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0.
학과대항전을 앞두고 각 학과 별로 이루어진 특훈.
가장 고생 한 건 다름 아닌 소환학과 학생들이었다.
“우와, 쟤들 봐.”
“완전 거지꼴이잖아?”
“듣자 하니 소환술도 못 쓰고 환수의 섬에서 2박 3일 동안 있었다던데?”
기숙사 입구로 들어오는 소환학과 학생들을 보며 다른 학과 학생들이 수군거렸다.
“앞으로 학과대항전까지 매주 할 거라던데…… 이걸 또 어떻게 하냐.”
테이드가 처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작 2박 3일 동안 야생에 익숙해질 리 없었다.
대다수 학생이 거지꼴인 것에 비해 비교적 멀쩡한 학생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레오, 첸 시아, 워레든이었다.
몇몇 학생 무리가 소환학과를 보며 킬킬거렸다.
“어우! 냄새!”
“몰골이 장난 아니잖아?”
자신들을 구경거리 취급하는 그들을 보며 소환학과 학생들이 사나운 표정을 지을 때였다.
“뭐가 재미있다고 그렇게 웃으시죠?”
“헉?”
“에, 엘리자.”
몰골이 말이 아닌 엘리자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우리 꼴이 우습다 이건가요?”
“아, 아니! 그러니까 우리는…… 그……!”
“미, 미안!”
날카로운 엘리자의 반응에 소환학과를 놀리던 학생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도망갔다.
1학년 중 최상위 실력자라고 평가 받는 데다가 영웅 명가인 엘리자의 눈 밖에 나는 순간 여러모로 학교생활이 꼬이기 때문이었다.
엘리자가 노려보자 다른 학생들도 허둥지둥 흩어졌다.
레오는 곧바로 씻고 기숙사 휴게실로 내려왔다.
그곳에는 칼이 언제나처럼 학생들에게 물건을 팔고 있었다.
“오! 레오 돌아왔냐?”
칼이 웃으며 레오를 반겼다.
“듣자 하니 엄청 쌩고생 했다면서?”
“나는 재미있었는데.”
“너니까 재미있지! 테이드 녀석은 완전히 뻗기 직전이던데?”
킥킥거리며 웃던 칼이 문득 말했다.
“그러고 보니 레오. 너 엘레나 선배에 대해 물었었지?”
“그랬지.”
“오늘 아침에 학교로 복귀했데. 내일 아침 전교생이 에레크에 집합하니까 그때 만날 수 있을걸?”
“그래? 잘됐네
레오가 눈을 빛냈다.
다음 날.
아침 7시에 전교생은 학교 중심에 있는 거대한 연병장, 에레크에 집합했다.
학년별로 줄을 선 가운데 1학년들은 모두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입학식 이후로 에레크에서의 공식 행사는 처음이었다.
특히나 전교생이 모인 자리였다.
“어우, 선배님들이 계속 쳐다봐.”
“기, 긴장된다.”
1학년들이 잔뜩 굳어있는 모습을 보며 고학년들이 킥킥 웃었다.
“1학년들은 역시 귀엽네.”
“긴장한 것 좀 봐. 어떻게 예뻐해 줘야 할까나?”
대부분 1학년은 고양이 앞에 생쥐처럼 선배들 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 했다.
하지만 보통의 선후배 사이가 아닌 곳도 있었다.
“셀리아 아가씨. 진작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교칙 상 고학년은 1학기 동안 1학년 구역에는 가지 못하게 되어 있어서 이제야 인사드려요.”
니엘 로다는 셀리아에게 주군의 예를 갖췄다.
그런 니엘을 보며 셀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니엘 언니. 이러지 마! 3학년이 1학년에게 이러는 걸 다른 학생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어?”
“어쩜! 셀리아 아가씨는 역시 생각도 깊으셔!”
니엘 로다.
셀리아 보다 네 살 많은 루메른 기사학과 3학년 생이었다.
제르딩거 가문의 가신 가문 로다의 후계자로서 어릴 때부터 셀리아와 함께 검술을 배운 사이이자 셀리아의 호위기사였다.
“교복이 너무 어울리세요, 아가씨! 지금 이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야 하는데!”
“행사에 마법 아이템을 들고 오는 건 금지잖아.”
“네. 그래서 몰래 들고 오다가 걸렸어요.”
“…….”
“쳇. 망할 교수들 같으니라고.”
셀리아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평소에는 냉철한 니엘이 자신과 관련되면 팔불출로 변한다.
‘교칙 어기면 벌점이잖아!’
…라고 해봤자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그깟 벌점 아무것도 아니에요!’라고 대답할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아가씨도 너무하세요. 한 번도 저를 찾지 않으시다니.”
“동기생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갖고 싶었어.”
정확하게는 학교생활 다 제쳐두고 자신만 신경 쓸 게 뻔한 니엘을 일부러 피한 것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셀리아. 가신과 너무 친하게 격이 없이 지내는 거 아니야? 주종관계는 엄격해야 하는 법이라고.”
셀리아처럼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을 가진 소년이 다가왔다.
그걸 본 셀리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오랜만이네, 바든.”
바든 제르딩거.
제르딩거의 방계로 셀리아 보다 세 살 많은 육촌 친척이었다.
“그래, 작년 겨울 방학 때 보고 처음이지?”
웃으며 셀리아에게 다가가던 바든이 인상을 썼다.
“뭐야? 나한테는 인사 안 해?”
“왜 니엘 언니가 당신에게 인사해야 해?”
셀리아의 싸늘한 목소리에 바든이 흠칫했다.
“니엘 언니는 제르딩거 본가의 가신이야. 방계인 당신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어. 오히려 2학년인 당신이 니엘 언니에게 예의를 갖춰야 하는 거 아니야?”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셀리아가 붉은색 눈을 번뜩였다.
그 모습에 바든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그래, 내가 선을 좀 넘은 것 같네! 미안해. 하하하!”
그렇게 웃으면서도 바든은 니엘에게는 선배의 예를 취하지 않았다.
그런 바든을 보며 니엘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루메른에서 바든은 제르딩거의 혈통을 앞세워 으스대고 다니는 걸로 유명했다.
‘피닉스 브레스도 익히지 못했으면서 주변에서 떠받들어준다고 자기가 진짜 제르딩거라도 되는 줄 아나?’
제르딩거 가문에서는 피닉스 브레스를 익히지 못한 이상. 직계, 방계를 막론하고 요직을 맡을 수 없었다.
“기사학과 1등 축하해!”
바든이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 말을 들은 니엘도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저도 셀리아 아가씨가 당연히 1등을 하실 줄 알았어요!”
“기사학과에서 1등이면 뭐해요? 정작 학년 대표는 다른 녀석이 차지했는데.”
팔짱을 낀 셀리아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못마땅한 반응을 보이는 셀리아를 보며 바든이 큭- 하고 웃었다.
“레오 플로브 때문에 그런 거야? 그 녀석이라면 걱정마.”
바든이 같잖다는 표정을 지었다.
“올 클래스인지 뭔지는 몰라도 시골에서 굴러먹다 온 족보도 없는 놈은 금방 한계를 드러내게 되어 있거든. 게다가 내 소환학과 친구들이 그러는데 그 자식이 싸가지 없이 2학년에게 시비를 걸었다는 거 있지? 1학년 대표라고 눈에 뵈는 게 없어서 나대는 꼴이라니.”
셀리아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바든이 신이 나서 떠들 때였다.
“리스 도련님, 어서 오세요.”
“니엘, 잘 지냈니?”
“네.”
“리스 형님!”
“오랜만이군. 바든.”
빙긋 웃은 리스가 자신의 옆을 가리켰다.
“너희가 모여 있길래 소개해 주려고 왔다. 이쪽은 나와 셀리아의 사촌인 레오 플로브야.”
리스의 말에 니엘과 바든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레오는 비록 제르딩거의 이름을 얻지는 못했지만, 피닉스 브레스를 익히고 있지.”
바든이 눈을 부릅떴다.
‘이 자식이 피닉스 브레스를 익혔다고! 어째서!’
바든은 오래전부터 피닉스 브레스를 익히게 해달라고 본가에 요청했다.
하지만 매번 거절당했다.
그런데 가문 모임에서 본 적도 없는 녀석이 갑자기 나타나서 피닉스 브레스를 계승했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제 좀 조용히 하겠네.’
니엘은 부들거리는 바든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루메른에 입학한 이후 바든에 대한 소문은 그리 좋은 게 없었다.
‘걸핏하면 제르딩거인 걸 내세워서 다른 동기생들에게 윽박지르기나 하고. 그러면 성적이라도 좋던가. 겨우 하위권을 면하는 주제에.’
바깥에서는 루메른 학생이란 게 대단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바깥에서의 경우.
루메른에서는 자랑거리도 아니다.
‘그러니 가문빨을 내세우는 거겠지. 한심해. 그에 비하면…….’
니엘이 눈을 반짝였다.
‘굉장히 특이한 도련님이네.’
레오는 입학식 때부터 이번 학기 화제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너무 잘나면 견제하는 이도 있는 법.
특히 별 볼 일 없는 가문이라는 이유로 레오를 얕잡아 보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레오가 제르딩거와 연관되어 있다는 소문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아가씨, 레오 도련님은 제르딩거란 걸 티를 안 내나요?”
“응. 티를 안 내. 그냥 안 내는 게 아니라 지나치게 안 내서 문제지.”
“그렇군요.”
니엘이 감탄하는 사이 에레크 중앙 단상 앞에서 진행 교수가 확성 마법이 걸린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학생회장은 학생회가 찾으니 지금 즉시 단상 앞으로 오도록. 그리고 학생 대표들은 단상 옆 천막으로 모여라.]
“이런 우리는 이만 가야겠군. 다들 나중에 보자.”
“셀리아, 나 간다.”
“응.”
레오와 리스는 곧바로 단상 앞으로 향했다.
“레오 너는 저기로 가면 된다.”
리스는 단상 옆에 준비실로 보이는 천막을 가리켰다.
“네.”
“조금 이따 보자.”
리스와 헤어진 레오가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두 명의 학생이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화사한 옅은 갈색의 곱슬머리를 가진 왜소한 체구의 남학생이었다.
왼쪽 가슴에는 4학년 배지가 달려 있었고 오른쪽 어깨에 수놓아진 검과 방패의 엠블럼을 본다면 기사학과가 분명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안대를 쓰고 코를 골고 잠을 자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4학년 대표 앞에는 2학년 대표로 보이는 여학생이 무릎을 꿇고 경건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연두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오른쪽 어깨에는 소환학과를 뜻하는 4대 원소 엠블럼이 있었다.
그녀는 레오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1학년 대표 레오 플로브입니까?”
“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2학년 대표 릴 루체라고 합니다.”
릴이 절도 있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군인 같은 그 모습에 묘한 표정을 지으며 레오가 손을 맞잡았다.
“레오 플로브라고 해요.”
“여기 계신 분은 4학년 하르크 리그아르드 선배님 이십니다. 보다시피 잠들어 계시죠. 거의 잠들어 계신 분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깨어 있는 모습은 본 적 거의 없습니다.”
“예. 그런데 말 편하게 하시죠?”
“전 이게 편합니다. 그나저나 레오, 당신을 한 번쯤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전 왜요?”
“올 클래스라니? 그게 정말입니까?”
릴이 살짝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세 힘을 동시에 써 봐주시면 안 됩니까?”
그 부탁에 레오는 오러와 마력, 영력을 동시에 일으켰다.
그걸 본 릴이 감탄하더니 이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정말 부럽습니다.”
“왜요?”
“저는 학년 대표인데도 아무 특색 없는 수수하고 평범한 정령사입니다.”
“학년 대표씩이나 되었으면 굉장한 실력자인 거 아닌가요?”
“아닙니다! 임팩트가 부족합니다! 하르크 선배님은 매일 자고 있으니 캐릭터가 확실합니다! 리스 선배님은 말할 것도 없이 최고의 실력을 가지셨죠! 심지어 1학년인 당신은 올 클래스! 아아! 평범해! 나만 너무 평범해! 평범하다고!”
‘아무리 봐도 평범하지는 않은데…….’
원래 스스로 평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제일 안 평범한 법이었다.
머리를 부여잡고 쪼그려 앉은 릴을 보며 레오가 물었다.
“엘레나 선배는 어때요?”
“그 선배는…… 조금 위험합니다.”
“위험?”
“어머? 내 어디가 위험하다는 거니? 릴.”
“윽.”
레오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3학년 학년 여학생이 서 있었다.
화려한 금발. 반짝이는 분홍색 눈동자.
백옥 같은 피부에 선명한 이목구비.
말 그대로 아름답다는 말 이외에 표현할 길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엘레나 선배님. 파견은 어떠셨어요?”
“재미없었어.”
딱 잘라 말한 엘레나가 또각- 또각- 레오에게 다가갔다.
“네가 그 유명한 1학년 대표니?”
엘레나는 눈을 빛내며 레오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레오의 볼을 콕 찔러 보았다.
“어머~ 귀여워라.”
쿡쿡 웃은 엘레나가 레오의 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레오 군, 누나 거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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