳에 도달하기를 위한 비수다. 그런데 처음 짰던 도안과는 달리 예상외의 진행이 이어지고 있었다.
“미쳤군.”
모든 작전을 무색하게 할 정도의 규모가 파괴되어 있었다. 오미터의 검이 좌우로 한 번 휘저어졌고 거기에 있던 인간 무더기가 무너져서 왼쪽으로 날아갔다.
전 방향으로 대수식이 공격하고 있었고 칠만 명 정도가 밀려 버렸다.
케식이고 후케식이고 접근을 못 하고 있었다.
그나마 후방으로 들어온 자하곤 에릭과 원소 마법사의 열띤 공방이 잠깐 펼쳐졌지만, 기본적으로 대수식이 메인이어서 곧 수천 발의 마법이 쏟아지니 버틸 재간이 없었다.
시온은 좌우와 뒤를 살펴봤다. 아득할 정도로 많은 이십만 명 정도의 인간이 나뒹굴었다.
이제 인간 외에 디딜 수 있는 벌판이 있으면 그게 신기할 정도였다.
끝났다고 봐야 했다. 시온도 한 명을 막 처리했다.
후케식이었는데 아마 비가 오지 않았으면 결투를 했을 그자였다.
어깨 위로 올라타서 검식을 나눴는데 지금은 목 없는 몸만 덜렁 남아 있었다.
팔 한쪽 매달아 놓으면 효과가 컸다. 갑옷이 화려해서 누가 봐도 후케식이었기에 공포가 빠르게 전염이 된다.
“막아라!! 대칸에게 접근하게 못 하게 막으란 말이야!!”
다급한 소리가 들렸지만 이젠 효과가 없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어야 하는데 가능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덕분인지 시온이 보냈던 전장 고렘의 무리와 어느덧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양쪽에서 포위 받고 있다는 생각은 빠르게 그들을 분해하고 있었다.
후미에 합류해야 할 수십 만의 군세가 도주하고 있었는데,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두 발로 뛰고 있는 오십 만에 가까운 도주자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도착했다. 적의 사령부.
화려하고 거친 깃발 수천 개가 어지럽게 휩쓸리고 있었고 그 아래에 얼마 전에 봤던 대칸 바트가 있었다.
그렁그렁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분한 모양이었다.
“시온 니벨룽 너를 여기서 치겠다! 대칸을 수호한다!”
후케식 세 명이 그리 뛰어들었는데 이미 주위가 훤했고 대수식 여섯 개가 그들을 사람 형체에서 벗어나게 한 것은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적당히 막아 내다가 한 번 꿰뚫리자 화염에 휩싸여 이리저리 비틀거리다가 쓰러졌고 한 명은 다리를 잃고 바닥을 기었고 다른 하나는 잽싸게 튀었다.
그리고 멸망의 검날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지상에 내리꽂혔다. 음? 아차 했지만 바트의 머리 위로 떨어진 거였다.
“?!!!!!”
묵직한 검 덩어리가 들리고 움푹 패인 공간에 대칸이 짓이겨져 있었다.
알아보려면 상당히 집중해야 했다. 그래도 옷차림은 그럭저럭 이었다.
“에슬린, 마리온. 파멸자를 통제해라.”
“알겠습니다!”
시온은 어깨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물컹한 바닥을 짚었다가 패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입만 살았었다.
후케식 급은 될 줄 알았는데 피하지도 못할 줄이야. 그리고 후련하기도 했고.
은근히 옥 죄이던 것이 단숨에 불타 없어진다. 시온은 바트를 끄집어냈다. 에릭과 마리온이 빠르게 붙었다.
“맙소사. 앞으로도 이런 경험은 하지 못할 거야.”
에릭이 자조적으로 말했고 마리온의 눈동자는 여전히 흥분으로 쨍쨍했다.
“대원수님. 제가 알릴게요. 바트가 죽었으니 전투는 끝났어요.”
“그래, 그렇게 해라.”
마리온이 전체에 알리기 전에도 이미 이백만의 군세가 분열되고 있었다.
후방에서 오던 지원 병력은 그대로 도주하고 팔십만은 서로를 밀쳐가며 두 다리로 뛰는 중이었다.
말(馬)이 필요하면 말이 있는 자를 공격했다. 아비규환이다.
후미가 그러하니 전방에 쏠려 있던 자들은 칼을 버리고 바짝 엎드려 깃발을 흔들었다.
ㆍㆍㆍ
빗줄기는 여전했는데 당연히 우기가 이제 시작됐으니 보름은 내릴 거였다. 시온은 빗소리를 들으며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안은 훈훈했다. 아늑한 기운이 흘러넘쳤고 누군가 들어오자마자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알렉시오스였다. 라산 왕국의 망명 왕자. 자세를 바로잡자 그가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위대한 대원수를 뵙습니다.”
말은 가벼웠지만, 상당히 걱정스러워 보였다. 시온과 알렉시오스의 위치는 하늘과 땅 그사이보다도 더 격차가 났다. 굳이 그가 아니어도 그 정도는 났다.
“저번에 했던 얘기 말인데.”
시온이 운을 떼자 알렉시오스의 표정이 볼만해졌다. 눈동자가 반쯤은 더 커지고 설마, 설마 되뇌는 듯한 흥분이 얹혀져 있었다.
“실비아를? 맞이해 주시겠다는 뜻입니까?”
“그래. 전세는 바꿨다. 이제는 내가 공격할 차례지.”
“감읍드리옵니다!!!!”
“잠깐만, 울진 말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대가가 있다.”
“....?”
“나한테 봉신 서약을 해라.”
짚고 가야 할 부분이었다. 독립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흡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답은 아주 쉽게 나왔다.
“물론입니다! 영원히 각하의 가문을 모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