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5
레오의 특별 체력 단련을 본 칼은 그대로 도망쳤다.
첫날 레오와 함께 훈련을 한 첼시는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었다.
처음에는 싫다고 한 셀리아는 포기하고 레오와 훈련에 임했다.
다행인 건 이미 체험해 봤던 터라 처음보다는 버틸만하다는 것이었다.
“이, 이게 정말 효과가 있어?”
“있어. 레오의 훈련은 무식한 주제에 쓸데없이 체계적이거든.”
여자 기숙사로 돌아가며 묻는 첼시에게 셀리아는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첼시를 향해 악의에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지옥에 온 걸 환영해, 첼시 르왈린.”
그 미소에 첼시는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잡담을 나누는 거 보니 할 만하구나?”
“웃기지마! 이 악마야!”
레오가 웃으며 말하자 셀리아가 후들거리는 팔로 레오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그렇게 누군가는 꿀 같은 주말.
누군가에게는 지옥 같은 주말이 지나고 루메른에서 두 번째 주가 되었다.
칼은 책상에 엎어져 팔다리를 떨고 있는 첼시에게 물었다.
“첼시, 살아 있냐?”
“아니…… 죽을 것 같아.”
“이거. 내가 널 위해서 어제 루메리아에 들어서 최고급 파스를 구해 왔어.”
“날 위해서?”
“응, 우린 같은 반 친구잖아.”
칼이 첼시에게 근육 회복에 좋은 파스를 건넸다.
첼시가 살짝 감동한 얼굴로 파스를 받았다.
그런 첼시의 얼굴에 칼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 손의 의미는 뭐야?”
“너에게는 특별히 30% 할인된 가격으로 팔게. 친구니까.”
“나가 죽어.”
칼의 얼굴에 파스를 집어 던진 첼시가 싸늘하게 말했다.
킬킬 웃은 칼이 파스를 첼시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래도 힘내, 배틀 메이지 지망이면 해야 하는 거잖아?”
“같이 할래? 내가 같이할 수 있게 레오 오빠한테 부탁해볼게.”
“아, 아니. 난 됐다.”
칼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은 후 레오에게 속삭였다.
“적당히 굴리지 그랬냐?”
“봐주면서 한 건데?”
“그게 봐준 거라고?”
칼은 앞으로 절대 레오와 훈련을 안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나저나 우리 담임 교수님은 어떤 분일까?”
의자에 앉은 칼이 깍지를 껴서 뒤통수에 가져다 댔다.
“예쁜 여자 교수님이면 좋겠는데.”
드르륵-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교문이 열리더니 후줄근하게 입은 중년 남성이 출석명부를 들고 반으로 들어왔다.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진하게 드리운 그를 보며 당황한 학생들이 재빨리 자리로 돌아갔다.
교탁에 선 남자는 출석부를 대충 내려놓고 분필을 들고 자신의 이름을 칠판 위에 썼다.
탁- 탁탁.
칠판에 적힌 이름을 확인한 5반 학생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만나서 반갑다. 너희들의 담임 교수를 맡은 할린드 에드몬이다.”
그는 루메른 교사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4학년이나 5학년 같은 고학년을 주로 맡는 교사!
별명은 통곡의 벽!
루메른에서 가장 많은 학생을 퇴학시키는 교수!
그것이 바로 할린드 에드몬이었다.
심상치 않은 반 친구들의 반응에 레오가 앞자리 앉은 칼에게 작게 물었다.
“유명한 교수님이야?”
“유명한 정도가 아니라 루메른에서 20년 가까이 교수직을 맡고 있으신 분이야.”
소곤소곤 대답한 칼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분 제자 중에 영웅에 오른 사람도 많지만 그만큼 퇴학당한 선배들도 많아. 원래 고학년 위주로 담임을 맡는 분인데 왜 1학년 담임을……!”
할린드는 출석부를 펼쳤다.
“지금부터 출석을 부르도록 하지. 칼 토마스.”
“네, 넵!”
“일리아나 라덴.”
“예.”
담임 교수가 출석을 부르는 것뿐임에도 불구하고 5반 학생들은 긴장된 반응을 보였다.
45명 중 레오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호명되었다.
“레오 플로브.”
“네.”
텁-!
출석부를 덮은 할린드가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왜 1학년의 담임을 맡았는지 궁금해하는 학생이 있을 거다.”
웃옷 주머니에 대충 손을 찔러 넣은 그는 의욕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이번 기수는 너희 선배들에 비해 입학시험 성적이 평균적으로 높은 편이다. 그래서 루메른 윗선의 기대를 받고 있지.”
전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학생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기대받는다는 사실에 교실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때 여학생 한 명이 손을 들었다.
“뭐지? 일리아나 라덴.”
“다른 반 교수님들도 원래 1학년을 안 맡던 분들인가요?”
“그렇다.”
“담임 교수 배정은 무작위인가요?”
“아니, 각자 원하는 반을 선택했고 나는 너희를 골랐지.”
할린드는 단순히 학생을 퇴학시키기로 유명한 것만이 아닌 뛰어난 학생을 많이 키워낸 유능한 교수이기도 하다.
그런 교수가 자신들을 선택했다는 말을 들은 5반 학생들은 들뜰 수밖에 없었다.
“우리 반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너희가 열 개 반중 입학시험 평균 점수가 가장 떨어지기 때문이다.”
들떴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내가 가장 많은 학생을 퇴학시키는 이유를 알고 있나? 일리아나 라덴.”
“아, 아뇨.”
“효율 때문이다.”
할린드 교수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일리아나를 바라보았다.
“가망성이 없는 학생은 일찌감치 걸러내고 가능성이 있는 학생을 집중해서 가르치는 게 좋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날고 긴다는 루메른의 5학년들도 벌벌 떨게 만드는 할린드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일리아나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레오를 제외한 5반 학생 전원이 숨을 죽이고 할린드의 눈치를 볼 때였다.
그런 일리아나를 구원한 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 안경을 쓴 이십 대 중반의 여성이었다.
“아이참! 할린드 교수님. 첫날부터 학생들을 겁주면 어떻게 해요!”
한숨을 푹 쉰 그녀는 할린드 교수 옆에 섰다.
“안녕하세요, 5반 여러분! 부담임을 맡게 된 세나 틸리아라고 해요.”
옅은 갈색 머리카락에 밝은 성격의 세나 교수는 척 보기에도 담임인 할린드와는 정반대였다.
“여러분! 할린드 교수님을 너무 무섭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말은 이렇게 하셔도 사실은 학생들을 매우 아끼…….”
“세나 틸리아. 밖으로 따라 나와라.”
학생들을 안심시키던 세나 교수가 불려 나갔다.
“너는 학생 때부터 변하지 않는군. 그 방정맞은 성격 고치라고 몇 번을 말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살짝 열린 교실 문 사이로 하얗게 질려 미친 듯이 고개를 숙이는 세나의 모습이 보였다.
“나 부담임 교수님은 마음에 들어.”
“나도다. 부담임이라도 성격이 좋아야 숨을 쉬고 살지.”
첼시가 웃으며 말하자 칼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인 듯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잠시 후 교실로 돌아온 두 교수가 다시 칠판 앞에 섰다.
“조금 전 내가 너희의 담임을 맡은 게 입학시험의 평균 점수가 가장 낮기 때문이라고 했지?”
“네에…….”
학생들이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할린드 교수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루메른에서 입학시험 성적은 3개월이면 의미가 없어진다.”
학생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희가 루메른에 들어오기 전 어떤 교육을 받았건 간에 루메른은 그 이상을 가르친다. 그래서 루메른 1학년들의 성적은 변동이 심한 편이지. 상위권 학생의 성적이 바닥을 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고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할린드 교수가 교탁을 탁-! 내려쳤다.
“당장 중간시험 때 너희 중에서 학년 1등이 나올 수도 있어.”
반 전체 분위기가 술렁였다.
“하지만 너희는 이 사실을 명심해라. 영웅의 세계를 공략하는 건 분명 영웅 사관생도들의 특권이지만 의무이기도 하다. 왜 의무인지에 대해 아는 학생이 있나?”
첼시가 손을 들었다.
“첼시 르왈린, 대답해 봐라.”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맞아.”
할린드 교수가 차갑게 말했다.
“나는 루메른에서 20년 동안 교직 생활을 하면서 많은 학생들의 장례식을 치렀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너희가 루메른 학생인 이상 영웅의 세계 공략을 거부할 수는 없다. 그건 목숨을 거는 일이지. 나는 살아남을 능력이 있는 학생만 그곳에 보내고 싶다. 그럴 수 없는 학생은.”
할린드 교수가 힘 있게 말했다.
“개죽음을 당하기 전에 퇴학시킬 것이다. 이것이 내가 평균 점수가 가장 낮은 너희를 맡은 이유다.”
거기까지 말한 할린드 교수는 출석부를 세나에게 건넸다.
“해 줄 말은 여기까지다. 지금부터 전투학 수업을 시작할 테니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연병장으로 나와라.”
할린드 교수는 쌩- 교실을 나갔다.
“그럼 여러분! 연병장에서 봐요!
세나는 학생들에게 웃어 준 후 교실을 나갔다.
교실 뒤편 사물함에서 체육복을 챙긴 학생들은 탈의실로 향했다.
“마냥 무섭기만 한 분은 아닌 것 같아.”
남자 탈의실에 들어온 칼이 입을 열었다.
“맞아. 생각해보면 할린드 교수님은 루메른에서 가장 존경받는 교수님들 중 한 분이기도 해.”
옆에서 걷던 같은 반 친구가 말했다.
‘이름이 테이드 였지?’
레오가 이름을 떠올리는 사이 테이드가 말을 이었다.
“담당 학생 사망률이 최저이신 분이지.”
매년 루메른에서 사망하는 학생의 수는 적지 않다.
아카데미에서 그들을 사지로 몰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루메른은 학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망자가 발생하는 이유는 학생들이 추구하는 길이 영웅이기 때문이다.
영웅이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시련으로 뛰어드는 자를 말한다.
영웅의 세계와 영웅 던전 공략.
그 밖에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사건 해결까지.
루메른 아카데미의 생활은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할린드 교수님이 처음부터 학생들을 겁준 건 그런 건 우리에게 그 사실을 되새겨주기 위해서일 거야. 그러니 우리 앞으로 열심히 하자.”
테이드의 말에 모두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어머? 너 입으면 말라 보이는 타입이였구나?”
열린 창문으로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꺅꺅-! 떠드는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남자 탈의실 바로 옆에 여자 탈의실이 있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남학생들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탈의실 가운데 모여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입으면 말라 보인다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냐?”
“일리아나?”
“아냐, 방금 그거 일리아나 목소리였거든.”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진지한 분위기로 토론을 나누었다.
“넬라일지도.”
그때 칼이 호리호리한 체구의 미소녀, 넬라 카븐을 언급하자 남학생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일리가 있어!”
“하긴! 넬라는 반전 매력이 있을 것 같아.”
전혀 쓸데없이 진지한 사춘기 소년들의 대화에 레오가 고개를 저었다.
‘얘들이 영웅 사관 생이긴 한가보군.’
누가 보면 이런 게 무슨 영웅 후보생이냐 하겠지만.
레오는 목숨이 오가는 와중에 이런 주제로 진지하게 토론하는 놈을 알고 있었다.
영웅.
그것도 그냥 영웅도 아니라 무려 대영웅이다.
바로 [신의 대장장이] 드웨노.
‘대체 그딴 놈은 존경받고 아직도 기억되는데 왜 난 잊혀졌냐고.’
다시 한번 억울해진 레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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