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 꽤 재밌거든.
부산 마이어 호텔, 최상층 레스토랑.
한수는 포수 마스크를 쓴 채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창가 쪽 테이블로 이동했다.
그리고 어머니 오정숙 여사와 만났다.
오정숙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꼴이 그게 뭐니?”
“야구에 진심인 구단주 같지 않아? 흐흐.”
“······.”
오정숙은 아들의 모습이 못마땅해서 뭐라고 하려다가 포수 마스크가 낯이 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건···.’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생각했다.
‘···아버님, 한수한테 정호 씨의 포수 마스크까지 줘서 타이탄스로 보낸 건 대체 무슨 의미인가요? 뒤늦게 아들의 한을 풀어주시려는 건가요? 너무하십니다···. 정말 너무 하십니다···.’
이때 한수는 부산 갈매기의 삼륜안(三輪眼)으로 오정숙의 정보창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눈부신 황금색 빛이 흘러나왔다.
‘응? 골드···?’
【오정숙】【Gold 등급】
【재능】
(타이탄스 선수: 0.1%)
(타이탄스 코치진: 5%)
(타이탄스 프런트: 83%)
결론: 프런트의 채염입니다. ···(중략)···
【포지션】
1순위: 마케팅팀
···(중략)···
【호감도: + 100%】
한수는 호감도가 100%인 걸 확인하고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엄마만 아니었어도 마케팅팀으로 스카우트할 텐데···.’
그는 포수 마스크를 벗으며 말했다.
“우리 오 여사님~ 그동안 잘 지냈어?”
그러자 오정숙이 퉁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난 아들 녀석이 전화 통화는커녕 메시지까지 다 무시하는 바람에 조금도 마음 편히 지내지 못했단다.”
한수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뭐, 언제는 연락 잘했나? 새삼스럽게···.”
“너! 그걸 말이라고···.”
“이런~ 이런~ 우리 오 여사님 왜 만나자마자 목소리를 높일까? 릴렉스. 릴렉스.”
오정숙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한수가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부산에 왔잖아.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관광도 좀 하고 서울로 가요. 아~ 덕수를 가이드로 보낼게! 걔가 부산의 맛집을 전부···.”
“한수야.”
오정숙의 부름에 한수는 말을 멈췄다.
그녀는 아들의 눈을 빤히 바라보더니 물었다.
“내가 왜 왔는지 알고 있지?”
“글쎄.”
“······.”
“내 고집을 빤히 아시는 우리 오 여사님께서 타이탄스에 손 떼라는 잔소리하러 직접 부산까지 행차하신 거 같진 않고···. 모르겠는데?”
오정숙은 아들을 보며 생각했다.
‘내 속으로 낳았지만···. 이렇게 능구렁이 같은 건 대체 누구를 닮은 거야?’
아들과 만난 지 십 분도 안 됐는데 이마에 주름이 하나는 더 생긴 거 같았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J&J 스프링 시즌 디자인, 네가 갖고 있지?”
“그걸 엄마가 어떻게 알아? 주주들 사이에 벌써 소문이 퍼졌어?”
“재수가 찾아와서···.”
오정숙은 이재수가 찾아와서 어떤 부탁을 했는지 말래젔다.
한수는 생각했다.
‘이재수 미친 X···. 자기 무덤을 자기 손으로 파네.’
세간에는 오정숙이 굉장히 공사 구분이 뚜렷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수는 알고 있다.
오정숙이 살아가는 이유는 이창호 부회장을 엿 먹이기 위함이라는 걸···.
물론 한수는 오정숙이 이창호한테 엿을 먹이든, 뒤통수치든 신경 쓰고 싶지 않다.
그는 할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식구들을 지키고, 평생 호사를 누리며 사는 게 목표니까.
어쨌든!
한수는 팔짱을 끼며 냉정하게 말했다.
“엄마, J&J 디자인으로 이재수를 밀어내고 나를 신영 패션 사장으로 만들려는 계획은 포기해.”
“한수야!”
한수는 귀를 긁적이며,
“신영 패션에 이재수 끄나풀이 얼마나 많은데, 어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난 그냥 할배 유산 상속받아서 신영 패션 대주주 될래. 그래서 배당금이나···.”
오정숙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탕! 소리 나게 쳤다.
한수가 말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자, 오정숙이 말했다.
“신영 패션은 신영 그룹을 차지할 반석이 되어줄 거다. 이번 기회에···.”
“난 회장 자리는 물론이고 경영에도 욕심 없어. 타이탄스 하나 관리하는 것도 귀찮은데 무슨 그룹 총수야.”
“너는 신영 그룹의 장손이야. 네가 아니면 누가···.”
“무슨 조선 시대야? 장손은 무슨···.”
“······.”
“나는 편하게 돈 많이 벌면서 나태하게 인생을 즐기고 싶다고요. 가끔 재수 없는 이재수한테 갑질도 하면서~ 오케이?”
오정숙은 아들의 똥고집을 알기 때문에 더는 설득하는 걸 포기했다.
하지만···.
“···타이탄스에서 그만 손 떼.”
“······.”
“네가 방금 말했지? 타이탄스 관리하는 것도 귀찮아 죽겠다고. 그러니까 그만두고 서울로 와. 유산 상속 문제는 엄마가 해결해 줄게.”
한수는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귀찮긴 한데···. 손 떼긴 싫어.”
“뭐?”
“타이탄스 구단 키우는 거 말이야···.”
잠시 말을 멈춘 한수가 씨익 웃었다.
그 미소에 오정숙은 불현듯 오래전 추억이 떠올랐다.
한수의 아빠, 이정호와 연애할 때···.
그는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벌지도 못하는 야구를 미친 듯이 열심히 했다.
그녀는 이해가 안 돼서 물었다.
[정호씨는 왜 그렇게 야구를 열심히 해요? 주전으로 뛰지도 못하면서···.]
[그게 말이야. 백업 포수라고 해도···.]
이정호는 환하게 웃으며,
[꽤 재밌거든.]
···이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한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꽤 재밌거든.”
“······.”
한수는 이정호와 외모 말고는 닮은 게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피는 못 속인다고 했던가?
이런 부분에서 비슷할 줄은 몰랐다.
‘하필 야구를···.’
생각해보니, 한수는 어릴 때도 야구를 좋아했다.
타이탄스 경기 때면 언제나 주먹을 꼭 쥐고 경기를 관람했으니까.
다만, 이정호가 죽은 뒤로는···.
오정숙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한수가 말했다.
“하여튼 내 뜻은 확실히 전했으니까. 더는 타이탄스에서 손을 떼라고 하지 마. 그러니까···.”
“······.”
“이제 음식 시킬까? 배가 등 가죽에 붙겠어~.”
능글맞게 웃는 한수를 보며 오정숙은 또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한수와 함께 메뉴를 주문하며 최근 얻은 정보를 떠올렸다.
‘이창호 부회장은 내년 말에 타이탄스를 매각할 생각이야. 그때가 되면 한수는 좋든, 싫든 타이탄스를 포기할 수밖에 없어.’
그녀가 할 일은 그 안에 한수가 이태백 회장의 유산을 상속받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한수가 다시 돌아올 자리를 만들어놔야지.’
그녀는 한수에게 물었다.
“J&J 디자인은 어떻게 쓸 생각이야? 그냥 재수를 골탕 먹이려고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
“타이탄스 운영 자금을 달라고 할 거야.”
“운영 자금···?”
“벌여놓은 일이 많은데, 운영 자금이 부족해서···.”
“신영 패션도 예산이 넉넉하진 않아. 알다시피 재수가 올 초에 말아먹은···.”
신영 패션은 올해 초부터 이재수가 꽤 오랫동안 준비해온 대형 프로젝트를 말아 먹었고, 여러모로 악재가 많았다.
한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지. J&J가 뜨지 않았으면 이재수 그 인간 모가지 날아갔을걸? 근데 이재수 그 자식 참 재수가 없게 나한테 감사하단 말 한마디를 안 해. 내가 제인 정을 꼬셔와서 브랜드 떡상한 덕에 살아남은 주제에 말이야. 사람이 감사한 줄 알아야지. 그러니까 그렇게 복이 없지. 쯧쯧.”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그래서 운영 자금을 어떻게 얻어내겠다는 거야?”
“신영 패션을 통해 투자받을 생각은 아니야. 그랬다간 작은아버지가 지랄할 테니까.”
“그럼···.”
“개인 투자를 받아야지.”
한수는 씨익 웃으며,
“이재수 그 인간, 내가 알기로 꼬불쳐둔 돈이 무척 많거든. 흐흐.”
오정숙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너는 이재수가 할아버지 유산 상속을 포기하면 J&J 스프링 시즌 디자인을 넘기겠다고 했는데, 내가 설득해서 개인 투자를 받는 걸로 마음을 바꾼 거야.”
“굳이 왜?”
“······.”
오정숙은 이 기회에 이재수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할 생각이다.
그걸 시작으로 이재수의 공략할 거다.
‘재수는 이창호한테 인정받지 못하고 상처가 많아.’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고 있으니, 말해 뭐하겠는가?
‘아마 누구보다 이창호한테 인정을 받고 싶어 하면서도···. 이창호를 미워하고 있을 거야. 이번 기회에 나한테 마음을 열게 만들고 이창호와 이간질하면···.’
그녀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그러나 이런 걸 한수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이유는 몰라도 돼. 하여튼 그렇게 알고 있어.”
“흠···. 알겠어.”
한수는 오정숙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느꼈지만, 더는 캐묻지 않기로 했다.
‘뭐가 됐든 나는 돈만 받으면 오케이니까.’
그때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두 사람은 식사를 시작했다.
다음 날, 오정숙은 서울로 다시 올라갔고 이재수와 만났다.
그녀는 이재수에게 간신히 한수의 마음을 돌렸다고 말하면서 타이탄스에 대한 개인 투자를 요구했고···.
이재수는 J&J를 말아 먹었다간 이창호 부회장한테 된통 깨진다는 공포감에···.
“···알겠습니다.”
···비자금 중 일부를 한수에게 넘기기로 했다.
오정숙은 씁쓸해하는 이재수를 위로하며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고···.
이재수도 차갑고 성과만 바라던 부모님과 달리 상냥한 오정숙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이때 이재수에게 막대한 투자를 받은 한수는···.
“흐흐, 구장 리모델링이나 더 해볼까?”
타이탄스를 발전시킬 생각뿐이었다.
= = = = = = =
타이탄스 단장실.
한수는 ST 위닝스에서 트레이드돼서 온 전예준에 대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전예준은 당장 불펜 투수로 활용해도 되겠군.’
ST 위닝스에서 오기로 한 또 다른 선수, 공형찬은 사정이 있어서 이틀 뒤에 올 예정이다.
예상보다 입단이 늦었지만, 괜찮다고 생각했다.
스토브리그는 이제 시작이니까.
다음은 염철수에 대한 보고서였다.
한수는 장보형 코치한테 지시해서 염철수한테 슬라이더를 가르치라고 했다.
그 결과, 염철수는 감도 못 잡은 팜볼이나 어색해하는 커브에 비해 무척 빠르게 슬라이더를 익혀나가고 있었다.
한수는 염철수의 정보창을 확인했다.
【염철수】【Diamond 등급】
【재능】
(타이탄스 선수: 98%) 【+ 1 ↑】
(타이탄스 코치진: 12%)
(타이탄스 프런트: 10%)
결론: 경기장의 자룡(子龍)입니다. 심지가 곧고, 강직하며 절대 포기하지 않는 노력파입니다.
···(중략)···
【특기】
1. 흔들리지 않고 침착한 Ace 마인드
2. ??? 슬라이더(미개발)
3. ??? 커터(미개발)
4. 철인(鐵人)
5. 헌신(獻身)의 아이콘
6. 신비한 회복력
7. 승부의 화신
8. 도깨비 무브먼트 【New】
【호감도: + 84%】
재능이 1% 상승했고, 특기에 도깨비 무브먼트라는 게 생겼다.
하지만 여전히 슬라이더는 미개발이라고 표시된 상태였다.
한수는 볼을 긁적이며 생각했다.
‘특별한 슬라이더라도 배워야 하는 건가? 아니면, 스스로 뭔가 깨달음을 얻어야 하나?’
“이 팀장한테 조언을 구해볼까?”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이소희가 들어왔다.
아주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구단주님, 다큐멘터리 관련해서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그래요? 마침 잘됐네. 나도 물어볼 게 있었는데.”
“물어볼 거요?”
“염 선수가 슬라이더를 배우고 있는데, 2% 부족한 거 같아요. 장 코치가 현역 때 슬라이더를 전문적으로 던지지도 않아서···.”
이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알겠습니다. 염 선수한테 슬라이더를 가르칠 트레이너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땡큐! 보고할 건 뭐예요?”
“미친개 스튜디오 윤하얀 이사의 요청으로 팬들이 근황을 알고 싶은 추억의 선수가 누구인지 설문조사 이벤트를 진행했습니다.”
한수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재밌는 걸 했네. 그래서 어떤 선수 근황을 알고 싶대요?”
“그게···.”
이소희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한수는 재차 물었다.
“왜 이렇게 뜸을 들여요? 돌아가신 최종권 선수 근황이라도 궁금하대요?”
“···이정호 선수입니다.”
“···누구요?”
이소희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타이탄스 원년 멤버이자 포수였던···. 등번호 9번 이정호 선수의 근황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 말에 한수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