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오랜만입니다. 지스 부가주님.”
“잘 지냈습니까? 로제스 황실 마법사님.”
지스는 로제스 르왈린에게 인사했다.
로제스 르왈린.
현 르왈린 가주와 사촌 관계로 제국 황실 마법사 지위를 역임하고 있었다.
“아바드와 첼시, 그리고 셀리아가 같은 학년으로 루메른에 입학하다니. 하하하! 같은 제국의 사람으로서 경사가 아닐 수 없군요!”
가주의 자식인 아바드는 열여섯. 첼시는 열넷이다.
제국 입장에서는 나라를 대표하는 세 인재가 같은 해에 입학했으니 좋은 일이다.
하지만 제국 최고 명가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두 가문 입장에서는 피 말리는 경쟁의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서부 입학시험 수석은 아바드가 차지하겠지만요.”
“확신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분명 아바드와 셀리아는 수석을 다툴 실력자입니다.”
로제스가 힐끔. 단상 위에 서 있는 시험관 알비를 보았다.
“이번 시험은 이례적입니다. 변수가 많죠. 그리고 아바드에게는 첼시가 있습니다.”
두 남매가 협력해서 셀리아를 쓰러트릴 것이라는 말이다.
첼시는 응시자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
그런 그녀가 아바드를 돕는다면 셀리아도 손쓸 도리가 없다.
‘여러모로 불리하지만…… 그렇다고 비관적이라고도 할 수 없지.’
이쪽에도 조커가 있었다.
레오를 떠올리며 지스가 의미심장하게 웃을 때였다.
허공에 거대한 정사각형의 마법 거울이 나타났다.
오오오- 관객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영웅의 세계내부를 볼 수 있는 마법이다.
여기에 시험 상황이 중계되었다.
마법 거울이 빛을 발하더니 화면이 떠올랐다.
그 화면을 본 순간.
“풉-!”
지스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고 로제스는 눈을 부릅떴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연하늘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손과 발이 묶인 채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소녀의 밑에는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넝쿨을 쥔 백발 소년이 사악하게 웃으며 줄 조절을 하고 있었다.
***
첼시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양손과 양발이 한 대 묶인 채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이, 이게 뭐야?”
“깼냐? 깬 김에 묻자. 나한테 협력할래? 안 할래?”
“날 탈락 시키지 않고 이런 조잡한 포박으로 묶어 둔 걸 후회하게 해주겠어.”
표독스럽게 말한 첼시가 마력을 일으켰다.
‘어, 어라? 왜 마력이 안 움직이지?’
무언가 주변에서 마력을 억제하고 있는 느낌.
“설마 마력봉인진?”
“맞아. 내가 그렸어.”
“너 마검사였어?”
“아니. 난 지금 마력이 없거든. 그래서 봉인진 역시 그렇게 강하지 않아.”
“윽! 설마 마법 소양이 있을 줄이야! 하지만 마력이 깃들지 않은 봉인진 따위 얼마든지 풀 수 있어!”
“그렇겠지. 단, 정신 집중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때 얘기겠지만.”
“뭐? 히이익-!”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화끈함에 첼시가 기겁했다.
레오가 줄을 내리자 모닥불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자, 잠깐! 그만! 꺄아아아악! 내리지 마!”
“그래서? 협력할 거야? 안 할 거야?”
“르왈린 가의 사람으로서 제르딩거 사람에게 협력할까 봐!”
“그래? 엉덩이가 다 익어도 난 모른다?”
“꺄아아아악? 그만! 그만해!”
첼시가 버둥거렸다.
화끈한 열기가 엉덩이를 타고 올라왔다.
다급히 봉인진을 파훼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마력 봉인진은 상당한 마법적 소양을 요구한다.
마력이 깃들지 않은 봉인진도 푸는 데 고도의 정신 집중이 필요했다.
물론 첼시가 조금만 더 경험 많은 마법사였다면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실력에 비해 미숙했다.
레오는 그걸 제대로 꿰뚫어 본 셈이었다.
첼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입학시험은 외부에서 볼 수 있잖아! 이 꼴을 남들이 본다면!’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다!
화르륵-!
입고 있는 치맛단에 불이 붙었다!
“꺄아악! 뜨거! 그만! 그마아안!”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 협력하겠다고.”
“할게! 한다고! 르왈린의 이름을 걸고 협력할 테니까 제발 멈춰!”
눈에 눈물이 고인 첼시가 애원했다.
‘애라서 쉽네.’
큭큭- 웃으며 넝쿨을 잡아당겼다.
가까스로 풀려난 첼시는 울먹이며 불을 껐다.
‘서, 설마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진 않았겠지? 그래. 그럴 거야. 못 봤을 거야. 이제 막 시험 시작했으니 다른 사람들 비춰 줬을 거야.’
하지만 그녀에게는 매우 애석하게도 레오와 첼시의 모습이 가장 먼저 마법을 타고 송출되었다.
***
‘흐음.’
알비는 의욕 없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지금 펼쳐진 영웅의 세계는 그에게 특별했다.
자신의 영웅담의 첫 번째 페이지.
그가 영웅의 자리에 오르게 된 계기였다.
그 세계에서 고군분투하는 응시자들을 보며 알비는 생각했다.
‘하나 같이 수준이 낮아.’
알비가 쯧-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영웅이란 신에게 인정받은 자.
그래서 사람들은 영웅을 고결하고 늠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자들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알비는 그러한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신경질적이고 효율을 추구하는 성격이다.
비효율적인 건 싫다.
귀찮은 것도 싫었다.
그래서 이 시험을 낸 것이다.
마의 비경에서의 생존.
살아남은 자는 강하다.
지극히 심플하면서도 옥석을 가리기 좋은 시험이다.
그리고 그 효과는 드러났다.
경쟁자를 탈락시키는 것.
몬스터와 싸워 생존.
이 시험에서는 주어진 두 가지 선택지.
대다수 응시자의 선택지는 경쟁자를 탈락시키는 것이었다.
‘어리석기 짝이 없어.’
자기들 딴에는 머리를 굴렸을 것이다.
순위권으로 치고 올라가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그리고 마물의 숲에 존재하는 몬스터.
오크, 놀, 고블린들은 응시자들 수준에서 크게 위협이 되지 못하는 수준이다.
물론 트롤은 위험하지만 개체수가 적어 만나기 쉽지 않다.
여기서 수험생들이 범한 실수는 두 가지.
첫 번째.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알비는 시험 내용을 이야기해줬다.
하지만 통과 기준은 제시한 적이 없다.
즉, 경쟁자를 탈락시키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다.
두 번째. 마물의 숲에 대한 오판이다.
많은 강대국이 군대를 일으켜도 정복하지 못한 숲이다.
하급 몬스터라고 할지라도 끝없이 싸운다면 지친다.
그런 상황에서 서로 협력하지 않고 싸운다니.
실제 상황이었으면 전멸이다.
‘물론 압도적인 실력이 있다면 몬스터 토벌과 경쟁자 탈락. 두 가지를 모두 취할 수 있지.’
알비가 마법 거울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불꽃의 오러를 검에 두르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셀리아 제르딩거. 과연 소문대로군.’
셀리아는 트롤 세 마리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연하늘색 머리를 가진 소년이 영창을 하고 있다.
‘아바드 르왈린도 마찬가지야. 제국은 미래가 밝겠군.’
앙숙 관계인 둘은 우연히도 영웅의 세계에 들어서자마자 처음 만났다.
단신으로 이번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압도적인 실력을 보유한 두 사람은 경쟁이 아닌 협력을 선택했다.
이 시험에 대해서 정확하게 꿰뚫어 봤기 때문이다.
‘저 둘이라면 문제없겠어. 오히려 우열을 가리기 힘들겠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1, 2등은 무조건 저 두 사람이라 생각하는 사이.
또다시 화면이 바뀌었다.
마법 거울에 비친 응시생은 오크와 싸우고 있었다.
‘이름이 레오 플로브였던가?’
마법 거울의 화면에 가장 먼저 잡힌 수험생.
그리고 이번 시험을 통틀어 가장 엽기적인 행동을 한 수험생.
대다수 사람은 르왈린 가문의 아가씨를 묶고 모닥불 위에 태우려 했던 레오를 웬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하고 있다.
하지만 알비는 레오에게 높은 점수를 줬다.
‘방법이야 어쨌든 첼시 르왈린의 협력을 얻어 낸 건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지.’
그래서 이번 시험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보여주는 모습은 기대 이상이다.
아니, 영웅인 그도 놀라울 정도였다.
‘셀리아 제르딩거와 같은 강력함과 화려함은 없어, 하지만…….’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오크를 베어 넘기는 모습에서는 끝을 알 수 없는 노련미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예상치 못한 다크호스로군.’
***
푸확-!
“취아악-!”
심장이 꿰뚫린 오크를 뒤로하고 레오가 몸을 회전시켰다.
자연스럽게 검이 뽑혔다.
원심력을 담아 휘둘러진 검은 정확하게 뒤를 노리던 오크의 목을 날려 버렸다.
오크 열 마리와 조우자 하자마자 레오는 바로 뛰쳐나갔다.
오크는 지능이 뛰어난 몬스터라 틈을 주면 진형을 짜고 덤벼온다.
그렇게 되기 전에 재빠르게 선수를 친 것이다.
레오가 선두에 오크들을 베어 넘기는 사이 첼시가 주문을 외웠다.
“윈드 애로우.”
완성된 마법을 쐈다.
퍼버버벅-!
“꾸아아아악!”
“취에엑!”
마법에 관통당한 오크들이 비명을 질렀다.
마법으로 인해 일곱 마리 오크가 죽었다.
마지막 오크의 목을 깔끔하게 그어 버린 레오가 검에 묻은 피를 털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서 걸어갔다.
그 뒤를 따르던 첼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투가 편해.’
배틀 메이지를 지망하고 있다 해도 마법사는 마법사.
가장 효율 좋은 전술은 역시 전방을 뛰어난 전사에게 맡기고 후방에서 화력지원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첼시는 레오와 호흡이 매우 잘 맞는다고 느꼈다.
겁박당해 본의 아니게 레오와 파티를 맺을 때는 분했지만 세 번의 전투를 수행한 지금은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만이 아니다.
마법이 가장 큰 효율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교묘하게 몬스터들을 한곳으로 몰아넣는다.
마법은 광역 공격.
당연히 적들이 뭉쳐 있을수록 효과도 크다.
“제법이네, 오러도 쓰지 않고 오크를 간단하게 요리하다니.”
“난 오러 쓸 줄 몰라.”
“뭐라고?”
“아직 안 배웠거든.”
‘오러도 쓰지 않고 저렇게 움직이는 게 가능해?’
의문이 드는 한편 아까 자신이 당한 이유도 이해가 됐다.
‘오러를 사용하지 않으니 마나 감지가 안 된 거였어.’
첼시가 허리에 턱- 손을 올리더니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비밀을 그렇게 밝히다니! 어리석구나!”
“지금 네 실력으로는 날 제압 못 하니까 걱정 없어.”
“호호호! 허세 부리긴.”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레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솔직히 넌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어.”
“응?”
“마력도 강하고 다양한 주문도 알고 있겠지.”
“솔직하게 칭찬한다고 너한테 떨어지는 건 없어.”
새침하게 말했지만 느닷없는 칭찬에 기분이 좋았다.
“근데 그게 문제야.”
“응?”
“실력이 너무 좋아서 바람 마법의 본질을 제대로 못 살리고 있어.”
첼시는 강력한 마법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전투 방식을 가지고 있다.
바람 마법의 본질은 그게 아니다.
“우리 가문의 자랑은 바람 마법이야. 르왈린 앞에서 바람 마법에 대해 논하다니. 가소롭네.”
첼시가 비웃었다.
레오의 지금 발언은 용납할 수 없다.
그녀가 룬어로 주문을 외며 지팡이를 한 곳으로 뻗었다.
“윈드 브레이크.”
“그어어어어어!”
거친 바람의 칼날이 수풀로 날아들더니 숨죽이고 있던 트롤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바닥에 쓰러진 트롤이 꿈틀거리더니 축 늘어졌다.
레오를 주눅 들게 하기 위해 미리 캐스팅해둔 상위 주문으로 힘자랑을 한 첼시였다.
‘마법에 대해서 조금 안다고 까불기는! 지금 걸 보고 깜짝 놀랐겠지?’
우쭐한 표정을 짓는 첼시.
그 모습을 보며 레오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바람 마법은 그렇게 쓰는 거 아닌데.”
바람 마법의 가장 큰 장점은 변화무쌍.
단순히 위력으로 찍어 누르는 건 바람 마법의 특색을 가장 못 살린 공격 방법이다.
레오의 말에 첼시가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획 돌렸다.
‘하긴. 지금 난 마법도 못 쓰는데 이런 말 하면 어이가 없겠지.’
전생에는 어떨지 몰라도 지금은 아직 마법을 익히지 못했다.
피식 웃은 레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첼시의 눈도 동그랗게 변했다.
주변에 트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하지만 시체의 상태가 이상했다.
마치 생기를 빨리기라도 한 듯 삐쩍 말라 있었다.
“뭐에 당한 거지? 마물의 숲에 생기를 빨아먹는 몬스터는 없을 텐데?”
첼시가 당황한 표정으로 시체를 살폈다.
시체를 만져본 레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설마.’
“일단 셀리아와 네 오빠랑 합류하는 게 우선일 것 같아. 이번 시험, 대충 통과 기준이 뭔지 알겠어.”
“응? 뭔데?”
놀란 표정을 짓는 첼시를 보며 레오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 세계를 공략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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