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4화 (304/304)

에필로그(完)

소식이 얼마나 빠른지, 

골 제국이 시온에게 무릎을 꿇은 것을, 전선을 유지하는 동방 제국 장엄제의 귀에 들어갔다.

“시온 니벨룽이 군을 회귀해 대규모 상륙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흐흐···. 하하하···.”

장엄제의 이름은 그들의 전통에 따라 매우 길었다. 이름이 세 줄이나 됐고 불리는 것마다 달랐다. 그는 레이만이라는 이름을 가장 좋아했다.

그가 광기를 앓듯이 웃었고, 그가 걸치고 있는 백여 개의 장신구가 흔들린다.

“대체 시온 놈이란 녀석은 언제 무너지는 것이냐?”

삼천 명이 넘는 동방 제국의 귀족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한마디도 할 수가 없다. 끔찍할 정도의 불편함이 흘렀다.

“대체 언제 무너진다는 것이지? 자신했던 네들이 말해 보거라.”

“.......”

“그 추한 것들과 동맹을 맺고 수 천 년을 이어온 선조께 부끄러워할 짓을 했다.”

막대한 물자를 골족에게 넘겼다. 목표는 딱 하나다. 시온 니벨룽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예상대로 제국은 갈라졌다.

“대체, 녀석은······. 녀석은 대체, 그 녀석을 어떻게···. 어떻게 했단 말인가, 그건 불가능하지 않은가. 어째서 시온 녀석만 이치에 벗어나 있는가. 왜 그를 태어나게 했는가······. 신이시여···. 이렇게 되면···.”

레이만은 난생처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모두 물러가라. 결전을 준비해라.”

“!!!!”

“하오나!! 그렇게 되면 수도가!! 시온 니벨룽에게!!”

“많이 컸구나, 짐에게 명령을 하다니.”

“죄송하옵니다!!! 소인을 용서해주십시오.”

“네놈을 죽일 거면 전쟁터가 낫겠지. 이만 나가라.”

장엄제는 상념에 젖었다. 오랜 옛날,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각이 났다. 그의 아버지인 세림은 무자비한 인간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냉혈한이라 불렀는데, 그가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완벽한 아버지였다. 폭력을 휘두르는 법도, 무리한 교육을 하는 법도, 없었다. 항상 자애로웠다. 

단, 그의 형제에게는 예외였다.

“레이만 살려줘! 내가 그럴 생각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잖아!! 부탁이야. 제발. 너와 함께 전장에 나가고 싶다! 이런 식으론 죽을 수 없어! 부탁이다! 나를 전장에서 죽게 해줘!”

눈물을 흘리며 처형장으로 끌려간 무라타는 그의 동갑내기 친척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무라타는 고독한 황궁에서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친구이자 형제였다. 

아버지의 친가와 외가 숙청은 무자비하게 시작됐고, 레이만은 무라타를 살리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갔다.

“무라타는 아무런 죄가 없어요. 아버지. 형제를 살려주세요. 황제이시여!”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옳다는 것을 너는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너를 위해서이고 숙원을 위해서이니. 이것은 네가 이어야 할 왕관의 무게다.”

레이만은 처형장에서 울부짖으며 목이 잘리는 무라타를 똑똑히 봤다. 그것도 모자라서 그의 머리를 직접 들고 한참을 쳐다보기까지 했다.

‘아버지를 미워할 수 있는가?’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나이 열 여섯때의 일이었다. 그는 무라타의 애검을 아직도 아직도 차고 있었다. 서늘한, 그것을 끄집어내고 비췄다. 무라타의 얼굴이 보였다.

“형제여. 아버지가 옳았던 것인지 아닌지가 결판이 나겠지.”

벨리사르와 벨저가 이끄는 18만병력과 동방제국 레이만의 친정 28만 병력이 평원에서 전면으로 부딪혔다. 수도를 시온에게 포위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레이만의 과감한 결정이었다.

전투는 십육일 간 계속됐으며 사망자는 모든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런 마지막 순간, 레이만은 노년의 기사가 자신을 향해 내달리는 것을 보았다.

막을 수가 없었고 그는 무라타의 검을 맞서 꺼냈다. 

순간 본 것은 시온 니벨룽이었다. 

“와라, 시온 니벨룽.”

초상화는 누구보다 많이 봐서 외모와 체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따라가는데 보인 건···.

“무라타···?”

그의 목이 하늘로 날았다. 벨저는 황제를 베고선 마지막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시온 이라 했었나. 안 보이는 곳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구나, 제자야.”

피를 뒤집어쓴 벨저는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주변엔 수십 만의 인간이 흩날려 있었고 그의 왼팔은 헐렁하게 비어 있었다.

한창 상륙 작전을 준비 중이던 시온은 활기 넘치는 항구에 있었고, 육백 기의 범선이 차곡차곡 들어오는 중이었다. 되는 데로 범선이 더 들어올 거였다.

그의 앞, 코르도바의 옆에는 어린 열 살 소년이 서 있었다. 코와 눈이 낯이 익었다. 아주 익었다. 시온은 코르도바를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혹시 네 아들인가?”

“맞습니다. 각하.”

“그랬군! 잘 됐었군.”

“에슬린, 마리온 둘이 힘을 써줬습니다. 평생 남을 빚입니다.”

“이름이 뭐지?”

“진 드 브린입니다.”

“.......잠깐만.”

“맞습니다. 허락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진 드 브린은 움드의 전 백작이었다. 브린 가문은 그가 죽음으로서 끝이 났고 그 계승권은 벨리사르의 의도대로 시온이 가졌다. 

코르도바는 그 전 백작의 이름과 가문을 아들에게 붙여 놓은 것이었다.

“못할 게 있나. 마음껏 써라. 나의 장군.”

하여튼 아이는 귀여웠다. 얼굴을 보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코르도바의 사생아를 두고 황제와 한바탕 납치 전을 벌였던 모양이고,

결국, 빼돌리는 데 성공했단 얘기는 들었는데 일이 밀려 보고를 받지는 못했었다.

“각하! 각하! 급보입니다!”

에슬린이 차림새를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의 태도로부터 딱 하나 기다리고 있던 것이 왔음을 알았다.

“말해봐라.”

결과에 대해선 심장이 뛸 수밖엔 없었다. 그리곤 답변이 이어졌다.

“레이만 황제가 육차 회전에서 사망했습니다. 동방제국은 팔라키아 일대를 내주기로 약조를 하고 휴전을 요청했다 합니다.”

“벨리사르가 결국 해냈군.”

“벨저 공이 레이만 황제를 베었다 합니다.”

“피해는?”

“거의 궤멸이라고······.”

“그래서 팔라키아 정도로 끝이 나는군.”

그마저도 시온을 의식해서 내주겠다고 내건 거일 거였다. 

물론, 황제의 생각은 다르겠지만, 시온은 그의 의견을 묵살하고 있었다.

“수도로 돌아가야겠다. 에슬린, 벨저와 선제후들에게 화평을 하라고 요구해라.”

“알겠습니다.”

먼 거리에 있지만, 모두 시온의 동맹이었으며 파편이었다. 황제의 권력은 시온으로 옮겨져 있었으니 이젠 황제의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벨리사르도 역시 빚이 생긴 상황이었고. 사실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었었는데,

그냥 무시하려고 했지만, 유목 제국이 무릎을 꿇으면서 자연히 시간이 좀 늦었던 것 빼고는 부탁을 들어준 게 됐다.

그러니, 

만장일치로 휴전이 결정됐다.

아무튼 수도에선 한바탕 여럿 일이 있긴 했다. 최대 규모의 개선식부터 오랜만에 황제인 디드리히를 알현했다.

머리가 하얗게 변한 게 그간 스트레스를 상당히 받은 듯한 그는 오만한 표정을 겨우겨우 숨겼다.

“콘스탄챠와 결혼을 서둘리 해주게.”

정치적으로 그는 궁지에 빠졌다. 허수아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서 반기를 들으면 황제는 곧바로 교체될 수밖엔 없었다.

하지만 시온은 거기까진 관심은 없었다. 수도에서 사는 것보단 움드에서 지내고 싶었다. 결혼은 이제 황제가 거래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단지 그의 목숨을 연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밧줄이었다.

디드리히 블랙파이어는 시온의 답변을 기다린다. 

단 한 번의 번복만으로 블랙 파이어 가문은 끝장이 날 수 있었다. 

안 되겠지. 디드리히는 거의 포기했다. 그가 겪어왔던 어떤 인간이든 모두 한결같았다. 언제든 자신의 차례가 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게 지금이라고 한다면···.

“형님은 재혼을 해야 하오!”

‘네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다.’

“적자가 필요하오! 그 여자는 그만 잊어버리고······.”

동생인 벨리사르와의 관계가 일방적인 된 건 이때부터였다. 블랙 파이어 가문은 남자 후손이 없었다. 블랙 파이어 가문은 벨리사르가 마지막이었는데 벨리사르마저도 딸이 셋이었고 남자아이가 없었다.

“그러니 그때 나를 형수께 보내야 했을 것이오.”

그때는 그랬다. 젊디젊은 시절, 대반란이 있을 때 벨리사르를 보낸 건 긴장 높은 전장이었다. 부인인 자베스는 그때 죽었다. 딸 하나를 남기고 사망했다. 습격으로 이동 중에 건강이 나빠져 조산한 거였다. 

그는 황제에 오를 수 있었지만, 어째 일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았고, 자베스는 재가 되어 묻혀버렸다. 그의 폭정은 그때부터였다. 딸에게도 가혹하게 대했다. 그러나 목적은 하나였다.

‘블랙 파이어 가문 따위, 그것 때문에 자베스가 죽었어. 재혼을 언급하지 마라, 벨리사르.’

그는 자신의 가문이 증오스러웠다. 더불어 사람을 한 명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예감은 언제나 적중한다.

콘스탄챠도 필시 잃게 되겠지. 내가 재혼을 하게 되면, 그 여자가 죽이겠지. 아들을 낳으면, 내가 그랬듯이 그 아들이 콘스탄챠를 불행하게 하겠지.

“그렇게 하지요. 폐하.”

시온이, 담백하게 말하자 디드리히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황관을 가져가지 않겠다고?”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시온은 별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애초에 영지 하나만 있으면 만족할 인생이었습니다, 폐하. 아무도 믿진 않았지만 말이죠.”

시온은 그대로 걸어나갔고, 적막한 홀에서 디드리히는 숨을 죽이고 자베스를 찾았다. 그녀와의 약속이 있었다. 그녀가 유언이라고 남긴 것은 믿을 수 있는 자에게 콘스탄챠를 결혼시켜달라는 거였다.

콘스탄챠와의 결혼식은 낙관적 분위기로 둥실둥실 떠 있었다. 2억 4천 평이 넘는 대연회장은 온갖 것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모두가 원하던 결과였다. 니벨룽 가문과 블랙 파이어 가문이 결합이 되면 제국이 안정되는데 그 골을 채워줄 방법은 딱 하나밖에는 없었다.

중요했다. 어차피 이미 두 명의 황제가 있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북부에서의 대칸식이 예정이 되어 있었는데 대칸으로 올라가게 되면 두 가지의 입장이 공존하게 되는 거였다. 

어차피 가진 영토가 너무 넓어서 황제는 시온이라고 하는 마당이었다.

일부분은 봉신이면서 일부분은 황제라는 이중적인 위치. 그것이 이곳 봉신 제도에선 가능했다. 

뭐든 좋군.

정말이었다. 뭐든, 잘 들어왔다. 콘스탄챠가 빤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외모는 찬란할 정도였다. 오만해 보이면서 여려 보이기도 하다. 불세출의 예술가가 있다면 평생을 앓았을 정도다.

폭군의 딸이라는 점은 위험한 독사과를 연상케 한다. 그걸 먹을 수 있는 자는 독이 통하지 않는 자일 수밖에 없다. 붓으로 칠한 듯한 입술이 달싹인다.

“아빠가 죽일 줄 알았어요.”

“.......”

“언제나 나에게 접근해오는 자는 다 죽였어요. 난 엄마 얼굴을 몰라요. 유모가 날 길러줬는데 따뜻한 사람이었데요.”

“......유모는? 여기에 있나?”

“이젠 없어요. 분명히, 아빠가 손썼을 거에요······. 난······. 이번에도 잃는 줄 알고···.”

아름다운 푸른색의 눈동자가 흐려진다. 깨지기 전에, 시온은 그녀의 손을 잡아 줬다. 머뭇거리던 콘스탄챠는 숨을 몰아쉬곤 행복감에 젖는다.

그런 시온을 보는 두 명의 얼굴이 있었다. 기드 도팽과 루시 도팽이었다. 도팽 가문은 시온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마법 물품 조합을 장악했다.

“알았니, 루시. 물건을 파는 자는 사람을 그 밑에 두어서는 안 된다.”

맞지 않소, 형님? 이미 깊게 나이 먹은 그와 다르게 기드의 기억에 있는 그의 형은 여전히 젊다. 

사람을 돈으로 계산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많은 자를 돈으로 바꿨다. 그해 봄의 열병에, 기드의 형은 죽는다. 죽기 전에 핏발이 선 눈으로 기드에게 소리쳤다.

‘물러 터진 놈. 너 같은 놈에게 감히 도팽 가를 맡겨야 하다니. 네 놈의 방식은 가문을 언젠가 망하게 할 것이다.’

그게 마지막 유언이었다. 기드는 평생 그 말의 반대로 살아왔다. 저기 저 앞에 그 증거가 있다. 

드래곤 상회의 협회장 버만을 결정적으로 설득한 것도 그였고, 이차 삼차 대규모 대출에도 관여한 게 그였다.

드래곤 상회의 모든 협회원을 설득하는 데에는 매수가 필요했고, 금에 미쳐 있는 협회장인 버만에게 확신을 부여해주기 위해서는 기드의 안목이 필요했다.

“응. 그 말이 맞아. 내가 시험장에서 시온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았다면, 저 자리는 내게 됐겠지.”

루시는 완전히 시온에게 반해버렸다. 이젠 그가 없으면 안 됐다, 그때 호감이 있었지만 고민했던 점. 과거에 대한 자책이 그녀를 괴롭힌다. 하지만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며, 각오를 다진다.

한 달이나 지나서야 결혼식은 겨우겨우 식었다. 일단의 거절을 수백 번은 반복하고 나서 삼 개월이 더 지나고 시온은 자유를 얻어 움드로 올 수 있었다.

“정말인가? 핸드를 나에게 넘기겠다고?”

마인츠 선제후가 무려 여섯 번이나 다시 물었을 정도였는데 시온은 수도에 머무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가장 강한 동맹인 마인츠를 추대하고 곧바로 빠져나온 것이다.

이제는 놀고먹어야지.

시온은 야무진 계획을 세웠다. 돌아온 움드의 앞은 가슴이 벅찼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커져 있었다.

도시 성벽은 꽉 찬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열 번이나 증축이 되었는데 좌우를 봐도 지평선밖엔 안 보였다. 관문은 총 여덟 개였고, 사람과 기사, 용병, 마법사, 기술자, 상인, 사냥꾼, 농부 등 온갖 자들이 흘러들고 나온다.

밟고 있는 데가 아마 움드 전투를 치른 곳인 것 같았다. 시온은 과거의 기억을 뒤져 용케 거대한 자태를 자랑하는 돌덩이를 찾았다.

공개적으로 온다 하면 도시의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없기에 몰래 왔다. 

안으로 들어가자 건물들이 반듯하게 수천 개가 박혀 있었다. 높았다.

이 정도면 거성 빼고는 제국의 수도보다 나을 정도였다. 많이 성장했군, 나처럼. 근질근질해진다. 잘했다고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음?

생각보다 거성 자체는 작았다. 것도 무지 작았다. 증축은 커녕, 시온이 떠나있을 때 무너진 곳까지 그대로였다. 검소함이 절로 묻어 나온다. 초이가 그랬겠군. 정말이지, 끝까지 다른 의미로 대단했다.

나는 죽어도 이렇게는 못할 것 같은데, 솔직한 심정이다. 어느새 들어온 시온의 존재를 쉽사리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곤, 한창 일거리를 던져놓고 떠났던 집무실을 향해 느긋하게 걷는다.

“누구냐. 거기 멈춰라.”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단한 목소리. 시온은 그 기사를 향해 마주 웃어 보였다. 어차피 쉽게 잊을 만한 사내는 아니다. 어레이는 시온을 확인하곤 말을 더듬었다.

“설마???”

“반갑군. 어레이.”

“시온 경! 아니, 각하!”

“난 경이 좋군.”

그와의 짧은 만남의 해후 후, 집무실로 들어갔다. 어레이가 곧장 얘기했는지 앞에 있는 기사들의 의전은 가히 진심 아닌 진심인 듯했다.

할 수 있는 존경심이란 존경심은 모두 우려낸 듯싶었다. 시온은 고개를 끄덕여주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툭 치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그 안에서 누군가가 끙끙거리고 있었다.

“초이. 오랜만이군.”

“........”

그가 잽싸게 튀어나와서 바로 머리를 박았다. 섭정인데도 행동이 참, 어차피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것이었다.

“이런 무례를. 언질을 주셨다면 제가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그만 하고 자유인이 되지그래?”

자유인! 노예의 해방, 그리고 시온이 곧바로 서랍을 열고 서류 하나를 들췄다. 그때 작성해두라고 한 것, 제국에서 노예를 없애기 위한 제도적인 방안이었다.

여덟 명, 

성년이 되자마자 일 년도 채 안돼 잃어버린 초이의 형과 누나의 수였다. 노예들은 의외로 유대감이 강하다. 노예 훈련소에서 낙인을 받고 짐승이 되기 위한 세뇌를 받는다.

그곳을 나온 같은 방을 쓰는 자들은 피보다 진한 사이가 되어 있다. 지독한 곳에서도 웃음과 농담과 유대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 그렇게 태어난 자들이었다. 초이는 결코 그 미소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추락으로 죽어 버린 누이가 그에게 보낸 마지막 낙서는 자식은 노예가 되게 할 수가 없다는 거였다.

“사람은 자신답게 살아야 해. 맞지 않나? 그 자식은 별개의 존재가 되어야 하고 기회는 분명히 공평해야 하지.”

시온의 던진 나지막한 말, 초이는 말문이 막혔다. 현대인인 시온이 가질 수 있는 당연한 사고방식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영원히 허락될 일이 없는 그것,

내가 이런 분을 위해서 일해왔었구나.

잉크가 적셔진 펜대가 미끄러지듯이 날아와 시온의 손에 잡혔다. 서명은 아주 간단했다. 너무나도 간단히 이루어졌다.

“괜찮군. 내가 황제께 진상해보지. 장인어른이 요즘 좀 많이 바뀌셔서 말이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실 거다. 수고했다.”

바로 대답이 나올 줄 알았건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끄윽···. 끅···. 끅···.”

“......?”

“아······. 닙니다. 아닙니다. 주인님···. 저는 여기서 죽어도 괜찮습니다. 저의 존재가 당신의 작은 발판을 드리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고, 얼굴을 들지도 못했다.

“허튼 소리하지 말고, 이 방안은 부족해. 좀 더 머리를 굴려봐. 이제 시작이니까. 그리고 내가 서명을 한 시점으로 이 안건은 가동됐다. 움드 내의 모든 노예는 이제 자유다. 고로 너도 자유다. 앞으론 칭호를 실수하면 용서치 않겠다.”

“알겠습니다. 워든 각하.”

그에게선 처음 듣는 호칭이었다.

몇 가지 일이 더 있었지만 시온은 대충대충 처리하고 다시 모습을 감췄다.

움드를 성장시킨 자, 마탑의 늙은 괴짜 장인 코논을 보기 위해서다.

그가 운영하는 공방은 불더미로 화끈화끈했다. 자신을 알아본 그의 제자들의 소개로 간 곳에 코논은 망치를 연신 내려치고 있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의 기백,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이었다.

“자주 저러십니다.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알려드리겠습니다. 귀가 나가셔서 불러도 못 알아들으십니다.”

움직이려는 건장한 제자를 시온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냥 보기만 해도 됐다. 저런 각오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도시를 건설한 것일 거였다. 한 방, 한 방 내려치는 쇳소리에 자신의 최후를 걸고 있었다.

“나중에 보면 되겠지. 나중에 한 번 찾아오라고 해.”

시온은 그 말을 남기고 그곳을 떠났다. 그렇게 마치 머물 것처럼 굴다가 남몰래 움드를 벗어났다. 

시온이 향한 곳은 고향이었다.

첩첩산중, 니벨룽 가문의 남작 영지는 정말 오지에 있었다.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어디를 봐도 세상 모르게 조용히 냇가가 흐르고 있다.

그리고 수도 없이 반복했던 그 길을 시온이 타고 있었다. 추적술의 기본은 모두 여기서 비롯됐었다. 살아남기 위해 발악했던 유년기의 시절. 주마등이 흐른다.

시온이 문득 샛길로 빠진 곳의 끝자락 언덕엔 한 묘지의 비석이 덜렁 있었다. 사람이 다니지 않아 무성한 잡초와 바래져서 보이지 않는 글씨.

시온은 그 앞에 잠시 묵념을 하고 허리춤에 있던 가죽 물통을 열어 거기에 와인을 부어 주었다. 황족만 먹을 수 있는 상표, 드래곤브레스다.

“내가 직접 공수해온 최고급이라고, 렌.”

사냥꾼 렌, 시온이 진정 아버지라고 보고 있던 자였다. 오랫동안 혼자 살던 사냥꾼이었는데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길러왔다. 막내였던 자신을 항상 아끼고 아꼈다.

열 살의 어느 날, 지독하게 아팠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폭우가 치는 날에, 그가 사라졌는데 약초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 날 그는 죽었다.

“영지 하나 거하게 얻어냈어. 내가 번번이 말했지. 나는 얻어낸다고.”

아무도 안 믿던 걸 유독 웃으면서 도련님은 할 수 있을 거라고 답해주던 것이 렌이었다.

니벨룽 영지는 난리가 났다. 워낙 외래가 없기도 하고 가족은 한 명도 없었다. 대리인을 두고 나머지는 지역을 맡겨 놨다. 

거의 서부 지역에 있었다. 그곳은 광범위하고 개발이 필요하니까. 누나들과 결혼한 자들도 거의 그쪽으로 보내놨다.

“발뭉 도련님. 안녕하십니까. 여전히 건강하시군요.”

대리인 장이 중얼거렸다. 백 세가 넘는다.

“아, 시온 도련님. 장 지배인이 요새 치매가 와서···.”

허둥지둥 시온에게 말한 건 장의 증손녀였다. 닮았군. 닮았어. 시온은 싱긋 웃었다. 얼굴이 홍당무가 된다.

“괜찮다. 장 어르신 오랜만입니다.”

시온은 그의 손을 맞잡았다.

“발뭉···! 발뭉이구나! 미안하다! 내가 너를 거짓말쟁이라고······! 너의 모험은 진짜였단다······! 나는 항상 자랑스러웠단다···!”

“예. 발뭉은 진짜 모험가입니다.”

발뭉 니벨룽, 시온은 푸른 액을 만드는 유물로 여기까지 왔다. 발뭉은 평생 오명에 시달렸는데 그는 거짓말쟁이였고, 동료를 버린 자였으며, 현실을 모르는 이기적인 사내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진정한 모험을 했다며 신념을 굳히지 않았다. 

그리고,

가족 서재로 들어간 시온은 그의 초상화를 눈앞에 두었다. 콧수염을 기른 어딘지 자부심이 범람하는 남자를. 

이곳을 마지막으로 짐을 챙기고 영지를 나왔다.

“썩 좋더라고요. 그거.”

그리고 훔쳐서 가져갔던 그의 일지를 원래 자리에 끼워 넣는다. 오랫동안 비어 있었을 그 자리에.

ㆍㆍㆍ

감았던 눈을 뜨니 햇살이 쏟아졌다. 시온은 테라스에 팔을 걸치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가운데에 있는 분수가 찬란한 빛을 내고 있었으며 그 아래에 아이들이 뛰어놀았다. 자신의 아이들이었다. 

시온을 발견한 콘스탄챠가 손을 흔들었고, 차례로 베다와, 카롤리나가 방긋방긋 웃는다.

실비아는 안쪽에서 루시 도팽과 아만다 블랙파이어와 떠들고 있었고, 라키에와 미아는 과일을 가져오고 있다.

분수의 맞은편은 에슬린과 마리온이 큰 애에게 간단한 교습 중이다. 이 둘은 결혼해서 남자아이를 하나 낳았다. 그 아이는 시온의 아이와 친구로서 같이 자라고 있었다.

제국에서 노예제는 폐지됐고, 남계가 없는 블랙 파이어 가문의 대는 니벨룽 가문이 잇게 되었다. 

디드리히는 은퇴했다, 손자를 보겠다고 들러붙은 와중이었다. 잠이 늘어지게 왔다. 당분간은 이 평화를 길게 즐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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