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67
그날 저녁.
루메른 학생들이 숙소에서 저녁을 먹는 와중에 방문자가 찾아왔다.
“첼시! 이런 걸 어떻게 먹냐!”
“내 요리에 불만 있어?”
“요리? 이게 요리야? 요리를 모독하지 말아 줄래?”
“뭐? 너희는 오늘 죽었어!”
“야야! 튀어! 쟤 마법 쓴다!”
“할린드 교수님한테 다 이를 거야!”
“반장! 그냥 네가 식사 당번하면 안 돼? 우리 중 네 요리가 제일 맛있었단 말이야!”
“어제 세이룬에서 파티 음식 몇 개 슬쩍해오는 건데.”
방문을 열기 전 숙소에서 왁왁!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번 수학여행의 테마는 자급자족인 만큼 매끼 식사를 학생들이 담당했다.
물론 다들 곱게 자라거나 요리와는 연이 없는 생활을 해왔기에 제대로 된 요리가 나올 리 만무했다.
덕분에 루메른의 매 식사 시간은 이렇듯 소란의 연속이었다.
담당 학생들의 추태 소리에 세나는 얼굴을 부여잡고 고개를 돌렸고 할린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 학생들이 활기가 넘치는군!”
오직 룬만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제, 제가 먼저 들어가서 진정시키고 올게요.”
세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 조용해진 가운데 세나가 문을 열었다.
반 전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하고 우아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다들 반갑네.”
“안녕하세요, 룬 대의회장님!”
5반 학생들이 입을 모아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할린드의 눈치를 계속 보는 건 잊지 않았다.
“하하. 이거 내가 식사를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 이렇게 자네들을 찾아온 건 공지사항이 있어서라네.”
“공지사항이요?”
칼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네. 자네들도 알 걸세. 페어리 포레스트에 데스나이트를 포함한 다수의 언데드가 나타났다는 사실 말일세.”
그 말에 전원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의회에서 회의가 있었지. 그 회의 결과를 자네들에게 알려주러 왔네.”
5반 학생들이 서로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엘살베키아 대의회에서는 이번 조사 의뢰를 세이룬과 루메른에게 정식으로 제의하는 바이네. 세이룬과 힘을 합쳐 페어리 포레스트에 있는 이상 사태를 조사해 주게.”
그 말을 듣고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아직 경험이 부족한 자네들만으로는 위험하지. 그래서 세이룬에 의뢰를 넣어 뒀네. 세이룬의 고학년들과 한 조가 되어 이상 사태를 조사하게 될 거라네.”
“그 말은 정식 의뢰라는 건가요?”
“그렇네.”
정식 의뢰.
루메른 1학년은 2학기부터 의뢰 실습을 하고 2학년부터 정식 의뢰를 맡는다.
그 과정을 1년이나 앞당기게 된 것이다.
“말은 정식 의뢰지만 어디까지나 의뢰 실습의 연장선이라는 걸 명심하도록. 너희가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시 곧바로 의뢰는 중지된다. 또한 말이 정식 의뢰지 비공식적인 의뢰나 마찬가지이므로 의뢰 보상도 당연히 없다.”
그 말에 몇몇 학생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런 분위기도 사라졌다.
정식 의뢰라니!
루메른의 학생으로 본격적으로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의뢰를 위해 대의회장님께서 직접 오신 건가요?”
레오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룬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실 내가 온 건 자네 때문이라네, 레오 군.”
“저요?”
“그래. 이 아이가 자네를 만나고 오고 싶다고 해서 말일세.”
룬이 빙긋 웃으며 자신의 등 뒤에 있던 에이란을 앞으로 내보냈다.
“귀여워!”
“반장! 쟤랑 어떻게 아는 사이야?”
5반 학생들이 쭈뼛쭈뼛하는 에이란을 보며 감탄했다.
일리아나의 물음에 레오가 덤덤히 대답했다.
“룬님의 손녀야.”
“오오.”
“레, 레오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그…… 하, 한번 놀러 와보라고 하셔서 이렇게 실례를 무릎 쓰고…….”
“어서 와.”
“레오랑 친한가 보네? 안녕. 난 일리아나라고 해. 저녁은 먹었어? 같이 먹을래?”
“야. 일리아나. 손님한테 이런 걸 주는 건 아니지.”
“아. 맞다. 미안해.”
일리아나와 칼이 식탁 위에 있는 음식을 모조리 치워 버렸다.
첼시가 도끼눈을 뜨고 칼과 일리아나의 목을 졸랐다.
그 모습에 에이란이 몹시 당황했다.
세이룬과는 분위기가 천지 차이였다.
“밥은 먹었어?”
“아, 아직 먹지 않았사옵니다.”
“그럼 먹을래? 애들이 입맛이 까탈스러워서 뭐라 하긴 해도 못 먹을 정도는 아니거든.”
“야! 레오! 그런 거 먹이지 마! 학교 이미지 나빠져!”
“죽어라!”
“컥! 항복! 항복!”
첼시가 칼의 목만 집요하게 조르기 시작했다.
“그럼 호의를 생각해서.”
에이란이 조심스럽게 포크로 고기 요리를 찍어 먹었다.
작은 입을 오물오물 움직이며 음식을 꼭꼭 씹어 먹던 에이란이 말했다.
“정성이 느껴지는 음식이에요.”
“그쵸? 그쵸? 먹을만하죠? 쟤들이 이상한 거죠?”
칼의 목을 조르던 첼시가 눈을 반짝이며 달려왔다.
느닷없이 다가와 살갑게 구는 첼시를 보며 에이란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때 룬이 다가와 친절하게 웃었다.
“우리 에이란 역시 세이룬 학생이란다.”
“진짜요?”
“그런데 낮에 수업 때 없었는데?”
“왜 없었어?”
“아까는 공부 때문에 세이룬 애들이랑 제대로 이야기 못 나눴는데 이 기회에 좀 자세히 나누고 싶어!”
세이룬 학생이라는 말에 에이란에 대한 관심도는 더 높아졌다.
주변으로 몰려드는 학생들을 보며 에이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 저! 잠시 실례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에이란이 다급히 사람을 피해 2층으로 달아났다.
그 모습을 보며 5반 학생들이 당황했고 룬의 얼굴을 딱딱하게 굳었다.
“안 쫓아가십니까?”
레오의 물음에 룬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레오 군. 자네가 대신 가주면 안 되겠나?”
“제가요?”
“방을 나오지 않는 손녀가 용기를 내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건 자네 덕분이었네.”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손녀가 오늘 자신을 찾아왔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그저 막연히 저 아이가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나는 저 아이의 마음을 다 헤아려주지 못한 모양이야.”
룬의 말에 할린드가 레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가 에이란을 좇아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2층 복도 끝 테라스 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밖으로 나갔다.
테라스 구석에는 에이란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러다 레오와 눈이 마주치고 허둥지둥 말했다.
“레, 레오님. 한심한 모습을 보여서 죄송해요!”
사과하는 에이란을 빤히 바라보던 레오는 어떤 엘프 소녀를 떠올렸다.
‘베르키아.’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에이란에게는 선조의 편린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베르키아 역시 에이란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어두웠다.
‘왠지 베르키아가 생각나서 내버려 둘 수 없단 말이야.’
쓰게 웃으며 레오가 겉옷을 에이란에게 덮어주었다.
“이, 이러면 레오님이 춥지 않습니…….”
“난 신경 쓰지 마.”
당황하는 에이란을 무시한 레오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에이란의 곁에 등을 기대고 섰다.
“그래서, 왜 세이룬에서 도망친 거야?”
“처음에는 세이룬에 다니고 싶었습니다. 영웅을 동경했으니까요.”
에이란이 무릎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처음 입학했을 때 에이란은 중급반이라고 했다.
재능도 있고 노력도 했지만 에이란은 자신의 모든 걸 걸고 검술과 마법을 갈고 닦지 않았다.
에이란은 그저 싸우는 것보다 영웅담을 읽는 게 훨씬 좋았다.
영웅을 좋아하는 에이란은 영웅 후보생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엘프 최고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면서 목표도 없이 현재에 안주하려는 에이란은 조롱의 대상이 되기 충분했다.
내성적인 소녀는 그 조롱에 힘겨워했다.
“세이룬의 생활이 버겁다고 느꼈을 때 태양 같은 사람을 만났어요.”
“그게 누군데?”
“루니아 양이요.”
에이란이 환한 표정을 지었다.
“루니아 양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못 하는 게 없고! 언제나 당당하고! 모두에게 친절한! 말 그대로 영웅 같은 사람이에요!”
에이란의 얼굴이 마치 영웅담을 할 때처럼 밝게 빛났다.
어떤 의미에서 루니아는 에이란이 처음으로 만난 또래 중에 가장 영웅에 근접한 사람이었다.
그런 루니아의 모습은 영웅담을 사랑하는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그래서 루니아 양을 동경하게 됐어요. 나와 다른 대단한 사람이니까…… 루니아 양을 뒤쫓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대단한 사람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다는 작은 목표.
목표가 정해지자 재능은 개화했고 순식간에 중급반을 벗어나 상급반에 올라갔다.
“상급 1반에 올라가자 루니아 양이 정말 살갑게 대해줬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루니아 양이 무서워졌어요.”
“왜?”
“결투 평가 때 제가 큰 실수를 했는지 그때부터 절 싫어하게 된 것 같아요.”
레오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얘 성격상 남에게 미움받을 일을 할 것 같지는 않은데…… 루니아도 사소한 일로 남을 싫어할 타입은 아니고…… 이건 한 번 물어봐야겠는데?’
목표로 하던 동경과 멀어지자 남게 된 건 자신이 추월해온 자들의 시기와 질투였다.
명백하게 아래라고 생각했던 에이란이 자신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자 시기와 견제가 시작된 것이다.
‘결국 그게 트라우마가 돼서 또래를 무섭게 여기게 된 건가?’
레오 같은 성격이야 오히려 냉소할 수 있지만, 확실히 에이란은 너무 여렸다.
“또래를 무서워하는 것 치고는 나는 엄청 편하게 대하는 것 같은데?”
“그야 레오님은 할아버지와 비슷한 느낌이니까요!”
“할아버지?”
환하게 웃던 에이란이 순간 당황했다.
“아, 아니! 그러니까 늙었다는 게 아니라! 그! 어, 어른의 매력이 있…… 내, 내가 무슨 말을!”
횡설수설하던 에이란이 창피한 듯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모습을 보며 웃던 레오가 물었다.
“세이룬을 떠난 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영웅을 목표로 하지 않는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걸림돌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네.”
‘착하네.’
소녀에게는 영웅으로서 가져야 할 포부가 부족했다.
‘완전히 포기했다면 내가 어떻게 해 줄 순 없지만.’
에이란의 방에 있던 깨끗한 세이룬의 교복을 떠올리며 레오가 말했다.
“베르키아 이야기 좋아해?”
느닷없는 질문이었지만 에이란은 힘차게 대답했다.
“네! 선조님의 이야기인 걸요! 대영웅님들의 이야기만큼 좋아해요!”
“그럼 너도 알겠네. 베르키아가 왜 위대한 영웅이 될 수 있었는지.”
“네?”
“베르키아는 스승이었던 대영웅들을 동경하고 그 뒤를 쫓았기 때문에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거잖아?”
“……!”
큰 꿈을 가진 자만이 영웅에 어울리는 건 결코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 중 리시나스를 빼고 영웅에 어울리는 놈이 한 명도 없지. 아니. 나랑 루나, 드웨노는 무조건 탈락이지.’
친구들을 떠올리며 레오가 말했다.
“남들의 시선에 뭐 그렇게 신경 써? 넌 네가 가고 싶은 길을 가면 되는 거야.”
에이란의 눈이 커졌다.
그 눈을 본 레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성격만 다르지 자기 선조랑 똑같군.’
선망 어린 눈.
겉으로는 틱틱거렸어도 베르키아 역시 이런 눈으로 카일을 바라보곤 했다.
레오가 손을 내밀자 에이란이 머뭇거리더니 손을 잡았다.
“내려가자, 루메른 애들은 다 성격 좋거든.”
앞서가는 레오의 손에 이끌려 1층으로 내려온 에이란을 5반 학생들이 환영해주었다.
“오! 다시 왔다!”
“부담스럽게 해서 미안.”
“아니야, 어쩌면 첼시 요리 먹고 도망간 건지도 몰라.”
“이것들이!”
첼시가 쌍심지를 켰지만 에이란이 또 겁먹을까 봐 참았다.
그 낯선 분위기에 잔뜩 당황하던 에이란도 곧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자연스럽게 또래 소년 소녀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룬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내 손녀가 또래 친구들과 저렇게 잘 어울리다니!”
“에이란 학생은 세이룬 1학년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라고 들었습니다. 왜 학교를 떠난 거죠?”
“얼마 전까지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학생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군. 세이룬의 학교 분위기가 문제였네.”
“학교 분위기요?”
“자네도 알겠지만 세이룬은 상급 학생에게 혜택이 많네. 성적이 낮은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도태되지.”
“루메른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래. 학교라는 구조상 그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세이룬은 그러한 경향이 훨씬 강하다네.”
반 자체에 등급이 매겨져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게 내 손녀에게는 부담이었던 모양이야.”
룬이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세이룬을 다녔고 세이룬에서 교직 생활을 해서 그게 문제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네. 하지만 내 손녀에게는 세이룬의 시스템이 맞지 않았던 셈이지.”
룬이 레오를 보았다.
‘나는 겁먹은 에이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지. 그런 의미에서 레오 군을 만나게 된 건…… 정말 큰 행운이로군.’
손녀에게 용기를 준 인간 소년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룬은 눈물을 훔쳤다.
그런 룬을 보며 할린드가 말했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겨내야 합니다. 에이란 학생은 실력이 있으니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하지만 방금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떠올랐네.”
“무슨 방법입니까?”
“할린드 교수.”
“예. 대의회장님.”
눈물을 닦은 룬이 진지한 표정을 짓자 할린드 역시 함께 진지해졌다.
“혹시 루메른은 전학생을 받나.”
할린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는 보내라고 하더니 이번에는 온다고 하는군. 전학 문의하는 엘프가 왜 이렇게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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