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1)
카스피아 초원 지대의 앞에 위치한 도시 에가엔 얼마 전과는 확연히 다른 자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번엔 제국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카스피아 초원은 우기가 시작됐지만, 그곳관 다르게 이곳은 해가 신나게 내리쬈다.
에가는 시온의 차지였고 모든 기능은 군사용으로 바뀌었다. 콘스탄챠와의 결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지금 실비아와 결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었다.
‘별수 없지.’
실비아는 얼굴이 무르익어 있었다. 그녀의 오빠인 알렉시오스 뿐만 아니라 그녀조차도 그간 입장이 바꿨었던 거였다. 상사병을 앓다가 갑작스레 시온이 약혼을 받아들이다니 그녀는 지금 꿈인지 아닌지 고민하고 있을 정도였다.
“급하게 해서 미안하다. 이곳이 좋은 장소는 아닌데.”
하지만 그녀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그간 여성성을 포기할 정도로 왕국의 복위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저는 너무 행복해요···. 아버지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오빠와 동생들도······.”
정말로 싸그리 죽었던 것이다. 그간 이동 하면서 그녀의 첫째 오빠가 사로잡혀서 잔혹하게 죽었단 비보 밖에는 오질 않았었다.
‘상처가 늘었군.’
콧잔등엔 긴 흉까지 있었는데 이번 영원 전투에서 그녀 역시 백병전을 펼쳤었다.
시온이 따로 정예를 빼놔서 성벽 위는 정말로 위태했었다. 애초에 작전을 구상했을 때도 살을 내주고 뼈를 치겠다, 싶었다. 실제로 잘 풀리기도 했고.
며칠간 십삼만의 병력은 자긍심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오백여 개의 악기가 울어대는 소리는 열정적이었고 대낮의 연회는 어딜 가나 생기가 흘렀다.
물론, 후속처리가 중요했다. 일단 영원 전투 지역은 여전히 난리였다.
사실 이것으로 끝을 내려고 했는데 코르도바, 에릭, 고드, 에슬린, 마리온, 아르눌프 등 모든 인물이 역공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졸라댔다.
그러고 보니 그게 맞아 보이기도 했다. 아무튼, 시온이 막 실비아가 따라준 맥주잔을 벌컥벌컥 마셨을 때쯤, 에슬린이 접근해 한쪽 무릎을 곱게 꿇었다.
“각하. 황제가 골 제국의 공략을 멈추라는 지시입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팍 식었다. 어지간한 냉기의 찬물이었다. 여전히 분위기 파악할 줄을 몰랐다. 시온은 곰곰이 생각했다. 어차피 여러 구실로 황제를 골탕먹이기도 했고, 실제로 정말로 필요했다.
황제의 재산이 아니었다면 영원의 장벽을 이 정도 규모로 구축할 수가 없었을 거였다. 걸 수 있는 건 콘스탄챠와의 약혼식 정도.
이걸 가지면 니벨룽 가문의 천 년간의 입지는 절대적으로 변한다. 핏줄이 한 방울이라도 흐른다는 것은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 인간 자체를 납득시킨다.
“.........”
수십 쌍의 눈가가 시온에게 쏠린다. 한 마디로 5500억 평의 세 개 대륙의 주인이자 제국의 영웅, 그런 위치의 권력자가 낼 수 있는 방향의 행방이 지금 놓이게 될 순간이니, 목울대를 통해 삼백 명의 침이 넘어간다.
“이제는 내가 답변을 하지 않을 때가 되긴 했지.”
순간 술렁거림으로 흔들흔들했다. 에슬린은 그 답변이 좋았던 모양이었다. 가벼운 어조로 시온에게 말했다.
“한 이십 번쯤 되면 그때 한 번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뒤로는 다시 적당한 결혼식이었다. 실비아와 춤도 추고 덕담과 선물을 받고 그렇게 하루가 빠르게 저문다. 크게 달리기 위한 이완의 시간이었다.
ㆍㆍㆍ
골 제국의 공략 작전 회의는 물이 올랐다. 대략 두 파로 나뉘었는데 십삼만의 병력을 나누자는 것과 그냥 수도를 향해 한 번에 가자는 거였다.
몇 가지 알아내기 힘든 난제가 있었다. 워낙에 영역 자체가 골 제국으로 넘어가서 밀정이 움직일 수 있을 만한 구멍이 없었다. 어지간하면 전부 살해당한 거였다.
회의의 결론은 그냥 나누자였다. 어쨌든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시온은 라산 왕국의 지대만 흡수해도 괜찮다고 보고 있었다.
“코르도바가 위. 에릭과 고드가 중앙. 내가 아래로 가지.”
아예 사령관을 분배해버리고 방향을 잡았다. 시온이 노리는 곳은 라산 왕국의 수도였다. 아무루 강이 관통했는데 저지대로 식량이 비옥했다.
이곳만 되찾아도 방어하는 건 쉬웠다. 출발은 바로 다음 날부터였고 각각의 각오의 인사를 받고는 헤어졌다. 목숨은 좀 그만 걸자고.
시온은 그렇게 되돌려 주고 출발했다. 날씨는 여전히 쾌적했다. 연신 햇빛이 돌았고, 봄날의 기운이 물씬 흘렀다.
지랄 맞은 카스피아 초원 지대가 문제였던 거지 다른 데는 다 이랬다. 나름 진지하게 전진을 하고 있었는데 누구 보다 이들의 습성을 잘 알기에 그랬다.
그런데 아무런 일도 없었다. 정말 쥐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질 않았다. 잘 뻗은 관도엔 상인도 안 보였다. 그냥 전부가 꽁꽁 얼어붙은 것 같았다.
“....또?”
발정 난 것처럼 재촉하는 실비아의 유혹에 반문했다. 실비아는 아주 열심히였다. 듣자 하니 잃은 가족만큼은 애를 낳고 싶은 모양이다.
처음엔 알렉시오스가 시켰거니 했는데 소리 질러대는 것을 보니 진심이었다. 상사병을 앓았다는 얘기도 뒤에 들었다.
시온은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살랑이는 실비아를 따라 들어갔다. 후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한 일이니까.
시간이 좀 흐르고 들러붙어 있는 실비아를 떼어 놓고 웃옷이라도 걸쳤다. 붉은 천막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온 젊은 기사 에밀턴이 무릎을 꿇었다.
이번 전쟁에서 손이 모자라 종자 겸 하나를 코르도바 추천으로 들였는데 빠릿빠릿하니 마음에 들었다.
“각하. 죄송합니다만, 중요한 전보입니다.”
“뭔데?”
“벨리사르 장군이 승리했습니다.”
“그렇군. 비느를 되찾았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벨저 공의 활약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애초에 벨리사르가 아래로 내려가기 전에 전선 자체를 벨저가 유지하고 있었다. 시온도 기분이 좋았다. 일단 스승 역할을 해줬던 사람이 살아있다는 건 아무튼, 좋은 거였다.
“그랬군.”
“또한 코르도바 장군이 벌써 폴레토를 점령했다 합니다. 에릭과 고드 경은 다시 군을 갈라 아풀리와 살레르로 빠졌다 하고요.”
폴레토, 아풀리, 살레르, 라산 왕국의 각기 위치한 최대 도시였다. 인구도 가진 땅도 전부다 라산 왕국의 삼 할씩은 차지했다.
“전투는?”
“없다고 하더군요. 각하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 모든 인원이 빠졌다는 소문입니다. 그간 만난 수십 개의 성엔 골 제국 사람이 없었다 합니다.”
“.......”
치열하게 전공을 추격하듯 다들 벅찰 정도의 강행군을 펼치고 있었다. 골 제국의 그 악마의 군단이 전부 빠졌다는 게 확실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을 나눈 덕분에 삽시간에 라산 왕국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오히려 수도로 향했던 시온은 느리게 가는 편이었다. 쉴 거 다 쉬며, 어차피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게 라산 왕국의 수도였다.
실비아가 나체로 끈적끈적하게 들러붙는다.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어쨌든,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황제의 말을 들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그쵸.”
맞았다. 익은 과일을 따기만 하면 되는데 그걸 못할 뻔 했다.
아무루 강 지대는 폭과 수심이 시온이 본 어떤 강보다 컸다. 확실한 건 움드를 지나가는 강보단 한 수 위였다. 비견할 마는 데는 제국의 수도밖엔 없을 거였다.
시야를 올리자 새들이 쏜살같이 갈라져서 번졌다. 물 냄새가 물씬 흘렀는데 전방엔 라산 왕국의 수도가 보였다. 엉망진창이었다.
정말로 그때 벌였던 전투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멀쩡한 성벽이란 건 찾아볼 수가 없었고 도시 반이 불타있었다.
사람 오백만이 바글거리긴 했는데 기아 때문인지 상태가 그다지 좋진 않았다. 그나마 뒤에는 급한 대로 감자밭이 지평선 끝까지 칠해져 있었다.
그 많은 식량을 상납하고도 또 저리 자라난 거였다. 저지대의 위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흠, 수비하려면 시간이 또 걸리겠는데. 화평이 좋나.’
라산 왕국을 먹고 나면 그냥 골 제국에 화평할 셈이었다. 정말로 부시기만 할 줄 알고 문명을 만들 줄은 몰랐던 거였다. 공격에 미친놈들···. 이래서 줄행랑을 쳤나.
물론 정확한 이유는 아니었다. 애초에 유목이 근본인 자들이라 수비할 때도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공격을 했다. 도시 방어는 녀석들에겐 다른 개념이었다.
“시온 니벨룽!!!”
“해방자!!!”
누가 그렇게 한 마디를 외쳤다. 시온이 도시 안으로 들어가자 곧 해방자란 칭호가 휘몰아쳤다.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압박감. 그 태풍에 눈 같은 위치에서 시온은 일단은 손을 들어줬다. 어째 목소리가 두 배는 더 커졌다.
왕성은 황제의 휴양지에 여섯 배는 되는 크기였는데 마찬가지로 멀쩡한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관리도 안 돼 있고 비도 한 차례 부어졌는지, 먼지, 진흙, 희끗한 핏자국과 지푸라기로 바닥은 어지러웠다.
차라리 막사가 더 편할 지경이라 시온은 그냥 나와서 막사로 돌아갔다.
알렉시오스는 아까부터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이제 제 눈을 뜨기도 힘들어 보였다. 평생 못 밟을 줄 알았다가 밟았으니 그 아릿함은 대단할 거였다.
“알렉시오스 내가 여기를 통치해서 복구해라.”
“각하! 저는 뼈가 가루가 된다고 해도 이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 반드시 이번 전쟁에선 마지막까지 따라가고자 합니다!!!”
아직 골 제국으로 들어갈지 말지에 대해선 확실하게 답변한 바는 없었었다. 뜨거운 눈동자에 시온은 턱을 긁적였다.
“진심은 아니지···?”
“진심입니다!!”
같은 피는 확실했다. 둘 다 질척한 게 있었다. 시온은 헛기침을 하다가 말했다.
“봉신 서약이나 확실히 하고. 골 제국의 잔여 병력은 내가 방어해주겠다. 이미 무너진 백성을 돌봐라. 굶주린 자가 많고, 집을 잃은 자가 많다. 성벽도 새로 세워야 할 거고. 지금부터 비옥지를 가꿔야 전 지역에 수백만의 아사자를 줄이지······?”
또 줄줄 울고 있었다. 이 정도면 버릇이 맞다. 희한한 놈일세. 죽음의 문턱에서도 용감했었다. 목에 칼을 대도 핏발 선 눈으로 복수를 맹세하거나 과감한 정치적 숙청까지 제법 있었다.
“왕위를 받아 주십시오!”
“???”
“제발 받아주시옵소서.”
머리가 멀쩡하지 않을 게 분명할 정도의 소리로 바닥에 박혔다.
“난 이미 왕위가 세 개인데? 여기서 하나를 더 늘려서 뭐하겠나.”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제 자신을 인정할 수가······.”
“네 봉신들은 허락 안 할걸?”
“죽이겠습니다.”
“?”
“지금까지 태도가 같다면, 변하지 못한다면 모조리 죽이겠습니다······.”
“.......죽이진 말고, 알았다. 알았어. 일단 왕위는 내가 명목상 가질 테니, 너는 내가 총독 직위를 내리겠다. 신설하면 되겠지. 그리고 설득을 최대한 해봐라.”
왕위와 총독은 분명히 달랐다. 상속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의 차이였다.
아무튼 알렉시오스는 의욕이 넘쳐 보였다. 그러면 된 거였다. 알렉시오스와 그의 기사와 병력을 남기고 시온은 도시를 벗어나 코르도바와의 약속 장소로 움직여야 했다.
분할된 병력이 한자리로 모여야 했다. 그 전에, 해방자에서 ‘아버지’로 단어가 바뀌어 있었다.
많은 자가 전쟁 통에 죽은 나머지 인구 오백만 밖에 남지 않은 이 상처 입은 도시의 사람들은 시온을 향해 아버지라 불렀다.
대부분은 가족을 잃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시온은 알게 모르게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던 것이다.
길을 가는 도중,
에밀턴이 가져온 두 번째 소식엔 시온도 한참은 고민해야 했다.
“동방 제국의 수도를 공략해 달라···?”
벨리사르와 벨저는 다섯 번째 거대한 회전(會戰)에 들어가고 있었는데 이번 규모가 최대였다. 붙기 전에 동방 제국의 수도를 친다면 꼼짝없이 전쟁이 끝날 거였다. 공성전만 걸어도 전력을 분할 해야 했다.
[제국의 수호자인 시온 니벨룽이여, 내 형이 자네에게 몹쓸 짓을 했다. 그러니 나는 자네에게 무릎 꿇고 사죄를 하네. 자네가 세운 전공은 누가 봐도 영웅적인 행보였어. 나는 비겁하게도 그 뒤에 칼을 겨눴을 뿐이지! 그대에게 자비를 구하네. 제국의 군단은 피를 흘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자들이 많아. 이 회전의 사망자를 최대한 줄이고 싶어. 다시 한 번 간곡하게 부탁하네.]
기절초풍할 정도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공개했다가는 정치적인 격변이 일어날 거였다. 기존 전쟁 영웅인 벨리사르의 저자세는 남은 귀족의 행방을 바꾸게 할 정도였다.
과감하게 사죄를 구하고 도와달라 하지만 시온은 여전히 골 제국이란 적수와의 협상을 앞둔 상황이었다. 이들의 기동력은 얕잡아 볼 게 아녔다.
동방제국의 수도를 공략하려면 최대 규모의 공성전을 걸어야 하는데 13만을 총동원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