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
“이름이 첸 시아라고 했지?”
“맞아요, 만나서 반가워요. 레오 플로브. 편하게 시아라고 불러요.”
“너도 편하게 불러.”
“그럼 레오 도령이라고 부르도록 할게요.”
눈매를 부드럽게 구부린 첸 시아는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소환술에도 일가견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요? 레오 도령은 어떤 분야인가요?”
“일단 정령술을 지망하고 있긴 하지.”
“그럼 앞으로 자주 보겠네요.”
빙그레 웃은 첸 시아가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촤르륵-!
작은 물방울이 뭉치더니 물의 하급 정령, 운디네가 나타났다.
“레오 도령은 어떤 정령과 계약을 했나요?”
“난 아직 계약은 안 했어.”
첸 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공이라면 모를까.
부전공을 선택한 학생 중에는 계약을 하지 않고 영력과 정령 친화력만 가진 학생도 제법 많았다.
첸 시아는 레오 역시 그런 케이스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정령 소환 때 조언이 필요하면 나한테 이야기해요. 도와줄 테니까.”
아무래도 남을 도와주는 걸 좋아하는 성격인 모양이다.
“부탁할게.”
“에헴. 그리고 레오 도령은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열다섯.”
“그럼 내가 연상이군요. 난 열일곱이에요.”
‘열일곱?’
레오가 묘한 눈으로 첸 시아를 보았다.
루메른의 입학 가능 나이는 14살부터 17살까지니 이상할 건 없다.
다만 첸 시아는 체구가 작고 얼굴이 너무 앳됐다.
‘첼시랑 동갑이라 해도 믿을 것 같은데 두 살 연상이라고?’
“레오 도령, 지금 나에게 뭔가 실례되는 생각을 했죠?”
눈을 게슴츠레 뜨는 첸 시아를 보며 레오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아니.”
“한 것 같은데?”
첸 시아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동안 수업 시간이 되었다.
앞선 기사학 수업과 달리 소환학 수업은 확실히 인원이 적었다.
하지만 수업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교수는 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슬슬 교수님이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안 오네요.”
첸 시아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레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왔네.”
그 말에 첸 시아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비룡이 날개를 펄럭이며 내려오고 있었다.
화악-!
지상에 다다른 비룡은 날개를 펄럭이며 바닥에 착지했다.
“우와! 블랙 와이번!”
“완전 상위 환수잖아!”
일평생 살면서 보기 힘든 희귀 환수의 등장에 학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블랙 와이번의 등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
키가 170cm가 될법한 여 교수는 등까지 오는 회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대충 묶어 야성적인 느낌을 주었다.
딱 달라붙는 가죽옷은 육감적인 몸매를 여실히 뽐냈고 허리춤에는 가죽 채찍을 달고 있었다.
“반갑다, 1학년 병아리들! 내 이름은 유라 마르닌! 앞으로 1년 동안 너희에게 소환학을 가르칠 교수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유라 교수님!”
학생 일동이 입을 모아 인사했다.
그 대답에 유라 교수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풍만한 가슴이 뭉클거리자 몇몇 남학생들이 얼굴을 붉혔다.
“부교수랑 조교들은 다 어디 간 거야!”
유라 교수의 외침에 부교수로 보이는 이가 한 명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교, 교수님. 준비 끝났습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부교수!”
“교수님이 갑자기 수업 일정을 바꾸시니까 그렇죠!”
“우는소리 하지 마! 내 수업 일정이 오락가락한 게 하루 이틀이야! 항상 대비하고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으악! 그런 억지가!”
부교수 카를로가 울상을 지었다.
‘막무가내네.’
레오를 포함한 학생 일동은 그렇게 생각했다.
과연 이런 교수 밑에서 뭔가를 제대로 배울 수 있을까?
물론 몇몇 남학생은 헤벌레 거리며 유라 교수를 보기 바빴다.
“어쨌든 준비는 끝났다는 거지?”
“예.”
“좋아, 애송이들. 여기에 있는 건 모두 소환사로서 재능이 있다는 소리겠지?”
유라 교수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어쭙잖게 소환학 재능을 가지고 부전공으로 들으려는 학생이 있다면 충고하겠는데.”
그녀의 안광이 위험스럽게 빛났다.
“지금 당장 나가라.”
그 말에도 움직이는 학생은 없었다.
입학시험을 통과한 학생들이 고작 이 정도에 겁먹고 수업을 나갈 리 없었다.
“없다 이거지? 그럼 이걸로 모두 각오한 걸로 알겠어. 모두 이동한다.”
첸 시아가 손을 들었다.
“어디로 이동하나요?”
“어디긴.”
빙긋 웃은 유라 교수가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조교들이 그리폰 무리를 이끌고 오고 있었다.
“실습 장소지.”
***
2인 1조로 그리폰에 탄 학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비행 가능한 환수는 드물다.
그만큼 소환하기 어렵기에 소환학 지망 학생 대다수가 그리폰을 타본 적이 없었다.
“루메른에 오길 잘했어!”
“나도 곧 이런 환수랑 계약할 수 있겠지?”
학생들이 꿈에 부풀었다.
“야! 이제 바꿔! 내가 조종할 거야!”
“아! 조금만 더!”
10분이 지나자 1학년 들은 누가 그리폰의 고삐를 잡느냐로 투닥거렸다.
“제법 재미있네요.”
그리폰 고삐를 쥔 첸 시아도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조심하는 게 좋아.”
“네?”
“그리폰은 처음 탄 사람이 다루기 힘든 환수거든.”
“이렇게 온순하고 말을 잘 듣는데요?”
“그거야 지금은 교수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까.”
선두에서 블랙 와이번을 타고 이동하는 유라 교수의 등을 힐끗 본 레오가 말했다.
“뭐, 저 교수 성격상 계속 그리폰들을 억제할 것 같지는 않지만.”
끼악-!
“어헉?”
레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리폰이 포효하기 시작했다.
레오와 첸 시아가 탄 그리폰 뿐만 아니다.
지금까지 학생들에게 순종적이던 그리폰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날뛰기 시작했다.
첸 시아가 당황해서 고삐를 잡아당겼지만, 통제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으악! 말을 안 들어!”
“얘 갑자기 왜 이래!”
“교수님! 살려주세요~!”
다른 학생들 역시 패닉에 빠졌다.
블랙 와이번을 탄 유라 교수가 깔깔 웃었다.
“그리폰도 제대로 못 다루면 루메른 학생이라고 할 수 있겠어? 어디 잘 제어해 봐!”
“그, 그런! 꺄악-!”
당황한 표정을 짓던 첸 시아의 손이 그리폰의 힘에 의해 쭉 딸려 나갔다.
엉덩이 역시 반쯤 안장에서 떠올랐다.
하지만 기사학 전공답게 바로 중심을 잡았다.
인상을 쓴 첸 시아가 손에 힘을 주어 본격적으로 힘 싸움을 하려 했다.
레오가 오른팔로 그런 첸 시아의 배를 감아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으헉? 레오 도령? 대담하게 무슨……!”
“그리폰은 자존심이 강해서 힘으로 제압하려고 하면 더 날뛰어.”
레오는 왼손으로 고삐를 잡고 부드럽게 당겼다.
그러자 고삐를 마구 잡아당기며 날뛰던 그리폰은 익숙하게 자신을 다루는 손길에 멈칫했다.
그러고는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훈련이 잘된 녀석이라 다루기 쉽네.’
처음 탄 사람에게야 다루기 어렵지 익숙한 사람에게는 이보다 다루기 편한 비행 환수도 없었다.
그걸 본 첸 시아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오 도령. 전에 그리폰을 다뤄 본 적이 있나요?”
“아니. 이번 생에는 처음인데.”
그 말에 첸 시아가 고개를 뒤로 돌려 레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레오가 왜? 라는 얼굴로 첸 시아를 보았다.
“사실인 모양이네요.”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린 첸 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그리폰을 잘 다뤄요?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나요?”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지.”
“흠! 과연 입학식에서 그런 도발을 할 만한 실력을 가졌군요.”
첸 시아가 마음에 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레오는 신경 쓰지 않고 첸 시아를 더욱 잡아당겼다.
“속력을 좀 더 내 볼 건데 떨어져 있지 말고 바짝 붙어 봐.”
“연상의 숙녀에게 너무 서슴없는 거 아닌가요?”
“연상의 숙녀? 아아. 미안.”
“게다가 무례하기까지.”
눈을 게슴츠레 뜬 첸 시아가 자신의 배를 감은 레오의 손등을 꼬집었다.
하지만 레오에게 별다른 의도가 없다는 걸 깨닫고 편하게 레오의 가슴팍에 등을 기댔다.
준비가 끝나자 레오가 외쳤다.
“가자!”
레오가 고삐를 당기자 삐에에엑-! 하고 포효한 그리폰이 높이 날아올랐다.
“오오-!”
자신이 고삐를 쥐었을 때와 명백하게 다른 움직임에 첸 시아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어쭈구리?”
유라 교수도 눈을 빛냈다.
“학생 주제에 그리폰을 다루는 게 엄청 능숙한데? 저 녀석 누구야?”
“어디 보자, 레오 플로브 학생이군요.”
“레오 플로브? 학생 대표잖아? 기사학과 지망이라고 들었는데?”
“실제로 이전 수업에서 중부 수석 듀란 모이라와의 대결에서 이겼죠.”
“그런 녀석이 그리폰을 저렇게 다룬다고? 개인 그리폰 같은 게 있나?”
“아뇨, 작은 왕국의 귀족가 출신인데 그리폰을 소유할 정도의 가문은 아닙니다.”
학생 명부를 보며 카를로가 착실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재능이란 거잖아?”
유라 교수가 눈을 반짝이며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았다.
“저 정도면 기사학 주전공이 아니라 소환학 주전공을 해도 될 수준인데?”
“교수님, 마음은 알겠는데요. 기사학과 교수님들이 가만히 안 있을 텐데요?”
“가만히 안 있으면 지들이 어쩔 거야? 기사 재능을 가진 학생들이야 널리고 널렸지만 소환학은 아니거든? 그리고 어차피 지금은 전공 선택도 안 한 상태잖아?”
유라 교수는 호전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카를로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별일 없어야 할 텐데.’
그리폰을 타고 도착한 곳은 루메리아 호수의 한 곳에 있는 거대한 섬이었다.
바다라고 해도 믿을 만큼 거대한 루메리아 호수에는 이런 섬이 여러 군데 있었다.
그래서 실습 장소로 자주 애용되곤 했다.
“웃차.”
첸 시아가 날랜 몸놀림으로 그리폰에서 내렸다.
레오가 내리자 그리폰이 뺨에 부리를 비벼왔다.
그런 그리폰에게 먹을 걸 주려고 나무 열매로 손을 뻗던 레오가 멈칫했다.
나뭇가지에 있는 커다란 회색 깃털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레오 도령, 왜 그러나요?”
“아무것도 아니야.”
레오가 깃털을 품에 갈무리했다.
그러는 사이 다른 학생들도 섬에 도착했다.
“으헉!”
“더, 더럽게 힘드네.”
“나 토할 것 같…… 웁!”
대부분 학생은 그리폰을 타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진 상태였다.
물론 멀쩡한 이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남부 시험 수석, 워레든 타이든이었다.
그리고 살짝 오만해 보이는 인상의 여학생 역시 멀쩡했다.
손톱 정리를 하는 그녀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다른 학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학생은 레오만큼이나 그리폰을 능숙 다루었다.
‘워레든, 엘리자. 얘들은 확실히 이번 1학년 소환학과의 에이스를 맡아 줄 녀석들이야!’
유라는 두 학생을 보며 눈을 빛냈다.
“테이밍 능력이 출중한 학생들이 몇몇 있군. 언제까지 쓰러져 있을 거냐! 다들 집합해!”
만족스럽게 웃던 유라 교수가 소리치자 학생들이 헐레벌떡 모였다.
정렬한 학생들을 보며 유라 교수가 히죽 웃었다.
“오늘은 실기시험을 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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