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93.
“누구세요?”
“난 엘레나라고 해.”
“엘레나 선배님이요? 정말이세요?”
클로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응.”
“선배님이 쓰신 마법 논문들 잘 보고 있어요!”
“응?”
“특히 대기 중 마나의 진동이 마법에 끼치는 영향에 관한 부분을 몹시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 어려운 내용을 이해한 거야?”
“네!”
“세상에나, 이렇게 귀여운 후배가 들어 왔었네?”
마법으로 몸을 둥실 띄운 엘레나는 클로에의 뺨을 양손으로 잡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살짝 당황하는 클로에를 보며 엘레나의 눈이 휘었다.
그 시선에 클로에는 살짝 소름이 돋는 걸 느낄 때였다.
“여긴 무슨 일이지, 엘레나.”
“숙부님!”
엘레나가 알비에게 날아갔다.
“숙부님이 수업을 진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왔죠! 들을까 하고요!”
“딱히 특별한 수업을 하는 게 아니야. 단지 1학년들에게 조언만 해줄 뿐. 그리고 넌 1학년 수업을 들을 수 없다. 3학년 수업을 들어라.”
“그런 따분한 수업. 들을 가치도 없는걸요.”
엘레나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렇다면 수업을 방해하지 말고 가라.”
그 말에 엘레나가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재미없어.’라고 중얼거리며 떠날 때였다.
“선배.”
“왜 부르니, 레오 군.”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방과 후에 저택에 가도 돼요?”
“부탁?”
고개를 갸웃거린 엘레나는 팔짱을 끼고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네 부탁을 들어줘야 해? 넌 아까 내 부탁을 거절했잖아?”
“그게 부탁이었어요?”
“물론이지.”
허공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엘레나가 생긋 웃으며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다른 교수님들이 몰려와서 잔소리하기 전에 난 갈게.”
방정맞게 손을 흔든 엘레나는 그대로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클로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범생인 그녀로서는 수업을 땡땡이치고 놀러 다니는 건 문화 충격이었다.
“저, 저래도 되나요?”
“안 되지. 벼르고 있는 교수가 한두 명이 아니야.”
“그런데 뭐라 안 하세요? 조카분이시잖아요.”
“저 아이의 선택이니 내가 뭐라 할 이유가 없지. 뭐라 한다고 들을 아이도 아니야. 너희는 신경 쓰지 말고 연습을 해라.”
그렇게 말한 알비는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레오는 엘레나가 사라진 쪽을 보았다.
금서고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엘레나의 허락이 필요했다.
‘분위기를 보면 굉장히 자기 멋대로군.’
지금으로서는 알비의 추천서를 보여준다고 해도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일단은 학과대항전에 집중하자.’
지금은 당장 눈앞의 학과 행사에 집중할 때였다.
***
아카데미 봉쇄령이 내려지고 이주가 지났을 무렵.
공강 시간에 교실에서 자습을 하던 일리아나가 툴툴거렸다.
“어떻게 이런 자습 시간에 다과도 없을 수가 있어? 이게 말이 돼?”
루메른 학생들은 귀족이나 상류층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자습시간에 다과를 곁들이며 공부했다.
물론 봉쇄령 이후 다과는커녕 과자 부스러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공부하는데 과자랑 차가 왜 필요해?”
“반장! 공부에는 원래 활력소가 필요한 법이야!”
“그나저나 칼은 어디 있어?”
넬라가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리고 칼이 다과 수레를 밀고 왔다.
첼시와 일리아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칼! 그거 뭐야!”
눈을 빛내는 두 여학생을 보며 칼이 우수한 집사처럼 우아하게 인사했다.
“비록 케이크나 쿠키는 구하지 못했지만.”
달칵-
“오오!”
수레의 덮개를 열자 찻주전자와 찻잔이 세팅되어 있었다.
“아가씨들 제가 정성스럽게 끓인.”
“오오! 홍차!”
“홍차만으로도 충분해!”
찻잎도 지금은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 이기에 이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쪼르르륵-!
찻잔에 맑고 투명한 액체가 따라졌다.
“맹물입니다.”
“…….”
“…….”
“풉! 푸하하하하하하하하! 표정 좀 봐! 속았냐? 속았…… 커헉?”
자신을 놀리는 칼을 보며 얼굴이 흉악하게 변한 첼시가 배에 그대로 드롭킥을 갈겨 버렸다.
그리고 일리아나와 함께 쓰러진 칼을 마구 걷어찼다.
“자, 잠깐! 나 뼈맞…… 아악! 미안! 미안해!”
칼의 처절한 비명이 한바탕 지나갔다.
“빅 뉴스가 하나 있어.”
“뭔데?”
“이번 학과대항전 장소가 정해졌어!”
“뭐? 어딘데?”
5반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에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한 칼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이그랑.”
“네이그랑?”
“거긴 출입 금지 구역 아니야?”
네이그랑.
대륙 동남부에 위치한 도시였지만 영웅던전의 폭주로 인해 하루아침 만에 멸망한 도시로 유명했다.
영웅던전을 은폐한 네이그랑의 참사는 반면교사로 대륙 곳곳에 널리 알려졌다.
이후 던전은 공략되었지만, 영웅 던전의 영향으로 저주받은 땅이 되어 인간은 살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런 곳에 가도 되는 거야?”
학생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출입 금지 구역이기는 해도 엄청나게 위험한 곳은 아니라고 들었어.”
첼시의 말에 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위험한 곳인 건 맞지만 중하급 몬스터들이 출몰하고 곳곳에 저주가 펼쳐져 있다는 것 정도?”
일반인들에게는 엄청난 위협이지만 영웅 사관생도들에게는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는 위험이었다.
학과대항전의 전장이 정해지자 5반 전체가 지리책을 가져와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영웅의 세계와는 달리 예측할 수 없는 위협이 있었기에 학생들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네이그랑에 대해 공부했다.
레오 역시 교과서로 받은 지리 책을 펴고 네이그랑의 지도를 찾았다.
‘네이그랑…… 네이그랑…… 여기군.’
책을 펼친 레오가 멈칫했다.
‘여긴?’
레오가 기억하고 있는 지명과 카일이 살던 시대의 지명은 다르다.
두 시대 간의 세월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과거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나와 리시나스가 처음으로 군단장을 쓰러트린 곳이잖아.’
***
학교 봉쇄령으로 인해 학생들의 불만이 쌓여가는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갔다.
특히 1학년들은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파지지직! 파지직!
듀란이 자신의 손에 맺힌 오러를 보고 주먹을 꽉 쥐었다.
파바바바바바밧-!
듀란의 힘에 반응하여 전류가 폭발하듯 사방으로 튀었다.
“괴, 굉장해! 듀란! 용자의 숨결을 거의 마스터 했잖아!”
듀란 파벌의 학생이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듀란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뭐가 마스터라는 거냐. 아직 자연스럽게 쓰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리고……!”
콰직-!
듀란이 짜증스럽게 쥐고 있는 목검을 부러트렸다.
“그때 레오 플로브 녀석이 내뿜었던 검격과 비교하면 형편없는 수준이다!”
“물론 그렇긴 하지만, 레오 플로브는 어차피 그만한 공격을 하면 반동으로 자신에게도 데미지를 주잖아?”
여학생 한 명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런 파멸적인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어. 기껏해야 위기 상황 때 쓸 비장의 수단 같은 거지.”
레오를 분석한 여학생의 말에 듀란이 코웃음을 쳤다.
“이번에 레오 플로브를 쓰러트리고 누가 진정한 1등인지 알려주겠다. 그리고…….”
듀란의 눈이 힐끗 고개를 돌렸다.
“셀리아 제르딩거도 쓰러트린다.”
화르륵-!
“대단해 셀리아, 오러의 불꽃을 이 정도로 컨트롤 해내다니.”
반 친구의 말에 셀리아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 정도는 기본이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는 셀리아가 화염을 꺼트렸다.
지난 한 달 동안 셀리아가 중점적으로 훈련해 온 건 오러의 섬세한 컨트롤이었다.
화염을 거둔 셀리아와 듀란과 눈이 마주쳤다.
셀리아가 뚱한 표정을 짓더니 손가락으로 듀란을 가리키고는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에 울컥한 듀란이 엄지손가락을 밑에서 아래로 떨구는 것으로 대응했다.
한편 마법 실습장에서는…….
휘오오오오오!
첼시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아바드를 보았다.
‘굉장해, 역시 오라버니야.’
세밀하게 바람의 마법을 컨트롤하는 모습에 절로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쿵- 쿵-!
아바드가 마력을 해제하자 허공에 휘날리던 바위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 정도 출력도 이렇게 섬세하게 컨트롤 할 수 있다니! 역시 오라버니예요!”
환하게 웃으며 다가온 첼시를 보며 아바드가 머리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첼시.”
“네!”
“레오와 비교하면 어때?”
“……!”
아바드의 물음에 첼시가 입을 다물었다.
첼시가 봤을 때 순수하게 마법 능력으로만 본다면 아바드가 우위였다.
하지만 종합적으로 봤을 때는…….
‘누구를 응원해야 하지?’
마법사로서 존경하는 아바드.
영웅 후보생으로서 존경하는 레오.
갈등하는 첼시를 보며 아바드가 웃었다.
“레오가 우위란 거구나.”
“오, 오라버니! 그러니까요. 저…… 그!”
“나쁘지 않네.”
“네?”
“도전할 대상이 있는 것도.”
진하게 웃는 아바드를 보며 첼시가 놀랐다.
한편, 도서관에서 네이그랑에 관련된 책을 잔뜩 쌓아 놓은 레오가 앉아 있었다.
‘네이그랑 내에 커다란 호수는 총 다섯 군데군.’
대도시인 만큼 커다란 호수가 다섯 개가 있었다.
“이 중 어디가 에르디아나 호수야?”
레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다른 학생들이 학과대항전 준비로 한참이었지만 레오는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오래전 일이 떠오른 것이다.
‘세월이 세월인 만큼 지금까지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레오가 팔짱을 꼈다.
과거 이곳에 있었던 에르디아나 호수라는 곳에는 한 정령이 잠들어있었다.
지금은 기억조차 하지 않는 정령.
그러나 재앙의 시대까지만 해도 강대한 정령으로서 칭송받았던 대정령.
리시나스의 잃어버린 맹약자.
‘광휘의 대정령, 루미너스.’
책을 덮은 레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다섯 군데 다 가볼 수밖에 없겠네.’
***
루메른 아카데미의 중앙에 있는 대연병장, 에레크에는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루메른 아카데미 학생뿐만 아니라 수많은 방문객들이 모여 있었다.
“오오! 우리 딸 좀 보자! 학교생활은 어땠니!”
“즐거웠어요!”
“아들아! 너는 가문의 자랑이다!”
“알고 있습니다!”
“가문의 명예 누가 되는 행동은 자제하도록 하거라.”
“예.”
원래는 허락된 인물들 이외에 루메른 아카데미에 들어올 수 없다.
하지만 학과대항전이라는 대규모 학과 행사를 위해 오늘만큼은 관계자 가족들의 방문을 허락했다.
물론 거기에는 지난 한 달 동안의 아카데미 봉쇄령에 대한 좋지 않은 여론을 환기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덕분에 루메른은 때아닌 축제 분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물론 외부 손님이 많으면 그만큼 문제도 있는 법이었다.
“어허! 우리 아들이 공부하는 장소를 보고 싶은데 그것도 안 된단 말이오!”
“학생들의 연구과제 등 보안규정 상의 문제 때문에 외부인의 출입은 불가능합니다. 허락된 장소만 이용하시길 바랍니다. ”
“이익! 내가 누군 줄 알고!”
평소에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루메른인 만큼 호기심을 느끼고 허락된 장소 이외에 출입하려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그런 이들은 조교들에 의해 제지당했지만, 막무가내인 이들도 많았다.
영웅의 탑, 꼭대기.
아카데미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서 칼리안은 에레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한 번에 외부인을 많이 받으면 침입자가 몰래 숨어들어오지 않을지 걱정되네요.”
유라 교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자 칼리안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강력한 억제력이 돌아왔으니 그때와 같은 일은 없을 걸세.”
칼리안의 말에 유라는 조심스럽게 손님용 소파에 앉아 차를 즐기고 있는 붉은색 머리카락의 여인을 보았다.
피닉스 피리나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환수술사로서 최강의 환수를 마주한 유라는 피리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다.
레오의 피오라와 울타의 에이리아와 달리 저쪽은 완전한 성체.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환수술사의 로망이자 전설 그 자체였다.
‘언제까지 이 사실을 숨길 수 는 없어. 세이룬과의 협력을 통해서 대외적으로 알려야만 해.’
칼리안의 눈이 진중한 빛을 띠었다.
‘타르타로스 놈들이 더 이상 날뛰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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