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 쉿, 그건 비밀입니다.
이소희는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커다란 가방을 들고 사무실 밖으로 향했다.
심연주는 내일 있을 허지웅 선수와 미팅과 관련해서 질문할 게 있어서 이소희를 불렀지만, 그녀는 듣지 못했는지 대답도 하지 않고 사라졌다.
심연주는 고개를 갸웃하며 공명량에게 물었다.
“이 팀장님 왜 저래요? 표정이 안 좋아 보이던데, 무슨 일 있어요?”
공명량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모릅니다. 퇴근하겠습니다.”
“······.”
냉정하기 짝이 없는 공명량의 반응에 심연주는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그때 윤가희가 다가와 그녀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언니야~ 술~ 이 한~ 잔 생각나는데~ 소주 한잔 어때요~?”
“···그럴까요?”
“네~!”
그렇게 두 사람도 퇴근 준비를 했다.
이때 이소희는 프런트 오피스에서 나와 철인 최종권 선수 동상 앞에 섰다.
그녀는 잠시 동상을 바라보다가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며 옛 추억을 떠올렸다.
여기서 한수의 아버지, 이정호와 했던 약속을···.
이소희는 타이탄스의 투수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로 했고, 이정호는 타이탄스 사장이 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소희는 꿈을 포기했고, 이정호는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이소희는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호 아저씨, 우리 둘 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네요.”
꿈을 포기한 스스로가 한심해서 자괴감도 들었고, 연락이 오기는커녕 어떻게 지내는 소식조차 들려오지 않는 이정호를 원망하기도 했다.
이소희는 고개를 숙이며 생각했다.
‘미안해요.’
투수의 꿈을 포기해서···.
‘미안해요.’
아무것도 모르고 원망해서···.
‘미안해요.’
사과가 너무 늦어서···.
그리고···.
‘고마워요.’
타이탄스로 정말 멋진···.
‘구단주를 보내줘서···.’
한수가 이태백 회장의 유언장 때문에 타이탄스로 온 건 알고 있지만, 이소희는 그것도 이정호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수 덕분에 운영팀장이 됐는데 적성에 잘 맞는 거 같아요. 그리고 한수 덕분에 타이탄스 성적도 엄청 좋아요. 이대로 가면 통합 우승도 가능할 거 같아요. 대단하죠? 그리고 또 한수 덕분에···.”
이소희는 말을 멈추고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노을 져 가는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슬프지 않아요.”
처음엔 이렇지 않았다.
한수가 이정호의 아들이란 걸 알게 된 뒤로, 한수를 보면 이정호가 떠올랐다.
무척 슬프고,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우울했다.
그래서 업무 외적으로 한수와 마주치는 건 최대한 피했고, 심상호의 조카라는 사실도 숨겼다.
하지만 이제 한수와 함께 있으면···.
“즐거워요.”
이소희는 그러다가 숨죽여 웃으며,
“아저씨, 한수 말이에요. 무진장 의심 많고 용의주도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누군지는 아직도 몰라요. 알면 깜짝 놀라겠죠? 한수 걔, 어릴 때 제가 자기보다 키가 커서 누나인 줄 알고 소희 누나, 소희 누나 하면서 따라다녔잖아요.”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으니, 한수도 언젠가 그녀가 어릴 때 함께 놀았던 친구란 걸 떠올릴 거다.
하지만 지금 이 사실을 밝히고 싶진 않았다.
‘곧 후반기 시즌이 시작되거든요. 정말 중요한 시기인데, 한수랑 불편해지고 싶지 않아요. 나중에···. 정말 나중에···.’
이소희는 생각을 멈추고 손에 든 가방을 꼭 쥐며 말했다.
“그때가 되면···. 한수랑 같이 아저씨 무덤에 찾아뵐게요. 그럼···.”
이소희는 최종권 동상 주변의 풍경을 살폈다.
이렇게 넋두리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더는 과거에 사로잡혀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이소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 안녕.”
그렇게 그녀는 경기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사라지자, 음료수 캔을 든 공명량이 나타났다.
그는 조금 씁쓸한 표정을 이소희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이소희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여서 위로해주려고 따라 나왔는데, 그녀의 넋두리를 다 듣고 말았다.
공명량은 생각했다.
‘저 녀석···. 역시 구단주를 좋아하는 거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이소희의 입으로 직접 듣게 되니까 기분이 묘했다.
왠지 입이 쓰고, 술을 진탕 마시고 싶은 기분···.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뒤 음료수 캔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몸을 돌렸다.
‘술은 무슨, 집에 가서 잠이나 자자.’
그때 막 건물에서 나온 윤가희가 그를 불렀다.
“명량씨~!”
“······?”
“연주 언니랑 소주 한잔할 건데~ 조인 콜?”
“······.”
심연주는 윤가희에게 그냥 우리끼리 가자고 말하려고 했다.
‘어차피 저 인간이 오케이 할 리 없으니까.’
그 순간, 공명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죠.”
심연주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
‘진짜···? 저 인간이 웬일로···.’
윤가희도 그의 대답에 놀랐는지 볼로 손을 가져가며,
“어~ 머나~! 다시 한번 말해봐!”
“······.”
“텔미, 텔미, 테에테레테···.”
공명량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됐습니다. 그냥 없던 일로···.”
“어허~! 낙장불입! 가려면 귀 한쪽을 두고 가요!”
“무, 무슨···.”
윤가희는 “에잇!” 하더니, 멍하니 서 있던 심연주와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던 공명량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자~ 빨리 술 마시러 갑시다! 렛츠 고!”
“자, 잠깐 천천히···.”
“팔 놓으세요. 제가 알아서 갈 겁니다.”
“싫어요~! 빨리~ 빨리~ 무브! 무브!”
공명량은 끌려가는 와중에 이소희가 사라진 방향을 한 번 더 쳐다봤다.
그러더니 살짝 한숨을 내쉬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는 마음속의 복잡한 감정을 조금은 털어낸 얼굴이었다.
그렇게···.
운영팀 삼인방은 술집으로 향했다.
= = = = = = =
한수는 홈팀 더그아웃에 앉아 이소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는 이소희와 함께 이곳으로 오려고 했는데, 사무실로 가자 그녀는 이미 퇴근한 뒤였다.
한수는 시간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대체 어디 간 거야? 설마 나 바람맞은 건가?”
하지만 이소희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그때 뒤쪽에서 인기척과 함께 이소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한수는 뒤를 돌아보며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소희를 본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왜냐면 그녀가 야구 유니폼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수는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꼴이 그게 뭡니까?”
“타이탄스 유니폼이죠.”
“아니, 그건 아는데···. 대체 왜···.”
이소희는 한수에게 다가오더니 큰 가방을 내밀었다.
한수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건 또 뭡니까?”
“포수 장비요.”
“······?”
“부탁 들어준다고 했죠? 이걸로 제 공을 받아주세요! 아~ 포수 마스크는 이정호 선수의 포수 마스크를 쓰고요.”
“···네···? 아니, 이게 무슨···.”
한수는 이런 부탁을 할 줄은 몰라서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때 이소희가 말했다.
“혹시 공 잡을 줄 모르세요?”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부탁할게요.”
한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이소희를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뭐든 들어주기로 했으니까. 포수 해드리죠. 그런데 대체 왜 이런 부탁을 하는 겁니까?”
이소희가 이런 부탁하는 이유는 꿈 때문이다.
언젠가 당당한 타이탄스 투수가 돼서 이정호와 배터리를 짜는···.
오래전 포기했고, 이제는 이룰 방법도 전혀 없는···.
아주 슬픈 꿈.
이소희는 이번에 그 꿈을 털어내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거다.
하지만 이걸 한수에게 말할 순 없다.
그렇게 되면 그녀가 누구인지 정체를 밝혀야 하니까.
‘그럴 순 없어.’
그래서 이소희는 어릴 때 봤던 애니메이션에 등장했던 실눈 마법사처럼 검지를 입술로 가져가며 대답했다.
“쉿, 그건 비밀입니다.”
그 대답에 한수는 어이없단 표정을 짓다가 가방에서 포수 장비를 꺼내며 말했다.
“오케이. 오~ 케이. 나는 직원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상사니까. 알겠습니다. 포수 해드리죠.”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몸 풀러 가볼게요.”
한수는 마운드로 걸어가는 이소희를 쳐다보다가 포수 장비로 시선을 돌리더니 귀찮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래서 공수표를 함부로 쓰면 안 된다니까. 쯧.”
= = = = = = =
한수는 더그아웃에서 장비를 착용한 뒤, 마지막으로 포수 마스크를 썼다.
앞에 알림창들이 나타났지만, 전부 닫아버리고 마운드 위에 서 있는 이소희를 쳐다봤다.
그녀는 스트레칭을 하며 어깨를 풀고 있었다.
한수는 마운드로 걸어가며 ‘최고의 구단주 가이드’ 덕분에 알게된 이소희의 과거를 떠올렸다.
신체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투수의 꿈을 포기했던···.
‘그래, 뭐, 프로 선수가 꿈이었으니. 마운드에서 던져보고 싶은 건 인정해. 그런데 굳이 나랑 할 이유가 있나?’
근처에 있는 투구 연습장만 가도 공을 마음껏 던질 수 있다.
친절한 사장님들은 직접 포수를 해주기도 한다.
타이탄스 경기장 마운드에 서고 싶다면 한수 말고 불펜 포수 아니, 강민수나 하민철한테 부탁해도 된다.
이소희한테 그럴 만한 권력은 충분히 있다.
그런데도···.
‘왜 나지?’
문득 작년에 타이탄스로 왔을 때, 이소희와 사이가 나빴던 게 떠올랐다.
‘혹시 실수를 가장해서 공으로 나를···.’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녀의 정보창을 오픈해 호감도를 확인했다.
【이소희 호감도 : + 100%】
한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응? 100%라고···?”
이소희는 늘 차갑고 사무적인 모습만 보였다.
그녀랑은 다른 직원들과 심심풀이로 하는 농담조차 나눈 기억이 없다.
그런데···.
‘언제 호감도가 이렇게 높아진 거지?’
한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이소희를 빤히 바라봤다.
‘혹시 이 팀장 나를···.’
그러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소희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한수는 생각했다.
‘덕수 같은 거겠지. 서로 신뢰하는 상사와 직원···. 그래, 그런 거야.’
그때 이소희가 한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잘 어울리시네요.”
“뭔들 안 어울리겠어.”
“그런가요?”
“반응이 미적지근하네.”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할 정도로 기분 나쁜 건 아냐.”
“알겠습니다. 그럼, 홈플레이트로 가주시겠습니까?”
“오케이! 아~ 그런데 몇 개 던질 거야?”
이소희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볍게 100구만 던질게요.”
“······.”
“장난입니다. 적당히 던지겠습니다.”
한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홈플레이트로 걸어갔다.
이소희는 그런 한수의 뒷모습을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바라봤다.
그리고 한수가 홈플레이트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이 팀장! 직구만 던져! 변화구 안 돼!”
이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그럼, 던질게요!”
“오케이!”
이소희는 송진 가루를 손에 묻히고 야구공을 강하게 잡았다.
정식 경기는커녕 연습 경기도 아닌, 캐치볼에 가까운 상황이지만···.
이소희는 입안이 바싹 마르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오랫동안 꿈꿔 왔던 타이탄스 구장의 마운드라서 이런 건가?’
왜 이런지 잘은 모르겠지만, 이대로 공을 던지면···.
‘최고로 즐거울 거 같아.’
이소희는 전력을 다해 와인드업했다.
그리고 빠르게 날아간 공은···.
-퍼어억!
한수의 미트에 꽂혔다.
이소희는 생각했다.
‘역시···! 즐거워!’
이때 한수는 생각했다.
‘공이 꽤 무겁네. 그리고 엄청 빠르잖아? 이 팀장, 선수 생활 왜 접었지? 2군에서 밥값도 안 하고 빈둥거리는 몇몇 게으름뱅이들보다 훨씬 나은 거 같은데?’
한수는 그녀에게 송구하며 말했다.
“좋아! 하나 더 가자고!”
“네!”
잠시 후, 이소희는 와인드업했다.
이번에도 제법 묵직하고 빠른 공이다.
다만···.
‘공 끝이 밋밋하네. 악력이 부족한 건가? 에라이~ 나 뭐 하고 있냐? 이 팀장이 선수도 아니고···.’
그냥 공을 받는 데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한수는 마운드에 선 이소희를 보며 중얼거렸다.
“엄청 즐거워 보이네. 정말 100구 던지는 건 아니겠지?”
그는 ‘설마~’라고 생각하며 자세를 잡았다.
이날···.
이소희는 108구를 던졌고, 한수는 손목을 뼜다.
이소희는 응급실까지 따라와 진심으로 사과했다.
한수는 처음에는 손목 통증 때문에 조금 짜증이 났지만···.
‘공수표를 남발하지 말자는 교훈으로 삼자.’
···라고 생각하며 짜증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의외의 수확도 있었다.
바로···.
【이소희의 재능이 94%에서 95%로 오릅니다.】
【이소희가 Platinum 등급에서 Diamond 등급···.】
【이소희가 보유한 특기들이 업그레이드···.】
마운드에서 100구를 던진 순간, 이소희가 94%의 벽을 뚫고 다이아몬드 등급 인재가 됐다.
프런트 직원이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다 재능 수치가 오른 게 어이없었지만···.
‘다이아몬드 등급으로 올랐으면 됐어. 흐흐.’
며칠 뒤···.
허지웅과 미팅을 하고 돌아온 이소희는 벌처스의 김아진 투수를 트레이드하는 데 성공했다.
2대 1 트레이드였지만, 양쪽 다 만족스러운 트레이드였다.
그리고 허지웅과 김아진의 입단식이 끝나고···.
타이탄스 프런트 회의실에 한수를 비롯한 팀장급 인사와 코치진들이 모였다.
한수는 모두에게 말했다.
“자~ 추가 엔트리 회의를 시작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