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 꼭지 돌면 다 물어뜯습니다.
이창호 부회장과 한수가 만나기 몇 시간 전···.
이창호는 오키나와로 출장을 와서 일정을 마친 뒤 숙소로 복귀하고 있었다.
그때 호텔 입구에 붙은 현수막이 보였다.
[신영 타이탄스 스프링캠프 숙소]
‘스프링캠프···. 여기로 온 건가?’
그는 옆자리에 있던 비서에게 물었다.
“한수도 여기에 묵나?”
“확인해보겠습니다.”
이창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서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이 호텔에 묵는다고 합니다.”
“흠···.”
“연락해볼까요?”
“아냐, 공동 인터뷰에 대한 것도 생각해본다고 하곤 감감무소식인 걸 보면 의도적으로 날 피하는 게 분명해. 연락하면 숙소부터 옮길 거야.”
이창호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한수와 만나서 나눌 얘기가 있는 건 아니다.
아니···. 사실 있는지 없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그렇지만 한번은 만나야 한다.
“···직접 찾아가지.”
비서는 조금 의외라는 눈빛을 했다.
“그럼 식사는···.”
“이따 봐서.”
“네.”
이창호는 팔짱을 풀며 물었다.
“LT 그룹 심 회장이 타이탄스 그룹에 관심을 보인다고?”
이창호는 타이탄스는 빠르면 올해 말 늦어도 내년쯤 타이탄스 구단을 매각할 계획이다.
“네, 이호연 사장에게도 타이탄스에 관심이 있다며 매각할 수 있냐고 부탁했답니다. 그래서 이 사장이 이한수 구단주를 설득해서 이태백 회장님의 유언 집행을 적당히 마무리 짓고 LT 그룹에 매각하자는 의견을 낸 겁니다.”
“···호연이가 부탁 정도로 움직이진 않을 텐데···.”
이호연은 이창호의 여동생이다.
신영 백화점과 신영 푸드를 책임지고 있다.
작고한 이태백 회장도 두 손 두 발을 들 정도로 야망이 커서, 이창호 부회장의 최대 정적이다.
그녀는 오래전 큰형 이정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본인 몫이 줄어들 걸 걱정하며, 이창호에게 이정호를 함께 몰아내자는 제안도 했었다.
하여튼!
이창호는 생각했다.
‘심 회장한테 타이탄스를 매입하는 데 도움을 주는 조건으로 뭔가를 약속받았겠지.’
사실 이호연이 심 회장과 어떤 약속을 했든 간에 이창호는 타이탄스 구단을 팔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만년 꼴찌인 타이탄스가 신영 그룹 품격을 낮춘다고 판단했었으니까.
‘···얼마 전까지는 말이지.’
하지만···.
【아낌없이 주는 나무, 타이탄스 이한수 구단주】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한수 구단주의 수많은 선행】
【보여주기가 아닌, 봉사에 진심인 이한수 구단주】
한수가 부산의 거리를 청소하고 다니며, 생활고를 겪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요양원, 보육원 등을 다니며 봉사활동을 한다는 기사가 나오고···.
여론이 묘하게 흘러갔다.
└다른 재벌 3세들이랑 다르네.
└이태백 회장이 잘 가르친 듯.
└이태백 회장이 인물이긴 했지.
└이한수가 이 회장을 많이 닮은 거 같아.
└타이탄스가 야구는 XX 못하는데, 이한수 구단주 때문에 응원하고 싶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아버지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한 몸 바치는 모습이 너무 멋져.
타이탄스 덕분에 신영 그룹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아름다운 기업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이창호는 생각했다.
‘이 상태로 성적까지 좋으면 금상첨화인데···.’
이창호는 다시 입을 다물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찍이 있는 현수막에 붙은 갈매기 앰블럼이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그걸 지켜보던 그는 비서에게 재차 물었다.
“자네도 부산 출신이랬지? 야구 좋아하나?”
“네.”
“혹시···.”
“···타이탄스 팬 맞습니다.”
이창호는 팬이라면서 타이탄스 매각에 대해서 담담히 얘기하는 비서를 의외라는 듯 바라봤다.
그러자 비서는 빙긋 웃으며,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요.”
“자네답군.”
비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타이탄스를 매각하려는 계획을 철회하실 생각이십니까?”
“···고민 중이네. 한수 그 녀석이 잘해줘서 타이탄스 덕을 좀 봤어. 그리고 호연이 수작에 놀아나고 싶지도 않고···.”
“그렇군요···.”
비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재차 입을 열었다.
“비서로서 말고, 타이탄스 팬으로서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해보게.”
비서는 침을 꼴깍 삼키더니,
“···타이탄스 올해는 진짜 느낌이 좋습니다. 통합우승도 가능할지 모릅니다. 삼십여 년만 우승입니다. 그 효과는 엄청날 겁니다. 그러니까···.”
“타이탄스가 정말 우승할 거라고 보나?”
“네! 이번에 새로 영입한 선수들이 정말 엄청납니다. 그중에서 기용찬과 홍진철은 정말 KBO 최고의 보석입니다.”
“홍진철···. 기용찬···.”
“그뿐만이 아니고···.”
비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타이탄스가 우승할 수 있는 이유 주절주절 설명했다.
눈을 반짝이는 게 평소의 비서와 전혀 달랐다.
이창호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네가 이렇게 야구를 좋아하는 줄 몰랐군.”
“아···.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그럼, 비서로선 타이탄스를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저는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회장님이 내리신 결정을 이루기 위한 첨병일 뿐입니다.”
“자네 다운 대답이군.”
이창호는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일단 한수를 만나봐야겠군.’
= = = = = = =
그리고 다시 현재.
한수는 이창호 부회장이 타이탄스를 매각한다는 소리를 듣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뜬금없이 타이탄스 매각이 뭔 소리야!?’
“···꽤 질 나쁜 조크를 던지시네요”
“농담이 아니다. 빠르면 이번 시즌이 끝나는 대로, 늦어도 내년 겨울에는 매각할 예정이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이창호는 본심은 숨겼다.
한수는 인상을 찡그리며,
“···싸우자는 겁니까? 타이탄스 구단은 제 소유입니다. 그런데···.”
“너를 설득할 생각이었다.”
“설득? 하! 지나가는 개가 웃을 소리군요.”
“······.”
“아~ 이거 혹시 귀신 아닙니까? 작은아버지가 여기에 있을 리가 없으니까~! 아유, 무서워라~! 얼른 문을 닫···.”
“타이탄스 구단 제법 잘 키워놨구나. 잘했다.”
“······?”
한수는 이창호 부회장의 말뜻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잘했다고? 무슨 소리지?’
타이탄스가 잘 되면 이창호의 입장이 곤란해진다.
왜냐면 타이탄스가 통합우승을 하면 한수가 신영 군수와 신영 패션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한수는 이창호를 보며 생각했다.
‘무슨 꿍꿍이지? 뭘 잘했다는···.’
“네 덕분에 LT 그룹 심 회장이 간이며 쓸개며 다 내줄 정도 타이탄스를 원하고 있어.”
“······.”
한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이상했다.
그가 아는 이창호는 이런 사실을 말해줄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한수가 매각에 대한 걸 전혀 파악하지 못하게 정보를 통제한 다음 뒤통수를 때릴 인물이다.
한수는 생각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타이탄스 통합우승 같은 건 집어치우고 본사 기획 조정실로 들어와. 삼 년만 일을 배우며 원하는 계열사 사장으로 보내주마.”
“······!”
기획 조정실은 신영 그룹의 모든 계열사를 관리하는 핵심 기관으로 최고의 인재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동시에 이곳은 신영 그룹 후계자들이 후계자 수업을 하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타이탄스 통합우승을 포기하면···.’
“할아버지의 유산을 포기하는 겁니까? 하! 웃기지도 않는 소리 마십시오!”
“현실을 직시하라는 거다. 타이탄스가 통합우승이 가능하다고 보는 거냐? 그건 아버님이 노망이 나셔서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거다.”
“······.”
“패션은 너에게 넘기마. 군수는 포기해. 대신 보상을 약속하마. 부동산에 관심이 많았지?”
매혹적인 조건이다.
기획 조정실에서 삼 년만 고생하면 편하게 룰루랄라 해피라이프를 즐길 수 있는···.
한수가 바라던 삶.
사사건건 문제만 일으키는 타이탄스···.
시즌 시작도 안 했는데, 한숨만 나오는 이런 구단···.
훌훌 털어내고 다시 망나니 재벌 3세로···.
‘돌아갈 수 있어.’
그때 이창호가 손을 내밀며 물었다.
“대답은?”
한수는 그 손을 바라보며 고민하더니, 이내 대답했다.
“싫습니다.”
“······.”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러더라고요.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라고요.”
“······.”
“할아버지도 그러십디다. 사내대장부가 한 입으로 두말하지 말라고요.”
“그래서?”
“타이탄스 통합우승해서 유산 상속받고 재수 형 손에 장을 지진다! 이게 제 목표입니다.”
“······.”
“그러니까 개수작 부리지 마세요. 수틀리면 본사랑 백화점 다 엎어 버릴 겁니다. 저 미친 망나니 XX인 거 아시죠? 꼭지 돌면 다 물어뜯습니다.”
이창호는 한수의 협박을 받으면서도 무표정했다.
한수는 싸늘한 목소리로,
“제 경고···. 허투루 듣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리고는 문을 쿵! 닫아버렸다.
이창호는 문 앞에 서서 팔짱을 끼며,
“재수한테 이런 독기가 좀 있으면 좋겠는데···.”
그는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에게 물었다.
“내일 타이탄스 청백전이 있다고 했나?”
“네.”
“자네가 말했던 KBO 최고 유망주라는 홍진철이 선발이랬지?”
“그렇습니다.”
“경기 시간에 일정 비워놔.”
“이 구단주한테는···.”
“말하지 마. 조용히 경기만 보고 갈 거니까.”
“네!”
이창호는 말없이 몸을 돌려 걸어가며 생각했다.
‘형···. 형 없이 자란 한수가 아비 보고 자란 재수보다 의젓하네. 참 얄궂어. 그렇지?’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때 한수는 문을 닫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젠장···. LT 그룹 심 회장이 노린다고? 요즘 돈 좀 벌었나? 건방지게···.”
한수는 강덕수한테 전화를 걸었다.
“덕수야, LT 그룹 심 회장에 대한 X 파일 만들어.”
[X 파일이요?]
“약점 말이야. 약점.”
[LT 그룹 심 회장이면 철두철미한 분인데···.]
“인마, 일 한두 번 하냐?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XX가 어딨어? 그리고 없으면 만들어 내야지!”
[···꽤 오래 걸릴 거 같습니다.]
“최대한 서둘러. 돈 아끼지 말고. 오케이?”
[네!]
전화 통화를 끝낸 한수는 중얼거렸다.
“다시는 타이탄스를 노리지 못하게 해주 마.”
= = = = = = =
오키나와, 자람 빌런스 스프링캠프 숙소.
사자 갈기 같은 머리 스타일의 남자, 박은우는 침대에 누워서 스마트폰 게임을 하고 있다.
그는 지난 시즌 신인왕을 차지한 뛰어난 투수다.
한국 시리즈에서 신성 스페이스를 궁지로 몰아넣었던 것도 박은우의 호투 덕분이었다.
마운드 위에서는 카리스마가 넘치지만, 그 외에는 게임과 만화에 빠져 산다.
그때 까치머리를 한 까무잡잡한 피부의 남자, 김현성이 물었다.
“너 내일 주 코치님이랑 타이탄스 청백전 보러 간다며?”
“응.”
“정호 형한테 허락받았어? 훈련 빼먹는 거 싫어하잖아.”
“응.”
“···그런데 왜 가는 거야?”
“그냥 구경···.”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지만, 사실 여은포를 보고 싶었다.
박은우는 중학교랑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일본에서 지내다가 2학년 때 한국의 적벽 고등학교로 전학 왔다.
그리고 당시 고교 리그에서 활약 중이던 안민혁, 전예준 등의 투수들을 꺾고 고교 최고의 투수로 인정받았다.
마운드의 사자.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박은우가 고교 최고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고교 최강 투수는 여은포 아닌가?’
‘걔가 다시 마운드에 올라오면 박은우는···.’
‘박은우는 솔직히 여은포 하위 호환이지.’
‘하위 호환은 아니고···. 결이 달라. 물론 박은우가 하수라는 건 맞지만···.’
괴물 투수 여은포.
그의 존재가 항상 박은우를 가로막았다.
‘청백전 때보니까 제법 던지는 거 같았는데···. 전력이었나? 실제로는 어떨까?’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타이탄스 청백전을 관람하러 가는 거다.
박은우는 게임을 하는 손을 멈추며 중얼거렸다.
‘어서 내일이 됐으면 좋겠네···.’
그렇게 다음 날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