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 콜?
서울, 신영 그룹 본사, 박동석 상무 집무실.
우락부락한 체격과 차가운 인상의 박동석 상무는 중요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는 비서라고 생각하며 문으로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무슨 일이야?”
문 앞에 서 있는 건 선글라스를 낀 이재수였다.
이재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삼촌, 바쁘신가 봐요?”
“응? 재수구나. 본사까지 무슨 일이야?”
“뭐···. 그냥···.”
이재수는 뒷말을 흐리며 소파에 앉았다.
박동석은 이재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선글라스 사이로 시퍼런 멍이 든 게 보였다.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부회장님···. 적당히 하시지. 결혼까지 한 애를···.’
박동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머신 쪽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커피 줄까?”
“괜찮아요. 그런 건 비서 시키시죠.”
“인마, 내가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커피 정도는 직접 타도 돼.”
이재수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했다.
박동석은 커피잔을 들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무슨 일로 온 거야?”
“이번에 타이탄스 구단 CFO 맡으셨죠?”
“그래.”
이재수는 씨익 웃더니,
“고마워요, 삼촌.”
박동석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가 고맙다는 거야?”
“에이~ 쑥스러워서 그러세요? 제가 이번에 한수 그 자식한테 당한 거 복수하고, 할아버지 유산 제가 물려받을 수 있게···.”
“재수야.”
“네?”
박동석은 커피잔을 테이블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타이탄스 구단 CFO를 맡은 건 너 때문이 아니야.”
“네? 그럼···. 혹시 아버지가···.”
“이태백 회장님 유언 때문이다.”
“······!?”
박동석은 팔짱을 끼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운영 자금으로 장난칠 생각이면 그만둬라. 나는 공정하게 CFO 직을 수행할 거니까.”
이재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삼촌! 지금 상황이 그게 아니에요! 한수 그 XX가 물려받게 될 주식이 얼만 줄 아세요? 그거면 부회장님 자리도 위협을···!”
“이재수!!!”
“······!”
“아무리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삼촌···.”
“우리는 수많은 신영 그룹 직원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해서는 안 돼. 사업은 장난이 아니야!”
“······.”
“너도 신영 패션을 이끌고 있으니 잘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
이재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궜다.
박동석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할 말 다 했으면 나가보거라.”
“···삼촌 이런 식으로 하시면 부회장님이 어떻게 삼촌을 믿고 일을 시키실 수···.”
“넌 아직도 네 아빠를 모르는구나.”
“네···?”
박동석은 커피잔을 들고 책상으로 향하며 말했다.
“부회장님은 내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소신을 굽히지 않을 거란 믿음 때문에 나를 중용하시는 거다.”
“······!”
“나 또한 부회장님이 사사로운 욕심에 그릇된 선택을 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어서 지지하는 거다.”
그는 의자에 앉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부회장님과 나는 이런 관계다.”
“······.”
“알았으면 나가보거라.”
“···네···.”
이재수는 분한 표정으로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박동석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회장님, 왜 하필 저한테 이런 일을 시키셔서···.”
그는 창문으로 시선을 돌리며 생각했다.
‘이한수, 그 건방진 망나니도 한 번 만나보긴 해야 하는데···. 어제 신인 드래프트가 끝났으니, 계약금 문제로 약속을 잡아볼까···.’
= = = = = = =
노을 진 저녁 무렵, 한수와 이소희는 동래역 근처에 있는 포장마차 거리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여기 온 이유는···.
‘구단주님, 안녕하세요. 저 염철수입니다. 다름이 아니고 내일 어머니하고 구단에 찾아뵙고 싶어서요.’
‘내일 말고 오늘 보죠.’
‘오늘은 학교에도 가고, 저녁엔 어머니 가게 일을···.’
‘그럼 저녁때 가게에서 뵙죠.’
‘네? 아, 아닙니다. 그냥 내일 제가 찾아뵐게요!’
‘이따 뵙겠습니다~!’
염철수와의 통화 때문이다.
이소희는 포장마차 거리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염철수 선수 어머니가 여기서 포차를 하시는군요. 예전에 자주 왔는데 11번이라···. 들어본 거도 같고···.”
“누구랑 자주 왔나요?”
“언니요.”
“자매가 친한가 보군요.”
“뭐, 그냥···.”
‘남들 만큼요’라고 말하려던 이소희는 입을 다물었다.
한수가 신영 그룹에서 어떤 처지인지 떠올랐다.
‘형제가 아니고 전부 적 아니면···.’
그녀는 불편한 얘기 말고 화제를 전환하자고 생각하며 말문을 열었다.
“그보다 구단주님, 염 선수랑 만날 땐 포수 마스크는 벗으실 거죠?”
“아뇨.”
“대체 왜 그러고 다니시는 거예요?”
“내 얼굴을 못 봐서 아쉬워요? 원하면 벗어드리죠.”
한수가 씨익 포수 마스크를 벗는 시늉을 하자, 이소희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 뭔 소리를! 됐어요! 그냥 평생 쓰고 다니세요!!”
“이걸 쓰든 말든 이 팀장은 신경 쓰지 말고, 11번 포차로 안내나 똑바로 하세요. 오케이?”
“···알겠습니다.”
인상을 찌푸린 이소희는 11번 포장마차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한수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피식 웃더니, 이번에 계약한 신인 선수 베스트 4의 정보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름: 염철수 (투수)】
【Diamond 등급, 타이탄스 선수 재능 97%】
【레벨: 22 / 96 (현재 레벨 / 잠재 레벨)】
【특성: 성장도 S (구단 입단과 동시에 발동)】
【이름: 홍진철 (투수)】
【Platinum 등급, 타이탄스 선수 재능 92%】
【레벨: 36 / 86 (현재 레벨 / 잠재 레벨)】
【특성: 체력관리 S】
【이름: 최민준 (외야수)】
【레벨: 32 / 81 (현재 레벨 / 잠재 레벨)】
【Gold 등급, 타이탄스 선수 재능 81%】
【특성: 배드볼히터 A】
【이름: 김효철 (유격수)】
【Gold 등급, 타이탄스 선수 재능 86%】
【레벨: 40 / 77 (현재 레벨 / 잠재 레벨)】
【특성: 위기 해결 A】
몇 번을 봐도 만족스러운 능력치다.
‘Point를 탈탈 털어서라도 스토브리그에서 최대한 성장시켜주마!’
모든 것은···.
‘통합 우승을 위해!’
그때 이소희가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있네요. 11번 포차.”
“오케이~! 갑시다!”
“네.”
두 사람은 11번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 = = = = = =
그 시각, 동산고등학교 정문.
염철수는 빠르게 달려 정문을 벗어나고 있었다.
‘으···. 늦었다···! 늦었어!’
원래 약속대로면 벌써 한수와 11번 포차에서 만났어야 하는데···.
계약서에 서명하기로 한 날 늦다니!
정말 최악이다.
‘구단주님이랑 엄마한테 메시지는 보내놨지만···.’
모든 건 야구부 감독이 갑자기 호출했기 때문이다.
감독은 재능이 뛰어나거나, 집이 잘사는 학생만 좋아하기 때문에 그는 항상 투명 인간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왜 부르나 했더니,
[철수, 나는 네가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네?]
[사실 그동안 너를 무심히 대했던 건 네가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와 날개를 활짝 펴길···.]
개소리를 지껄였다.
그 소리가 얼마나 길었는지, 네, 네 대답만 했는데도 입안에 단내가 났다.
그때 뜻밖의 정보를 들었다.
강대한이 메이저리그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는 거다.
염철수는 달리며 생각했다.
‘메이저리그라니···. 역시 대단하네. 그럼, 트리플스랑 계약은 안 할 건가?’
그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 뛰는 속도를 올리며,
‘알아서 잘하겠지. 내 코가 석 자인데···. 일단 내 계약이 먼저지! 신경 쓰지 말자!’
그는 빠르게 11번 포차로 향했다.
= = = = = = =
11번 포차, 구석 테이블.
한수와 이소희는 김명숙과 마주 앉아 있었다.
김명숙은 면목이 없다는 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철수가 학교에서 일이 좀 생겨서···.”
“사과는 거기까지. 더 안 하셔도 됩니다. 비즈니스라는 게 늘 계획대로 풀리는 게 아니니까요. 염 선수의 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감사합니다···.”
“하하, 감사할 거 없습니다. 당연한 거죠. 그렇죠, 이 팀장?”
“···맞습니다, 구단주님.”
담담하게 대답한 이소희는 한수를 살피며 고개를 갸웃했다.
‘염 선수가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아서 무척 기분 나빠하는 거 같았는데···. 갑자기 왜 저렇게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는 거지?’
그녀 생각대로 한수는 염철수가 지각해서 무척 기분이 나빴다.
계약금을 반 토막 낼까? 라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김명숙을 보는 순간, 그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녀한테서 찬란한 하얀색 빛이 뿜어졌다.
그리고 화려한 Platinum 등급 정보창이 나타났다.
-띠링
【김명숙】【Platinum 등급】
【재능】
(타이탄스 선수: 0.1%)
(타이탄스 코치진: 3%)
(타이탄스 프런트: 94%)
결론: 프런트의 황충(黃忠)입니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녀는 어떤 사람의 입맛도 저격할 수 있는 백발백중 요리사입니다! 허름하고 지저분한 11번 포차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녀의 손맛입니다!
【적성】
1순위: 선수 전문 영양사
2순위: 갈매기 치킨 점주(타이탄스 구장 내부)
3순위: 직원 식당 영양사
【특기】
1. 어쨌든 맛만 좋네요! [놀라운 요리 실력]
2.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요! [예리한 미각]
3. 이 메뉴가 좋겠어요! [선수 컨디션 UP]
4. 요리 공부가 너무 쉬움!
【호감도: + 0%】
길을 가다가 금덩어리를 주운 기분이었다.
더군다나 생각지도 못했던 영양사라니···!
‘선수의 컨디션은 중요하지. 그런데 정말 요리 실력이 뛰어난 거 맞아? 가게에 파리만 날리는데···.’
그때 김명숙이 종이컵을 두 개 가져왔다.
“기다리시면서 이거라도···.”
어묵 꼬치와 국물이었다.
한수는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며 고맙다고 한 뒤, 포수 마스크를 벗고 어묵 꼬치를 먹었다.
그리고 흠칫 놀랐다.
고급스러운 산해진미로 입맛이 까다로운 한수인데, 이 어묵에서 느껴지는 풍미가 어마어마했다.
‘이게 어묵이라고?’
이소희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어묵 직접 만드신 건가요?”
“아, 네···.”
“어머, 엄청 맛있어요! 구단주님, 그렇죠?”
한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맛이 일품이군요.”
“감사합니다. 입맛에 맞으시면 더···.”
“아뇨. 아뇨. 그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포차 계속하실 겁니까?”
11번 포차는 남편과 추억이 깃든 장소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여기서 음식을 만들어 파는 게 즐거웠다.
“네, 물론이죠.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건가요?”
한수는 김명숙의 굳은 의지를 느꼈지만, Platinum 등급 영양사를 놓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포차는 그만두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네? 그게 무슨···.”
“구단주님, 갑자기 왜···.”
김명숙은 물론, 이소희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염철수와 계약하러 와서, 뜬금없이 포차를 그만두라는 소리를 왜 한단 말인가?
“제가 염 선수를 무척 아끼는지라 조사를 조금 해 봤습니다. 염 선수가 중학교 때부터 어머님이 하는 포차 일을 도왔다고 하더군요. 심지어 경기 전날에도 새벽까지 일을 도왔다고···.”
김명숙은 눈가를 움찔했다.
“그렇긴 한데···. 괜찮다고 하지 말라고 해도···. 저도 잘못된 건 알지만···. 아, 앞으론 프로가 됐으니까···. 포차 일을 절대 시키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어머니를 비난하려는 게 아닙니다.”
“······.”
“염 선수가 공을 제대로 못 던지는 거 알고 계십니까?”
“네? 그럴 리가요···. 철수는 마운드 위에서···.”
“그건 염 선수의 진짜 실력이 아닙니다. 어머님은 모르시겠지만···. 염 선수는 찬란한 다이아몬드입니다. 그런데 지금 계속 공을 제대로 못 던지고 있습니다. 부상도 없는데 말이죠.”
“그런···. 대체 왜···.”
“제가 염 선수와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조금 이해가 됩니다. 염 선수가 왜 공을 못 던지는지요.”
이소희는 흠칫했다.
비슷한 경험이라면 분명 이정호 선수의 교통사고다.
그녀는 안타까운 눈으로 한수를 쳐다봤다.
‘꼬맹이···.’
한수는 팔짱을 끼며 말을 이어갔다.
“염 선수는 어머니가 아버지처럼 포차에서 일하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날까 봐 두려운 걸 겁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가게에 나와서 일을 돕는 거고···. 공을 던질 때도 어머니가 잘못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전력투구를 못하는 걸 겁니다.”
“그런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래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
“저는 그랬습니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다리를 다친 어머니도 제 곁을 떠나지 않을까. 아무것도 못 하고···.”
“······!”
“······.”
김명숙은 눈을 크게 뜨며 손으로 입을 가렸고, 이소희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한수는 메마른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그래서 말인데···.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제안이요···?”
그때 포차 안으로 염철수가 뛰어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헉! 허억···! 헉···!”
“타이밍 좋군요. 잘됐네요. 두 번 설명할 필요 없겠어요.”
이소희, 김명숙, 염철수 모두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무슨 제안···?’
‘에? 응? 무슨 상황···?’
한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머님을 우리 구단 스포츠 영양사로 채용하고 싶습니다. 계약금은···.”
그는 포차를 대충 훑어보더니,
“뭐, 여기서 얼마나 버시는지 잘 모르는지라···. 원하시는 계약금을 말씀해보세요.”
“네? 네? 아니, 잠시만요.”
“이억 어떠세요? 아드님과도 이억으로 계약할 생각이거든요? 모자가 사이좋게···.”
김명숙과 염철수는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이, 이, 이억이요!?”
“저, 저, 이억이나 받습니까!?”
한수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