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91.
“거절할게요.”
“왜? 누나가 많이 귀여워해 줄게.”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 모습이 매우 고혹적이고 치명적이었다.
같은 여자인 릴조차 얼굴을 붉힐 정도였다.
“전 비싸거든요.”
엘레나는 조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릴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풉.”
순간 엘레나의 입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하하하하하하!”
엘레나는 배를 잡고 웃었다.
눈물까지 흘리며 웃는 엘레나를 보며 릴이 ‘이 선배는 역시 이상해!’ 라는 표정으로 샤샤샥- 물러섰다.
“재미있는 애가 들어왔네.”
“다들 모인 것 같군.”
5학년 학년 대표 리스가 천막으로 들어왔다.
“리스 선배님! 반갑습니다!”
릴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리스 앞에 차렷 자세로 섰다.
“그래, 잘 지냈어?”
“물론이죠! 선배님의 대활약! 매일매일 경청하고 있습니다!”
“릴, 리스 선배를 대하는 거 절반만큼만 날 대해주면 안 되겠니?”
“오랜만이야, 엘레나. 임무는 어땠어?”
“재미없었어요.”
엘레나는 따분하다는 얼굴로 답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은 리스는 바닥에서 코를 골고 자고있는 하르크에게 다가갔다.
“이봐, 하르크. 언제까지 잘 거야.”
“응?”
이때까지 퍼질러 자고 있던 하르크가 안대를 벗고 부스스하게 한쪽 눈을 떴다.
왜소한 체구의 4학년 대표는 엄청난 미소년이었다.
“흐암. 선배 언제 왔습니까?”
“방금.”
늘어져라 하품을 한 하르크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하르크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응? 너 이름이 뭐더라?”
“릴입니다.”
“아, 그래. 1학년 대표!”
“아니, 전 이제 2학년 대표인데요.”
“응? 그랬던가?”
잠에서 깨서 정신이 없는지 아니면 원래 남에게 관심이 없는지 하르크는 흐리멍텅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비볐다.
“자, 그럼.”
하지만 잠에서 깨고 얼굴이 돌변했다.
“한 판 붙죠, 선배.”
호전적인 미소를 지으며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하고 치는 하르크를 보며 리스가 피식 웃었다.
“나중에 상대해 줄게.”
“지금 붙고 싶은데요?”
“일어나자마자 무식하게 싸움질부터 하려고 하다니, 역시 야만스럽네요.”
“킥! 별 잡스러운 쓰레기들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너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엘레나 제르온.”
“으아아아! 서, 선배님들! 여기서 싸우면 큰일 납니다! 교수님들한테 죽는다고요!”
서로에게 살기를 드러내는 엘레나와 하르크를 보며 릴이 기겁했다.
두 사람 모두 강력한 차기 학생회장 후보들인 만큼 사이가 매우 나빴다.
사실 그걸 떠나서 상정 자체가 완전히 반대였다.
그 모습을 보며 리스가 레오에게 물었다.
“어때, 학년 대표들을 본 소감은.”
“사이가 무척 좋네요.”
“…….”
릴이 입을 쩍 벌리며 레오를 보았다.
‘여, 역시 레오도 평범한 사람은 아닙니다!’
리스 역시 다소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레오 바라보며 말했다.
“둘 다 그만해. 후배들 보는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아?”
리스의 중재에 엘레나와 하르크가 물러섰다.
“네가 레오 플로브야?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난 하르크 리그아르드라고 한다.”
“레오 플로브입니다.”
엘레나 앞에서는 사나웠던 하르크는 레오 앞에서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학년 대표들, 다 모였지? 모였으면 예복으로 갈아입어.”
천막 안으로 들어온 조교 한 명이 그렇게 말하고는 방을 나갔다.
“예복?”
“모릅니까?”
레오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교생이 모이는 학과 행사에는 학년 대표들은 늘 예복을 입습니다.”
릴은 천막 한곳에 반듯하게 개어 있는 예복을 들어 레오에게 건네주었다.
“우리는 학년 대표인데 일반 학생들과 같으면 안 되잖아.”
하르크 역시 익숙하다는 듯 예복을 꺼냈다.
확실히 천막 안에는 탈의실로 보이는 방도 두 개 갖춰져 있었다.
레오와 리스, 하르크는 오른쪽 탈의실에 들어갔다.
학생 대표 예복은 루메른 학생들이 행사 때 입는 정복 보다 훨씬 격식을 차린 옷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자 여자 탈의실 쪽에서는 소란이 들렸다.
“서, 선배! 어딜 만지는 겁니까!”
“아까 1학년 후배 앞에서 날 위험하다고 한 벌이야!”
“그, 그건 사실…… 으아악! 만지지 마십시오!”
“시간 없어! 빨리 준비해!”
하르크가 버럭 소리쳤다.
잠시 후 릴은 잔뜩 붉어진 얼굴로 나왔고 엘레나는 장난기 가득 한 미소를 지으며 그 뒤를 따랐다.
“흠흠!”
릴은 헛기침을 하더니 레오 앞에 와 옷매무새를 매만져 주었다.
마치 누나처럼 이것저것 챙기는 릴을 보며 엘레나가 쿡쿡 웃었다.
“상냥하기도 하지. 1학년 후배를 잘 챙겨 주는구나?”
“학년 대표 후배가 들어오면 잘 해줘야겠다고 작년부터 다짐했습니다. 제가 1학년일 때 선배 대표님은 절 데리고 장난만 잔뜩 치셨거든요.”
“어머나. 누가 그런 몹쓸 짓을.”
엘레나가 뺨에 손을 대며 고개를 저었다.
“음! 학년 대표다운 기품이 느껴집니다! 레오.”
만족스럽게 웃은 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다섯 사람이 천막을 나가자 장관이 펼쳐졌다.
예복을 입은 학생들이 도열 해 서 있었다.
학생 숫자가 작은 5학년을 시작으로 4, 3, 2, 1학년이 학과별로 서 있었다.
학년 별로 맨 앞에는 학과 수석들이 학과 깃발을 들고 서 있었다.
수석이 학년 대표일 경우에는 차석이 서 있었다.
레오가 1학년 쪽으로 가야 하나 고민할 때 릴이 말했다.
“레오, 학년 대표는 여깁니다.”
릴이 단상 아래에 있는 작은 단상을 가리켰다.
학생 중 맨 앞.
말 그대로 루메른 학교를 대표하는 다섯 학생을 위한 자리였다.
학년 대표들이 순서대로 섰다.
모든 학생의 시선이 학년 대표의 등에 꽂혔다.
어떤 이는 선망, 또 다른 이는 호승심.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다.
‘과연. 모두가 학년 대표 자리를 원하는 게 있군.’
이 자리에 서니 확실히 알겠다.
천재가 아닌 이가 없는 루메른 학생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이들.
말 그대로 미래의 영웅에 가장 가까운 자리가 학년 대표인 것이다.
위를 노리는 자는 어떻게든 이 자리에 올라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반대로 이곳에 선 자들은 도전자들로부터 이 자리를 지켜야 했다.
‘재미있네.’
레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런 레오를 보며 긴장된 표정을 짓던 릴이 혀를 내둘렀다.
‘난 지금도 이 자리에 서면 떨리는데. 전 학년들의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웃다니, 그릇이 달라. 그릇이.’
한편 엘레나 역시 레오를 보며 눈을 빛냈다.
그러는 사이 단상 위로 교장 칼리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보며 리스가 입을 열었다.
“전체…… 차렷!”
척-!
루메른 학생 전체가 절도 있게 차렷했다.
“교장 선생님께…… 경례!”
쿵-!
절도 있게 전 학년이 오른쪽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쳤다.
위대한 영웅에게 바치는 인사였다.
칼리안이 가볍게 손을 들자 모두 원래 자세로 돌아갔다.
“제군들. 주말에는 잘 쉬었나? 이번 하루도 화창하군! 모두 공부에 힘쓰는 한주가 되길 바란다!”
이후 칼리안의 훈화가 시작됐다.
“그러니까 자고로 영웅이란!”
지루하고 의미 없는 정신 교육이 이어지자 학생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전교생 집합은 입학식 이후에 한 번도 없었던 대행사다.
말 그대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있는 행사에서 뻔한 훈화만 하고 있으니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수들 조차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후아암. 아침부터 학생들 불러 놓고 너무하네요.”
결국 맨 앞에 있던 엘레나가 가볍게 하품하며 입을 가렸다.
몇몇 교수가 그런 엘레나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학교의 여왕이라 불리는 여학생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심통이 난 듯 오른손으로 옆을 가리켰다.
“쿨-”
꾸벅- 꾸벅-
그곳에는 하르크가 고개를 꾸벅이며 졸고 있었다.
그 모습에 교수들이 뒷목을 잡았다.
‘저것들이 진짜!’
‘니들이 그러고도 학년 대표냐!’
‘학년 대표로서 모범을 보이란 말이다! 이 불량배들아!’
바로 눈앞에서 학년 대표들이 딴짓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리안은 지루한 훈화를 이어 나갔다.
“엘레나 제르온, 하르크 리그아르드. 행사 끝나고 교무실로 따라오도록.”
장내를 얼어붙게 만드는 싸늘한 목소리가 확성 마법을 타고 울려 퍼졌다.
엘레나와 하르크가 흠칫하며 차렷 자세를 취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진행 교수 대신 마이크를 든 할린드였다.
그 모습을 본 칼리안이 환하게 웃었다.
“오오! 할린드 교수. 역시 학생들은 자네의 말을 제일 잘 듣…….”
“교장 선생님도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그러도록 하겠네.”
할린드는 교장이 루메른에서 두려워하는 두 교수 중 하나였다.
“크흠.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네.”
“지금까지 지루한 훈화 말씀을 하신 이유가 뭘까요?”
마이크를 돌려받은 진행 교수가 당황해서 묻자 할린드는 딱 잘라 대답했다.
“본론이 지나치게 짧으니까 그것만 이야기 뻘쭘해서겠지.”
할린드는 누구보다 칼리안 교장을 잘 파악하고 있는 세 교수 중 하나이기도 했다.
“물론 그 본론이란 게 결코 가볍지는 않겠지만.”
할린드가 심각한 얼굴로 교장을 보았다.
“오늘부터 루메른 아카데미는 1학년 학과대항전이 끝나기 전까지 외부와 모든 연락 수단을 단절하겠네.”
“……?”
일순간 모든 이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루메리아 시티에서 출퇴근하는 교수들은 모두 학교에 머물 것이고 학생들은 외출 외박이 일절 금지되네. 루메른에 입점한 상인들은 오늘부터 들어오지 않으니 당연히 레스토랑, 매점, 카페. 모두 문을 닫게 되네.”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수들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마법을 통한 통신도 금지. 편지나 소포도 발송, 반입이 불가능하네.”
교수들은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았다.
하지만 학생들 사이에 일어난 소란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봉쇄령! 말 그대로 전대미문의 사태였다.
학생 전체가 웅성거리는 가운데 레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교장을 보았다.
‘배신자를 잡겠다는 소리군.’
***
전교생 집합이 끝나고 학생들은 패닉에 빠진 채로 식당으로 향했다.
“말도 안 돼! 한 달 동안 매점도 못 가나니!”
가장 패닉에 빠진 건 여학생들이었다.
매점, 카페, 레스토랑이 문을 닫는 건 간식을 살 수 없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크! 미리 알고 간식을 사재기해놨으면 한탕 바는 건데! 아니다! 제과 동아리 애들이랑 이야기를……!”
칼의 말에 첼시가 눈을 번뜩였다.
“빨리 가자! 칼!”
“좋았어! 딱 대라 제과 동아리! 레오 가자!”
“난 예복을 갈아입어야 해서. 먼저 가.”
“알았어!”
칼과 첼시가 아침도 거르고 후다닥 뛰어갔다.
학생들에게 간식은 중대 사항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트리던 레오는 예복을 갈아입기 위해 천막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릴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끔찍한 시간이었습니다.”
“장난 아니었나 보네요.”
“예. 리스 선배는 학생회 일 때문에 먼저 가서 말릴 사람도 없었습니다.”
엘레나와 하르크가 한바탕 한 모양이었다.
“할린드 교수님이 중간에 오지 않았다면 진짜 싸울 뻔했습니다.”
“엘레나 선배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나중에 따로 찾아가야겠군요.”
“레오, 엘레나 선배를 만나러 갈 생각입니까?”
“네.”
릴이 몸을 일으키더니 한숨을 쉬었다.
“저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왜요?”
“아까도 말했지만 조금 위험한 사람이라서요.”
“그런데 부탁할 게 있어서요.”
릴이 한숨을 쉬었다.
“정 만나야겠다면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만…… 아마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을 겁니다.”
“그냥 3학년 교실동에 가면 만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아니요. 엘레나 선배는 수업을 거의 듣지 않습니다.”
릴의 말에 레오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 천재거든요.”
수업을 거의 듣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학년 대표.
“거의 하루종일 자신의 저택에 있다가 기숙사로 돌아갑니다.”
“저택이요?”
“예. 엘레나 선배는 제르온 가문의 사유지를 개인 동아리 건물로 쓰고 있습니다”
“스케일이 다르네요.”
“제르온의 후계자니까요. 어쨌든 만나려면 일단 그곳으로 가야 하는데 사람을 잘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일단 가봐야겠네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레오가 빙긋 웃었다.
“일단 가면 조심해야 할 겁니다, 레오.”
“……?”
레오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릴이 혀를 찼다.
“여왕의 추종자들은 질투심이 강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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