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 오늘 저녁에 제주도로 출발하세요.
한수는 염철수와 만나기로 한 식당 주차장에 도착했다.
약속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서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식당 입구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한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점심 대기 줄인가? 어마어마하네. 예약해놓길 잘했어. 그런데 왜 이렇게 줄이 엉망진창이지?’
사람들은 식당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게 아니라, 식당 입구를 막아서고 있었다.
그리고 웅성웅성 소란스럽기까지 했다.
‘대체 뭐야?’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일단 식당으로 들어가는 게 먼저였다.
한수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며 말했다.
“잠시만요. 지나갈게요. 잠시···.”
그때 아주 건장한 체격에 헬스복을 입은 남자가 한수의 어깨를 강하게 잡으며 소리쳤다.
“마! 왜 새치기하는데!?”
한수는 인상을 쓰며 남자의 손을 거칠게 쳐낸 뒤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헬스복 남자의 두툼한 양쪽 어깨에 새겨진 타이탄스 엠블럼과 갈매기 문신 그리고 헬스복에 프린트된 염철수의 와인드업하는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타이탄스 팬···?’
한수는 분노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언제 봤다고 반말입니까? 그리고 새치기라뇨? 난 식당에 예약하고 왔어요!”
헬스복 남자, 김영복은 움찔하며 생각했다.
‘시, 식당 손님이었어?’
무척 민망했지만, 자존심 때문에 사과가 망설여졌다.
그러다가 한수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 사람 낯이 익은데···. 우리 헬스장 회원인가? 아니야, 이렇게 잘생긴 회원이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어. 그러면···.’
한수는 사과도 없이 입을 다문 김영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타이탄스 팬이라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막 입을 열려는데, 사람들에 둘러싸여 사인 삼매경에 빠져 있는 염철수를 발견했다.
그는 사인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팬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뭔 일인가 했더니, 염 선수 때문이었군.’
김영복도 염철수의 사인에 눈이 멀어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고 한수에게 막말을 한 거였다.
그때 김영복이 소리쳤다.
“호, 혹시 가, 갓단주···?”
“······?”
“여, 역시! 이한수 구단주님 맞으시죠! 아이고! 제가 구단주님을 몰라뵙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염 선수 사인을 받고 싶다는 욕심에···. 정말 죄송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김영복의 말에 한수를 힐끗 보며 수군거렸다.
‘대박! 진짜 이한수다!’
‘염 선수랑 갓단주랑 밥 먹으러 왔나 봐!’
‘이한수 존잘이네. 대박···.’
‘저 헬스남 갓단주랑 있으니까 완전 오징어네.’
‘갓단주 별명이 오징어 메이커래잖아.’
이때 한수는 김영복이 갑자기 저자세로 나오자 조금 당황했다.
“뭐···. 조금 무례하긴 했지만, 죽을죄까지는···.”
“과연 갓단주님이시네요! 저 같았으면 저처럼 무례한 놈은 XX를 그냥 확! 마! XX해서 XX해버렸을 텐데!”
“······.”
“존경합니다, 갓단주님! 저, 악수 좀···.”
“아, 네···.”
“그리고···. 타이탄스 우승 꼭 좀 부탁드립니다. 우리 선수들도 잘 부탁드리고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네! 믿습니다!”
사실 김영복은 염철수보다 한수의 팬이었다.
염철수가 프린트된 헬스복을 일주일에 한 번 입는다면, 남은 날은 전부 한수가 프린트된 헬스복을 입을 정도다.
극성 타이탄스 팬인 그에게 한수는 메시아였기 때문이다.
한수는 헛기침하며 말했다.
“흠, 어쨌든 사과는 받겠습니다. 앞으로 조심하세요.”
“물론이죠! 아! 혹시 염 선수랑 식사하러 오신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염철수의 사인을 받기 위해 몰린 인파 때문에 쉽지 않을 거 같았다.
그러자 김영복이 말했다.
“갓단주님, 제가 길을 뚫겠습니다.”
“안 그래도 되는데···.”
“아닙니다! 갓단주님과 염 선수의 식사가 늦어져선 안 되죠!”
김영복은 멧돼지처럼 인파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마! 다들 비키라!”
그러나 부산의 시민들은 약하지 않았다.
“뭐야!? 어떤 XX가 밀었어!?”
“악!? 누가 자꾸 밀어? 너야!?! 확! 마!”
“꺄악! 문디 자슥이···! 죽고 싶나!?”
“으악! 이 가시나가 누구 머리를 잡아!”
김영복은 인파에 파묻혀 어디론가 사라졌고, 식당 앞은 혼돈의 도가니가 됐다.
한수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미쳐버리겠네.”
그때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구단주님, 안녕하세요.”
고개를 돌려보니 염철수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한수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염 선수, 언제 여기···.”
“아~ 팬분들이 피하라고 해주셨어요. 저를 노리는 테러범이 나타났다고···.”
‘테러범···?’
한수는 인파에 휩쓸려 사라진 김영복을 떠올리며 명복을 빌었다.
“자, 그럼 들어갈까요?”
“네!”
그렇게 한수와 염철수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 = = = = = =
한수의 우려와 달리 염철수는 어머니 김명숙과 박동준 코치의 그린 라이트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고민도 별 게 아니었다.
“사실···. 엄마랑 여행을 가본 적이 없어서요. 그래서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에 여행을 가고 싶어서···.”
한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염 선수는 고민마저도 반듯하네. 여은포가 이런 걸 좀 본받아야 하는데···.’
“그래요? 어디 생각해둔 데는 있어요?”
“제주도를 생각했었어요. 부모님께서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가셨었거든요. 어머니가 좋아할 거 같아서···.”
“어머님이 좋아하시겠네요. 저도 제주도에 몇 번 가봤는데 여행하기 괜찮습니다. 아! 여행 날짜가 언제죠? 신영 호텔에 연락해두겠습니다. 염 선수, 면허 아직 없죠? 기사도 붙여드리죠. 제주도 지리에 밝은 사람으로···.”
염철수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안 그러셔도 됩니다. 어차피 제주도는 가지 못하게 돼서···. 그냥 근처에 온천으로···.”
“제주도에 왜 가지 못합니까?”
“그게···. 엄마도 이번 주만 시간이 되시고, 저도 다음 주부터 훈련이 있어서요. 그래서 비행기표를 예매하려고 했는데, 일정에 맞는 게 없어서요.”
“아···.”
“미리 준비했어야 하는데, 올스타전 때 갑자기 떠올린 거라···. 내일모레 비행기가 있긴 하지만 그러면 급박할 거 같아서···.”
“하긴, 이번 주만 시간이 되는 거면 내일 출발해도 삼 일밖에 안 되네요. 흠···. 그러면 이렇게 하죠. 제가 페르난도 감독한테 염 선수 휴가를 더 주라고 지시하겠습니다. 물론 어머님도···.”
염철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훈련에 빠질 순 없죠. 괜찮습니다. 주말에 어머니와 온천에 다녀오는 걸로 충분합니다.”
그 말에 한수는 감동했다.
‘철수야, 철수야, 너는 어쩜 이렇게 예쁜 말, 예쁜 짓만 골라서 하니?’
염철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구단주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감사는요. 음···. 그래요. 이러면 어떨까요?”
“······?”
“오늘 저녁에 제주도로 출발하세요.”
“네···? 그, 그게 무슨···.”
한수는 씨익 웃으며,
“부산 국제 공항에 있는 전세기를 빌려드리겠습니다. 숙박과 식사, 교통 등도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니까 염 선수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즐거운 여행을 보내고 오세요.”
“아, 아닙니다. 어떻게···.”
“거절하지 마세요. 저한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마음 같아서는 세계 일주라도 시켜드리고 싶은데, 아직 시즌이 끝나지 않아서···. 하하.”
“그런···.”
염철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더니, 이내 면목이 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신경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구단주님께는 매번 신세만 지네요.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이미 충분히 갚았어요. 제가 선물을 더 줘야 할 정도로요.”
“아니에요. 구단주님이 없었다면 저는···!”
염철수는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한수는 염철수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했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 그럼, 식사를 계속할까요?”
“···네, 구단주님.”
염철수는 젓가락을 잡는 한수를 보며 생각했다.
‘구단주님, 저한테 베풀어주신 은혜···. 전부 갚을게요. 반드시···!’
.
.
.
-띠링!
【염철수 선수의 호감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특기 ‘은혜 갚은 호랑이’가 생성됩니다.】
= = = = = = =
한수는 즐겁게 점심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나와 차에 탔다.
그때 옆좌석에 뒀던 포수 마스크 위로 느낌표가 나타난 게 보였다.
‘음···. 임무 29가 완료된 건가?’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이소희가 삼각 트레이드에 성공해도, 임무 29는 끝난 게 아니다.
왜냐면···.
『임무 29』
【구단주님,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입니다. 선수들을 휴식을 취하며 컨디션 관리를 해야 하지만, 프런트는 쉴 틈이 없습니다. 이 기간에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보세요.】
└① 구단 간 선수 트레이드: [미달성]
└② 추가 엔트리 5인 확정: [미달성]
└보상: 1,000 Point, ‘잠재 레벨 1 상승권’, ‘재능 수치 1% 상승권’
‘아직 1군 추가 엔트리 5인을 정하지 않았으니까.’
육성팀 심상호 팀장이나 페르난도 킴 감독 등과 상의하고는 있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언급된 선수는 없다.
‘일단 허지웅은 무조건 올릴 거고···. 나머지 4명은 다음 주쯤 정하도록 하지.’
그렇다면···.
‘느낌표가 왜 떠오른 거지?’
한수는 포수 마스크를 착용했다.
그리고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 중에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염 선수한테 새로운 특기가 생겼네. 은혜 갚은 호랑이? 뭔 이름이 이래?’
【은혜 갚은 호랑이(특기)】
└지정 대상(이한수)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경기 중에 강한 의지를 내비칠 때, 낮은 확률로 본인의 ‘현재 레벨’보다 높은 힘을 발휘합니다. 상승 수치는 1레벨에서 4레벨이고, 무작위로 결정됩니다.
‘해바라기(특기)’처럼 기적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건 아닙니다. 발동 확률이 무척 낮지만, ‘해바라기(특기)’보다는 확률이 더 높습니다.
한수는 ‘은혜 갚은 호랑이’가 어떤 특기인지 확인하고 생각했다.
‘이거 아주 좋은데?’
잠재 레벨이 높은 선수일수록 레벨 상승에 따른 성장도가 크다.
잠재 레벨 99인 염철수는 말할 필요가 없다.
‘해바라기보다 발동 확률이 높으면 한 달에 한 번은 발동하려나? 아니지. 염 선수의 의지에 달린 문제니까 더 낮을 수도 있고···.’
어쨌든 있어서 나쁠 게 전혀 없는 특기다.
한수는 즐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철수 예뻐 죽겠네. 흐흐.”
한수는 강덕수한테 연락해서 염철수 모자의 제주도 여행을 알리고, 아주 행복하고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게 철저히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자, 여행 준비는 덕수가 잘할 거고···. 여은포는 저녁 약속이니, 어떻게 하지? 바로 사무실로 갈까?’
그때 이소희한테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소희 팀장: 삼각 트레이드 성공했습니다. 한민석을 빌런스로 보내기로 했고, 트리플스로부터 허지웅과 3라운드 지명권을 받기로 했습니다.
한수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이한수: 수고했어요. 3시쯤 사무실 도착하니까 자세한 보고는 그때 해요.
└이소희 팀장: 알겠습니다. 조심해서 오세요.
한수는 시동을 걸며 씨익 웃었다.
“이 팀장이 좋아하는 간식이라도 사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