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4.
레오는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마물 여왕 실라투나.
재앙의 시대 이전부터 존재해온 마족의 군단장.
그리고 5000년 전.
대영웅들이 끝장내지 못한 세 명의 군단장 중 한 명이었다.
‘인지 저하 마법을 걸고 있었군.’
레오가 마법을 인지한 순간 마법이 풀린 것이다.
‘마신기와 연관된 만큼 뒤에서 일을 꾸민 게 고위 마족이라고는 예상했었지만 설마하니 이 자식이었을 줄이야.’
꾸득! 꾸드드득!
[학생? 예민한 애송이구나. 이 몸의 마법을 알아차린 걸 보니 말이야.]
레오는 몸을 긴장시켰다.
실제 재앙의 시절 당시 존재했던 열 명의 군단장 중 일곱이 카일과 동료들의 손에 토벌되었다.
‘하지만 끝내 셋은 토벌하지 못했지.’
이유는 간단했다.
남은 세 군단장은 다른 군단장들과 격을 달리하는 괴물이었다.
그 소름 끼치는 강력함 이면에는 영악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카일이던 시절에는 실라투나와 직접적으로 부딪힌 적이 없었다.
카일은 또 다른 군단장들.
사령왕과 거인왕과의 전투를 전담했다.
실라투나를 맡았던 건 루나와 아르온.
‘내가 지원을 갔을 때는 물러섰지.’
결국 재앙의 시대 말기까지 마주칠 일은 없었다.
그 난적을 지금 마주하게 된 것이다.
[쓸데없이 예민한 감각을 원망하렴.]
실라투나가 비웃음을 날리며 레오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콰가가가각-!
쭉 늘어난 팔이 레오를 꿰뚫기 위해 날아왔다.
화악-!
그때 오러의 불꽃이 부풀어 올랐다.
화르륵! 콰아아앙-!
잿더미가 되어 바스러지는 자신의 손을 보며 실라투나의 눈이 꿈틀거렸다.
[전의를 상실한 줄 알았는데.]
군단장은 공포의 저주로 무장하고 있다.
그 저주에 노출된 자는 공포에 질려 전의를 상실한다.
하지만 레오에게는 그런 정신계 저주가 통하지 않았다.
‘이건 살점 덩어리로 만든 분신이야. 본체였다면 숨기려야 숨길 수도 없었겠지만!’
레오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가게 창문을 깨고 밖으로 나갔다.
분신이라도 츄바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위험스러운 존재였다.
‘지금은 손쓸 도리가 없어.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서……!’
[등을 조심하라고 교수들이 안 가르쳐주던?]
“큭!”
조롱 섞인 비웃음과 함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살기에 레오가 급히 몸을 틀었다.
촤악-!
순간 살점의 채찍이 레오의 등을 살짝 스쳤다.
뒤에서 느껴지는 따끔함에 레오가 몸을 회전시켰다.
화르르륵!
콰앙-!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오러의 불꽃이 실라투나의 팔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실라투나의 눈이 꿈틀거렸다.
살점의 채찍은 레오를 꿰뚫기 위해 살아 있는 뱀처럼 움직였다.
레오의 붉은 눈이 빠르게 공격의 궤적을 쫓았다.
‘속도에서는 뒤처져.’
레오의 육체는 아직 소년의 몸.
아직 완성에 이른 몸이 아니다.
‘예측해서 미리 움직여야 해!’
레오의 몸에 잔상이 늘어났다.
하지만 그럴수록 레오는 조금씩, 그리고 확실하게 실라투나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실라투나 눈을 가늘게 떴다.
‘고작 학생 나부랭이가.’
잡힐 듯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피해 가는 레오의 움직임이 매우 거슬렸다.
힘과 속도는 명백하게 실라투나가 우위였다.
그 차이를 메우고 있는 것이 레오의 기술이라는 걸 눈치챈 실라투나가 빙긋 웃었다.
[아무래도 지금 반드시 죽여야 할 애송이군.]
콰아아아-!
살점이 마치 거대한 그물망처럼 레오를 덮쳤다.
[이대로 짓뭉개 주마.]
그걸 보고 레오가 급히 오러의 화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화르르르륵-! 콰아아아아!
맹렬하게 타오른 불꽃에 의해 살점을 불태웠다.
살이 타는 기분 나쁜 악취가 울렸다.
[피닉스의 불꽃?]
실라투나가 놀랐다.
치이익-!
한 번에 최대치의 화력을 내뿜은 레오의 몸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육체가 감당할 수 있는 화력을 낸 대가로 몸에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대단하긴 하지만 그 정도 화력은 몇 번이나 낼 수 있을까?]
실라투나가 낄낄 미소를 지을 때였다.
레오가 슬쩍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레오의 시선에 실라투나 역시 흠칫하며 하늘을 보았다.
파칭-! 콰과가가가가가각!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실라투나를 향해 빛의 파편이 쏟아졌다.
퍼버버버버벅-!
빛의 파편은 실라투나의 몸을 짓뭉개버렸다.
[왔구나.]
실라투나는 몸에 붙은 빛의 파편을 떨쳐내며 진한 미소를 진한 미소를 지었다.
[마안의 마법사.]
하늘에는 왼쪽에 황금빛 마안을 해방시킨 알비가 있었다.
“육체의 찌꺼기인가.”
[찌꺼기라니. 고귀한 이 몸을 지칭하기에는 불경한 말이구나.]
“찌꺼기에는 관심 없다.”
알비의 마안이 빛을 발했다.
그러자 사각형의 황금색 빛의 장막이 생성되었다.
챙그랑-!
그 빛의 장막에 금이 가더니 날카로운 파편으로 변했다.
레오가 눈을 크게 떴다.
‘요정 마법.’
요정 이외에는 쓸 수 없는 마법.
그것을 인간이 쓰고 있다.
‘이게 히어로 레코드…… 영웅을 육성시키는 힘.’
레오가 감탄하는 사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빛의 파편을 보며 실라투나가 살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언젠가 그 왼쪽 눈을 파먹어주겠어.]
콱-!
말을 끝맺기가 무섭게 빛의 파편 중 하나가 분신의 얼굴에 박혔다.
무수한 빛의 파편에 직격당한 실라투나는 고깃덩어리가 되어 사라졌다.
레오의 몸에서 타오르던 오러의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레오 플로브인가.”
원래의 눈으로 돌아온 알비가 안경을 고쳐 썼다.
“어쩌다 이 흉물에게 쫓기게 되었지?”
“루테크를 조사하는 도중에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루테크?”
알비의 싸늘한 시선이 레오에게 향했다.
“그곳은 이미 루메른에서 조사를 끝낸 곳인데 저 흉물이 발견되었다고?”
“인지 부조화 마법이 걸려 있었습니다.”
“인지 부조화라…… 과연.”
납득이 간다는 표정을 지은 알비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런 알비를 보며 레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타르타로스와 관련된 일에는 굉장히 집요하다고 들었는데?’
알비 제르온.
루메른 교수지만 수업을 하지는 않았다.
그거 루메른의 교수가 된 건 순전히 교수로서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였다.
국경을 마음껏 오갈 수 있으며 타르타로스와 관련된 사건에는 언제든지 개입할 수 있는 권한.
루메른의 교수에게는 그러한 권한이 있다.
일평생 타르타로스만 쫓아온 그가 특히 원수와 관련된 실라투나의 일에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수학 여행 준비를 하러 나온 게 아니었나?”
“네.”
“그렇다면 가보도록.”
“예?”
“왜 놀라지?”
“아니…… 이번 일과 관련해 벌은 없나요?”
알비를 봤을 때 레오는 벌을 각오했다.
레오는 중간고사 때 있었던 사건의 관계자이지만 사건에 파고드는 건 허락되지 않은 일이다.
어디까지나 단독행동.
알비가 아니라 다른 교수였다 해도 벌을 받을 일이다.
그런데 알비는 레오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보라고 한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레오를 보며 알비가 무료하게 말했다.
“교수 노릇도 똑바로 하지 않던 내가 벌을 내리는 것도 웃긴 일이지. 그리고…….”
싸늘하던 알비의 얼굴에 온화한 기운이 감돌았다.
“나는 너에게 감사를 하고 있다, 레오 플로브.”
“예?”
“그 아이를 구해줘서 고맙다.”
그 말에 레오는 알리아를 떠올렸다.
“앞으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널 돕도록 하마.”
그 말을 남기고 알비는 루테크 잡화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를 아는 학생이나 교수가 봤다면 두 눈을 의심했을 대사건이었다.
하지만 알비로서는 레오가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몇번이고 동생을 구할 수 없었다는 말을 들어야 했을 테니.’
후대를 위해 자신의 영웅의 세계를 오픈했지만, 그때마다 알비는 동생의 죽음을 상기해야 했을 것이다.
레오는 그런 알비의 응어리를 해결해준 셈이다.
알비의 뒷모습을 보며 웃던 레오는 문득 하나의 사실을 떠올렸다.
‘제르온 가문은 루메른 3대 가문 중 하나였던가?’
그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대도시 루메리아 시티와 영웅 사관 학교 루메른을 관리하는 3대 영웅 명가로 이루어진 루메른의 이사회.
제르온 가문은 그중 한 축을 담당하는 명가 중의 명가였다.
‘알비 교수에게 부탁하면 금서고를 열람할 수 있지 않을까? 다음에 한 번 부탁해봐야겠네.’
다음을 기약하며 레오는 실라투나의 분신이 사라진 곳을 보았다.
‘이걸로 확실해졌어. 체드머더스 사건도 그렇고 이번 사건도 그렇고 뒤에서 실질적으로 움직였던 건 실라투나야.’
현재로서는 실질적인 타르타로스의 지배자 중 한 사람인 실라투나가 움직였다.
‘단순히 영웅 후보생의 싹을 잘라 놓기 위해서 움직였을까?’
찝찝함은 떨칠 수 없었다.
‘대체 뭘 노리고 있는 거지?’
***
휘오오오오-!
대륙 북부 깊숙한 곳.
세상에서 가장 추운 곳에 바람이 휘날렸다.
1년 내내 눈과 얼음으로 덥힌 이곳은 재앙의 시대 이전부터 엘프의 성역이었던 곳이었다.
이 성역에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엘프의 고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은 엘프의 영웅 사관 학교라 불리는 곳, 세이룬이었다.
세이룬의 교정에서 학생들이 이동하고 있었다.
그중 붉은색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엘프 소녀가 목에 목도리를 둘둘 메고 눈밭을 걷고 있었다.
“이 날씨에 그런 차림이라니. 강력한 마력을 타고난 절 자랑하시는 건가요?”
“역시 족보도 없는 가문의 분답게 겸손이라는 미덕을 모르시는 분이군요. 하긴. 당신은 순수한 엘프조차 아니죠?”
“당신 같은 엘프가 위대한 세이룬의 학년 대표 중 한 사람이라니! 통탄스러울 따름입니다.”
멀리서 들려온 목소리에 엘프 소녀는 짜증이 난다는 표정을 짓고 그곳으로 걸어갔다.
“지랄들을 해요, 지랄들을! 안 추우면 편하게 입을 수도 있는 거지. 겨우 그딴 걸로 우르르 몰려가 꼽을 주냐? 안 쪽팔려? 명문가의 자존심도 없어?”
엘프 소녀의 말에 얼어붙은 분수대 앞에서 한 소년을 가운데 두고 말을 하던 엘프 무리가 흠칫했다.
“루, 룬드아 양! 그 말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게다가 명가의 자제인 당신이 그런 폭언이라니! 창피한 줄 아세요!”
“선생님들이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뭔 개소리야. 여럿이서 한 명을 괴롭히는 너희가 더 심하고 창피하고 선생님들이 가만 안 냅두겠지.”
소녀는 엘프답지 않은 호전적인 미소를 지었다.
“내 말이 불만이면 나랑 결투라도 하던지?”
세 엘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루니아 엘 룬드아.
엘프 영웅 명가, 룬드아의 후계자이자 세이룬 1학년에 재학 중인 이 소녀는 무려 학년 대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압도적인 실력자였다.
특히나 1학년들끼리 결투 평가에서 29연승이라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다른 1학년들이 흠칫하며 도망치듯 흩어졌다.
흥-! 하고 코웃음을 친 루니아는 날씨와 다르게 얇은 옷차림의 소년에게 다가갔다.
“루카. 그런 모습을 하고 다니면 다른 녀석들이 괜히 시비 걸 거라고 했잖아.”
“그렇긴 한데요. 누가 제 옷을 모두 훔쳐 갔더라고요.”
“뭐야? 이것들이 진짜!”
아마 조금 전 녀석들의 짓이 분명했다.
한숨을 쉰 루니아가 목도리를 풀어 루카의 목에 둘러주었다.
“루, 루니아 양! 이러면 루니아 양이 춥잖아요!”
“난 충분히 두껍게 입었어. 그리고 넌 추위를 덜 느끼는 거지 안 추운 건 아니잖아?”
생긋 웃은 루니아는 루카와 교정으로 들어갔다.
“에취!”
교정에 들어가자 루니아가 바로 재채기했다.
“괜히 나 때문에.”
“크응! 싱경쓰지 마! 싱경쓰지망.”
코를 문지르며 손을 저어준 루니아가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응! 아빠…… 가 아니라 엘런 선생님의 호출이 있었거든.”
루니아가 가슴을 활짝 폈다.
“내 계약자가 드디어 부화한 모양이야!”
“아! 축하해요! 루니아 양!”
루카가 활짝 웃었다.
“응. 그래서 나 먼저 가볼게! 루카. 또 딴 녀석들이 시비 걸면 말하고!”
루니아가 복도를 뛰어갔다.
이윽고 어떤 선생 연구실 들어간 루니아가 물었다.
“아빠! 내 계약자가 태어난 거 맞죠! 그런 거죠?”
“학교에서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을 텐데.”
“아무도 안 보잖아요! 그것보다 내 계약자가 부화한 거 맞죠?”
룬드아 가문은 대대로 피닉스와 계약을 맺어왔다.
그리고 현재 가주인 엘런 룬드아의 계약자인 피리나의 자식과 루니아가 계약을 할 예정이었다.
엘런은 자신의 맹약자가 보낸 편지를 봤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리나의 자식이 부화했다는구나.”
“역시!”
짝-! 손뼉을 치며 루니아가 만세 삼창을 외쳤다.
“그래서요! 언제 만나 볼 수 있어요? 지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루니아. 일단 앉거라.”
루니아가 엘런 앞에 앉았다.
그런 딸을 보며 깊게 심호흡을 한 엘런이 입을 열었다.
“루니아. 네 계약자가 말이다.”
“네!”
“……이미 계약을 했다는구나.”
쩌적-!
루니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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