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2
루메리아 시티.
대륙의 중앙에 있는 이 대도시는 단순히 지리적 이유뿐만 아닌 상징적 의미에서도 세계의 중심이라 불리는 곳이다.
그런 루메리아 시티에 있는 워프 게이트 중 한 곳이 빛을 발했다.
-손님 여러분, 루메리아 시티에 도착했습니다. 잊으신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시고 게이트에서 하차해주시기 바랍니다.
안내 방송과 함께 레오가 게이트에서 내렸다.
워프 게이트가 설치된 곳은 도시 루메리아 시티 외곽 고지대.
게이트 입구를 나서는 순간 루메리아 시티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휘오오오오-!
레오의 하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발전된 거대한 대도시의 풍경.
그리고 저 멀리, 바다라 해도 믿을 만큼 거대한 호숫가 보였다.
평소라면 자욱한 물안개가 껴 있을 호수는 너무도 맑았다.
그 덕에 호수 끝자락에 아주 희미하게 보이는 거대한 성, 루메른 아카데미가 보였다.
‘이틀 뒤 저곳으로 가는구나.’
입학시험을 치르고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매년 입학시험이 그렇듯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다.
그중 단연 입에 오르내리는 곳은 레오가 치른 서부 지방 시험이었다.
단 40명의 합격자 수를 기록한 덕분에 한동안 시끄러웠다.
‘내 알 바는 아니지.’
레오는 입학 준비로 바빴다.
그리고 오늘 한 달 동안의 준비를 끝내고 루메리아로 왔다.
플로브 가문에서 함께 온 이는 없었다.
루메른의 입학식은 외부인이 참관할 수 없다.
‘가서 많은 걸 배우고 오거라.’
‘아들, 안 간다고 섭섭해하진 않을 거지?’
마중 나왔던 데이드와 레이나를 떠올리며 레오가 웃었다.
부모님은 귀족이지만 사치를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다.
‘의미도 없이 워프 게이트에 돈을 쓰느니 그 돈을 영지 복지를 위해 쓰겠다는 분들이지.’
물론 레오도 그런 부모님의 의견에 공감했다.
워프 게이트를 나선 레오는 루메리아 시내의 번화가라고 할 수 있는 쿠라주 거리에 들어섰다.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레오! 여기야, 여기.”
허리까지 오는 흑발을 포니테일로 묶고 고급스럽고 활동적인 외출복을 입은 셀리아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모은 그녀는 레오 앞에 와서 생긋 웃었다.
“잘 지냈니?”
“못 지낼 건 없지. 그건 그렇고 수석 축하해.”
“그 버터랑 공동 수석이라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수석은 수석이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우아하게 옆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제 나를 좀 더 존경의 눈빛을 담아 보도록 해.”
“토악질하던 모습을 봐서 존경은 무리겠는데?”
“야!”
셀리아가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으휴! 진짜! 한마디도 안 져요!”
레오를 노려보던 셀리아가 한숨을 푹 쉬었다.
“지스 삼촌은?”
“저녁에 오신다고 하셨어. 그때까지 쿠라주 거리에서 쇼핑이나 하려고.”
쿠라주 거리는 루메른에 필요한 것들을 판매하고 있다.
교복을 시작으로 교과서와 각 학과 별로 필요한 교재 외에도 무구, 지팡이, 소환 촉매 등이 유통되는 곳이다.
“너 교복이랑 교과서 아직 안 샀지?”
“응.”
“오늘 사면 되겠네. 따라와, 특별히 내가 따라가 줄게.”
***
셀리아가 레오를 이끌고 가장 먼저 간 곳은 대로에 있는 커다란 옷 가게였다.
바깥에서 볼 수 있는 유리로 된 진열장에 루메른의 교복이 전시되어 있었다.
[블레스리거]라는 상표가 보였다.
“비싸 보이는데.”
“당연하지, 1000년 동안 루메른 교복을 만들어 온 가게니까.”
루메른에 필요한 옷은 크게 세 종류다.
행사 때 입는 정복.
수업 때 입는 교복.
실습 때 입는 실습복.
그리고 모든 옷에는 최소한도의 스펙이 있다.
그 스펙을 맞추기 위해서는 천에 마나가 깃든‘마나 클로스’ 가 필요했으며 마나 클로스에 따라 교복의 품질이 나뉜다는 게 셀리아의 설명이었다.
“그리고 블레스리거는 명품으로 이름 높아. 나도 여기서 맞췄어.”
설명을 끝낸 셀리아가 매장으로 들어갔다.
딸랑- 딸랑-
“블레스리거에 어서 오십시오.”
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종업원이 상냥하게 웃으며 문을 열어 줬다.
안으로 들어가자 몇몇 손님이 보였다.
그중에는 루메른 입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도 있었다.
진열대를 구경하고 있을 때 안에서 중년 여인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셀리아 아가씨. 당점을 다시 방문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우아하게 인사한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혹시 맞춘 교복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요?”
“아니요, 오늘은 남학생 교복 한 벌을 맞추러 왔어요.”
셀리아가 웃으며 레오를 가리켰다.
“올해 나랑 입학하거든요.”
“아, 그러시군요. 올해 제르딩거에서는 아가씨께서만 입학하시는 줄 알았는데. 다른 도련님도 계셨군요.”
입가를 가리며 탄성을 내지른 재단사는 레오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네라라고 합니다. 당점 블레스리거에서 재단사를 하고 있죠.”
레오는 그녀가 마법사라는 걸 꿰뚫어 봤다.
‘하긴, 마나가 깃든 천을 다루려면 마법사여야 하겠지. 그래도 마법사가 일개 재단사라…… 세상이 좋아지긴 했네.’
“도련님, 치수를 제겠습니다.”
네라는 품에서 줄자로 꺼내 레오의 치수를 쟀다.
“지망 학과는 기사학과 지망이시죠?”
“예.”
“혹시 사용하는 오러의 속성은 무엇인가요?”
오러는 오러 심법의 특성에 따라 속성이 나뉜다.
그리고 오러의 속성에 따라 사용되는 마나 클로스의 배합이 달라진다.
상극 속성에 대한 방어력을 높인다던가.
아니면 같은 속성의 힘을 더한다던가.
물론 마나 클로스로 극적인 효과를 낼 순 없지만 작은 효과라도 무한 경쟁인 루메른에서는 도움이 된다.
“무속성 마나 클로스로 해주세요.”
“예?”
네라가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옆에서 생글생글 지켜보던 셀리아는 미간을 좁혔다.
레오는 빙긋 웃으며 다시 말했다.
“무속성으로 해주세요.”
무속성 마나 클로스.
말 그대로 아무런 속성을 띄지 않은 수수한 상태의 천을 말한다.
당연하지만 이런 걸 원하는 손님은 없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손님이 원한다면 해야 한다.
치수를 재고 정보를 받은 네라는 재단실로 들어갔다.
“갑자기 웬 무속성? 우리 가문의 오러를 배울 건데 불꽃 속성의 마나 클로스로 교복을 짜는 게 더 좋지 않아?”
“그냥, 생각한 게 조금 있거든.”
‘무속성이라는 말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소리기 하지.’
물론 제르딩거의 오러 심법은 익힐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 주력으로 삼을 생각은 없다.
“그나저나 나 돈 없는데.”
“치사하고 쪼잔하게 너보고 내라고 하겠니? 아버지께서 네 이야기를 듣고 학교생활 필요한 비용을 모두 제르딩거 가문에서 지원하기로 했어.”
그 말에 레오는 레이나의 말을 떠올렸다.
‘괜찮아, 괜찮아. 오라버니는 쫌생이긴 해도 돈은 많거든. 그리고 쪼잔하게 굴면 나도 가만 안 있지.’
아버지 데이드가 레오의 입학 비용과 교복, 교재 구입에 필요한 비용에 대해 고민할 때 한 말이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제르딩거 가문에 있을 당시 있던 개인 자산은 모두 놔두고 왔다고 한다.
가문을 떠났어도 가문과는 별개로 쌓은 재산이니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나 뭐라나.
‘어머니 성격이면 제르딩거로 가서 싹 엎어버리겠지.’
가주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지원을 해준 것이리라.
잠시 후- 일류 재단사답게 네라는 순식간에 맞춤 교복을 만들어 가져왔다.
옷을 입어 본 후 간단한 치수 조정을 끝냈다.
이후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완벽하게 교복을 만들어 온 네라가 고개를 숙였다.
“교복은 숙소로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계산을 끝내고 블레스리거를 나왔다.
“자, 다음은 교과서 사러 갈까?”
셀리아가 레오를 이끌고 거대 서점으로 향했다.
사야 하는 건 전교생이 듣는 필수 교과서와 전공 교과서였다.
레오는 기사학 전공서 뿐만 아니라 마법학, 소환학 전공서까지 모조리 쓸어 담았다.
“벌써부터 결투 준비를 하는 거야? 철두철미하구나?”
호오- 호오-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셀리아를 보며 레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배울 건데.’
물론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말해봤자 미친놈 보듯 볼 게 뻔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교재까지 모두 샀다.
이후에는 루메리아를 구경했다.
루메리아는 대도시였고 그만큼 구경거리도 많았다.
구경도 즐거웠고 거리에서 노점 음식을 사 먹는 것도 재미있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셀리아를 보며 레오가 피식 웃었다.
‘저런 걸 보면 아직 애군.’
제르딩거 가문의 여식으로서 항상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온 셀리아지만, 동갑인 레오와 어울리다 보니 소녀다운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그렇게 저녁을 먹을 시간이 돼서야 레오와 셀리아는 숙소로 돌아왔다.
“왔느냐?”
“삼촌!”
숙소에는 지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조마조마한 얼굴로 묻는 셀리아의 머리를 흐트러트려 준 지스가 레오에게 다가갔다.
“레오, 한 달 동안 잘 지냈느냐?”
“예.”
“가문 회의 결과가 나왔다.”
입학시험이 끝나고 지스는 가문에 레오가 [피닉스 브레스]를 배울 수 있도록 건의했다.
인정받은 가문의 사람만이 익힐 수 있는 비전 심법을 피를 이었다고는 하나 외부인인 레오가 익히느냐 마느냐는 상당히 민감한 안건이었다.
관련 회의는 한 달이나 지속되었고 그 결과가 오늘 나온 것이다.
“네가 [피닉스 브레스]를 계승할 수 있도록 허락이 떨어졌다.”
그 말에 셀리아가 활짝 웃으며 레오에게 말했다.
“축하해, 레오!”
레오와 함께 수련하고 시험을 친 셀리아는 레오가 제르딩거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문의 높으신 분들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조마조마했는데 마침내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비록 가문을 떠났지만 네가 누님의 아들이라는 점, 그리고…….”
지스가 씩- 웃었다.
“서부 시험을 통과했다는 점을 원로들이 높게 샀다.”
단 40명밖에 합격하지 못한 서부 시험의 악명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지스가 레오에게 붉은색 열쇠 하나를 꺼냈다.
아공간 열쇠였다.
“열어 봐라.”
그 말에 레오가 열쇠를 허공에 꽂고 돌리자 아공간이 열리며 책 하나가 튀어나왔다.
책을 펼쳤지만,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봉인되어 있군.’
어렵지 않게 봉인 구조를 이해했다.
“그곳에 네 피를 떨궈 봐라.”
레오가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낸 다음 페이지에 묻혔다.
그러자 글자가 떠올랐다.
“이제부터 그 책은 너만 볼 수 있는 책이다.”
“예.”
“입학은 모레다만…… 그 전에 한 번 익혀보는 게 어떠냐?”
“그래도 됩니까?”
“물론. 입학 전에 오러를 각성시킬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것도 없지.”
지스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
[피닉스 브레스]를 받은 레오는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넌 왜 왔냐?”
“지금부터 오러 수련할 거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내가 도와줄게.”
“순순히?”
“물론 ‘도와주세요, 아가씨.’ 이라고 해야겠지만 말이야.”
“나한테 져서 ‘도련님, 도련님’ 하던 녀석이.”
“야!”
자신의 흑역사를 언급하는 사촌을 향해 셀리아가 쿠션을 던졌다.
물론 레오는 그걸 얄밉게 피할 뿐이었다.
침대 위에 앉아 책을 펴는 레오를 보며 셀리아가 잔뜩 골이 난 표정을 지었다.
“우이씨! 정말 정중하게 부탁할 때까지 안 도와줄 거야!”
고개를 획 돌리는 셀리아를 보며 능글맞게 웃은 레오가 책의 내용을 확인했다.
‘과연.’
영웅 명가의 오러 심법다웠다.
매우 복잡하면서도 강력한 오러 심법이었다.
집중해서 [피닉스 브레스]의 마나 운용법을 읽어가는 레오를 보며 셀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쉬울 리 없지.’
지금 레오의 실력이라면 아마 보통 오러 심법은 매우 쉽게 입문할 것이다.
‘고모님께서 레오는 마나 공명 단계에는 이르렀다고 했으니까.’
오러 심법의 최대 난관이라고 할 수 있는 마나 공명을 할 줄 안다면 오러 심법은 이미 절반 이상 익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피닉스 브레스는 달랐다.
마나 공명뿐만이 아니라 마나 운용도 더해져야 한다.
그 운용을 통해 ‘불꽃’을 만들어내서야 비로소 첫 관문을 넘었다고 할 수 있다.
천재라 불리는 셀리아도 불꽃을 일으키는 데 일주일이나 걸렸다.
이제 좀 있으면 마나 운용법에 막혀서 난감해할 것이다.
셀리아가 히죽 웃었다.
‘날 하녀로 부린 빚은 갚아 주겠어. 이틀 정도 동안 아가씨라고 불러라고 해야지~’
지난번 굴욕을 갚아 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화륵-
레오의 몸에 불꽃이 일더니 이윽고 전신을 감싼다.
불꽃은 레오의 등 뒤에서 날개 형상을 취하나 싶더니 이내 흩어졌다.
“역시 쉽지 않네.”
[피닉스 브레스]에 입문하는 건 오러를 이용해 불꽃의 날개를 만드는 것이다.
셀리아는 그 단계에 이르는 이 주일이 걸렸다.
‘그런데 이 녀석은…… 이 녀석은…….’
“아가씨야. 이 부분 막히는데 쉽게 하는 노하우 같은 건 없냐?”
전혀 정중하지 않은 말투로 책 한 구절을 가리키며 묻는 레오를 보며 셀리아는…….
“야 이 미친놈아! 해도 해도 정도껏 해야지! 그걸 한 번 쓱 보고 해내는 또라이 같은 놈이 세상에 어딨어!”
……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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