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 이정호 포수입니다.
박치수는 말이 좋아 은퇴하겠다는 거지, 방출이었다.
한수는 잡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생각한 방법도 방출이었으니까.
다만···.
‘스스로 떠나겠다고 할 줄은 몰랐네.’
한수는 강덕수한테 지시해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게 했다.
다음날,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게 됐다.
박치수한테 속아서 코인에 빠진 팀 동료들의 그를 고소하겠다고 나섰고, 페르난도 킴 감독이 선수들 사이에서 중재했다.
박치수는 고소를 취하해주는 조건으로 조용히 떠나기로 했고, 코인에 빠진 선수들은 마무리 캠프 성적이 좋지 않아서 2군으로 보냈다.
‘사실 마무리 캠프 성적은 핑계고, 팀워크를 해칠 거 같으니까 처리한 거겠지.’
한수는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페르난도 감독···. 보기완 달리 칼 같은 사람이네.”
친구인 박동준 코치와는 정반대인 거 같았다.
박동준은 겉으로는 까칠한데 속정이 깊으니까.
하여튼···.
“큰 잡음 없이 문제 해결된 거면 땡큐지.”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이소희 팀장이 단장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서류철을 내밀며 말했다.
“구단주님, 얼마 전에 말씀하셨던 구단의 문제점들을 파악해왔습니다.”
“수고했어요.”
한수는 서류철을 확인하더니 피식 웃었다.
“두 개라고 했는데···. 문제를 몇 개나 찾아온 겁니까?”
“찾다 보니···. 원하시는 걸 고르시면 될 거 같습니다.”
“아닙니다. 기왕 찾은 문제···. 전부 해결하세요.”
이소희가 당황하며 되물었다.
“전부요? 전부 해결하려면 운영 자금에 문제가···.”
“일단 바로 처리할 수 있는 문제부터 해결하세요. 비용이 많이 드는 문제는···.”
한수는 말을 멈추고 휴대폰으로 일정을 확인하더니,
“박종철 사장이 횡령했던 운영 자금들 이번 달 안으로 회수될 겁니다. 그걸로 처리하도록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래요.”
이소희가 밖으로 나가고, 한수는 포수 마스크를 힐끔 바라봤다.
‘이제 이 팀장이 문제를 해결하기만 기다리면 되겠군. 그럼, 임무 17도 완료···.’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강덕수가 들어왔다.
강덕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구단주님···.”
“왜 그래?”
“오 이사장님께서 연락하셨는데요.”
오 이사장은 한수의 엄마 오정숙이다.
그녀는 한수가 부산으로 온 뒤로 주기적으로 연락하며 타이탄스 구단주를 그만두라고 하고 있다.
통합 우승 같은 걸 하지 않아도 소송을 통해서 유언장에 적힌 유산을 얻을 수 있다며 말이다.
아마 ‘최고의 구단 가이드’가 없었다면 포기하고 오정숙의 말대로 했을지도 모른다.
처음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한수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알아서 커트하라고 했지? 왜 나한테까지···.”
“그게···. 오늘 저녁에 부산으로 오시겠다고 합니다.”
“뭐? 누가 온다고?”
강덕수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오 이사장님께서 오신다고 합니다.”
“······!”
= = = = = = =
부산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고급 세단.
오정숙은 담요로 덮은 다리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올리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부산까지 10km가 남았다는 표지판을 보며 생각했다.
‘오랜만이구나···.’
이정호와 만나고 결혼까지 하게 된 행복했던 추억.
이정호가 부상으로 은퇴를 결심했을 때 함께 슬퍼했던 기억.
그녀처럼 고아인 줄 알았던 이정호가 사실은 재벌 2세였다는 사실에 너무 놀라 한수와 희수를 데리고 떠나려고 했던 일.
그리고 이정호를 용서하고 함께 본가로 갔다가 얼마 후 교통사고를 당해서···.
[정숙아···. 미안···. 아이들을···.]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가지런히 올려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당장이라도 토를 하고 싶었지만,
-꽈아악!
손에 힘을 주며 참았다.
그때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그녀의 안색을 살피더니 물었다.
“사모님, 잠시 멈췄다가 갈까요?”
“···아뇨.”
“차를 너무 오래 타셔서 그런 거 같은데 잠시···.”
“괜찮아요.”
“네···.”
숨을 고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행복, 추억 모두 악몽에 집어삼켜졌다.
그리고 오정숙에게 남은 건···.
[···창호야, 네가 그랬냐?]
[제가 뭐라고 말씀드려도 아버님은 제가 정호 형을 죽였다고 생각하시지요?]
[······.]
[그러니까 저를 조사하는 경찰이나 기자들을 전부 처리하신 거잖습니까? 골육상잔의 비극으로 신영 그룹 명예에 먹칠하고 싶지 않아서···.]
[창호야, 나는···.]
[아버님! 서방님! 이, 이게 무슨 소리예요! 그이를, 그이를 누가 죽여요!!?]
[아가···.]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증오뿐이다.
권력을 탐해서 형을 죽인 동생이나, 그룹의 명예를 위해 진실을 덮어버린 아버지나···.
모두···.
모두···.
부숴버리고 싶다.
그녀는 지금까지 숨을 죽이며 때를 기다려왔다.
그리고 이재수 덕분에 한수가 J&J 브랜드의 명줄을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한수 걔는 이런 일을 나한테 말하지도 않고···.’
이재수는 신영 패션의 주주인 그녀에게 한수를 설득해달라고 부탁했다.
오정숙은 알겠다고 했지만···.
속내는 달랐다.
‘재수를 몰아내고 한수가 신영 패션을 차지할 좋은 기회야.’
신영 패션은 그룹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한 계열사다.
한수가 신영 패션의 새로운 사장이 된다면···.
‘이창호 부회장 속이 무척 쓰리겠지.’
이태백 회장이 남긴 한수의 유산도 최고의 로펌에 의뢰해서 해결할 생각이다.
그렇게만 되면···.
‘한수가 신영 그룹의 주인이 되는 건 시간 문제야.’
그러기 위해선···.
‘쓸데없는 야구 놀이를 빨리 그만둬야 하는데···.’
한수는 청개구리 기질이 있는 건지 그녀의 말을 듣질 않는다.
요즘은 연락도 받지 않는다.
그래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직접 찾아가는 한 거다.
‘그놈의 타이탄스가 뭐라고···.’
문득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남편 이정호가 부상으로 은퇴를 결심했을 때···.
[아버님께 경영에 대해 배우고 타이탄스 사장이 될 거야. 그때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자. 알겠지?]
[그래요.]
[선수로서는 이루지 못했지만···. 타이탄스 사장이 돼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 거야. 반드시.]
[응원할게요. 항상.]
그녀는 잠시 슬픈 표정을 지었지만, 곧 차가운 눈빛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오정숙이 탄 세단은 부산에 도착했다.
= = = = = = =
타이탄스 구단 사무실.
운영팀 팀장 이소희는 미친개 스튜디오 윤하얀 이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다큐멘터리에 추억의 타이탄스 선수를 찾는 내용을 넣고 싶다는 건가요?”
[네~. 그냥 타이탄스와 부산 야구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다큐는 재미없으니까요. 추억의 선수를 찾으면서 자연스럽게 야구 역사를 설명하는 거죠~!]
“괜찮은 생각이네요. 이번에 미친개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예능 프로그램 ‘그땐 그랬었죠?’처럼 말이죠?”
[아하하~! 네, 맞습니다.]
“좋습니다. 구단에서도 최대한 협조하도록 할게요.”
[그러면 이벤트 설문 조사를 해주실 수 있으세요?]
“어떤 내용으로요?”
[팬들이 근황을 알고 싶은 선수가 누구인지요!]
윤하얀의 제안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큐멘터리가 성공하려며 팬들이 궁금해하는 선수의 근황을 찾아야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설문 조사 이벤트는 이번 주 중으로 시작할게요. 통계 자료는 이벤트 종료일까지 매일 정리해서 보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선수들은 알아서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럼, 고생하세요!]
“네, 강 사장님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이소희는 예전에 신성 그룹에서 일할 당시 미친개 스튜디오 강동수 사장과 인연이 있었다.
그래서 안부 인사를 하는 거다.
윤하얀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소희는 전화 통화를 끝내고 윤가희를 불렀다.
“가희씨, 홍보팀한테 설문 조사 이벤트 개최하라고 전해주세요.”
한수가 다큐멘터리 관련해서는 이소희에게 전권을 일임해서 다른 팀에도 이런 식으로 지시를 할 수 있다.
윤가희는 고개를 갸웃하며,
“설문 조사 이벤트요? 어떤 내용이요?”
“그게···.”
그날 저녁, 타이탄스 구단 공식 홈페이지에 이벤트 공지가 올라왔다.
【다큐멘터리 ‘타이탄스 40년’ 제작 기념 설문 조사 이벤트!】
[타이탄스 팬 여러분~ 혹시 우리 팀에서 활약했던 선수 중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근황이 궁금한 선수가 있나요~? 그렇다면 댓글로 적어주세요! 참여해주신 분 중에 추첨해서 소정의 상품을 보내···.]
야구 커뮤니티, 블로그, 포털 사이트 등에도 홍보를 해서 야구팬들이 하나둘 이벤트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갈매기야. 그래서 상품이 뭐냐?
└타이탄스가 소정의 상품이라고 적은 거면 진짜 보잘것없는 걸 거다.
└남두오성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인마, 세트 메뉴를 적으면 어떻게 하냐? 한 명만 적어!
└자갈치 선수를 근황을 알고 싶어요!
└티라노스로 간 양반 근황은 왜 알고 싶음.
└티라노스랑 재계약 불가 되고 뭐, 잘살고 있겠지.
└마몰레드 잘 살고 있나 궁금하네.
└예능 뒤져보면 나오지 않음?
└마수아비는 뭐하러 찾아. PTSD만 오네.
└황재혁은···.
└황 사원은 위닝스로 갔잖음.
└황 사원은 빌런스를 그리워할 듯.
└손마석 선수!
└티라노스에 있잖아.
└시즌 시작하면 볼 놈임.
└짜증나게 마석이는 왜 찾아!
다양한 선수들의 이름이 언급됐다.
타이탄스의 전성기를 이끌고 은퇴한 선수.
타이탄스의 아픈 시기를 함께 했던 선수.
사건 사고를 몰고 다녔던 선수.
현재 지도자로 활동 중인 선수.
타이탄스를 떠나서 다른 팀에서 활약 중인 선수.
그리고···.
└타이탄스사십년팬: 그 선수가 기억나요. 포수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자주 나오진 않아도 정말 열심히 했던 선수예요. 팬 서비스도 좋았어요. 우리 아들이 팬이었던 선수가 있었는데 사인을 받으려고 하니까 그 선수가 무시하고 갔거든요. 그때 그 포수가 “인마, 팬이 있어야. 우리도 야구를 계속하는 거야!”라면서 사인을 받게 해줬어요. 그런데 이름이 잘 기억이 안 나네요.
└갈매기3회우승: 타이탄스사십년팬님, 타이탄스 역대 선수들 검색해보면 나올 겁니다.
└└타이탄스사십년팬: 검색해봐도 잘 모르겠어요.
└└└갈매기짱구: 언제 활동한 선수인데요?
└타이탄스사십년팬: 타이탄스 초창기부터 활동하신 분이에요. 주전은 아니고 완전 백업 포수여서 경기에 자주 출장하지도 못했는데···. 90년인가? 91년에 경기 중에 상대 타자랑 충돌해서 부상으로 은퇴했는데···.
└타이탄스잼민이: 윗댓님 정말 타이탄스 사십년 팬인가 보네···.
└티라노스로갈아타: 보살이셨네. 어떻게 사십 년 동안 타이탄스 팬을 하지?
└소호가대호됨: 아드님한테 물어보세요. 아드님도 타이탄스 팬이면 기억할 텐데···.
└└타이탄스사십년팬: 아들은 야구 안 봐요. EPL에 빠져서···. 그때 당시 선수들 이름을 봐도 전부 아닌 거 같아요.
그때 커뮤니티 고인물이 등장했다.
늘 타이탄스를 비방하는 부러진황금깃발이었다.
└부러진황금깃발: 타이탄스 초창기부터 함께한 선수 중에 신체 조건이 부족했지만, 꽤 영리한 리드를 했던 포수가 한 명 있습니다. 아마 그분을 말씀하시는 거 같군요.
└부러진황금깃발: 팀을 위해 헌신하다가 버려진 선수죠. 중요한 경기에서 부상을 당하자 팀에서 방출당했거든요. 타이탄스는 그의 이름과 기록도 말소시켜버렸습니다. 정말 끔찍한 팀 아닙니까? 팀을 위해 헌신한 선수를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이래서 타이탄스는 해체가 답입니다.
└타인탄스잼민이: TMI 그만~ 그래서 그 선수 이름이 뭔데?
└부러진황금깃발: 이정호 포수입니다.
이정호 포수의 이름이 설문 조사에 등장했다.
그 시각, 한수는 어머니 오정숙 여사를 만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