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 우리 내기할까?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타이탄스는 허지웅과 김아진을 새로운 팀원으로 받아들였고, 확대 엔트리도 어느 정도 윤곽을 잡았다.
한수로서는 확대 엔트리가 확정되어야지만 임무 29를 달성할 수 있어서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래도 조급해하진 않았다.
한수는 호텔 방의 소파에 앉으며 생각했다.
‘중요한 건 임무 달성이 아니라, 1군에 필요한 선수를 확대 엔트리에 넣는 거니까.’
그래서 9월 1일부터 포함될 세 명을 이번 달까지 정하고, 추가로 포함될 2명은 천천히 결정하기로 했다.
그보다 중요한 건 7월 21일, 내일부터 시작되는 신아 재규어스와의 주말 3연전이다.
왜냐면 여은포가 투타 겸업으로 출전하는 첫 경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선발 투수로 출전하진 않는다.
‘여은포의 컨디션에 따라서 중계 투수나 마무리로 올린다고 했으니···.’
한수는 박동중 QC 코치가 메시지로 보내준 내일 경기 라인업을 확인했다.
【타이탄스 VS 재규어스 1차전, 타이탄스 라인업】
선발 투수 : 염철수(Diamond 등급)
1번 타자 : 김유빈(Diamond 등급, 중견수)
2번 타자 : 손재현(Platinum 등급, 3루수)
3번 타자 : 장문원(Platinum 등급, 우익수)
4번 타자 : 이소호(Diamond 등급, 1루수)
5번 타자 : 윤진호(Diamond 등급, 2루수)
6번 타자 : 여은포(Diamond 등급, 지명타자)
7번 타자 : 강민수(Platinum 등급, 포수)
8번 타자 : 김효철(Gold 등급, 유격수)
9번 타자 : 안종렬(Gold 등급, 좌익수)
가장 큰 변화는 늘 2번 타순에 출전하던 오재근, 최민준, 로빈 애플 대신에 손재현이 2번 타자가 됐다는 점이다.
손재현은 주력이 엄청 빠르진 않지만, 테이블세터로서 가장 중요한 건 출루다.
전반기 출루율 3위를 기록한 손재현이라면 테이블세터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오재근, 최민준, 로빈 애플이 빠져서 외야 수비에 생긴 공백은 내야와 외야 수비가 모두 가능한 안종렬이 좌익수를 맡으면서 해결됐다.
‘오재근보다 수비력이 좋진 않지만, 타격력은 안종렬이 더 뛰어나니까.’
안종렬이 보유한 ‘9번이라 불린 사나이 S’라는 특기 덕분이다.
9번 타자로 출전하면 타격력이 상승하며, 9회에 타석에 서면 더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니까.
타격만 놓고 보면, 김효철이 보유한 ‘위기 해결’ 특성보다 좋았다.
위기 상황에 발동된다는 조건보다, 9번 타자로 출전만 시켜도 능력치가 업그레이드니까 말이다.
어쨌든 안종렬이 좌익수로 빠지며, 1루수는 이소호가 맡았고, 여은포는 지명타자로 출전하게 됐다.
한수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생각했다..
‘여은포, 이 녀석 잘하겠지?’
‘최고의 구단주 가이드’를 믿긴 하지만, 여은포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아서 걱정됐다.
그때 핸드폰으로 여은포가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여은포: 3경기 연속 홈런 치면 한우 사줄 겁니까?
한수는 피식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한수: 오케이.
그런 뒤 핸드폰을 내려놓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걱정 안 해도 되겠어.’
오히려···.
‘내일 경기가 기대되네.’
= = = = = = =
다음 날, 타이탄스 구장, 홈팀 라커룸.
장은수는 라커룸 구석에서 배트를 쥔 채 눈을 감고 있는 여은포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옆에서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 김유빈에게 물었다.
“형, 저 자식 왜 저래요?”
“누구? 아~ 은포?”
김유빈은 여은포를 힐끔 쳐다본 뒤 장은수에게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명상하는 거 아냐?”
“그건 저도 알죠. 근데 쟤가 명상하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예전에는 치어리더 영상이나 SNS 보면서 농땡이 부렸잖아요.”
“그야 오늘은 타자로서 처음 데뷔하는 날이잖아. 충분히 긴장될 법한데···.”
“형~ 예전에 여은포가 했던 처음 마운드에 오를 때, 장 코치님이 긴장하지 말라고 응원해줬더니 뭐라고 대답했는지 잊었어요?”
[제가 긴장을 왜 해요? 그런 건 재능 없는 놈들이나 하는 거죠. 저 같은 천재는 그딴 건 안 키웁니다.]
“이딴 식으로 말했잖아요.”
김유빈은 장은수가 여은포가 했던 말을 배우처럼 연기해내자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네 말대로 오늘 은포가 조금 이상하긴 하네.”
김유빈은 다시 시선을 돌려 여은포를 살펴보더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닐까?”
“아픈 게 아니고, 분명 뭔가 사고 친 게 분명해요. 그러니까 저렇게 분위기 잡는 거라고요.”
“에이~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죠. 진철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뒤쪽에 서서 유니폼을 입고 있던 홍진철이 대답했다.
“사고 쳤으면 SNS에 글이라도 올렸겠죠. ‘나 오늘 사고 쳤어.’ 같은 똥폼을 잡으면서요.”
“그러네. 여은포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그럼, 대체 왜 저러는 거지?”
홍진철은 여은포를 힐끔 보더니,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조는 거 같네요.”
“아무리 그래도 저런 자세로···.”
“아니면, 똥폼을 잡는 거죠.”
“차라리 그게 말이 되네.”
김유빈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어색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얘들은 은포를 정말 싫어하네. 좀 사이가 좋아졌으면 좋겠는데···.’
안종렬이 없었으면, 여은포와 이 둘 때문에 팀의 분위기가 이상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안종렬도 완벽히 중재한 건 아니다.
‘희동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화해를 시키면 좋겠지만···. 문제가 터지지 않는 한 굳이 나서는 성격이 아니니까.’
그렇다고 올해 타이탄스로 온 김유빈이 나서기도 그렇고, 다른 선배들은 신임 주장인 문희동의 체면을 생각해서 나서지 않기로 했다.
이런저런 문제를 겪어 봐야 진짜 주장이 될 수 있단 생각에서였다.
김유빈은 너무 고리타분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일단은 경기에 승리하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김유빈은 여전히 배트를 잡은 채 눈을 감고 있는 여은포를 걱정스레 쳐다보며 생각했다.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볼까?’
그때 안종렬이 한쪽 벽에 기대서 여은포를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김유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여은포가 이상한 행동을 하면 늘 안종렬이 나서서 훈계했었다.
그런데 오늘 안종렬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은포가 사고를 친 건 아니라는 건가? 아니, 오히려···.’
김유빈은 안종렬의 입가에 맺힌 희미한 미소를 보며 중얼거렸다.
“왠지 흐뭇해하는 거 같네. 무슨 일이지?”
= = = = = = =
안종렬은 배트를 잡고 명상 중인 여은포를 보며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형, 저 혜선 씨 팬클럽 탈퇴할게요.’
‘뭐? 왜? 너 혹시 고백했다 차였냐?’
‘차, 차이긴 누가 차여요!’
‘뭐야? 그럼 혹시 환승이냐? 누구야? 혹시 미나 누나는 아니지? 은포야, 다른 사람은 다 괜찮은데, 미나 누나는···.’
‘아, 거참! 그런 거 아니라고!’
‘그럼 왜?’
‘그냥···. 야구에 집중해보려고요.’
‘······뭐?’
‘그래서 말인데···. 훈련 좀 도와주세요.’
‘······누구냐, 너?’
여은포가 야구에 집중하겠다니···!
훈련을 도와달라니···!
정말 믿기지 않았다.
왜냐면 여은포가 평소에 하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능 없는 놈들이나 훈련을 열심히 하는 거죠. 저처럼 진짜 천재는 대충해도 최강이거든요. 흐흐.]
정말 얄미웠지만···.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여은포는 농땡이를 부리며 훈련을 하고도 전반기 세이브 1위를 기록했으니까.
여은포에게 그렇게 놀다가 나중에 훅 갈 수도 있다고 경고를 하긴 하지만···.
솔직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 같았다.
그 정도로 여은포의 재능은 사기였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순간의 변덕이라고 생각했다.
‘SNS에서 감동 글이라도 읽은 건가? 삼 일은 하려나···.’
그랬는데···.
여은포가 훈련에 임하는 태도와 전처럼 자존심을 부리지 않고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는 모습을 보며 생각이 점점 바뀌었다.
그러다가 여은포가 SNS를 탈퇴했다는 걸 알고 확신했다.
‘우리 은포가 달라졌어요!’
안종렬은 배트를 잡고 명상 중인 여은포를 보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생각했다.
‘저 녀석···. 오늘 사고 칠 거 같네.’
이때 여은포는 한수가 고깃집에서 해줬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여자는 말이야. 본인 일에 최선을 다하는 남자한테 매력을 느끼곤 해.]
[매력 좀 높여보는 게 어때? 이대로는 최혜선 마음 얻는 거 영영 불가능할걸?]
[지금보다 매력적인 남자가 되려고 노력해. 그래서 최혜선이 널 돌아보게 만들어.]
[은포야, 멋진 남자가 돼라.]
‘그동안 최선을 다했어.’
비록 며칠뿐이지만···.
‘이렇게 열심히 훈련했던 적은 살면서 처음이야.’
심지어 퍼거슨 감독의 명언을 읽고 급발진해 SNS까지 탈퇴했다.
두 번 다시 SNS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라커룸에 와서 배트를 잡고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여은포는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재규어스랑 3연전만 끝나면 복구해야지.”
최혜선 SNS의 스토리나 피드도 눈팅해야 한다.
한수도 최혜선을 뺏길까 봐 애간장 태우며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관심을 접으라는 소리는 없었다.
그리고···.
‘사람이 훈련만 하고 살 순 없잖아.’
그때 장문원이 다가와 물었다.
“은포야, 오늘 무슨 일 있어?”
“딱히. 왜?”
“분위기가 심각해 보여서. 혹시 투타 겸업이 부담스러운 건···.”
“문원아, 넌 아직도 나를 모르냐? 내가 이런 걸로 부담을 느낄 거 같아?”
그 말에 장문원은 피식 웃으며,
“하긴···. 네가 그럴 일은 없지.”
“그럼, 그럼.”
“알겠어. 그럼, 경기 준비 잘해.”
장문원이 몸을 돌리렸다.
여은포는 장문원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야.”
“······?”
“···그···. 내가 야구부 때랑···. 그 왜···. 트리플스 입단할 때···. 너한테···.”
장문원은 어색하게 말을 이어가는 여은포를 보며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설마···.’
여은포는 어색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더니,
“젠장···. 그때 내가 미···.”
그때 장문원이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은포야.”
“응?”
“우리 내기할까?”
“내기···?”
“오늘 안타를 더 많이 치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 어때?”
“소원? 갑자기 무슨···.”
장문원은 빙긋 웃으며 물었다.
“왜 겁나?”
여은포는 움찔하더니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우리 문원이, 멘트가 아주 상큼하네? 겁? 내가? 하하! 오케이! 알겠어! 내기해!”
그렇게 여은포와 장문원의 내기가 시작됐다.
그리고···.
.
.
.
-따아아악!
[장문원! 쳤습니다! 초구를 노린 강력한 스윙! 큽니다!]
[타구가 무척 빠릅니다! 중견수 달리지만 이건···!]
[아~ 넘어갔습니다! 장문원 선수! 후반기 첫 타석을 홈런으로 장식합니다!]
[김유빈 선수에 이어서 장문원 선수도 홈으로 들어옵니다. 1회 말! 타이탄스, 재규어스를 상대로 2점 앞서 나갑니다.]
[재규어스 선수들 정신 차려야 합니다. 타이탄스가 1회에 점수를 내기 시작하면 답이 없거든요?]
장문원은 1사 주자 2루 상황에서 3번 타자로 타석에 서서 초구를 노리고 홈런을 쳤다.
타이탄스 코치진과 선수들은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장문원을 반겼다.
단 한 사람, 여은포만 제외하고 말이다.
여은포는 박동준 코치와 대화를 나누는 장문원을 보며 생각했다.
‘네가 치면 나도 친다. 홈런!’
이어서 4번 타자 이소호가 안타를 쳐서 1루로 출루했고, 5번 타자 윤진호는 플라이 아웃을 당했다.
그리고 마침내···.
6번 타자 여은포가 타석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