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 인생처럼 알다가도 모르는 게 야구다.
낙동강 더비 1차전 승리로 24승을 달성했지만, 타이탄스 분위기는 좋지 못했다.
여은포가 공형찬의 멱살을 잡은 사건 때문이었다.
구단 공식 홈페이지와 SNS는 물론, 한수의 개인 SNS로도 사과문을 올려서 팬들의 항의는 줄었지만···.
한수가 여전히 분노한 상태였다.
결국, 페르난도 킴 감독은 여은포를 데리고 한수가 묶는 호텔을 직접 찾았다.
두 사람이 한수의 방 앞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강덕수가 말했다.
“감독님은 여기 계시고, 여은포 선수만 들어가세요.”
페르난도 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여은포를 보며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여은포 선수, 다시 한번 말하겠는데···.”
“네~ 네~ 사과 잘~ 하고 올게요.”
“···괜히 구단주님 심기 상하게 하지 말고요.”
“거참, 몇 번을 말합니까···.”
여은포는 귀찮다는 듯 투덜거렸지만, 페르난도 킴이 날카로운 눈빛을 하자 움찔하더니,
“알겠어요. 알겠어. 진심으로 공손히 사과하고 올게요.”
“···믿겠습니다.”
“······.”
여은포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 앞에 섰다.
사실 여유로운 척 말했지만, 그도 한수를 만나려니까 몹시 긴장됐다.
그렇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까짓거 죽이기야 하겠어? 사과 빨리하고 나오자.’
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간 순간,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한수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은포, 죽고 싶어?”
“···아니, 뭔 말을···.”
“내 말이 심했다고 생각해?”
“······.”
“나는 말이야. 내 걸 망치려는 놈들을 정말 싫어해. 잘근잘근 씹어서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그런데 오늘 네가 그 짓을 했어. 내 심정이 어떨 거 같아?”
여은포는 한수의 차가운 눈빛에 등골이 오싹해져서 침을 꿀꺽 삼키며 생각했다.
‘이 인간···. 진심이야···. 정말 날···.’
한수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같잖은 사과는 필요 없고, 두 번 다시 오늘과 같은 문제 일으키지 마. 그땐 네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할 거야.”
“······.”
“그리고 올스타 브레이크 때 봉사활동을 하는 거로 이번 징계를 대신 할 거야.”
“올스타 브레이크 때 전부요?”
“응. 불만이야?”
불만은 많았다.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그랬다간 한수가 더 한 징계를 내릴 거 같았으니까.
여은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그럼, 나가봐.”
“네···.”
한수는 “아~!”하면서 방에서 나가려는 여은포에게 물었다.
“공형찬한테 사과는 했어?”
“했습니다.”
“그건 잘했네. 가봐.”
“네.”
한수는 여은포가 나가자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참 귀찮은 녀석이야. 염 선수나 홍 선수처럼 야구에만 집중해주면 참 좋을 텐데···.”
그때 박동준 QC 코치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낙동강 더비 2차전 라인업이었다.
【타이탄스 VS 티라노스 2차전, 타이탄스 라인업】
선발 투수 : 기용찬(Platinum 등급)
1번 타자 : 김유빈(Platinum 등급, 중견수)
2번 타자 : 로빈 애플(Gold 등급, 좌익수)
3번 타자 : 손재현(Platinum 등급, 3루수)
4번 타자 : 이소호(Diamond 등급, 지명타자)
5번 타자 : 윤진호(Diamond 등급, 2루수)
6번 타자 : 장문원(Platinum 등급, 우익수)
7번 타자 : 하민철(Platinum 등급, 포수)
8번 타자 : 김효철(Gold 등급, 유격수)
9번 타자 : 안종렬(Gold 등급, 1루수)
선발 투수는 5선발인 기용찬이다.
공형찬은 여은포와의 다툼으로 출전하지 못하게 됐고, 이소호가 4번으로 지명타자를 맡았고, 장문원이 6번으로 내려갔다.
그 외에는 어제와 같았다.
한수는 생각했다.
‘오늘 경기 때 티라노스 타자들 꼴을 봐선 내일도 우리가 무난하게 이기겠네.’
그렇게 다음날이 됐다.
= = = = = = =
한수의 예상은 정확했다.
2차전에서 티라노스 타자들은 기용찬의 구위에 눌려 줄줄이 삼진과 범타를 당했다.
그 결과···.
【신영 타이탄스 8 : 0 대명 티라노스】
···타이탄스는 2차전도 가볍게 승리했다.
여은포 문제도 구단에서 적절히 대처한 덕분에 더는 말이 나오지 않았고, 타이탄스 팬들은 승리를 만끽했다.
└오오오오! 25승이다!
└1승 남았다! 가즈아아아아!
└티라노스 올 시즌 망했네 ㅋㅋㅋ
└윤진호한테 홈런 치고, 양창진이 마무리하고 ㅋㅋ
└마산 아저씨들 배 아플 듯 ㅋ
└내일만 이기면 26승이다!
└염철수니까 무조건 이길 듯.
└철수야! 믿는다!
└갈매기들 창원으로 다 집합!!!
팬들의 기대를 가득 받으며 3차전이 펼쳐졌다.
오전에 빗줄기가 거세서 경기가 취소되는 게 아닌가 걱정했지만, 점심 이후로 비가 그쳐서 팬들은 안도했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됐고···.
【타이탄스 7 : 0으로 낙동강 더비 압승!】
【오늘도 침묵한 티라노스 타자들···.】
【타이탄스! 26승 달성! 세계 최고 기록과 동률···!】
【역시 염철수! 무실점 피칭으로! 또 다시 완봉승!】
【이소호! 시원한 만루 홈런! 티라노스 침몰!】
【MVP 염철수! “앞으로도 팀을 위해 최선을···.”】
···타이탄스는 또 승리했다.
무려 26연승.
백여 년 전에 세워진 위대한 기록과 동률!
WBC가 목전인 터라 해외 매체들도 타이탄스의 행보를 주목했다.
물론, 타이탄스 선수 중에 WBC에 출전하는 선수는 없지만 말이다.
하여튼 팬들은 난리가 났다.
└기왕 이렇게 된 거 27승까지 하면 좋은데.
└찰스여서 힘들 듯.
└아냐. 벌처스 3연전이잖아.
└그러네? 참새들이네?
└찰스 형이 참새 사냥은 잘했음.
└찰스야, 참새 잡고 정신 차리자!
└최소 29연승 각인데?
└하늘이 타이탄스 편임 ㅋ
└아~ 빨리 화요일 됐으면 좋겠다!
= = = = = = =
월요일, 부산의 어느 영화관 입구.
한수는 벤치에 앉아서 폰으로 타이탄스 관련 기사들을 살펴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흠···. 26승도 잘하긴 했지만, 기왕이면 27승을 달성해서 신기록을 세우는 게 좋지. 그러면 찰스가 잘 해줘야 할 텐데···.’
조금 걱정됐지만···.
찰스 스팅은 벌처스와 경기에서 승률이 높았고, 장보형 코치가 집중 케어에 들어갔다는 보고도 들어서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내일 경기 이기고 찰스도 정신을 차리면 좋겠네.’
그때 저편에 있던 최혜선이 한수를 발견하고 후다닥 뛰어왔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수에게 말했다.
“죄, 죄송해요···. 제, 제가 늦어서···.”
“안 늦었어요. 내가 빨리 온 거지. 들어갑시다.”
“네, 네!”
한수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앞장서서 걸어가자, 최혜선은 배시시 웃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최혜선은 한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팝콘이랑 음료수 제가 살게요···.”
“괜찮습니다. 덕수가 상영관에 세팅해놨을 겁니다.”
“아, 네···.”
최혜선은 뭔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한수랑 같이 영화를 볼 수 있어서 무척 좋았다.
그녀는 힐끔 한수를 살피며 생각했다.
‘평소하고 달리 캐주얼하게 입으셨네. 정장도 멋있지만···. 저런 모습도···. 호, 혹시 데, 데이트라고 생각하고 신경 써주신 걸까?’
최혜선의 생각과 달리 한수는 그냥 편하게 입고 온 거뿐이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그녀는 볼을 살짝 붉혔다.
그러다가 최혜선은 영화관이 무척 한적하다는 걸 깨달았다.
월요일 오전이긴 하지만, 관객이 아예 없다니···.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 영화관에 사람이 없네요. 우, 우리만 보러 왔나 봐요.”
“맞습니다.”
“네?”
“우리만 보러 온 거 맞아요.”
“······?”
한수는 상영 목록을 살펴보며 말을 이어갔다.
“오늘 하루 동안 영화관 통째로 빌렸거든요. 영화 볼 때 방해받는 걸 싫어해서.”
“아···.”
최혜선은 새삼 한수가 재벌 3세라는 걸 실감했다.
동시에 씁쓸했다.
그에 비하면 스스로가 너무도 초라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애써 그런 생각을 떨쳐냈다.
‘알았던 사실이잖아···. 그래도 포기하지 않기로 한 거고···. 그러니까···.’
그때 한수가 물었다.
“보고 싶은 거 있습니까?”
“아, 전 아무거나···.”
“그럼, 이거 봅시다.”
한수가 가리킨 영화는 ‘아반떼: 불의 도로’였다.
할리우드의 거장이 13년 만에 내놓은 아반떼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다.
첫 작품만큼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최혜선은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좋아요!”
“오케이. 갑시다.”
한수는 앞서서 걸어갔고, 최혜선은 한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천천히 뒤따라가며 생각했다.
‘지금은 그냥···. 구단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이 순간을···’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한수 옆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구단주님, 점심은 제가 살게요. 근처 맛집을···.”
“이미 식당 예약해뒀습니다.”
“저, 정말요? 그, 그러면 제가 저녁 살게요.”
“저녁까지 먹자고요?”
“아···. 혹시 바쁘신가요?”
한수는 최혜선의 풀이 죽은 표정을 보고 고민했다.
‘일정은 따로 없지만···. 뭐, 호텔 레스토랑에서 먹는 것도 질려가던 차니까···.’
“그래요. 저녁은 혜선씨가 사요.”
그러자 최혜선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네!”
그렇게 두 사람은 영화를 봤고···.
다음날이 됐다.
= = = = = = =
5월 첫째 주, 대전에서 펼쳐지는 벌처스와의 주중 3연전이 시작됐다.
리그 1위와 꼴찌의 대결이었지만, 세계 신기록이 걸린 경기이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타이탄스는 총력전을 기울이기로 했다.
오재근도 손목 컨디션이 좋아져서 로빈 애플을 대신해서 2번 타자로 출전했다.
선발 투수 찰스 스팅도 컨디션이 무척 좋았다.
찰스 스팅의 컨디션이 좋아진 이유 중 하나는 미국에 있는 가족들이 오늘 경기를 보러 한국까지 왔기 때문이다.
MLB 구단의 영입 제안을 거절하고, 타이탄스 영구결번 선수가 되겠다던 그의 꿈을 반대하던 가족들이 드디어 마음의 문을 연 것이다.
덕분에 찰스 스팅은 자격지심을 떨쳐내고 완벽하게 부활했다.
【찰스 스팅! 참새 사냥꾼다운 멋진 피칭!】
【찰스 스팅 9회까지 호투(好投)! 타이탄스 27승!!!】
【타이탄스 7 : 2로 벌처스 제압! 세계 신기록 달성!】
【미국 ESPN 타이탄스의 리그 27연승을 집중 보도!】
【NPB의 거장, “타이탄스 정말 대단한 팀!” 극찬!】
【해외 야구팬들도 놀라는 타이탄스의 신기록!】
【빅리그에서 눈독을 들이는 타이탄스 선수들!】
온갖 기록을 갈아치우는 타이탄스.
심지어 벌처스와 2차전에서 또 승리했다.
리그 28연승···!
정말 말도 안 되는 기록이다.
팬들은 이러다가 전승 우승을 하는 게 아니냐는 소리까지 했다.
하지만···.
인생처럼 알다가도 모르는 게 야구다.
벌처스와 3차전.
타이탄스 선발 투수는 장은수였다.
장은수는 5회까지 무실점으로 막다가 6회에 타자가 막무가내로 휘두른 스윙에 예기치 못한 홈런을 맞았다.
1실점.
다른 때 같으면 큰 문제가 없었다.
타이탄스 타자들이 언제 든든하게 점수를 올려줬을 테니까.
하지만 오늘따라···.
【신영 타이탄스 0 : 1 한영 벌처스】
···타이탄스 타선이 침묵하고 있었다.
컨디션이 나쁜 김유빈, 오재근, 손재현을 대신해서 최민준, 로빈 애플, 박종구가 출전했는데 화력이 대폭 줄어버렸다.
타이탄스 벤치는 박종구를 대신해서 공형찬을 출전시키고, 김유빈도 대주자로 교체하며 작전을 펼쳤다.
장은수는 1실점 이후에 분투하며 더는 실점을 하지 않았지만···.
반전은 없었다.
【타이탄스 연승 행진 종료, 시즌 첫 패배!】
【장은수 투수, 분투(奮鬪)했지만, 타격진 침묵···.】
【벌처스 감독, “우리 팀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타이탄스 감독, “모든 건 제 불찰···. 선수들은 잘못이 없습니다.”】
【이소호, “은수에게 미안하다. 두 번 다시 이런···.”】
이렇게 타이탄스는 연승행진은 막을 내렸고···.
5월 5일 어린이날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