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3화 (303/304)

에필로그(2)

‘지금 회군을 하라는 건가.’

물론, 몇 가지 입장이 치열하게 맞물리곤 있었다. 제국의 수호자라는 직함과 워든으로서, 그리고 이젠 명목상이지만 황제의 봉신으로서,

하지만 벨리사르가 말하지 않은 점은, 아마 여기를 비우면 되찾은 지역이 초토화가 될 거란 점이었다.

벨리사르가 자신의 병사를 아끼고 기사를 아끼는 것도 있지만, 시온도 자신이 열어 버린 이곳의 목숨을 책임질 필요가 있었다.

무려, 삼천만의 인구의 절반이 목숨이 간당간당했다. 전쟁 통에 전술적으로 태워버린 식량이 20만 톤인지라 당장에 식량을 퍼오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숫자만 어림도 안 됐다. 

“황제와 벨리사르 장군과 모든 장군이 요구한다면 니벨룽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 내려가시는 것도···.”

기본적으로 정치는 전통적으로 라산 왕국이 더 심했다. 거기는 연합 왕국인지라, 실비아가 아무리 창대를 쥐었다 해도 그녀도 왕족이었다.

정치적인 힘이 밀리게 되면 사람을 잃는다. 그것이 여기의 원리였다. 누가 숙청을 당할지 암살을 당할지 모른다. 항상 라인을 만들고 유지해야 했다. 그런 것이 지금의 선택지에 달려 있었다.

“사람의 무게는 크다. 나는 내 할 일을 했고, 벨리사르 장군은 자신의 할 일을 해야 한다. 군단은 서약은 그런 게 아니지. 제국과 제국민을 위해 쓰기로 했다면 그게 바꿔서는 안 되는 것이지. 이곳은 위기고 내가 마무리 짓지 않고 떠난다면 모두가 죽겠지. 벨리사르 장군에게 이대로 전해라.”

에밀턴이 고개를 팍 숙였다. 실비아가 옆에서 울먹거렸다.

“왜 울지?”

“오빠가 생각이 나서요.”

“.....”

“나한테 창술을 가르쳐줬어요.”

“설마 그때?”

“네. 셋째 오빠는 다리를 절었어요. 얼굴도 크게 화상을 입었어요. 그래서 온갖 소문이 따라다녔죠. 그래도 나는 다음 왕위는 항상 셋째 오빠였으면 했어요.”

“언제나 빈민 굴을 가는 것을 거리껴 하지 않았어요. 창을 가르쳐 줄 때도 제가 울고 있을 때였어요. 주면서 그러더군요. 울지 말고 누군가를 위해서 작은 것부터 해보지 않겠느냐고.”

안타깝지만,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살아남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돌격해서 죽었다 하지 않았나.”

“분명히 큰 오빠 때문이에요. 아버지랑 성격이 똑같죠. 죽을 길을 가라고 했겠죠. 아마도. 물어볼 수는 없겠지만······.”

저 가문의 생존자는 알렉시오스와 실비아밖에는 없었다. 에밀턴이 조용히 빠져나갔다. 뭐가 됐든 이젠 확정이었다.

계속해서 위쪽으로 올라갔다. 아무루 강을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너무나 길어서 가도 가도 강 자락밖에는 안 보였다. 하나 확실한 건 새가 정말 많았다.

하늘은 더럽게 맑아서 앞으로의 일에 대한 걱정을 한 시름 덜게 할 정도였다. 그리고 소도시 급 옆에 기다란 막사가 일만 평 정도 끝없이 펼쳐졌다. 깃발은 딱 하나 니벨룽 가문의 문장이었다.

시온은 마지막이었는데 코르도바, 에릭, 고드, 아르눌프, 에슬린, 마리온은 분할 해 간 병력으로 자기가 맡은 방향로를 확실히 통치권을 확립한 뒤에 도착한 상황이었다.

“다 좋은데 굳이 이렇게 힘을 빼야겠나? 이런 건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시온은 오백여 평의 왕의 막사로 들어오자마자 코르도바에게 한소리를 했다. 그도 그럴 게 십만 병력이 늘어서서 자신을 맞이한 거였다. 날씨도 더운데 시온은 이런 것이 딱 질색이었다.

“악마의 멍에를 벗긴 해방자에겐 이것도 부족한 것이죠.”

“악마의 멍에?”

“모르셨습니까? 전 지역이 각하를 부를 때 그렇게 부릅니다.”

“지독하긴 했지.”

“벨리사르 원수께서 저에게 호소하더군요.”

“그랬나?”

“평생 기사로서의 의무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

코르도바는 길거리 고아였다. 원래 전 백작이 그에게 칼을 쥐여주지 않았다면, 평생 길바닥을 돌아다녔을 거였다. 

그러나 시온은 그 누구보다 기사도를 지키는 사람은 코르도바라고 생각했다.

“움드에서 죽고자 했습니다. 태어나고 길러주고 저를 인간으로 만들어 준 곳이니까요.”

당시 유비드 가문의 공격은 매서웠다. 움드를 노리던 그 전략가는 백 년이 넘게 그곳을 압박해왔었다.

“그때 죽은 목숨입니다. 각하의 반기를 드느니 그냥 죽겠습니다.”

“고맙군.”

“천만의 말씀입니다. 앞으로 오래 사셔서 더 많은 자에게 빛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크흠. 코르도바 어쨌든 식량은 다 풀어버렸다.”

“들었습니다. 제가 최대한 보급을 노렸습니다만, 솜씨가 좋은 녀석들인지라 운반해갔더군요.”

시온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갈증이 좀 가신다.

“전쟁은 더는 못해. 군량미가 모자라. 화평을 해야 한다.”

“들키지 말아야 하겠군요.”

“그렇지. 단, 마치 전쟁의 고삐를 끊지 않을 것처럼.”

“입단속을 시키고, 따로 회의를 거치겠습니다. 구체적인 방안은 그때 드리겠습니다.”

ㆍㆍㆍ

상황은 아주 빠르게 진행이 됐다. 다만 밑은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동방제국의 장엄제는 단숨에 회전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야 딱 하나였다. 

시온 니벨룽. 

대치가 길어지고 있는 와중, 시온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해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두려운 거였다.

영원 전투는 빠르게 세계를 강타했다. 믿지 못한다 해도 문제는 항상 그런 결과를 만들어 내는 인물에게서 다시 한 번 나온 탓이었다.

게다가, 시온의 눈앞에 모인 대치는 다시 한 번 자신의 판단에 가치를 더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

푸른 평원 위에 십삼만의 시온의 병력과 골족의 패잔병 팔십만 정도가 대치 중이었다.

어딜 봐도, 말을 타고 있는 인간의 무리가 꽉 껴 있었다. 좌우로 펼쳐진 방향은 눈으로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다.

어쨌든 인간밖엔 없으니, 심히 부담스러웠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쳐도 쳐다보는 눈동자가 불안불안해 보인다.

시온은 알았다. 이건 공포의 냄새였다. 시각적으론 불리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문제가 없을 거라는 느낌에 자신감이 돈다 싶었다.

그리고 중앙으로, 점차 밝아지며 삼십 명이 다가왔다. 다섯 명밖에 없는데도 어째 태도는 반대였다.

그리고 낯이 익은 얼굴이 보였다. 

라카이? 자신을 도스섬으로 안내했던 여선장이었다. 한때 달달 볶았던 그녀의 오빠인 나인만 부족의 카이샨도 옆에 붙어 있었다.

“반갑군? 여기서 볼 줄이야.”

시온이 대뜸 그들에게 물었다.

“워든 각하. 오매불망했습니다.”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그녀가 다소곳하게 있자 시온은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풀네임. 라카이 에키, 그녀에 비하자면 실비아는 애교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은 야성미가 넘쳐 보였다. 건강했고, 생기발랄했다. 흉터 하나 없는 매끈한, 그을린 피부. 잠자리가 정말로 불같은 여자였다.

“봐주세요.”

“무엇을?”

그녀가 시온 앞에 내민 것은 작은 천에 감싸인 것이었다. 정성스럽게 투박하게 말려 있는 그 안에는 풋풋한 뭔가가 있었다.

“???”

“각하와 저의 결실이에요.”

“?!!”

심장이 갑자기 뛰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겪었던 그때하고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하여튼 그렇다곤 한다. 말없이 잠시 서 있었다.

“내 아이라고.”

“네. 원래는 그냥 키울 아이였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려서.”

아, 그랬다. 원래 유목 민족이 워낙 이런 거에 얽매이지를 않았다. 애초에 결혼도 약탈해서 했고, 여자는 거꾸로 강한 남자에 씨만 받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라카이의 오빠인 카이샨이 나섰다. 이제 보니 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지나치게 긴장한 거였다. 불쌍할 정도로 떨면서 한 자씩 집중해서 말했다.

“아이를 위해서 위대한 늑대 신에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저희를 살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위대한 늑대에서 ‘신’ 이란 단어가 붙었다. 가만 보니 라카이 빼고는 식은땀이 쉴 새 없이 빠졌다.

날 정말 신으로 알고 있는 건가. 시온은 이들의 의중을 묻곤 싶었으나,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언제는 문명적이었던 게 많았던가.

말없이 있자 다급해진 건 삼십여 명이었다. 목숨을 구걸하는 짐승처럼 바닥 아래에 납작하게 몸을 눕혔다. 머리가 긴 자는 그것을 제쳐 목덜미를 보여줬다.

“......”

시온은 알렉시오스에게 지겹게 들은 바가 있어서 이 의미를 알고 있었다. 

이것은 대칸에게 하는 의례였다.

서먹한 시간이 흐르고, 시온은 여전히 가만히 있었다. 애초에 애가 생겼다는 것에 충격을 안 받을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생긴 아이라니! 그런데 그 의미를 달리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팔십만의 인간이 천천히 말에서 무너졌다. 말에서 내린 것으로 끝이 아니라 똑같은 자세를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머리카락이 길면 즉석에서 머리채를 잘라 그 앞에 내놓았다. 점점이 시작된 그것이 좌, 우로 뒤로 하나씩 넘어가듯 번졌다. 무려 이십 킬로미터 정도를.

휘이잉.

바람이 한 번 휘몰아쳤다. 아이를 둘러싸고 있던 천이 흔들렸다. 시온은 바로 바람을 차단했다.

ㆍㆍㆍ

화평 정도는 분명히 아니다. 이건 그냥 새로운 대칸 즉위였다. 얼떨떨했지만, 그곳에서 벌어진 건 대칸 즉위와 비슷한 거였다.

카이샨이 빠르게 입을 놀렸다.

“대칸 일족이 몰살당했고, 나인만 부족이 육십여 개의 부족을 장악했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거기에서 썼던 것이 바로 위대한 늑대와의 아이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

“결국, 모든 부족은 항복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눈먼 점쟁이가 삼일에 걸친 점을 쳤고, 모든 점괘는 극흉. 다시 말해 수억 번을 반복해도 이길 수가 없다는 것으로.”

‘그 정도 하면 수십 번은 이기겠지······.’

시온은 한마디 하려다가 꾹 참았다.

당연히 영원 전투에서 참가했던 자들은 모든 부족의 전사들이기에 이들이 부리나케 도망을 치자마자 보고 들은 것을 맞춰봤을 거였다.

그리고 절망했다. 단순히 끝날 게 아니라 반드시 물어뜯길 것이라는 공포. 늑대의 보복은 항상 지독한 법이었다.

“눈먼 점쟁이가 그런데 뭐지?”

“수천 년간 세습되어온 저희의 모든 운명을 볼 수 있는 자입니다. 얼마 전에 죽었습니다.”

“설마, 죽였냐?”

“아···. 아닙니다. 나이가 백이십이어서 자다가 죽었습니다.”

“........”

“그 자손이 여기 왔습니다.”

“?”

“들어와 주십시오! 예언자시여.”

그리고 작은 아이가 들어왔다. 작은 고양이었다. 지나치게 어리다. 열넷은 됐을까. 그런데 눈이 안 보이는 듯했다.

“나이가 몇이지?”

“열넷입니다.”

“너무 어리지 않나.”

“원래 예언자는 세대를 뛰어넘어 가장 어린 자에게 그 영혼이 전수되게 됩니다.”

‘말도 안 되지 않나. 염병, 눈도 보니까 당한 것 같은데. 게다가 여자애잖아.’

비틀비틀 위태하게 걸어오다가 시온의 앞으로 왔다. 정갈하게 입고 있었는데 골족 사람이란 건 단번에 알 수 있는 옷차림이었다.

“어···. 어떻게 생기셨나요?”

“그······.”

카이샨이 말문이 막혔다. 시온은 카이샨의 말을 끊고 어린 예언자에게 말했다.

“한 번 이리 와서 만져봐라.”

그리고 더듬더듬 시온의 눈과 코와 입을 작은 손으로 봤다. 그리고 예언자의 입이 열렸다.

“수천 년간 저희 일족은 푸른 늑대를 찾았습니다. 드디어 내 대에서 끝이 나네요. 할머님의 마지막 예언은 이분이 맞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수백 명의 선조가 찾았던 칸 중의 칸이 분명합니다. 신의 섭리를 본 자. 깊은 곳까지 다녀온 자. 분명히 어딘가를 다녀오셨을 겁니다.”

“.......”

“옆에서 보필하고 싶습니다. 전 대의, 그 전전 대의, 셀 수도 없는 선대 예언자들이 바랬던 기회가 저에게 오는군요. 감사드리고, 감사드립니다.”

시온은 한참 뜸을 들였다.

곧 이들을 내보냈다. 하여튼 골 제국까지 들여와 버리게 됐다. 땅 하나는 무지막지해서 제국에 세 배였다. 물론 비옥한 면적은 제국의 반의반도 따라오지 못하지만.

몇 가지 절차와 돌아가는 꼴은 봐야겠지만 방향타는 이미 터진 후다. 황제를 압도할만한 권력이 만들어졌다.

‘이러면 벨리사르의 요구를 들어줘도 되긴 하겠어.’

뒤늦었지만 충분히 압박 정도는 가능했다. 공성전은 못 걸지언정 비슷한 건 할 수 있었는데, 

‘대칸이라 잘됐네, 이상한 관습은 다 없애버려야겠군.’

마지막 길인가. 정말 분에 넘치도록 길을 떠나왔었다.

처음에 가문을 나섰을 땐 그저 적당히 살아야 할 영지 한 덩어리 얻으려고 했던 거였다. 어느새 모두를 지탱할 만한 존재가 되었고, 이루어야 할 것을 이루어 버린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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