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 사임하겠습니다.
한수는 김윤희 부부와 대화를 끝내고 타이탄스 구단으로 향했다.
오후에 있는 스카우트팀과의 미팅 때문이다.
그는 뒷좌석에 앉아서 포수 마스크를 쓴 채로 Lv 1 상점의 아이템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현재 18포인트가 있고, 2포인트만 더 모으면 ‘포기를 모르는 원조 금테 안경(Gold 등급)’이라는 우완투수 전용 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지만···.
사실 선수 전용 아이템은 당장 쓸모가 있는 건 아니다.
지금은 스토브리그에 유용하게 쓸 아이템이 더 필요하다.
'어디 보자.’
물품은 정말 다양했다.
그중에서 당장 쓸만하다고 생각되는 건 한 가지였다.
[안경 D 에이스의 의지]
└종류 : 구단주 전용 스킬
└등급 : 골드
└설명
① 신인 선수에게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② 현재 레벨 / 잠재 레벨을 보여줍니다.
③ 안경 쓴 우완투수(신인)한테 1년에 ‘딱 1번’ 축복을 내릴 수 있습니다. (체력과 내구력을 무작위로 강화합니다.)
└필요 포인트: 10
‘신인왕이 될 가능성을 수치화해서 보여준다···. 이거 좋은데?’
부산 갈매기의 삼륜안(三輪眼)으로 선수들의 능력치를 볼 수 있지만, 솔직히 재능이 좋다고 신인왕에 뽑히는 건 아니다.
그랬다면 우선 지명권이 있는 하위권 팀에서 매번 신인왕이 나왔어야 한다.
타이탄스만 해도 늘 하위권이라 우선 지명권이 있었지만···.
신인왕은 1992년에 딱 한 번 나왔다.
‘이 스킬만 있으면 타이탄스에 두 번째 신인왕이 탄생할지도 모르겠군.’
한수는 포인트를 계산해봤다.
‘지금 18포인트가 있으니까, ‘안경 D 에이스의 의지’를 구매하면 8포인트가 남네. 그리고 김종문을 처리하고 스카우트 팀을 구성하면 5포인트를 보상으로 받고, 그러면 13포인트···.’
‘포기를 모르는 원조 금테 안경(Gold 등급)’은 좀 더 나중에 구매해야 할 거 같았다.
한수는 마음을 정했다.
‘구매!’
-띠링
【안경 D 에이스의 의지를 구매했습니다.】
【현재 8포인트가 남았습니다.】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선 포수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어야 합니다.】
‘신인 드래프트 때도 포수 마스크를 써야겠네.’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
주변 사람들은 포수 마스크를 쓴 그를 이상하게 여겼지만, 한수는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 운전을 하던 강덕수가 말했다.
“실장님, 보고하는 걸 깜박했는데요. 이새롬 기자한테 확인해보니, 송신철 기자 정직 처분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아마 지저분한 짓을 많이 했던 거 같습니다.”
한수는 포수 마스크를 벗으며 피식 웃었다.
“유 대표가 행동력이 좋네. 독사 회장님을 쏙 빼닮았어.”
“이새롬 기자한테 뭔가 보답을 해야 하는데···. 어떤 게 좋을까요?”
이새롬이 원하는 보답은 돈이 아니다.
바로, 기삿거리였다.
한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이재수가 얼마 전에 홍콩으로 미술품 사러 갔다가 마카오 카지노에서 한 판 땡긴 정보 넘겨. 환치기 수법으로 해외 원정 도박 벌인 재벌 3세, 하룻밤에 수백만 달러 탕진! 헤드라인 임팩트 있고 좋잖아?”
“괜찮을까요? 이재수 사장을 그렇게 때리면 이창호 부회장이 나설 텐데···.”
“애들 싸움은 애들 끼리 하게 놔둬야지. 어른이 끼면 판이 커지지.”
“무슨 계획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한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뭐, 그런 게 있어.”
“······?”
“일단 이새롬 기자한테 이재수에 대한 자료 넘겨.”
“알겠습니다.”
잠시 후···.
한수는 타이탄스 프런트 오피스에 도착했다.
= = = = = = =
신영 타이탄스 사장실.
한수는 스카우트팀과의 미팅을 속전속결로 끝내고 양승진 사장과 만나서 스카우트팀의 처우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윤재규 팀장은 2군 배터리 코치로 보내고, 다른 직원들은 경영지원팀으로 보내세요.”
“코치요? 윤 팀장이 가겠다고 하던가요?”
“네.”
양승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팀장 시절에 윤재규에게 몇 번이나 코치로 전향해보라는 제안을 했었다.
그때마다 윤재규는 스카우트 팀이 좋다고 했는데···.
‘무슨 바람이 분 거지? 혹시 구단주가 협박을···.’
협박한 게 맞다.
능력은 부족해도 스카우트로서 발전할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다는 윤재규에게···.
2군 배터리 코치나 정리 해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으니까.
윤재규는 어쩔 수 없이 2군 코치를 선택했다.
대신 한수는 연봉을 조금 더 인상해주기로 했다.
하여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그리고 스카우트팀 팀장으로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추천이요? 누굽니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죠.”
한수는 고민수 연락처가 적힌 쪽지를 양승진에게 건네며 말을 이어갔다.
“직접 만나 보세요.”
한수가 양승진에게 고민수를 직접 만나보라고 한 건 그가 보유한 첫 번째 특기 때문이다.
【특기】
1. 안목 [프런트 직원, 코치진]
이 특기가 정말이라면 양승진이 Platinum 등급 인재인 고민수를 못 알아볼 리 없다.
양승진은 한수가 건넨 쪽지를 보며 생각했다.
‘고민수···? 들어본 거 같기도 하고···. 음···.’
“···일단 만나보겠습니다. 그런데 김종문 단장은 어떻게 할까요? 스카우트팀 팀장을 뽑는데 단장을···.”
“김종문은 신경 쓰지 마세요. 다 조치해뒀으니까.”
양승진은 소문과 달리 한수가 사업 수완도 좋고 추진력이 있구나 싶어서 내심 안심이 되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신인 드래프트 지명 대상자 명단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건 왜···. 호, 혹시 직접 드래프트에 참여하시려고요?”
“안 됩니까?”
“일단 단장과 스카우트팀만···.”
“나도 조사해봤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단장이나 스카우트팀 외에 다른 직원도 참석하던데요?”
“그렇기 하지만···. 신인 드래프트는 각 구단이 벌이는 소규모 전쟁과도 같습니다. 지명권을 헛되이 소모하지 않기 위한 눈치 싸움이 치열해서 전문가들도 피가 마르고 숨이 막힐···.”
한수는 팔짱을 끼며 물었다.
“TMI 거기까지. 그래서 가도 된단 겁니까? 안 된단 겁니까?”
양승진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참석은 하셔도 되지만, 부디 지명권을 맘대로 쓰는 일은 안 하셨으면 합니다···.”
“물론이죠.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환하게 웃는 한수를 보며, 양승진은 내심 불안했다.
“지명 대상자 명단은요?”
“윤 팀장한테 메일로 보내라고 지시해두겠습니다.”
“OK. 이만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네, 살펴 가십쇼.”
한수가 사장실에서 나가고, 혼자 남은 양승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의욕이 넘치는 건 좋지만 왜 신인 드래프트까지 참석하겠다는 건지···. 내년에는 신인왕이 우리 팀에서 나왔으면 좋겠는데···.”
그는 타이탄스의 유일한 신인왕을 떠올렸다.
1992년 데뷔와 동시에 신인왕과 골든글러브를 차지하고, 신영 타이탄스 두 번째 우승을 이끈,
KBO 사상 최고의 슬라이더 피처로 손꼽히는···.
“용왕(龍王) 용정식.”
양승진은 누구보다 화려했지만 너무나도 쓸쓸하게 마운드를 떠난 선수를 추억했다.
= = = = = = =
부산 수영구, 김종문의 집.
김종문은 예상치 못한 손님을 맞이했다.
바로, 이재수 사장이었다.
“연락도 없이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로···.”
“아직 소식을 못 들으셨나 보네.”
“소식이요?”
“김 단장이 이한수를 코너에 몰려고 섭외했던 송신철 기자···. 정직됐더군요.”
“그게 무슨···!?”
이재수는 거실 소파로 가서 앉더니 혀를 차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요. 이한수 그 자식 언론 쪽으로는 도가 튼 놈이라고!”
“······.”
김종문은 이마를 짚으며 이재수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이재수는 팔짱을 끼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요?”
“······.”
김종문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곧 신인 드래프트입니다. 그때···. 지명권을 엉망으로 행사하겠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약한데···. 아! 이건 어떻습니까? 이소호 있잖아요. 이소호!”
“이소호요···?”
“그 선수, 트레이드 시켜버립시다. 아주 엉망진창인 선수랑!”
“아, 안 됩니다! 이소호는 타이탄스의 프렌차이즈 스타이자, 두 번째 영구 결번 선수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함부로 트레이드했다간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이재수는 턱을 쓰다듬더니,
“폭동이라···. 나쁘지 않은데요? 그러면 타이탄스 구단을 해체해버릴 수도···.”
김종문은 어이가 없었었다.
‘이 인간, 완전 미친놈이군···.’
“좋아요! 이소호 트레이드 진행해보세요.”
“그건 너무나 많은 무리수가···.”
이재수는 반박하려는 김종문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한배를 탔습니다. 같은 방향으로 노를 저어야지 딴생각하면···. 바다에 빠뜨리는 수밖에 없어요.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죠?”
결국, 김종문은 고개를 떨구며,
“······노력해보겠습니다.”
이재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김 단장만 믿고 갑니다. 수고해요.”
“···네, 살펴 가십시오.”
둘이 악수를 하려던 순간!
이재수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아, 미안해요. 중요한 전화라···.”
“괜찮습니다.”
이재수는 여유로운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지더니,
“···카지노? 미, 미친! 그딴 기사가 왜···! 어느 신문사야!? 뭐? 데일리 아이리스?! 건방진 XX들! 홍보팀 인간들 뭐하고 있는 거야? 당장 기사 내리게 조치하지 않고!”
버럭 소리치기 시작했다.
김종문은 흠칫 놀랐다.
‘무슨 일이지?’
“뭐? 부회장님이 찾으신다고? 벌써 아버지 귀까지 들어간 거야? 젠장! 젠장! 알겠어! 지금 서울로 갈 테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기사부터 내려! 기사 못 내리면 너부터 모가지야! 알겠어!?”
이재수는 인사도 없이 뛰쳐나갔다.
김종문은 인상을 쓰며 혀를 찼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예의도 없이···.”
그때였다.
-띠링!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발신인은, 한수였다.
“······.”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침을 꿀꺽 삼키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뭐야? 기사 링크?’
그런데 제목이···.
[방송과 스타 튜브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프로야구 K 단장의 민낯··· 고등학교 감독 시절 가난한 학생 선수들에게 가혹한 체벌과 혹사를···.] - 달피아 일보
[XX 고등학교 출신 현직 야구 선수의 증언 “감독님께 죽도록 맞고 온 날 아버지는 서러움을 못 이겨서 농약까지 드시려고···.”] - 데일리 아이리스
김종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 이게 뭐야···. 서, 설마···.”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흠칫하며 휴대폰 화면을 보니 역시나 한수였다.
그는 곧장 전화를 받으며 소리쳤다.
“이, 이게 무슨···.”
[기사가 마음에 드십니까? 헤드라인 죽이죠?]
“혹시 이 기사···. 당신이···.”
[단장님, 제가 요즘 야구 공부를 하는데 말입니다.]
“······?”
[랑데뷰 홈런이라는 말이 있더라고요.]
“뭔 개소리를 하는 거요! 당장 기사 안 내리면···!”
[다음은 더 큰 홈런인데···.]
“뭐···.”
[술만 먹으면 딸과 아내를 때리고, 부인의 친한 친구와 불륜을 저지르고···. 그걸 알게 된 부인이 화병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그, 그만···!!! 너, 너, 그, 그걸···!?”
[조만간 따님 인터뷰도 대문짝만하게 기사에 날 겁니다. 인터뷰하는 걸 옆에서 들어보니까 아버지에 대한 원한이 뼛속까지 사무쳤더라고요?]
“당신 내 딸한테 접근했어!?”
[접근이라기보다는 제 스타일로 도움을 청했죠. 그러니까 평소 잘 좀 하시지. 워낙에 아버지한테 맺힌 게 많은지 따님이 생각보다 쉽게 도와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이, 이, 익···!?”
김종문은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으며 얼마 전 김윤희가 보냈던 도와달라는 문자를 떠올렸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뭐가 됐든, 김윤희의 인터뷰까지 터지면 끝이다.
그가 쌓아온 공든 탑이 다 무너진다.
“워, 원하는 게 뭐요? 대체···.”
[고등학교 감독 시절 가혹행위를 인정하고 타이탄스 단장직을 사임하세요.]
“······.”
예상했던 제안이지만···.
막상 듣고 나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박종철 사장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이재수 사장과 손잡는 게 아니고···.’
[대답이 없군요. 그러면···.]
“자, 잘못을 인정하고 사임하면···. 남은 연봉은···.”
[김종문씨,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한 거 같은데···. 인터뷰 기사가 터져봐야 정신을 차리고 상황 파악 제대로 하시려나?]
“···알겠어요. 조용히 물러나죠···. 사임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전화 통화가 끝나고, 김종문은 떨리는 손을 움직여 김윤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
연결되지 않았다.
절망한 표정의 김종문은 다리에 힘이 풀려 소파에 주저앉았다.
= = = = = = =
타이탄스 프런트 오피스 복도.
한수는 김종문과 전화 통화를 끝내고 뒤따라오던 강덕수에게 말했다.
“양 사장한테 김종문 불태웠다고 전하고, 신임 단장 알아보라고 해.”
“알겠습니다. 김윤희씨 인터뷰는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한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일단 킵해둬. 언젠가 또 써먹을 날이 오겠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그는 타이탄스 사무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