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 옴 마니 반메 훔.
타이탄스와 그리즐리스의 1차전 당일 아침, 타이탄스 숙소 대회의실.
단상에 선 장보형 투수 코치가 대회의실에 모인 1군 선수들에게 한수가 계획한 가족 초대 이벤트를 설명했다.
“···그럼, 일요일에 경기 때 경기장으로 가족을 초대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오늘 오후 2시까지 나한테 메시지 보내. 초대하기 싫은 사람은 안 해도 되고. 질문 있어?”
질문은 없었다.
이미 충분히 설명을 들었으니까.
장보형은 선수들을 훑어보고 말했다.
“그럼, 경기 전까지 컨디션 조절 잘하고···. 해산.”
장보형 코치는 나갔지만, 1군 선수들은 일어나지 않고 삼삼오오 모여서 떠들기 시작했다.
장보형 코치가 설명한 가족 초대 이벤트가 꽤 괜찮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일요일 경기 초대권만 주는 게 아니다.
선수들 가족들을 서울로 모셔오기 위한 개별 차량도 제공된다.
일정은 토요일 오전부터 일요일 경기 종료까지인데, 신영 호텔 서울 본점 숙박권, 최고급 레스토랑 이용권도 전부 무료였고, 경기 전에 서울 맛집 투어 일정도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가족이라면 몇 명이 됐든 초대해도 상관없다는 거다.
선수들은 생각했다.
‘아버지, 어머니랑 형, 누나네 식구들도 초대하고···. 아~ 할아버지, 할머니도 오시라고 해야겠다. 흐흐, 구단 덕분에 효자 소리 좀 들어야지.’
‘아내한테 장인어른, 장모님 모시고 오라고 해야겠네. 좋아하시겠어.’
‘가족들만 되나? 친구들은 안 되나?’
그때 제일 뒷자리에 앉아 있던 여은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학예회 하냐? 쪽팔리게 가족을 왜 불러. 이런 쓸데없는 이벤트 말고 돈으로 주지. 하여튼 구단주 그 인간 마음에 안 들어···.”
그러자 홍진철이 그를 지나치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돈이면 다 인 줄 아나?”
“뭐? 야, 너 방금 뭐라 했냐?”
홍진철은 발걸음을 멈추고 여은포를 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돈이면 다 인 줄 아냐고 했습니다.”
“이 자식이···. 야! 그게 선배한테 할 말이냐?”
“할 말 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사건건 구단주님 까는 것 좀 그만하시죠.”
“구단주를 욕하든 말든 뭔 상관이야? 내 주둥이로 마음대로 떠들지도 못하냐?”
“구단주님이 싫으면 왜 우리 팀에 있는 겁니까? 괜히 팀 분위기 망치지 말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세요.”
“하! 이런 XXXX를 봤나···?”
“욕하지 마시죠.”
“뭐···.”
지켜보고 있던 주장 문희동이 인상을 쓰며 일어서려는 순간, 안종렬이 재빠르게 둘 사이에 끼어들더니 으름장을 놨다.
“마! 하늘 같은 선배님들 계신 데 어디서 쌈박질이야. 쌈박질은! 쌍팔년도식으로 몽둥이찜질 좀 할까?!”
“······.”
“······.”
두 사람이 입을 다물자 안종렬은 홍진철한테 도끼눈을 뜨며,
“홍진철!”
“···네, 선배님.”
“여은포가 네 친구냐?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그렇지 지킬 건 지켜야지! 태도가 왜 그래? 선배가 우스워?”
“···죄송합니다.”
“다음에 또 이러면 선발이고 나발이 국물도 없어!”
“···네.”
여은포는 홍진철이 고개를 푹 숙이자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낄낄 웃었다.
그러자 안종렬이 여은포에게 버럭 소리쳤다.
“마! 뭘 잘했다고 쪼개?”
“어? 그게···.”
“너 XX···. 내가 적당히 하랬지? 구단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배려해주시는데···. XX가 은혜도 모르고···!”
“나는 그냥···.”
그때 안종렬이 여은포에게 다가가서 속삭였다.
“너 자꾸 이러면 최혜선 치어리더가 구단주 좋아하는 거 때문에 네가 구단주한테 졸렬하게 군다는 사실 다 말한다.”
“아니, 형! 그건···.”
“그게 싫으면 제발 주둥이 좀 함부로 놀리지 마.”
“······.”
결국, 여은포도 고개를 푹 숙였다.
안종열은 윤진호를 비롯한 이소호, 김태규, 양창진 등의 선배들을 향해 말했다.
“선배님들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 두 놈은 제가 데려가서 잘 타이르겠습니다.”
선배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안종렬은 두 사람을 데리고 대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이어서 다른 선수들도 하나둘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사람···.
대회의실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장문원이었다.
그는 장보형 코치의 설명한 가족 초대 이벤트에 대해 듣고 난 뒤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며 생각했다.
‘엄마, 일요일에 시간 되시려나?’
장문원은 엄마는 직장인이다.
토요일엔 종종 출근하지만, 일요일에는 확실히 쉰다.
그는 엄마한테 보낼 톡 메시지를 적다가 멈칫했다.
“······.”
그러더니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평일 내내 고생하셨을 텐데···. 주말엔 쉬게 해드리자. 괜히 번거롭게 하지 말고···.’
“···괜한 생각 말고 경기에 집중하자. 경기에.”
그리고···.
신영 타이탄스와 두성 그리즐리스의 1차전 경기가 시작됐다.
= = = = = = =
분당, 판교의 어느 대형 호프집.
금요일 퇴근 시간대라 직장인들이 많이 보였다.
지인들끼리 모인 그룹도 있었지만, 주변에 회사들이 많아서 회식 중인 사람들도 많았다.
장문원의 엄마, 김은혜도 회사 직원들과 회식을 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회식을 강요하는 문화를 없애는 추세라 다른 때 같았으면 김은혜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고 빠졌을 거다.
오늘은 얼마 전에 새로 온 팀장을 환영하는 자리여서 빠질 수가 없었다.
새로 온 팀장은 회사 대표의 대학교 후배로, 대표가 애걸복걸해서 간신히 스카우트해온 뛰어난 인재···.
회사의 중역이 될 게 확실하니, 다들 어떻게든 잘 보이려는 거지만···.
김은혜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회사에 다녔던 이유는 장문원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야구 선수가 꿈이었던 아들.
간신히 트리플스 2군에 입단했지만, 거기서도 경기 한 번 출전하지 못하는 만년 후보···.
그녀는 장문원이 야구로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고, 아들이 야구를 그만뒀을 때를 대비했다.
대학교에 가고 싶다면 학원부터 대학교 등록금을, 직장을 다니고 싶다면 취업을 위한 공부를, 장사가 하고 싶다면 장사 밑천을···.
그런데 장문원이 타이탄스 1군이 되더니···.
[구단주님께서 나를 좋게 봐주셔서 계약 연봉을 굉장히 높게 책정해주셔서···. 엄마, 나 앞으로도 열심히 할 거니까. 일 그만두고 부산으로 내려와서···.]
···떡상했다.
사실 그때 ‘아들 말대로 할까?’라고 고민했지만, 두 다리 멀쩡한데 아들 덕 보고 산다는 게 왠지 민망해서 거절했는데···.
새로 온 팀장에게 굽실거리는 직원들 모습을 보니···.
‘그냥 그만둘까?’
···이런 생각이 마구 들었다.
그녀는 힐끔 시계를 보며 생각했다.
‘경기 시작했겠네···. 오늘도 출전한다고 했는데···.’
요즘 그녀는 프로야구를 꼬박꼬박 챙겨본다.
처음에는 아들이 출전하는 경기만 볼까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야구에 흠뻑 빠져 버렸다.
일과 아들 키우기에 바빴던 그녀에게 처음 생긴 취미였다.
그러나 회식 자리는 쉽게 끝날 거 같지 않았다.
김은혜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재방으로 보는 건 재미없는데···. 그냥 갈까?’
슬그머니 핸드백을 챙기려는데, 호프집 사장이 대형 벽걸이 TV로 다가가더니 타이탄스와 그리즐리스 1차전 경기가 방영하는 채널을 틀었다.
김은혜는 활짝 웃으며 생각했다.
‘사장님, 나이스!’
그녀는 회식은 신경 쓰지 않고 경기를 시청했다.
[1회 말, 2아웃 주자 3루. 그리즐리스의 공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타석에는 4번 타자 임재환. 찰스 투수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공이 자꾸 높게 들어갑니다. 오늘 컨디션이 별로 인가요?]
[글쎄요. 스페이스와의 2차전에서도 아슬아슬한 경기력을 보여주긴 했거든요···.]
[찰스 선수, 이럴 때일수록 긴장해야 합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투수 와인드업···!]
중계진의 말에 김은혜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찰스 선수, 오늘 컨디션이 안 좋나? 타이탄스가 지면 안 되는데···.’
그녀는 휴대폰으로 경기와 관련된 기사들을 찾아서 1, 2, 3번 타자 때 경기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확인하고 밑에 달린 댓글을 확인했다.
└마! 찰스야! 정신 몬 차리나!?
└찰스 형! 해운대 모래사장에 대가리 박아 봐야 정신을 차리나!?
└1회부터 왜 이래? 불안하게···.
└타이탄스야···. 12연승 해야지···. 제발 연승 기록 세우자···!
└찰스 형 이러면 안 돼···.
└마! 찰스야! 이 악물고 던져라!
그녀는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그리즐리스 4번 타자 임재환이 찰스 스팅이 던진 공을 쳤다.
김은혜는 움찔하며,
‘안 돼!’
TV 스피커를 통해 중계진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임재환 쳤습니다! 큽니다! 커요! 우중간을 가르며 쭉쭉 날아가는 공···!]
[우익수 달립니다! 장문원 달립니다!]
[잡을 수 있나요? 잡나요? 장문원···! 장문원···!]
김은혜는 두 손을 꽉 쥐고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문원아, 잡아. 잡아. 잡아···.”
그 순간,
[아~! 잡았습니다!!!]
[장문원! 정말 나이스 수비였습니다!]
[대단한 수비였어요. 이건 홈런을 친 거나 마찬가지예요.]
[장문원 선수, 타격이면 타격, 수비면 수비. 정말 못 하는 게 없는 선수네요!]
[찰스 투수, 장문원 선수에게 손가락 하트를 보냅니다. 장문원 선수 쑥스러워하네요.]
[1회 말, 점수는 0대 0으로 마무리됐습니다. 이어서 2회 초, 타이탄스의 공격은 4번 타자 이소호부터···.]
김은혜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생각했다.
‘잘했어. 우리 아들! 최고야!’
그녀는 히죽 웃으며 맥주를 쭉 들이켰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경기장에 직접 가볼까?’
인터넷에 올라온 글 중에 야구 경기장에서 먹는 치맥이 최고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음···. 일요일에 가는 걸로 하고···. 표는 인터넷으로 예매하면 되나?’
“아~ 문원이한테 부탁해볼까?”
그때 직원이 한 명이 그녀에게 물었다.
“김 대리님, 팀장님께서 일요일에 팀 단합 겸 등산을 하자고 하시는데···. 김 대리님도 오실 거죠?”
김은혜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못 가요.”
= = = = = = =
서울 잠실 경기장.
한수는 VIP 좌석에 앉아 그리즐리스와 1차전 경기를 보고 있었다.
8회 초, 점수 차는···.
【신영 타이탄스 10 : 7 두성 그리즐리스】
···타이탄스가 앞서고 있었고, 문희동 투수가 올라와서 그리즐리스 타자를 봉쇄하고 있어서 무난하게 승리하는 분위기였고···.
경기는 결국 점수차를 유지한 채 타이탄스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한수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찰스 스팅의 오늘 그리즐리스 타자들한테 홈런을 세 방이나 맞고 3회에 5실점을 하고 조기 강판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장문원의 호수비와 클린업 트리오의 대활약 그리고 불펜 투수들 덕분에 경기는 잡았지만···.
‘흠, 찰스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나?’
페르난도 킴 감독한테 찰스 스팅이 어떤지 물어볼까 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한 달에 한 번 선수들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Diamond 등급 스킬 ‘옴 마니 반메 훔’이었다.
한수는 포수 마스크를 쓰며 중얼거렸다.
“옴 마니 반메 훔. 누가 재채기를 했어?”
그 순간, 그의 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