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 지명 안 합니다.
홍진철은 독고준에게 멱살을 잡힌 순간 아차 싶었다.
독고준 성격이 더러운 건 야구계에서 유명한데···.
하필이면 만년 No. 2라는 콤플렉스를 건드려서 표정 관리가 전혀 안 됐다.
‘젠장, 괜히 강대한 생일 파티에는 와서···!’
홍진철은 원망스러웠다.
생일 파티에 가자고 조른 최민준, 커뮤니티 글을 보여준 양성도, 오늘 생일이자 독고준을 부른 강대한, 콤플렉스를 건드린 독고준···.
그리고 표정 관리에 실패한 자기 자신까지···.
그는 독고준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적당히 넘어가 줬으면 좋겠는데···. 한 대 맞겠지? 얼굴에 멍이라도 들면 엄마한테 뭐라고 하지? 하···. 지금이라도 사과할까?’
그 순간, 강대한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보였다.
홍진철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 자식, 지금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이래서 그는 강대한이 싫다.
강대한은 남 잘되는 꼴을 못 보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즐기는 쓰레기니까.
‘재수 없는 새끼···! 그래, 까짓거 한 대 맞고 말지!’
그때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거참, 좋게 넘어가려고 했더니···.”
목소리의 주인공은 포수 마스크를 쓴 남자였다.
독고준이 고개를 갸웃하는 게 보였다.
홍진철은 둘을 번갈아 보며 생각했다.
‘···아는 사람인가?’
“어이, 좋은 말로 할 때 홍진철 선수 멱살 놔.”
자신감 넘치고 여유로운 목소리.
대체 누구길래 성질머리 더럽기로 유명한 독고준한테 저런 말을 하는 걸까? 그리고···.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독고준의 눈이 커졌다.
“당신 설마···.”
그러자 남자, 한수는 포수 마스크를 벗으며 말했다.
“오래만~ 잘 지냈어? 똥.덩.어.리?”
홍진철을 비롯한 유망주들은 입을 쩍 벌렸다.
그들은 독고준이 한수를 반쯤 죽여놓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독고준은 똥 씹은 표정으로 중얼거릴 뿐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젠장···. 저 자식이 왜···.”
홍진철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있네? 저 사람이 대체 누구길래···.’
그때 한수가 테이블로 다가오며 말했다.
“안 들려요? 멱살 놓으라고.”
“···상관할 일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쇼.”
“신경 쓰고 말고는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고···.”
한수는 손을 뻗어 홍진철의 멱살을 잡은 독고준의 손을 톡톡 치며,
“놔. 당장.”
독고준은 이를 뿌드득 갈더니 홍진철의 멱살을 놨다.
홍진철은 속으로 안도했지만, 한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진 못했다.
독고준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 한수가 말했다.
“참 한심하네요. 어린 후배 멱살이나 잡다니.”
“적당히 하십쇼. 아무리 구단주라도 참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이번엔 내 멱살 잡으려고요? 감당할 수 있겠어요?”
“······.”
두 사람의 대화에 유망주들은 모두 움찔했다.
강대한, 최민준, 김광철, 양성도는 각각 생각했다.
‘구단주? 타이탄스? 설마, 내 생일 축하해주러···.’
‘저 사람 신영 그룹 황태자구나···. 진철이가 무사해서 다행이네. 내가 괜히 오자고 해서···.’
‘독고준도 구단주한테는 안 되네.’
‘쓰벌, 저렇게 잘생겼는데 구단주라고? 존X 부럽네.’
그리고 홍친철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타이탄스 구단주가 내 이름을···!’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한수를 노려보는 독고준.
한수는 그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속삭였다.
“타이탄스의 불꽃 투수님. 멍청한 짓해서 몸값 떨어뜨리지 말고, 고기나 먹고 들어가세요.”
‘그래야 좋은 선수랑 트레이드하지!’
독고준은 한수의 손을 쳐내며 고깃집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강대한은 독고준을 따라 나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독고준보다는 구단주한테 잘 보여야지.’
한수는 피식 웃더니 홍진철을 바라보며 물었다.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그리고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나한테 신세 진 건 앞으로 갚을 기회가 있을 겁니다.”
“네?”
의아해하는 홍진철에게 한수는 명함을 내밀었다.
홍진철은 두 손으로 명함을 받았다.
“어려운 일이나 상의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요. 내 개인 번호니까. OK?”
"왜 저한테···."
“오늘은 여기까지!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죠.”
한수는 홍진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주고 손 인사를 하며 밖으로 나갔다.
어안이 벙벙한 홍진철은 손에 든 명함을 쳐다봤다.
‘이한수···.’
최민준이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
“야, 괜찮아?”
“어, 응.”
“너 타이탄스 구단주랑 아는 사이야?”
“아니 오늘 처음 봤어.”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네 편을 들어준 거야? 독고준 선배는 개무시하고?”
“독고준 선배가 잘못했잖아. 갑자기 멱살까지 잡고···.”
그때 양성도가 비웃는 얼굴로 말했다.
“근데 저 구단주는 진철이한테 명함까지 줬으면서, 초특급 유망주이신 강대한 투수한테는 인사 한마디 없이 가냐? 대한이 너 정말 타이탄스 가는 거 맞냐?”
그렇지 않아도 강대한은 한수가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서 기분이 나빴는데, 양성도의 말에 자존심이 팍 상했다.
“양성도···. 닥쳐.”
“흐흐, 타이탄스가 1라운드에서 너 말고 진철이 지명하는 거 아니냐?”
“미친 XX! 적당히 해라. 홍진철이 나 대신 뽑힌다고? 타이탄스가 병X이냐?!”
그러자 최민준이 인상을 쓰며 나섰다.
“대한아 말이 좀 세네. 진철이 앞에서···.”
“난 괜찮아. 민준아, 나 먼저 숙소로 갈게.”
“어? 응···.”
홍진철은 짐을 챙기더니 강대한에게 말했다.
“생일 축하한다. 가볼게.”
“······.”
강대한은 말없이 시선 돌렸다.
홍진철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밖으로 나갔고, 강대한은 그런 홍진철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저 XX가 나 대신 뽑힌다고? 지랄···. 타이탄스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 없어!’
= = = = = = = =
한수는 차 뒷좌석에 앉아 양승진한테 전화를 걸었다.
[구단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고민수 씨 만나 봤어요?”
[네, 지금 막 얘기 끝내고 병원에서 나오는 중입니다.]
“어땠어요?”
[좀 더 겪어봐야겠지만, 식견이 깊은 거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중, 고교 유망주들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아마추어 리그도 직관을 했다고 하더군요.]
양승진은 고민수에 대한 칭찬을 이어갔다.
한수는 다리를 꼬며 물었다.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내일부터 출근할 겁니다.]
“내일? 아직 몸이 다 안 나았을 텐데···.”
[저도 건강부터 회복하라고 만류했는데, 열정이 대단하더군요. 구단이 중요한 시기이니만큼 통원 치료를 하면서···.]
한수는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차 수리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근성 있네.’
[일단 임시로 스카우트 팀장을 맡겼지만, 상황을 봐서 정식으로 임명할까 합니다.]
“알겠습니다. 더 보고할 거 있나요?”
[이상입니다.]
“OK. 그럼, 내일 봅시다.”
한수는 전화 통화를 끝내고, 곧바로 이소희한테 전화를 걸었다.
[구단주님,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자고 있었어요?”
[벌써 잘 시간은 아니죠. 드라마 보고 있었습니다.]
“드라마도 봐요?”
[···보면 안 되나요?]
“집에서도 타이탄스 경기만 볼 줄 알았지.”
[······.]
그녀는 조금 어색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로 전화하신 거죠?]
“내일 출근하자마자 신인 드래프트 전략 회의를 할 거예요. 준비해두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타이탄스의 1라운드 지명 대상자인 강대한 선수가 요구한 계약금이···.]
“강대한 지명 안 합니다.”
[···뭐라고요?]
이소희는 무척 당황한 눈치였다.
한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우리 타이탄스는 강대한 지명 안 할 겁니다.”
= = = = = = =
부산 마린시티, 이소희의 집, 거실.
이소희는 양반다리를 하고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보며 중얼거렸다.
“꼬맹이···. 대체 뭔 생각인 거야?”
그러자 바닥에 드러누운 채 TV를 보고 있던 언니 이태희가 물었다.
“너 구단주랑 진짜 연애하냐?”
“아, 아니거든! 내가 꼬맹이랑 연애를 왜 해? 그리고 말했잖아. 꼬맹이 걔는 이정호 선수 아들···.”
“아니면 아닌 거지, 뭐 그리 흥분해?”
“······.”
“그렇게 흥분하니까 더 수상하네?”
“···아니라는데 자꾸 이상한 말을 하니까 그렇지···.”
이태희는 일어나서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알았어. 근데 강대한 계약금은 왜? 너무 세대? 계약 조정 준비하래? 한수 걔 스케일이 큰 줄 알았더니 살짝 실망이네?”
“······.”
“뭐야, 입 다물기 있기? 없기? 응?”
이소희는 구단주가 강대한 지명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이태희는 정말 야구에 미쳤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시즌 중 남자친구랑 데이트 장소가 전부 야구 경기장이겠는가?
‘중혁 오빠, 미안해. 내가 괜히 우리 언니를 소개해줘서···.’
어쨌든!
철인(鐵人) 최종권의 재림이라고 불리는 강대한 지명을 포기한다는 사실은 절대 말할 수 없다.
“···기밀이라 안 돼.”
“그러지 말고 알려주라~! 아! ‘마왕 한경희’ 다음 편 내용 말해줄까? 차 작가랑 브레인스토밍하면서···.”
이태희는 드라마 작가인데, 요즘 최고의 화제작인 ‘마왕 한경희’의 차 작가랑도 친분이 깊다.
이소희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됐거든! 네타 하지 마!”
그녀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이태희가 방문을 두드리며 신인 드래프트에 대해서 알려달라고 했지만, 이소희는 무시하고 책상에 앉아 신인 드래프트 스카우트 리포트를 펼쳤다.
예상 지명 1순위에 적힌 강대한의 데이터를 보다가 예상 지명 3순위의 홍진철의 데이터로 시선을 돌렸다.
한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1라운드에 홍진철을 지명할 겁니다.]
‘홍진철···. 나쁜 건 아니야. 분명 좋은 신인이야. 하지만 객관적으로 강대한이 더 나아. 무엇보다 팬들이 원하는 건···.’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커뮤니티에 글까지 써가면서 간신히 꼬맹이 우호 세력을 만들었는데···. 신인 드래프트 때문에 난리 나겠네.”
이소희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생각했다.
‘갑자기 왜 홍진철한테 꽂힌 거지? 저렇게 확신에 차서 말하는 걸 보니 쉽게 물러서지는 않을 거 같은데···.’
그녀는 팔짱을 끼고 한수를 설득할 방법을 고민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꼬맹이 성격을 봤을 때, 강대한 지명을 절대 안 할 거야. 괜히 설득하려고 애쓰지 말고···. 이 상황에서 챙길 수 있는 이득을 챙기자.’
그녀는 2순위 지명권을 가진 팀, 한영 벌처스(대전 독수리)의 정보를 확인했다.
‘한영 벌처스는 투수진은 이미 과포화야. 연고지 에이스 투수 홍진철 대신 김광철이나 양성도를 노릴 확률이 커. 그렇다면···.’
그녀는 3순위 지명권을 가진 팀을 바라봤다.
“엔젤 트리플스(서울 삼둥이)···. 여기라면···.”
엔젤 트리플스는 불펜이 무너지면서 시즌을 망쳐서 이번 신인 드래프트에서 투수진을 강화할 게 분명했다.
그들은 강대한이 욕심이 나지만, 3순위 지명권을 가져서 울며 겨자 먹기로 홍진철을 지명할 테지만···.
‘우리가 포기한다고 거래를 제안하면 좋다고 수락하겠지.’
그녀는 고민했다.
‘문제는 거래 대상인데···.’
지명을 포기하는 대신, 그 급에 맞는 선수를 데려오는 게 맞다.
‘우리한테 부족한 건 테이블세터야. 가장 좋은 건 삼둥이 1번 타자 오재근인데···.’
“···아무리 강대한 지명을 포기해도 오재근은 안 내주겠지?”
프로에서 검증이 안 된 초특급 유망주와 프로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1번 타자이자, 외야수인 오재근을 내주지는 않을 거다.
‘어쩌지···. 흠···.’
그녀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베스트 트레이드 전략을 구상했다.
그리고 다음 날.
신영 타이탄스 프런트 오피스, 회의실.
상석에 앉은 한수는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에게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강대한 지명을 포기하는 대신, 엔젤 트리플스 오재근을 데려올 겁니다.”
이소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차라리···.”
“받아 옵니다.”
“······.”
‘이 똥고집···!?’
“독고준까지 준다고 하면···. 오재근이랑 트리플스가 가진 3라운드 지명권까지 받을 수 있을 거 같은데?”
“······!”
한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