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 과연 내 공을 칠 수 있을까?
타이탄스 1군의 애리조나 스프링캠프는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오늘은 2차 청백전이 있고, 내일은 휴식.
이틀 뒤에는 2차 스프링캠프가 있는 일본 오키나와로 출발한다.
관중석에 앉아 2차 청백전을 구경하던 한수는 옆에 앉은 이소희에게 물었다.
“오늘도 내기할래요?”
“또, 밥 한 끼 인가요?”
“그럴 생각이긴 했는데···. 원하는 조건이라도 있어요?”
이소희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소원권 어떠세요?”
“소원권? 에이~ 난 그런 두루뭉술한 건 싫은데. 그냥 원하는 게 있으며 말해요.”
“그럼 그냥 밥 한 끼로 해요.”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이렇게 빼기 있나?”
“딱히 원하는 건 없습니다. 그저 밥 한 끼가 너무 약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이 팀장, 도박 좋아해요?”
“······.”
그녀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평소처럼 차분한 표정으로 경기장을 응시할 뿐이었다.
한수는 피식 웃더니,
“그래서 어디가 이길 거 같아요? 먼저 골라요.”
“백팀입니다.”
“오늘도 백팀이네. 하얀색을 좋아하는 건가?”
“데이터에 따른 선택입니다.”
“오케이. 그럼, 난 청팀으로 하죠.”
“백팀을 고르셔도 됩니다.”
“아냐, 아냐. 이 팀장한테 먼저 고르라고 했는데, 그럴 순 없지. 흐흐.”
“······.”
이소희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는 한수를 보며 묘한 눈빛을 했다.
문득, 옛 추억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이소희는 한수보다 훨씬 키가 훨씬 컸다.
그래서 한수는 그녀를 누나로 착각해서 잘 따랐고, 종종 어울려서 놀았다.
그날은 처음으로 야구를 함께 했던 날이다.
[누나, 뭐 할 거야?]
[투수.]
[에? 나도 투수하고 싶은데···.]
[그래? 그럼, 네가 투수해. 내가 포수 할게.]
[···아냐. 그럴 순 없지. 누나한테 먼저 고르라고 한 건 나잖아. 내가 포수 할게.]
[포수 할 수 있어?]
[우리 아빠도 포수잖아. 나도 재능 있겠지.]
그날 한수는 그녀의 폭투에 얼굴을 맞고 쌍코피를 터뜨렸다.
하여튼!
추억에서 벗어난 이소희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자기가 한 말을 지키는 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네.’
그때 한수가 말했다.
“이 팀장 왜 웃어? 혹시 내기 승리를 확신한 웃음 뭐 그런 건가?”
“아닙니다. 그냥···. 동생 생각을 잠시···.”
“동생을 생각하면서 웃음이 나온다고? 이야~ 신기하네. 난 동생만 생각하면 열불이 치미는데···.”
“······.”
그녀는 뭐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은 뒤,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청팀과 백팀의 타자는 지난번과 같았다.
하지만 투수는 달랐다.
청팀 선발은 기용찬이었고, 백팀은 찰스 스팅이다.
둘 다 좌완 투수이고, 강속구를 던진다.
기용찬은 95마일에서 99마일을 넘나드는 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만을 던졌다.
찰스 스팅은 포심과 투심과 함께 체인지업을 섞어서 던졌다.
두 사람은 3회까지만 던졌다.
기용찬은 단 하나의 안타도 허용하지 않고 완벽한 피칭을 펼쳤다.
반면에 찰스 스팅은 이소호에게 1점 홈런을 맞았다.
[청팀 1 : 0 백팀]
그리고 4회 초.
청팀에서 중계 투수로 한병도를 올렸다.
그는 성격이 불같아서 사람들과 마찰이 잦기는 했지만, 트리플스 필승조 출신답게 좋은 피칭을 선보였다.
그는 5회 초에 3번 타자 손재현한테 안타를 맞고, 4번 타자 윤진호한테 홈런을 맞았지만, 무너지지 않고 6회 초까지 마운드를 책임졌다.
백팀은 4회 말에 전예준을 올렸다.
지난번 청백전에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선발 출전을 포기했지만, 오늘은 컨디션은 최고였다.
그는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투수답게 80km/h의 초저속 폭포수 커브를 선보였다.
찰스 스팅의 강속구에 적응했던 타자들 전예준의 공에 적응하지 못하고 헛스윙을 남발했다.
전예준은 무실점으로 6회 말을 마무리했다.
[청팀 1 : 2 백팀]
그리고 7회 초.
청팀은 우완언더 김태규를 마운드에 올렸다.
‘타이탄스 TV’로 시청하던 팬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청팀이 지겠네.
└15연패 투수를 왜 올리나···.
└청백전에서라도 던져야지···.
└애초에 김태규가 어떻게 1군 스프링캠프에 낀 건지 모르겠음.
└방출 안 된 게 신기함.
└이한수 구단주랑 개인적인 친분이 있나?
└이 구단주가 친분 때문에 실력 없는 선수 놔둘 사람은 아님.
└설마 김태규도 부활한 건가?
└쟤 33살임. 에이징커브가 올 나이임.
└수술까지 했으니···. 답 없죠.
└토미 존의 경우도 있으니.
└15연패 김태규랑 토미 존이랑 비교하네. ㅋㅋ
└그리고 얘는 손목 수술임. 팔꿈치가 아니고 ㅋ
└야알못 왜 이렇게 많음?
하지만 김태규는 예상 밖의 피칭을 선보였다.
언더핸드 스로 투수 공은 일반적인 투구보다 느리다.
하지만 김태규의 공은 느리지 않았다.
-휘이이익!
-퍼어억!
무려, 87마일을 넘나드는 빠른 공이 뱀처럼 포수의 미트에 꽂혔다.
└뭐냐? 방금 김태규가 던진 거 맞음?
└구속 뭐임?
└공이 뭔 뱀처럼 날아가네.
└와···.
└김태규···. 33살에 부활하나요?
└토미 존 서저리 수술받은 선수 중에 구속이 오른 경우가 있다고 들었음.
└윗님. 김태규는 팔꿈치가 아니고 손목 수술했음.
└알지도 못하고 지껄이는 놈들 많네 ㅋ
└겨우 한 번 던짐. 좀 더 지켜보자.
김태규는 7회 초에 올라온 하위타선 타자 셋을 전원 삼진으로 잡아냈다.
타이탄스 TV로 시청하던 팬들은 환호했다.
└태규 부활 가나요?
└김태규 공 완전 마구 아님?
└포심이랑 투심, 슬라이더만 던짐. 높이가 달라서 그렇게 느껴진 듯. 김태규가 장착하고 있는 구종은 더 다양한데···. 오늘은 몸풀기인 듯.
└태규가 팔 년 전까진 XX 잘 던졌지.
└청팀, 이번에 이소호부터니까. 점수 내면 태규가 9회까지 막아줄 듯.
└전예준 느린 공에 좀 적응했겠지.
└전예준 내릴 거 같은데?
└그럼 누가 올라오나? 양창진인가?
└저번에 던져서 새로 영입한 외인 투수 시험할 듯.
그리고 그때···.
백팀 감독을 맡고 있던 QC 코치 박동준은 콜록콜록 기침하며 흐르는 콧물을 손수건으로 닦더니, 불펜 코치에게 물었다.
“임 코치님, 은수 준비됐죠?”
“그렇긴 한데···. 카를로스 말고 은수로 올리려고?”
“은수가 부탁하더라고요. ST 위닝스 라이언 킴 투수가 던지는 걸 보고 자극을 받았는지···. 사람들한테 ‘진짜’를 보여 주고 싶다나 뭐라나···. 오늘 아침에도 숙소까지 찾아와서 귀찮게 굴어서요···.”
“음···. 괜찮으려나?”
“조금 이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담금질하는 것도 나쁘지 않죠.”
“아니, 내 말은 은수가 너클볼을 던진다는 게 알려지면···.”
박동준은 피식 웃더니,
“알려져도 상관없죠. 너클볼이 그런다고 칠 수 있는 공이 아니잖아요. 특히, 은수의 너클볼은···.”
“그건 그렇지. 알겠어. 그럼 민철이한테 너클볼 전용 미트 교체하라고 할게.”
“네~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7회 말.
백팀 마운드로 장은수가 올라왔다.
그리고 타이탄스 TV 시청자들은 난리가 났다.
└쟤는 누구임?
└여자인가?
└장은수? 어? 쟤 걔 아님?
└장은수면 그 XX네. 백으로 들어온 투수.
└미쳤네. 저놈 왜 올린 거?
└팬들 앞에서 실력을 증명하겠다 뭐 이런 건가?
└타자들이 일부러 배트 안 휘두를 수도 있어.
└청백전이니까 그럴 수도···.
└아···. 김이 확 빠지네···.
└타이탄스 미쳤네.
심지어 타이탄스 TV 채널을 이탈하는 시청자도 생겼다.
그만큼 장은수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이때 마운드에 오른 장은수는 생각했다.
‘···묘한 느낌이네···.’
왠지 모르게 즐거웠다.
심지어 긴장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때 타석에 백팀 6번 타자 강민수가 섰다.
얘기를 많이 나눠보진 않았지만, 좋은 눈을 가진 강타자란 건 알고 있다.
더불어, 쉽지 않은 상대라는 것도.
그 순간, 필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넌 타고난 투수야. 마운드에 오르면 내 말뜻을 이해할 거다.]
필 할아버지의 말은 정확했다.
그는 마운드에서 타자와 승부를 겨루는 게 너무나도 즐거웠다.
투수 중에는 자신이 던지는 공을 타자가 치면 어쩌니 걱정하기도 한다.
마운드의 새가슴이자 2군 페드로인 박종구가 그랬다.
하지만 장은수는 달랐다.
‘저 사람은 과연 내 공을 칠 수 있을까? 못 칠까?’
그가 던지는 마구, 너클볼.
그걸 상대가 칠 수 있을지 없을지가 궁금했다.
칠 수 있으면 상대랑은 이길 때까지 승부.
치지 못하면 내 승리.
뭐가 됐든, 생각만 해도 즐거웠다.
장은수는 공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이때 타석에 선 강민수는 히죽거리는 장은수를 보다가 포수 하민철에게 물었다.
“쟤, 괜찮은 거죠? 머리를 향해 던지는 건 아니겠죠?”
“던지면 잘 피해. 오케이?”
“······.”
동시에 장은수가 와인드업했다.
포수와 사인 교환은 없었다.
왜냐면 장은수가 던질 줄 아는 건 단 하나···.
너클볼뿐이니까.
-꽈드드득
강하게 쥔 공이···.
-휘이이익!
홈플레이트를 향해 날아갔다.
무회전 하는 공은 공기의 저항을 이겨내며 기묘한 무브먼트를 보였다.
강민수는 염철수가 장은수의 너클볼에 대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비가 날갯짓하며 날아오다가 먹잇감을 노리는 독수리처럼···. 정말 최고였어요!]
그러나 그의 눈에는···.
‘나비랑 독수리가 어딨다는 거야!?’
그는 장은수의 공이 보이지 않았고, 눈 딱 감고 배트를 휘둘렀지만···.
-후우우웅!
-퍼어억!
헛스윙했다.
“스트라이크!”
강민수는 미트에 잡힌 공과 장은수를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미쳤네. 진짜···.”
그날 강민수는 삼진으로 물러났다.
이어서 7번 타자 양동식, 8번 타자 박종구도 삼진.
8회 말에 올라온 9번 안종렬, 1번 서동진, 2번 오재근도 삼진으로 잡았다.
연속 삼진 여섯 개.
말도 안 되는 피칭.
타이탄스 TV 팬들은 난리가 났다.
└너클볼···. 실화냐?
└연속 삼진 여섯 개···. 대박이다.
└아무도 못 건드리네.
└어떻게 너클볼만 계속 던지지? 배짱 좋네.
└진짜··· 대박···.
└이한수 구단주님은 다 계획이 있으시죠?
└갓단주 이한수.
└경력도 없는 투수를 입단시킨 이유가 이거였네.
└누구한테 배운 너클볼인지 모르겠지만, ST 위닝스 라이언 킴보다 잘 던지는 거 같음.
└어떤 놈이 이한수 눈 의심했음?
└무슨 공포의 외인구단이냐? 너클볼러가 왜 나와?
└이러다가 자이로 볼이나 스크류 볼 던지는 놈도 나오겠음.
└그건 오바임.
└어쨌든 장은수 대박이네.
청팀의 김태규는 9회 초까지 호투하며 무실점으로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9회 말···.
점수는 여전히 2대 1로 백팀이 앞서는 상황.
3번 타자 김유빈을 삼진으로 잡았다.
칠 연속 삼진.
그리고 이때 4번 타자 이소호가 타석에 섰다.
장은수는 지난번 마무리 캠프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소호는 말했다.
[이긴 사람이 형님이 되는 걸로 하죠. 어떻습니까?]
세 번의 승부 중에 첫 번째는 이소호가 이겼고, 스프링캠프 전에 했던 두 번째 승부는 장은수가 이겼다.
이번이 세 번째다.
‘형님이 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질 생각은 없어!’
마운드에 오르자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았다.
이때 포수 하민철이 이소호한테 말했다.
“형, 이번에 지면 족보 꼬이는 거 아시죠?”
“······.”
“은수가 저보다 한 살 어린데···.”
“조용히 해. 집중 안 되잖아.”
“······.”
하민철은 이소호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해서 입을 꾹 다물며 생각했다.
‘은수한테 형이라고 부르고 싶진 않나 보네.’
그때 장은수가 와인드업했다.
초구는 스트라이크.
이소호는 생각했다.
‘전보다 구속이 올랐어. 진짜 귀신 같은 공이 됐네. 한 타석만으로 적응할 순 없겠어.’
이구는 바깥으로 빠져서 볼.
삼구는 애매했는데 스트라이크.
그리고 네 번째 공.
이소호는 생각했다.
‘이대로는 삼진···.’
믿을 건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감각 그리고···.
‘운!’
앞쪽 다리를 들었다가 배트 스윙과 함께 내리는 특유의 타격 자세가 펼쳐졌고···.
-따아아아악!
···공을 쳤다.
쭉쭉 뻗어간 타구는 그대로 관중석으로 넘어갔다!
홈런!
이소호는 주먹을 불끈 쥐며 달리기 시작했다.
장은수는 넘어간 타구를 보며 씁쓸한 표정으로,
‘졌네.’
하지만 곧 씨익 웃으며,
‘그래도 재밌네.’
그러면서 다음 타자와 승부를 기대했다.
‘장문원이었지. 트리플스와 연습 경기에서 사이클링히트를 했던···.’
장은수는 중얼거렸다.
“과연 내 공을 칠 수 있을까?”
그날 경기는 2대 2 무승부로 끝났다.
청백전이라 연장전은 안 했다.
장은수는 5번 타자 장문원을 삼진으로 잡아냈다.
7회부터 올라와 9회 말까지 삼진 여덟 개.
던진 공은 오로지 너클볼 하나뿐.
야구 커뮤니티는 난리가 났다.
더는 장은수를 욕하는 타이탄스 팬은 없었고, 그들은 장은수를 응원했고, 이한수를 찬양했다.
그리고 기대했다.
올해 타이탄스는 뭔가 다르다고···.
어쩌면···.
정말 어쩌면···.
└타이탄스 우승할지도 모르겠는데?
└염철수, 여은포, 장은수, 기용찬, 홍진철···. 보물들이 왜 이렇게 많냐?
└타자 중에도 보물 많음. 최민준, 김효철, 강민수, 장문원.
└이소호랑 윤진호, 오재근도 있음.
└용병들도 잘함.
└진짜 올해는 가을 야구 하는 거야?
└이건 우승 각인데?
└타이탄스 통합 우승 ㄱㄱ
└타이탄스 쓰리스타 ㄱㄱ
물론 다른 팀 팬들은···.
└ㅋㅋㅋ 지치지도 않는 꼴빠놈들.
└이맘때면 갈매기들이 항상 미쳐 날뛰죠.
└여름 되면 조용해지려나···.
└DTD 모르나?
└청백전 백날 잘해도 안 돼요.
└꼴빠놈들 대가리 속은 꽃밭인가?
└꼴빠 탈출은 지능 순이지.
타이탄스 팬들을 조롱하기 바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애리조나에서 개최된 1차 스프링캠프가 끝났고, 타이탄스 1군은 오키나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