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 허락해주실 수 있나요?
트리플스 1번 타자는 홍창우는 출루율이 높았다.
테이블세터에 어울리는 타자였다.
하지만 그것도 공을 칠 수 있을 때 얘기다.
-휘이이익!
-퍼어억!
“···스트라이크!”
심판의 판정을 들은 홍창우는 “미친···.”이라고 중얼거리며 마운드에 선 염철수를 쳐다봤다.
염철수의 투심 패스트볼을 겪은 타자들이 왜 염철수를 ‘도깨비’라고 부르는지 깨달았다.
140km 초반대의 공인데, 무브먼트가 더러워서 공이 어디로 날아올지 파악이 안 됐다.
영상 자료를 통해서 염철수의 공을 눈알이 빠지도록 봤는데, 타석에 서서 직접 마주해보니,
‘이건 예습을 한다고 칠 수 있는 게 아니네. 이러니 안타를 친 타자가 한 손에 꼽지.’
그때 염철수가 다시 와인드업했다.
홍창우는 배트를 꽉 쥐며 생각했다.
‘커트라도 하면서 투구 수를 늘리는 거야. 그럼 운 좋게···.’
날아오는 공을 향해 배트를 가볍게 뻗었다.
그러나 공이 갑자기 크게 휘어졌다.
‘스, 슬라이더···!’
“스트라이크 투!”
홍창우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미쳐버리겠네. 진짜.”
결국 그는 삼진 아웃을 당했다.
이어서 2번 타자 박해진도 삼진.
그리고 타격 기계라고 불리는 3번 타자 임현수는···.
-따아악!
[임현수 쳤습니다만···. 염철수 투수 뜬공을 가볍게 잡아내는 염철수!]
[임현수 선수는 표정이 좋지 않네요.]
[장타력이 좋은 선수인데, 노리고 친 공에 밀렸거든요. 자존심 강한 선수여서 기분이 많이 상했을 겁니다.]
[염 선수 구위가 그만큼 뛰어나다는 거죠.]
[네, 그렇군요. 자~ 타이탄스와 트리플스의 경기 1회 초는 염철수 투수 덕분에 안전하게 지나갔습니다. 이제 2회 초···. 마운드에는 테일러 윈스 투수, 타석에는 1번 타자 김유빈···.]
김유빈은 타석에 서서 테일러 윈스 투수를 쳐다보며 며칠 전 아버지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찾으러 갔다가 사고를 당했고, 정신을 차렸을 때 한 달 가까이 지나서 뒤늦게 그를 찾았지만···.
‘···다리를 다쳐서 짐만 될 아비는 없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유빈은 아버지가 참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상처였지만,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간신히 만나 아버지다.
함께 행복하게 살기도 부족하니까.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어려워.’
그가 사는 곳은 작은 오피스텔이다.
‘휠체어를 타고도 편하게 지내시려면 단독주택이 낫겠지? 아니야, 좋은 아파트 같은 곳도···.’
그러기 위해선···.
‘성공해야 해.’
상념을 끝내고, 눈에 힘을 줬다.
그 순간, 테일러 윈스 투수가 와인드업했다.
날아오는 공이 두 눈에 또렷하게 보였다.
저 공을 치면 성공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다.
그러면···.
‘아버지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어···!’
“흐으읍!”
강하게 휘두르고···.
-따아악!
···달렸다.
그리고···.
“세이프!”
···성공에 한 발 더 다가갔다.
2루 베이스에 선 김유빈은 환하게 웃었다.
[아~ 김유빈 선수 깔끔한 2루타를 성공시키네요.]
[사실 비거리가 조금 애매했거든요? 그런데 김유빈 선수의 주력이 워낙 빨라서 2루타가 됐습니다.]
[정확히 측정은 안 해봤지만···. 김유빈 선수의 주력은 KBO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거 같습니다.]
[자~ 테일러 투수 긴장해야 합니다. 김유빈 선수는 도루를 무척 잘하거든요.]
[자, 타석에 2번 타자 오재근···.]
= = = = = = =
VIP 관중석.
한수는 김유빈이 2루로 출루하자 박수를 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컨디션이 아주 좋은 거 같네? 김준재 그 양반이랑 얘기가 잘 풀렸나 보군. 흐흐.’
그때 옆자리의 심연주가 물었다.
“한수씨, 김유빈 선수랑 자리 좀 마련해줄래요?”
“왜요?”
“우리 LT 소프트에서 이번에 게임을 하나 출시할 예정인데, 메인 광고 모델로 쓰고 싶어서요. 달리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라···.”
“시즌 중엔 광고 모델 금지입니다. 그 시간에 훈련 한 번을 더 해야지.”
그러자 심연주가 ‘과연~!’이란 표정으로 수첩을 꺼내 뭔가 메모하기 시작했다.
한수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이 정말 재능 99%라고···?’
LT 그룹 기획 실장이자 심 회장의 심복이니 능력이 있는 건 알겠지만, 하는 행동을 봐서는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때 심연주가 경기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멀리 날아가요!”
한수가 고개를 돌리자 2번 타자 오재근이 친 공이 쭉쭉 날아가고 있었다.
힘이 부족해서 홈런은 나오지 않았지만, 김유빈과 오재근은 발이 무척 빨랐다.
[김유빈 홈으로 들어옵니다! 이어서 오재근 선수도 3루로···.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오재근 선수, 친정팀에 비수를 꽂습니다!]
[이야~ 트리플스···. 속이 정말 쓰리겠는데요?]
[오재근의 타격력이 살아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래서 야구가 재밌는 겁니다.]
[그렇군요. 말씀드리는 순간, 3번 타자 손재현 선수가 타석에 섭니다.]
[테일러 투수 긴장해야 합니다. 손재현 선수는 타고난 슬러거예요.]
1회 말.
타이탄스가 1점을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한수는 입꼬리를 올렸다.
‘오재근이 한 건 해줬군. 팬들이 더 즐거워하겠어. 흐흐.’
“한수씨,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대답하기 귀찮았다.
하지만 재능 99%인 걸 확인하고 나니 조금 잘해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LT 그룹 회장 손녀라 프런트로 데려올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말이다.
“뭔데요?”
“염철수, 김유빈, 오재근 그리고 지금 타석에 선 손재현까지···. 전부 한수씨가 데려온 선수죠?”
“맞습니다.”
“어떻게 찾아낸 거예요? 저런 인재들?”
“······.”
“오재근을 제외하곤 다른 팀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별 볼 일 없는 선수들이잖아요. 한수씨는 저 사람들의 재능을 어떻게 알아본 거예요?”
전부 ‘최고의 구단주 가이드’ 덕분이다.
하지만 그걸 말할 순 없다.
한수는 피식 웃으며 다리를 꼬더니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별거 아닙니다. 내 안목 무척 뛰어난 덕분이죠.”
“안목이요? 그러면 한수씨는 선수를 보면 누가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보인다는 말인가요?”
“물론.”
“어떤 식으로 보이는 거예요?”
“그건 몰라도 됩니다.”
“음···. 궁금한데···.”
그때였다.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한수와 심연주는 동시에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높이 뜬 타구가 쭉쭉 날아가더니···.
관중석으로 넘어갔다.
한수는 벌떡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좋아! 잘했어!”
심연주는 그런 한수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안목이라···. 재밌는 사람이네.’
= = = = = = =
[홈~ 런~! 손재현 선수 홈런입니다!]
[이야~! 정말 시원한 홈런입니다. 아주 편안하게 공을 넘겼어요.]
[그리즐리스 이성현 감독의 전성기가 떠오르는 부드러운 스윙이었습니다. 그만큼 손목 힘이 뛰어나다는 소리거든요.]
[테일러 선수, 정신 차려야 합니다. 타이탄스 타자들은 한번 기세를 타기 시작하면 무섭거든요.]
1회 말···.
【신영 타이탄스 3 : 0 엔젤 트리플스】
···타이탄스는 점수 차를 더 벌리기 시작했다.
타석에는 4번 타자 이소호.
그는 2루타를 치며 출루했고, 이어지는 윤진호가 안타를 치며 무사 주자 1, 3루 상황을 만들었다.
타석엔 6번 타자 장문원이 섰다.
장문원은 장비를 점검한 뒤 차분하게 호흡하며 자세를 잡았다.
그는 마운드에 선 투수를 바라보다가 어젯밤에 엄마와 나눴던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문원아, 엄마 타이탄스 프런트에서 일하게 됐어.]
[저, 정말?]
[응, 구단주님께서 마케팅팀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해주셔서···.]
[아···.]
[그래서 부산에 새로 집을 구할 건데···.]
[나도 돈 보탤게! 같이 살자!]
[···그래. 좋아. 근데 돈은 괜찮아.]
[하지만···.]
[아들은 내일 경기나 신경 써. 알겠지? 응원할게!]
[응···!]
드디어 엄마와 같이 살게 됐다.
장문원은 너무 기뻤다.
‘구단주님, 감사합니다···.’
한수는 트리플스 2군 만년 후보로 방출 예정이었던 그를 타이탄스로 데려와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다.
재능이 없어서 자기 비하만 하던 그에게 포기하지 말라며, 당신은 재능이 있다며 자신감을 심어줬다.
그리고 엄마의 문제까지···.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은혜를 갚는 방법은···.
‘타이탄스의 승리···!’
그때 테일러 윈스 투수가 와인드업했다.
날아오는 공이 무척 느리게 보였다.
이종규 코치는 성급하게 배트를 움직이지 말고, 스스로 기회를 만들라고 했다.
하지만 촉이 왔다.
‘이건 꼭 휘둘러야 해!’
그는 전력을 다해 배트를 휘둘렀고···.
-따아아아아악!
경쾌한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테일런 윈스 투수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갓뎀!”이라고 소리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와아아아아아!
커다란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홈~ 런~! 대~ 단합니다! 장문원 선수! 화끈한 스윙이었어요!]
[장문원 선수, 차분하게 기회를 만들어가는 타자인데, 이번에는 아주 시원하게 휘둘렀네요.]
[테일러 투수의 공이 높았어요. 아무래도 많이 흔들리는 거 같습니다.]
[타이탄스의 우세를 점치기는 했지만···. 1회 말부터 정말 무시무시하네요.]
1회 말.
【신영 타이탄스 6 : 0 엔젤 트리플스】
타이탄스의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타이탄스의 압도적인 경기력을 이어갔고···.
【신영 타이탄스 11 : 0 엔젤 트리플스】
···1차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타이탄스 21연승 성공! 신기록까지 단 2승!】
【염철수, 또 완봉승! MLB 스카우트들의 관심을···.】
【MVP 염철수, “구단주님과 팬분들께 감사를···.”】
【장문원, 아쉽게 사이클링히트에 실패···.】
【손재현, 장문원 치열한 홈런왕 경쟁···!】
【오재근, 장문원! 친정팀의 목에 비수를···!】
【타이탄스! 23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울 수 있을까?】
타이탄스 팬들은 난리가 났다.
└이제 22연승 가즈즈아!
└신기록까지 2승 남았다!
└마! 내일모레 이틀간 광안리로 모여라!
└우린 해운대에 모이자!
└다 필요 없고 직관 가즈아아!
└타이탄스 파이팅!!!
관중들이 빠져나가고 한산해진 경기장.
한수는 VIP 좌석에 남아 휴대폰으로 커뮤니티 반응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때 박동준 QC 코치한테 메시지가 왔다.
2차전 라인업이다.
【타이탄스 VS 트리플스 2차전, 타이탄스 라인업】
선발 투수 : 찰스 스팅(Gold 등급)
1번 타자 : 김유빈(Platinum 등급, 좌익수)
2번 타자 : 오재근(Platinum 등급, 중견수)
3번 타자 : 손재현(Platinum 등급, 3루수)
4번 타자 : 이소호(Diamond 등급, 지명타자)
5번 타자 : 윤진호(Diamond 등급, 2루수)
6번 타자 : 장문원(Platinum 등급, 우익수)
7번 타자 : 하민철(Platinum 등급, 포수)
8번 타자 : 김효철(Gold 등급, 유격수)
9번 타자 : 안종렬(Gold 등급, 1루수)
선발 투수가 2선발 찰스 스팅으로 바뀌었고, 포수가 하민철로 바뀐 거 말고는 오늘과 동일했다.
한수는 찰스 스팅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페르난도 킴 감독이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었다.
그는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고 옆을 쳐다봤다.
거기에는 심연주가 다소곳이 앉아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안 가고 뭐 합니까?”
“궁금한 게 있어서요.”
“또, 뭡니까?”
“타이탄스 프런트에 남는 일자리 있나요?”
“···뭐라고요?”
그녀는 살포시 웃으며,
“저 타이탄스에서 일하고 싶어요. 궁금한 게 아~ 주 많아서요.”
“······.”
“허락해주실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