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 지푸라기도 잡아야지.
해질 무렵, 부산 마이어 호텔, 최상층 와인바.
한수는 와인을 마시며 이소희가 보낸 로빈 애플의 새로운 계약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계약금 백만 달러에 여러 옵션이 붙어 있는···.
로빈 애플 인생에 있어서 역대급 계약서임이 분명했다.
한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생각했다.
‘등가교환의 법칙에 따라 투자한 만큼 멋진 활약을 보여달라고.’
와인잔을 들어 향을 맡으며 생각했다.
‘임무 9도 거의 다 끝났군.’
그는 객실에서 확인했던 임무 9의 내용을 떠올렸다.
『임무 9』
【구단주님! 꼴찌팀 통합 우승을 시키기 위해선 몸이 세 개라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세 가지 임무를 한 번에 드리려 합니다! 파이팅!】
└① : 감독의 처우를 결정하세요! (완료)
└② : Gold 등급 이상의 외국인 용병(투수, 외야수)과 계약하세요! (완료)
└③ : 신인 계약(완료) + 선수 연봉 협상을 완료하세요!
【보상 : 30 Point】
이제 1군 선수와 연봉 협상만 완료하면 끝이다.
1군 선수들 연봉 협상은 보통 11월에 시작하지만, 조금 빠르게 물밑 작업에 들어가기도 한다.
한수도 이참에 1군을 리빌딩할 생각이라 서둘러 움직여야 한다.
그때 강덕수한테 전화가 걸려 왔다.
한수는 와인잔을 내려놓고 받았다.
[실장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감독 섭외가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아서···.]
강덕수는 ‘히어로 메이커’ 프로젝트를 위해 여기저기 발품을 팔고 있었다.
감감무소식인 CFO 박동석 상무를 계속 기다릴 수만은 없으니까.
한수는 담담히 말했다.
“됐고, 본론만 말해.”
[영화 ‘철인 최종권’ 제작은 골드해머 스튜디오의 오덕훈 감독이 관심을 보였습니다.]
‘철인 최종권’은 최종권 선수가 1984년에 타이탄스를 한국 시리즈에서 우승시킨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될 영화의 가제다.
한수의 지시를 받고 기획팀에서 기획한 아이디어인데, 시나리오와 연출을 맡을 감독을 찾는 중이었다.
“왜 오덕훈이야? 황준혁은?”
[황 PD는 ‘마왕 한경희 시즌 2’ 제작에 들어간다고 거절했습니다.]
“아쉽네···.”
천재 PD 황준혁이 메가폰을 잡아야 대중이 더욱 관심을 가질 텐데···.
[대중성은 황 PD가 높지만, 영화계에서는 오 감독 끗발이 좀 더 위입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오케이. 미팅 잡아봐.”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부산 갈매기 백년사’는 미친개 스튜디오에서 맡아주기로 했습니다.]
“미친개 스튜디오? 이름이 특이하네. 괜찮은 데야?”
[예능 프로그램 전문 제작사인데, 이번에 다큐멘터리 쪽으로도 진출하려는 거 같습니다.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다큐멘터리 담당자인 윤하얀 이사가 예전에 유명한 다큐멘터리 전문 작가라···.]
강덕수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거 보면 안심해도 될 듯하다.
“오케이. 미친개 스튜디오랑도 약속 잡아.”
[네, 구단주님.]
“그동안 수고했는데, 며칠 쉬다 와.”
[아닙니다. 내일부터···.]
“괜찮아. 괜찮아. 그럼, 굿밤.”
한수는 통화를 끝내고 생각했다.
‘박 상무한테 연락이 와야 하는데···.’
그때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러다가 영화랑 다큐멘터리 모두 내 사비를 털어서 제작하는 거 아냐?”
= = = = = = =
신영 그룹 본사, 부회장실.
이창호 부회장은 퇴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무뚝뚝한 얼굴로 서류를 검토하고 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가 문을 열었다.
“부회장님, 박동석 상무가 뵙고 싶다고···.”
“들어오라고 해.”
“네.”
잠시 후, 정장이 터질 것 같은 우락부락한 체격과 차가운 인상의 박동석이 들어왔다.
이창호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무슨 일이지?”
“제가 보고드린 타이탄스 운영 자금 인상안···. 왜 반려된 겁니까?”
“타이탄스 운영 자금을 서서히 삭감한 뒤, 내후년쯤엔 해체하자고 한 건 자네야.”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창호는 고개를 들어서 박동석을 쳐다봤다.
조금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그가 아는 박동석은 쉽게 생각을 바꿀 인물이 아닌데···.
“왜 생각이 바뀐 거지? 혹시 한수한테 아버지 유산 일부를···.”
박동석은 버럭 소리쳤다.
“형님! 그게 무슨 소립니까!?”
“거, 사람하고는···. 장난일세. 장난.”
“저는 이 구단주가 통합 우승을 위해 열정적으로 리빌딩하는 모습에서 희망을 품었고, 히어로 메이커 프로젝트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영화, 다큐 그 외에도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성과를 낼 거 같다고 판단돼서···.”
이창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야구팀이 야구를 잘해야지. 콘텐츠가 다 무슨 소용이야? 타이탄스가 삼십 년 넘게 우승을 못하고 매번 하위권에 머물러서 붙은 별명이 뭔 줄 아는가? 꼴영이야. 꼴영. 꼴찌 신영!”
“······.”
“우리 그룹의 품격을 깎아 먹는 타이탄스를 더는 두고 볼 순 없어. 운영 자금 인상? 말도 안 돼. 삭감 안 하는 걸 고맙게 여겨야지.”
“부회장님···.”
“할 말 더 없으면 나가보게.”
박동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수는 작년 대비 운영 자금 인상률 50% 바랐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생각하며 10%를 인상해주는 걸로 결재 서류를 올렸는데···.
‘삭감이 아닌 게 다행인 건가?’
“부회장님,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해보게.”
“부회장님의 이번 결정···. 우리 신영 그룹을 위해서입니까? 부회장님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박 상무, 별 쓸데없는 질문을 다 하는군. 나한테 최우선은 언제나 그룹의 이익이네.”
“···알겠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박동석은 꾸벅 인사를 하고 부회장실에서 나갔다.
이창호는 서류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아버지, 그냥 조용히 가시지. 괜한 일을 벌이셔서···.”
그는 혀를 차며 업무에 집중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10월 중순이 지나고···.
마침내 KBO 포스트시즌, 가을 야구가 시작됐다.
= = = = = = =
포스트시즌은 와일드카드 결정전부터 시작한다.
시즌 4위 대운 드래곤스(대구 용가리)와 5위 자람 빌런스(서울 악동)의 단판 승부.
전문가들은 대운 드래곤스의 승리를 점쳤지만···.
타격 4관왕 유정호 선수의 연타석 홈런에 힘입어 빌런스가 드래곤스를 4:3으로 물리쳤다!
└고척 아이돌 유정호! 최고다! 너만 믿는다!
└역시 폭풍의 손자!
└내년에는 5관왕도 하겠네!
└클로저 긱스도 잘했음. 마무리 완벽했음.
└티라노스 웃고 있겠네. 상대 전적 티라노스가 압도적이지 않냐?
시즌 3위 대명 티라노스(마산 티라노)는 빌런스가 준플레이오프에 올라온다는 소식에 무척 기뻐했다.
이번 시즌 빌런스 상대로 승률이 70%가 넘었기 때문이다.
빌런스의 기세가 심상치 않기는 했지만, 모두 티라노스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야구는 9회 말 2아웃까지 모른다고 했던가?
1차전 (창원) - 티라노스(패) 1 : 4 빌런스(승)
2차전 (창원) - 티라노스(패) 2 : 6 빌런스(승)
3차전 (고척) - 빌런스(승) 9 : 1 티라노스(패)
빌런스가 티라노스를 상대로 압승을 거뒀다.
유정호를 비롯한 타자들의 방망이가 불을 뿜었고, 투수들이 갑자기 미친 구위를 선보인 덕분이다.
└빌런스 미쳤네.
└얘들 단체로 약 빤 거 아님?
└전에는 유정호가 멱살 캐리하는 분위기였는데···. 이젠 다른 애들도 밥값 하네.
└곰돌이 투수들 똥줄 타겠네. 유정호 어떻게 막냐?
└이 기세로 빌런스 첫 우승 가즈아아아!
└아무리 그래도 신성 스페이스한테는 안 됨. 걔네는 외계인이거든.
└ㅋㅋㅋ ㅇㅈ
팬들이 시즌 2위 두성 그리즐리스(서울 곰돌이)와 자람 빌런스의 플레이오프 경기를 기대하고 있을 때.
가을 야구와 좀처럼 인연이 없는 신영 타이탄스(부산 갈매기)의 기사가 떴다.
[타이탄스, KBO 구단 중 제일 먼저 용병 계약 완료!]
[타이탄스 그렉 호프, 해리 핀스와 결별! 1선발 찰스 스팅과는 재계약!]
다른 팀 팬들은 관심이 없었지만, 타이탄스 팬들은 바로 반응을 보였다.
└좋아! 찰스 형이랑 당연히 재계약해야지! 그렉 호프랑 해리 핀스 방출한 것도 마음에 드네!
└찰스 형, 작년 ERA은 3.01이라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14승 투수니까. 당연히 재계약 ㄱㄱ!
└계약금은 105만 달러네. 작년보다 올랐네!
└찰스! 마! 올해는 15승 가즈아앗!
└새로운 용병은 누구지?
[NPB에서 자이언츠 PO 진출에 공을 세운 로빈 애플과 파격적인 계약!]
[타이탄스, 로빈 애플에 거는 기대가 크다며 백만 달러···.]
└로빈 애플은 누구임? 트리플 A 선수임?
└더블 A에서 잠깐 뛰다가 CPBL로 갔고, 작년까진 NPB에서 뛰었음.
└성적은 어때?
└더블 A에서는 그냥 그랬고, CPBL은 첫 시즌은 씹어먹었는데 팀 옮기면서 평범해졌고, 일본에선 보통 이상은 했음.
└백만 달러나 주고 계약할 선수는 아님. 일본에서도 대충 오십만 달러 정도였는데···. 타이탄스 돈 많네.
└타이탄스 특기가 돈지랄이랑 성적 지랄이잖아.
└외국인 선수 셋 쓸 수 있지? 세 번째는 누구지?
[부산 갈매기! 한국계 미국인 용병 기용찬과 계약!]
└···누구세요?
└기용찬···?
└뭐임? 한국인임?
└싱글 A팀 배팅볼 투수라는데?
└배팅볼 투수? 진짜?
기용찬 선수의 정보가 인터넷 여기저기로 퍼졌다.
다른 팀 야구팬들은 타이탄스를 조롱했다.
└드래프트 땐 패전처리투수를 지명하더니, 이번에는 배팅볼 투수냐? ㅋㅋㅋ 미쳐버리겠네 ㅋㅋㅋ
└ㅋㅋㅋ 구단주가 달피아에서 ‘울 아부지는 메이저리거’ 읽었나 봄 ㅋㅋㅋ 용찬아, 컵스 반지 끼고 있냐?
└저 투수가 101마일 공 던짐? ㅋㅋㅋ
└ㅋㅋㅋ 미친 꼴빠놈들 ㅋㅋㅋ
그리고 부산 갈매기들은···.
└내년에도 꼴찌 탈출은 글러 먹은 거 같네···.
···절망했다.
= = = = = = =
아침, 타이탄스 구장 인근 도로.
한수는 차 뒷좌석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기용찬 선수의 기사를 읽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누가 이딴 기사를 낸 거야? 기용찬이랑은 육성 선수로 계약한 거잖아!”
그러자 운전 중인 강덕수가 대답했다.
“아마 청백전이 와전된 거 같습니다.”
“홍보팀에 당장 정정 기사 내라고 해. 그리고 동백 스포츠 박 기자한테도 알려줘! 기용찬 선수는 육성 선수로 계약한 거고 외국인 용병은 메이저리거 출신 카를로스 디아즈라고! 오케이?”
“알겠습니다.”
한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장보형 감독한테 기용찬 재활 보고는 꾸준히 받고 있지?”
“네, 오늘도 연락이 왔습니다. 다만, 매번 똑같은 거 같습니다. 여전히 공을 전력으로 못 던진다고···.”
“시력교정술은?”
“수술 일정을 잡고 있다고 합니다.”
“흠···.”
한수는 포인트를 다 털어서 ‘패전투수 Thanks Dragon의 소중한 1승(정신력 +2)’이라는 골드 등급 아이템을 기용찬한테 착용시켰지만, 효과가 미미한 거 같아 아쉬웠다.
‘정신력 +2로는 부족하다는 건가?’
포인트가 부족해서 아이템을 더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없다.
“그 사람이랑은 연락됐어?”
“그 사람이요?”
“기용찬 선수가 폭투해서 대가리 맞힌···.”
“아! 연락은 됐습니다만···. 그 사람도 딱히 방법이 없다고 하던데요.”
“기용찬 선수를 재기하게 만들려면 지푸라기도 잡아야지. 모셔와.”
“알겠습니다.”
그때 한수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양 사장이네?’
전화를 받자 양승진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양 사장, 좋은 아침!”
[구단주님, 좋은 아침입니다.]
“무슨 일로 연락한 거죠?”
[새로운 감독 후보자 명단이 나와서 연락드렸습니다.]
“그래요? 오케이! 수고했어요. 거의 도착했습니다. 사장실에서 보죠.”
[알겠습니다.]
그렇게 한수는 타이탄스 사장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