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 인마, 우리가 배트맨이냐?
한수는 부산 씽 농구팀 응원단의 연습이 끝나자마자 박홍철을 찾아갔다.
경기장에서 장비를 정리하던 박홍철은 당황했다.
‘뭐, 뭐야? 이한수 구단주가 왜 여기에···.’
물론, 타이탄스 홈구장이 길 건너에 있으니 언제든 찾아올 수 있지만···.
타이밍이 문제였다.
막 연습이 끝난 터라 아직 치어리더들도 돌아가지 않았는데···.
그때 한수가 물었다.
“혹시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언짢은 건가요?”
“아, 아닙니다.”
사실 기분이 나빴지만, 김종문이 해줬던 조언을 떠올리며 내색하지 않았다.
‘재계약할 때까진 납작 엎드려야지.’
“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로···.”
“이 팀장한테 들었어요. 재계약을 거절했다고요?”
“거절은 아니고요. 조금 생각할 시간을···.”
“애써 마음 쓸 필요 없어요.”
“···네?”
한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재계약 안 해도 된다고요.”
“예? 아니, 저는 안 한다는 게 아니고···!”
“전임 단장과의 인연 때문에 억지로 응원단장을 맡았다고 들었습니다. 많이 힘들었죠?”
“그, 그건···.”
사실이긴 하지만, 그때랑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
친구와 사업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함부로 사업에 뛰어드는 게 아니라고는 했지만, 사업 아이템이 무척 좋았다.
친구는 정상궤도에만 오르면 투자금의 열 배는 회수할 수 있다고 했다.
[홍철이 너는 투자금만 마련해줘. 나머진 내가 전~부 알아서 할게.]
참으로 고마운 친구였다.
그래서 계약 연봉을 올리려고 한 거다.
그런데 재계약하지 말자니···!
“구단주님,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이소희 팀장이 제시한 계약 연봉대로···.”
“거~참, 말귀를 못 알아듣네.”
박홍철은 한수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자 당황했다.
“네, 네···?”
“훈훈하게 악수하고 끝내면 참 좋았을 텐데···. 왜 이렇게 질척거려?”
“······.”
“돈이 궁하면 이 팀장이 계약서 내밀었을 때 바로 서명 하지 그랬어. 그랬으면 위약금이라도 챙겼지.”
‘위약금···.’
그제야 박홍철을 알게 됐다.
‘이한수 구단주는 애초에 나를 쫓아낼 생각···.’
한수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타이탄스에 대한 애정은 조금도 없고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응원단장은 필요 없어. 부탁이니 꺼져주세요.”
“······.”
박홍철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한수는 콧방귀를 끼며 몸을 돌렸다.
그때 한쪽에 뻘쭘하게 서 있던 부산 씽 농구팀 치어리더들이 보였다.
치어리더들은 삼삼오오 모여 속삭이고 있었다.
‘방금 박 단장 까인 거지?’
‘타이탄스 구단주래. 실물이 훨씬 미남이야~!’
‘저분 완전 셀럽이잖아. 패션쇼에도···.’
‘타이탄스 응원팀 물갈이하는 건가?’
‘거기 어중이떠중이만 남았는데···. 지원해볼까?’
한수는 피식 웃더니 그녀들을 향해 다가갔다.
치어리더들은 움찔하며,
‘뭐야? 나한테 오는 거야?’
‘날 보는 거 같은데?’
‘웃는 모습 예술이다···.’
‘혹시 스카우트 제의라도 받는 건···’
한수가 향한 곳은 박민희 앞이었다.
한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박민희씨 맞으시죠? 반갑습니다. 이한수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치어리더들을 ‘그럼 그렇지···.’ 했다.
박민희는 부산 씽 응원팀 간판이니까.
‘···집에나 가자.’
‘또, 민희 언니만···.’
‘팀장님은 이미 소속팀이 두 개나 되는데···.’
치어리더들은 한숨을 쉬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박민희는 힐끔 팀원들을 살피더니, 한수에게 말했다.
“저···. 팀원들하고 아직 할 얘기가 남아서···.”
“아~ 미안합니다. 곤란하게 만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한수는 그녀에게 명함을 내밀더니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 싶어서 온 겁니다.”
박민희는 한수의 미소가 참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좀 전에 박홍철에게 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명함을 받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스카우트 제의를 하시려는 거면···. 이미 소속된 팀이 많아서···.”
“그런 거 아닙니다. 정말 인사만 하려는 겁니다.”
“네···.”
한수는 안도하는 박민희를 보며 생각했다.
‘지금은 인사만이지. 지금은···.’
당장 내일부터는 박민희 소속사에 오퍼를 넣을 계획이다.
그는 박민희를 타이탄스 전속 치어리더로 만들자고 결심했으니까..
임무 18 달성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박민희는 프런트의 왕윤이야. 그리고···.’
한수는 한쪽에서 짐을 챙기고 있는 최혜선을 쳐다봤다.
‘최혜선은 프런트의 초선···. 이 둘은 다양한 영웅 도감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인재야. 반드시 영입해야 해.’
한수는 박민희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그럼, 저는 이만···. 기회가 되면 또 봐요.”
“안녕히 가세요.”
한수는 출구로 걸어가며 최혜선 옆을 지나갔다.
그때 최혜선과 잠시 시선을 마주쳤고···.
“······.”
“······.”
···그대로 지나쳐 체육관에서 나갔다.
밖으로 나온 한수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겁에 질린 눈빛 같았는데···. 혹시 내 얼굴이 무섭나? 아냐, 이건 말도 안 돼.’
한수는 체육관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최혜선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 = = = = = =
최혜선은 한수가 체육관 밖으로 나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녀는 한수가 두려웠다.
물론 한수를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도 두려운 이유는···.
한수가 ‘신영 그룹’ 사람이기 때문이다.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어···.’
그때 박민희가 다가오며 물었다.
“민희야, 아까보다 안색이 더 안 좋은 거 같은데···. 괜찮아?”
“괜찮아요.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김호성 실장이 또 무리하게 행사 뛰게 해?”
박민희는 그녀와 같은 RT 엔터에 속한 치어리더인데, 실력도 뛰어나고 인지도도 높아서 입김이 세다.
최혜선을 담당하는 김호성 실장도 박민희는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최혜선은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요즘은 안 그래요···.”
“그럼 다행인데···.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알겠지.”
사실 고민이 있다.
하지만···.
[혜선아, 어린애처럼 왜 이래? 그분한테만 잘 보이면 네 구질구질한 인생도 확 핀다니까?]
[김 실장님, 저는···.]
[인마, 너 그분이 누군지 알아? 신영 패션 사장의 처남이야. 신영 패션 사장이 누군지 알지? 신영 그룹 부회장의 아들이야. 곧 신영 그룹을 물려받을 거라고!]
[아무리 그래도···.]
[너 배우가 꿈이랬지? 신영 그룹 후광만 얻으면···. 당장 톱스타도 될 수 있어.]
[······!]
[그러니까 다음번엔 실수하지 말고···. 알았지? 그분도 한 번 더 기회를 준다니까. 알겠지?]
[······.]
···박민희한테 말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짓된 미소를 지으며···.
“네, 언니. 신경 써줘서 정말 고마워요.”
···마음속으로는 구해달라고 소리쳤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그녀는 천천히 옛 기억을 떠올렸다.
.
.
.
최혜선은 어렸을 때 ‘연금술사’라는 책을 읽고 이런 생각을 했다.
‘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 꿈을 위해 사는 사람은 인생이 풍요롭고 행복할 거야.’
그래서 결심했다.
‘힘들더라도 꿈을 위해 살 거야.’
어떤 꿈이 좋을까 고민했고, 우연히 TV에서 방영하는 ‘검은 미로의 숲’이란 드라마를 보게 됐다.
그리고 한 배우에게 매료됐다.
『바둑판 위로 뻗어지는 섬섬옥수.
새하얀 돌들이 가득 한 바둑판에 검은 돌 하나가 놓아지더니···.
[이번엔 악수(惡手)를 뒀네.]
그리고 한 여인이 등장했다.
강렬한 눈빛으로 바둑판을 쏘아보며···.
[아니면, 이것도 포석(布石)인가? X···.] 』
바로, 드라마의 주인공 임혜령 배우였다.
그녀는 작은 극단에서 활동하던 연극배우였는데, 천재 작가와 만나서 재능을 꽃피워 세계적인 배우로 성장했다.
‘나도 임혜령 배우처럼 되고 싶어···!’
그래서 최혜선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극단에 들어갔다.
임혜령처럼 되기 위해···.
그녀와 똑같은 환경에서 시작해서···.
‘최고의 배우로 성장하는 거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깨달았다.
‘연극배우가 배고픈 직업이구나···.’
흔히들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연극배우는 TV, 영화에 출연하며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배우들과 처지가 달랐다.
단원들은 대부분 배우의 꿈을 이어가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면 걱정 없겠지만···.
일용직 노동자인 아버지와 식당 주방에서 일하는 어머니는 오빠들의 학비를 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때 포기할까 했지만···.
[꿈을 위해 사는 사람이, 꿈을 망각하고 사는 사람보다 행복해.]
···그런 생각이 들어서 어쩔 수 없이 편의점, 택배, 식당을 비롯한···.
온갖 아르바이트를 했다.
힘들었지만···.
‘무대에 올라 연기만 할 수만 있다면···.’
이런 고생쯤은···.
‘임혜령 배우처럼 될 수만 있다면···.’
괜찮았다.
‘계속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성공할 수 있을 거야···.’
그랬는데···.
[혜선이 쟤는 참 바보 같아. 저렇게 궂은일 다 해봤자 무대에 서지도 못할 텐데···.]
[단장님이 XX대 출신만 주연으로 쓰는 거 모르나?]
[연기 백날 잘해봤자 뭐해. 인맥이 없으면···.]
[그래도 얼굴 반반하니까 단장 비위만 잘 맞추면···.]
[그래봤자 단장 애인밖에 더 되겠냐? XX대 출신이 아니면 절대 무대에 못 올라.]
노력과 열정만으로 꿈을 이루는 건 판타지였다.
필요한 게 너무도 많았다.
학연, 지연, 혈연···.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이 악물고 더 노력해보자.’
그러다가 집 근처 정육점 개업 행사에서 광고판을 들고 춤을 추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어릴 때부터 춤만큼은 자신이 있어서 음악에 맞춰 아주 신나게 흔들어댔는데···.
[안녕하세요. RT 엔터 김호성 실장이라고 합니다.]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치어리더들을 관리하는 회사라고 했다.
계약금에 흔들리기는 했지만···.
거절했다.
‘내 꿈은 배우니까.’
하지만 그때···.
[혜선아···. 네 아빠 어쩌면 좋니···.]
[미안하다···. 아빠가 이런 꼴로···.]
아버지가 공사 현장 삼층에서 떨어져서 크게 다쳤다.
어마어마한 수술비와 입원비가 발생했다.
다행히 부모님이 모아둔 돈으로 어찌어찌 해결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 간호를 위해 식당을 그만뒀다.
그리고···.
[이번에 어학연수를 가야 하는데···.]
의대에 다니는 큰오빠와···.
[나 이번 주까지 학원 등록이야! 빨리 돈 줘!]
명문대를 목표로 삼수에 도전하는 작은오빠···.
두 사람의 뒷바라지는···.
[혜선아, 엄마가 정말 면목이 없는데···. 너 혹시 모아둔 돈 좀···.]
[엄마, 알았어. 내가 어떻게든 마련해볼게.]
···최혜선의 몫이 됐다.
누군가 그랬다.
꿈은 이기적인 거라고.
남의 꿈을 짓밟아야만 본인의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하지만 그녀는 이기적이지 못했고···.
가족을 위해 꿈을 포기했다.
그렇게 극단을 그만두고···.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명함을 받은 최혜선이라고 하는데요···.]
···RT 엔터와 계약했고, 치어리더가 됐다.
왠지 모르겠지만 점점 꿈에서 멀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포기하면 가족들이 전부 불행해질 테니까.
‘큰오빠가 의사가 되고, 작은오빠가 한국대에 진학하면···. 나도 다시 배우의 꿈을···.’
그러던 어느 날, 신영 패션 김태한 실장과 만났다.
[혜선아, 인사드려. 김태한 실장님이야. 네가 마음에 들어서···.]
그녀는 생각했다.
세상은 왜 이렇게···.
[혜선아, 김태한 실장님이 너한테 주는 폰이야. 연락오면 무조건 받아. 알겠지?]
[표정 좀 풀어. 김 실장님이 네가 동생 같고 그러니까 친해지려고···.]
[야! 너 왜 김태한 실장님 연락씹었어!? 미쳤냐?!]
‘나를 힘들게 하는 걸까?’
가족도, 일도, 꿈도···.
‘다 포기하고 싶어···.’
.
.
.
타이탄스 단장실.
한수는 강덕수가 조사해온 최혜선에 대한 자료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김태한 얘가 최혜선한테 개수작을 부리고 있단 말이지?”
“한번 작업을 걸려고 했는데, 최혜선이 도망쳐서···.”
“설명은 됐고. 근데 김태한이 왜 실장이야? 이 자식 차장 아니었어?”
“얼마 전에 기획 홍보 실장으로 승진했습니다.”
“내 땜빵?”
“네.”
한수는 혀를 차며 말했다.
“이재수 이 자식은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 없나?”
“안목 문제가 아니고···. 아마 부인되시는 분의 입김 때문에···.”
“하긴 형수가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니긴 하지. 더군다나 나한테 비자금까지 털렸으니, 형수한테 더 빌빌거리고 있겠네.”
“어쩌시겠습니까? 김태한, 처리할까요?”
“노우~. 노우~.”
한수의 대답에 강덕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최혜선을 영입하려면 김태한을 먼저 처리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인마, 우리가 배트맨이냐?”
“······?”
“우선순위를 생각해야지. 김태한 처리하고 최혜선이 입 싹 닦으면? 그냥 자원봉사 한 게 되잖아!”
“아···.”
한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김태한 처리해주는 대가로 전속 치어리더가 되게 만들어야지. 타이탄스에 뼈를 묻게! 흐흐.”
“역시 구단주님은 대단하십니다.”
“당연한 소리 그만하고 RT 엔터에 연락해서 최혜선, 박민희랑 약속 잡아!”
“네!”
그리고 삼일 뒤, 한수는 RT 엔터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