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63.
“데스나이트?”
“신성한 성역에 데스나이트라니.”
레오의 보고를 받은 할린드와 룬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믿을 수 없군요.”
하지만 룬의 집무실에 앉아 있던 안경을 쓴 엘프가 의문을 제기했다.
“확실히 페어리 포레스트에는 비극적이게도 오래전부터 몬스터가 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데스나이트라뇨. 그런 전례는 없지 않습니까?”
고개를 저은 그 엘프는 레오를 향해 물었다.
“정말로 데스나이트를 본 게 확실합니까?”
“안 본 걸 봤다고 할 이유는 없지 않잖아요?”
“당신이 거짓말을 한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루메른 학생. 스켈레톤이 출현했다는 보고는 우리 학생들에게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의회장님께 말씀드리러 왔죠. 하지만 데스나이트에 관한 보고는 받지 못했습니다.”
‘세이룬의 교수인가 보군.’
세이룬의 선생은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루메른 학생. 태어나서 언데드를 본 적이 있나요?”
“이번 생에는 없죠.”
“그렇다면 스켈레톤 나이트를 데스나이트로 착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비교적 흔하게 하는 착각입니다.”
‘내가 전생에 쓰러트린 데스나이트만 부대 단위가 넘어가는데 착각을 할 리가 있냐.’
실소를 터트린 레오가 말했다.
“세이룬의 학생들은 종종 착각하나 보군요?”
그 말에 세이룬 선생이 멈칫하더니 헛기침을 했다.
“크흠. 우리 학생들도 가끔 하는 실수입니다.”
그렇게 말한 세이룬 선생이 화제를 돌렸다.
“어찌 되었든 루메른 학생. 데스나이트와 마주했다면 무사하기 힘들텐데요? 우리 세이룬의 1학년들도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마물입니다. 그런데 혼자서 탈출을 했다는 말인가요?”
“네.”
“상당히 실력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군요.”
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는 할린드에게 말했다.
“할린드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우리 학교 학생의 말을 믿습니다. 헤르디움 선생.”
딱 잘라 말하는 할린드를 보며 헤르디움은 미간을 좁히더니 이번에는 룬을 보았다.
“대의회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거짓말을 할 친구는 아니네.”
룬 역시 빙긋 웃으며 말하자 헤르디움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데스나이트에 관해서는 추후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세.”
룬의 말에 할린드와 헤르디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린드 교수, 레오 군. 먼저 가보게. 나는 헤르디움 선생과 따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일세.”
“알겠습니다.”
할린드가 인사를 하고 레오와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일정이 바뀌게 생겼군.”
집무실을 나서자 할린드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레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일정이 바뀌다니요?”
“헤르디움 선생은 세이룬 1학년 상급 1반의 담임이다. 마침 반 전체가 이곳으로 임무 실습을 왔다고 하더군.”
할린드가 피식 웃었다.
“우리도 이곳에 수학여행을 왔다는 걸 알고 헤르디움 교수가 합동 수업을 요청했다.”
“합동 수업이요?”
“우리는 세이룬의 수업 방식을 체험하고 세이룬은 루메른의 수업 방식을 체험하는 거지.”
“재미있겠는데요.”
“물론 재미있겠지. 하지만 단순히 재미만 있어서는 안 된다. 이건 견문을 넓힐 좋은 기회다. 체험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반은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지.”
“그렇네요.”
“상급 1반은 세이룬에서도 가장 우수한 1학년들을 모아 둔 곳이다. 우리에게도 큰 도움이 될 거다.”
“오호.”
“헤르디움 선생이 저녁에 우리를 초대했다. 가서 반에 공지하도록.”
“예.”
***
“크으! 세이룬의 학생들을 만날 수 있다니!
“야! 어때? 나 머리 잘 세팅됐어?”
“이 목걸이 어울려?”
저녁 만찬을 앞둔 5반 학생은 전체적으로 들뜬 분위기였다.
“칼, 뭐 해?”
레오는 1층 자리에 앉아 책자를 만들고 있는 칼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카탈로그 만들어. 내가 취급하는 물품이 세이룬 학생들에게도 필요하지 않겠어?”
씩- 웃는 칼을 보며 첼시가 어이가 없다는 듯 팔짱을 꼈다.
“그 자리에서 장사를 하겠다고?”
“홍보야, 홍보. 뭐, 그 파티에서 할 생각은 없고. 내일부터 있을 합동 수업 때 비즈니스 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거야.”
그 말에 첼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다 됐어. 가자.”
시계를 확인한 레오가 말하자 5반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가자마자.
“춥다아아아!”
“이러면 머리 세팅한 의미가 없잖아!”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비명을 내질렀다.
그 모습을 보며 칼이 킬킬 웃었다.
“니들 바보냐?”
물론 괜히 꺼냈다가 눈 뭉치 세례를 당했다.
“그나마 가까워서 다행이네.”
넬라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세이룬의 숙소는 루메른 숙소 바로 앞의 고급 호텔이었다.
“여기를 통째로 빌린 게 세이룬이었구만. 킁-! 역시 재력이 빵빵한가 보네.”
칼이 콧소리를 내며 말하자 첼시가 어깨를 으쓱였다.
“세이룬은 영웅 사관 학교 중에서 가장 부자 학교로 유명하니까.”
영웅 사관 학교들이 각 종족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다르다.
당장 루메른만 하더라도 현 체재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많았다.
히어로 레코드 때문에 자국의 최우수 인재들을 어쩔 수 없이 루메른에 입학시킨다.
그 과정에서 졸업 후 자국에서 좋은 지위를 가지는 자들도 많지만 루메른에서 운영하는 영웅 길드들에 입단하는 자들도 적지 않다.
자국의 인재 유출에 자연스럽게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세이룬은 달랐다.
세이룬 자체가 엘프 국가 연합의 중추 역할, 즉 엘프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거대 세력이었다.
“하긴 루메른이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편의는 세이룬과 비교한다면 새 발의 피라고 했지?”
“응. 특히 엘프들은 우리 인간 보다 더 ‘혈통’을 중요시 여긴데. 그래서 우리 학교처럼 무명 귀족 가문이나 평민 출신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데.”
“권위의식들이 장난 아니겠군.”
칼이 혀를 내두르는 사이.
5반이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급사가 정중하게 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여러분.”
“외투를 받아드리겠습니다.”
“제게 주시죠.”
로비에서 급사들이 정중하게 외투를 받아 주었다.
첼시처럼 익숙하게 넘기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칼처럼 허둥대는 학생도 있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급사의 안내를 받은 학생들이 호텔의 대연회실로 들어섰다.
“이게 다 뭐 다냐.”
칼이 얼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연회실은 호화스러움 그 자체였다.
“이건 우리 제국 황제 폐하께서 주관하는 파티 급인데?”
명가 중의 명가. 르왈린의 직계인 첼시가 봐도 지나치게 화려했다.
모두가 놀라는 사이.
헤르디움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루메른의 1학년 5반 학생분들. 부족하지만 세이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헤르디움 윈텔이라고 합니다. 헤르디움 선생으로 불러주면 감사하겠군요.”
“파티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헤르디움 선생님.”
5반 학생들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앞으로 세이룬과 루메른을 이끌어 나갈 1학년들인 만큼 깊은 친목을 다지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을 끝낸 헤르디움이 한 번 웃어 준 후 자리로 돌아갔다.
할린드와 세나의 경우에는 이미 도착해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일단 배가 고프니 밥부터 먹을까?”
칼이 손을 비비며 말하자 첼시가 째릿- 칼을 노려보았다.
“평소처럼 예의 없이 호들갑 떨지 마. 세이룬 학생들도 보고 있으니까.”
“잘 안다고. 나도 학교 망신시킬 생각은 없어.”
세이룬 아카데미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 이전에 루메른과 세이룬은 오랫동안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던 영웅 학교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은 각종 교류회에서 세이룬이 루메른을 앞섰다.
루메른에서는 어떻게든 세이룬을 앞지르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반대로 세이룬은 지금의 우위를 계속해서 지켜나가려 하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는 넓은 관점에서 본다면 앞으로 학창 시절 내내 맞부딪힐 다른 학교의 라이벌들을 만나는 자리이기도 했다.
평소 이상으로 외모에 신경 쓴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꿇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파티가 시작되었다.
루메른과 세이룬 학생들은 서로에 대한 호기심과 탐색해나갔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했지만 그래도 또래라는 점과 영웅을 목표로 하는 같은 공통점 때문에 금방 말문이 트였다.
레오에게 역시 몇몇 세이룬 학생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다가왔다.
“난 세이룬에서 정령술을 공부하고 있어. 넌?”
“나도 소환학을 들어.”
“오호. 루메른의 정령술 수업은 어때?”
첫 번째 학생은 자신을 정령술사라고 소개했다.
“전 창술을 수련하고 있습니다.”
“나도 기사학과인데.”
“오오. 루메른의 기사는 어떤지 견문을 넓히고 싶군요. 내일 대련을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두 번째 학생은 자신을 기사라고 소개했다.
이후 여러 학생이 오갔다.
그런 가운데 레오는 의문을 느꼈다.
‘왜 마법을 공부하는 녀석은 한 명도 없는 거지?’
그러는 사이에도 파티장에 흐르는 음악은 수시로 바뀌었다.
잔잔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음악이 나오는가 하면 갑작스럽게 신나는 음악이 나왔다.
그 음악에 맞춰 엘프들은 수시로 댄스를 췄다.
5반은 그 분위기가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인간의 사교 파티는 보통 댄스 타임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오에게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엘프들이 춤을 좋아하는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네.’
과거부터 엘프는 춤과 노래를 사랑했던 종족이었다.
춤과 노래로 상대에게 구애를 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루나도 야영 당시 종종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곤 했다.
지금 세이룬 학생들이 추는 춤은 오래전에 루나가 췄던 춤이었다.
‘드웨노는 그 모습이 하나의 예술이라고 찬양했었지.’
‘어찌 이런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가 이리도 아름답게 노래하며 춤출 수 있는지 의문일 따름이군!’
‘……같은 개소리를 해서 싸우는 게 주 레퍼토리였지만.’
과거 일을 떠올리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왔다.
“넌?”
“안녕하세요, 또 만나네요.”
루니아가 빙긋, 미소 지었다.
그때 타이밍 좋게 댄스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걸 듣고 루니아가 물었다.
“한 곡 추실래요?”
“그럴까?”
레오가 손을 내밀자 루니아가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가볍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엘프의 춤을 아시네요?”
“옛날에 배웠었지.”
놀랍다는 듯 묻는 루니아에게 레오가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파티는 즐거우세요?”
“응. 근데 조금 궁금한 게 있는데 세이룬 에는 마법학과가 따로 없어?”
“우리는 루메른처럼 학과를 나누지 않아요. 주력으로 익히는 걸 집중적으로 배우죠.”
“음. 그런 느낌이긴 했어.”
스스로를 정령술사, 소환술사, 스피어 나이트, 소드 나이트라고 소개하던 앞선 학생들을 떠올렸다.
“그래도 마법을 공부하는 학생은 없던데?”
“세이룬에 대해 잘 모르시는 모양이네요. 세이룬에서 마법은 필수에요.”
“필수라고?”
“네. 마법의 종족이니까요.”
“마법의 종족이라도 마법 적성이 안 맞는 학생이 있을 텐데?”
“그런 사람은 세이룬에 입학할 수 없죠.”
‘기본적으로 듀얼 클래스라는 소리군.’
그렇게 대답하면서 루니아는 경쾌하게 스텝을 밟아 나갔다.
레오는 어렵지 않게 그런 루니아를 보조해주었다.
루니아는 레오와 함께 추는 춤이 상당히 즐거웠다.
‘엄청 능숙하게 잘 추는데?’
실력이 좋으니 평소보다 재미있었다.
이윽고 댄스 타임이 끝나자 루니아는 살짝 아쉽다는 표정으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아직 안 물었네요?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나? 레오 플로브.”
“……?”
레오의 손을 놓으려던 루니아의 얼굴이 우지직 굳었다.
그 반응에 레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너였냐?”
“뭐?”
조금 전까지 가지고 있던 친절한 우등생 분위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깡패라고 해도 될 정도로 험악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루니아가 눈을 부릅떴다.
“남의 계약자를 가로챈 도둑놈이 너였냐고?”
“아.”
레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빙긋 웃었다.
“잘 쓰고 있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흥분한 루니아가 레오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싸, 싸움이다! 싸움 났다!”
파티장 분위기가 초토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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