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 그냥 알았어요.
신영 타이탄스와 ST 위닝스의 경기는 시작한 지 꽤 됐지만, 아직도 1회 초였다.
윤진호는 안민혁의 실투를 놓치지 않았고 2점 홈런을 때리며 점수 차를 5:0으로 벌렸다.
이어서 올라온 6번 타자 하민철.
하민철은 용 무늬가 그려진 배트를 사용하는데, 무당에게 받았다, 하민철의 징크스다 등등 여러 소문이 돌지만···. 그냥 본인의 취향이다.
하여튼 하민철은 프로 데뷔 이후 꾸준히 3할 타율을 유지해왔다.
결코 얕봐서는 안 된다.
포수석엔 앉은 문정준은 하민철에게 말했다.
“···과연 타이탄스답네?”
“······?”
“연습 경기 하나는 죽여주게 잘하잖아.”
하민철은 피식 웃더니,
“선배, 저한테 도발하는 게 아니고 투수한테 위로라도 한 마디 건네야 하는 거 아닌가요?”
“뭐···?”
“뭐, 선배의 포수 스타일이니~ 배 놔라. 감 놔라 하긴 그렇지만···. 투수가 불쌍하네.”
“······.”
문정준이 이를 뿌득 갈았다.
트래시 토크를 하려다가 본인 마음만 상했다.
그는 하민철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건방진···. 천재, 천재 띄워주니까 기고만장해서···.’
하민철만은 삼진으로 잡고 싶었다.
문정준은 안민혁한테 사인을 보냈다.
그런데 안민혁이 조금 이상해 보였다.
반응도 없이 몹시 흥분한 듯···.
‘쟤 괜찮나? 타임을 하고···.’
마운드로 향할까 고민하는데 안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드업했다.
하민철은 안민혁보다 2살이 많아서 비슷한 시기에 고교 리그에서 활동했었다.
물론 당시 안민혁은 신이고의 에이스였고, 하민철이 속했던 광양고는 약체였던지라···.
이렇게 투수와 타자로 승부를 겨루는 건 처음이다.
하지만 하민철은 안민혁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박동준 QC 코치가 분석 자료를 주기도 했지만, 그 나름대로 KBO의 속한 선수들의 데이터는 전부 파악해뒀기 때문이다.
하민철은 배트를 강하게 쥐며 생각했다.
‘안민혁···. 릴리스포인트를 최대한 끌고 오는 쓰리쿼터 폼을 쓰는 투수. 구위가 무척 뛰어나지만···. 멘탈이 좋지 않아. 승부를 오래 끌고 가면 실투할 확률이 높아.’
하민철은 날아오는 공의 궤적과 스트라이크 존을 파악하고 배트를 휘두르지 않았다.
“볼!”
예상대로 초구는 볼.
‘그런데 구속이 좀 오른 거 같은데···?’
힐끔 전광판을 확인하니 구속이 90마일(145km/h)로 찍혀있다.
‘이전 타석까지 87마일(141km/h) 정도였던 거 같은데?’
이어지는 두 번째 공.
몸 안쪽을 노리는 슬라이더···.
‘깊게 빠지네. 이번 공도···.’
“볼!”
2볼이다.
그런데···.
‘83마일(133km/h)···? 제구는 엉망인데 구속이···.’
하민준은 묘한 눈빛으로 안민혁을 쳐다봤다.
안민혁은 몹시 씩씩거리며 하민철을 노려봤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그때 문정준이 안민혁한테 송구하며 입을 열었다.
“쫄았냐? 왜 배트를 안 움직여?”
“······.”
“아~ 민혁이 공이 좀 빠르지? 쟤가 열받으면 공이 점점 빨라져. 아마 곧 있으면···.”
하민철은 살짝 한숨을 내쉬며,
“거른 겁니다.”
“······.”
“이걸 쫄았다고 보시다니···. 참 안타깝네요.”
“큭···.”
그때 심판이 엄한 눈빛으로 말했다.
“둘 다 그만. 시합에 집중해!”
하민철은 어깨를 으쓱하며 타격 자세를 잡았고, 문정준은 인상을 쓰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하민철을 슬쩍 보며 생각했다.
‘빈볼을 던지게 하고 싶은데···.’
연습 경기든, 정식 경기든 빈볼을 던져선 안 된다.
문정준은 이를 갈며 안민혁한테 사인을 보냈다.
계속 공을 거르고 있으니, 스트라이크를 하나 잡기 위해 몸쪽 낮은 코스.
구종은 슬라이더.
안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드업했다.
그리고···.
-휘이이익!
91마일(147km/h) 포심이 하민철의 허벅지를 노리고 쏘아졌다.
문정준은 흠칫하며,
‘슬라이더를 던지라니까···!’
그 순간, 하민철이 중얼거렸다.
“젠장···.”
-퍼어억!
허벅지에 공을 맞은 하민철은 인상을 쓰며 배트를 옆으로 휙 던졌다.
그리고는 안민혁을 노려봤다.
안민혁은 미안하다며 고개를 살짝 숙였지만···.
하민철은 봤다.
‘···저 자식 날 맞히고 비웃었어.’
이건 100%···.
‘노리고 던진 거야.’
“경기 참 더럽게 하네···.”
하민철은 일루로 천천히 뛰어갔다.
이때 문정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민혁이 저 자식···.’
그때 7번 타자 손재현이 타석에 섰고 배트를 하늘을 향해 뻗으며···.
-척!
“간다! 간다! 홈런!!!”
예고 홈런 사인을 보냈다.
동시에 안민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위타선 주제에 감히 누굴···!’
= = = = = = =
ST 위닝스, 더그아웃.
심은배 수석 코치는 원종현 감독에게 속삭였다.
“감독님, 저 자식, 방금···.”
“놔둬. 저렇게라도 해서 분위기를 다시 가져와야지. 타이탄스 타자들도 몸 좀 사리겠지.”
“감독님, 이거 연습 경기인데···.”
“연습 경기? 아니지. 이 경기에 뭐가 걸렸는지 잊었어?”
“아···.”
경기에 이기면 안민혁의 폭력 영상을 없앨 수 있다.
만약에 지면 타이탄스가 원하는 선수를 현금 트레이드로 넘겨야 한다.
‘그랬다간 단장이 지랄할 수도 있어.’
팀을 정비할 스토브리그 때 함부로 전력을 손실시켰으니까.
심은배는 생각했다.
‘이 경기···. 어떻게든 이겨야 해.’
하지만···.
‘안민혁은 무조건 3회까지는 던지게 하기로 약속해서···.’
“이번에 무조건 흐름을 끊어야 해.”
원종현은 타석에 선 빨간 머리 타자를 쳐다봤다.
‘손재현···? 낯이 익은 이름인데···.’
그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심은배한테 물었다.
“심 코치, 저 선수···. 데이터 있어?”
“네? 아뇨. 없습니다. 마무리 캠프 직전에 타이탄스 육성 선수로 들어왔는데···.”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데···.”
“···중요한 선수는 아닌 거 같아서···.”
원종현은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이번에 더블 플레이로 투아웃 잡으라고 해. 그리고 8번 박종구는 타격력이 좋지 못하니까 무난히 삼진을 잡을 수 있을 거야. 절대 9번까지 이어가면 안 돼.”
9번 타자 김효철은 스페이스와의 연습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때리며 타이탄스를 승리로 이끌었다.
심은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문정준 포수에게 사인을 보냈다.
= = = = = = =
키노 스포츠 콤플렉스 경기장, 관중석.
한수는 마운드에 선 안민혁과 전광판에 찍힌 그의 구속을 번갈아 보며 생각했다.
‘안민혁이 보유한 광전사 B 특성 효과 때문인가? 실점 이후부터 구속이 높아졌네···.’
【특성: 광전사 B】
└3점 이상 실점하면 발동. (구속 +4 / 제구 –2)
대신 제구력은 확실히 엉망이다.
다만···.
‘좀 전에는 일부러 하민철을 맞힌 거 같은데···.’
그때 손재현이 붉은 머리를 흩날리며 타석에 섰다.
그리고 홈런 사인을 냈다.
‘승부를 즐긴다는 특기가 있는 타자 답네.’
고의사구에 대한 건 나중에 따지고, 일단은 경기를 지켜보자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옆자리에 앉은 장은수를 힐끗 쳐다봤다.
‘아까 어째서 레벨이 오른 거지?’
현재 레벨은 훈련을 통해서만 오르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장은수는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띠링!
그때 알림창이 나타났다.
【육체적인 훈련을 통해서만 성장을 하는 건 아닙니다. 이미 신체 능력이 수준급에 이른 선수는 정신적인 수양, 마음가짐, 확고한 목표 등을 통해서도 성장할 수 있습니다. 물론···. 기본 베이스는 육체 훈련이지만요.】
그렇다면···.
‘장은수는 이미 신체 능력이 수준급이라는 말인가?’
특기에 괴력과 철완이 있고, 취미로 이런저런 스포츠를 즐긴다는 건 알지만···.
‘선수급이라고···?’
한수는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장은수가 와인드업하는 안민혁을 보며 중얼거렸다.
“···또, 사구를 노리고 있어요.”
“네?”
“저 투수요. 또 타자를 맞힐 생각이라고요.”
“그걸 어떻게···.”
그때였다.
-휘이이익!
안민혁의 90마일(146km/h)의 포심이 손재현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한수는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 = = = = = =
타석에 선 손재현은 이종규 타격 코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상대는 더블 플레이를 노릴 거다. 그러니까 함부로 휘두르지 말고 마지막까지 지켜봐. 알겠지?’
손재현도 상대가 병살을 노릴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하민철도 내보낸 거겠지.’
그때 일루에서 살짝 옆으로 나와 있던 하민철이 사인을 보냈다.
본인 허벅지와 안민혁을 번갈아 가리키는데···.
‘···저건 뭔 사인이냐?’
손재현은 머리는 나쁘지만 중요한 사인은 전부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하민철의 사인은 처음 본다.
‘혹시 내가 졸다가 놓친 게 있었나?’
그때 안민혁 투수가 와인드업했다.
손재현은 일단 지켜보자고 생각했다.
그때 안민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웃어?’
그냥 웃는 것도 아니고, 비웃고 있었다.
동시에 등골이 오싹했다.
그리고 투수의 손을 떠나 높게 날아오는 빠른 공.
손재현은 배트를 꽉 쥐었다.
‘이 자식···.’
그리고···.
“우리야압!!!”
말도 안 되는 각도로 배트를 휘두르더니,
-따아아아악!
호랑이처럼 포효했다.
“내 대가리 기용찬 거야!!! 이 자식아!!!”
타구는 우중간으로 향했지만···.
더블 플레이를 위해 내려와 있던 우익수에 의해 플라이 아웃이 됐다.
= = = = = = =
타이탄스 더그아웃.
기용찬은 손재현의 외침을 듣고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뭐라는 거야···. 어휴···.”
이종규 타격 코치는 타석에서 내려오지 않고 안민혁을 노려보는 손재현을 쳐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피하지 저걸 왜 쳐서···.”
페르난도 킴 감독은 웃으며 말했다.
“높은 공에 대한 공포는 완전히 극복한 거 같네요.”
“네, 저 무식한 성격만 좀 고치면 좋겠는데···.”
“그런 게 장점일 수도 있지요. 그런데···.”
페르난도 킴 감독은 안민혁 투수를 차가운 눈빛으로 보며,
“···저 투수는 도가 지나치네요.”
“민철이 때부터 조금 걸렸습니다. 실투라고 믿고 싶지만···. 만약 공에 맞기라도 했으면···.”
페르난도 킴 감독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박종구는 타격 능력이 아직 떨어져. 김효철은···.’
그는 김효철을 살폈다.
그는 스페이스 연습 경기 2차전에서 연타석 홈런을 때리며 팀을 위기에서 구했다.
그런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때처럼 뭔가 해줄 거 같지 않네.’
하지만 아직 경기는 1회 초다.
페르난도 킴은 이종규 코치에게 말했다.
“일단 좀 더 지켜보죠. 타자들한테 조심하라고 하고···.”
“알겠습니다.”
박종구와 김효철은 안민혁의 고속 슬라이더와 93마일(150km/h)의 포심에 연속으로 삼진 아웃을 당했다.
그리고 1회 말.
마운드에는 좌완 파이어볼러 기용찬이 섰다.
= = = = = = =
한수는 기용찬이 마운드에 서는 걸 보며 장은수에게 물었다.
“아까 말입니다.”
“네?”
“투수가 몸에 맞히는 공을 던진다는 걸 어떻게 미리 안 겁니까?”
“······.”
장은수는 대답을 바로 하지 않고 옛 추억을 떠올렸다.
[투수는 제구할 수 없고, 타자는 칠 수 없고, 포수는 잡을 수가 없으며, 가르친다고 가르칠 수도, 배운다고 배울 수 없는 공···. 그게, 바로 너클볼이네.]
[너클볼···?]
[자네 배트 스윙은 해본 적 있나?]
[그냥 배팅 연습장에서 조금···.]
[그럼 타석에 한 번 서보게.]
[···왜요?]
[말로 백 번 듣는 거보다, 한 번 경험해보는 게 더 많은 걸 느낄 수 있을 테니까.]
그때 한수가 재차 그를 불렀다.
“은수씨?”
장은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요. 그냥 알았어요.”
“······?”
그때였다.
ST 위닝스의 첫 번째 타자가 타석에 섰고, 기용찬이 와인드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